내 어린시절의 하늘은 너무 푸르고 맑았다 한참을 기어다니다 힘이 들면 고개들어 쳐다보던 그 하늘......소아마비라는 질긴 장애의 끈의 묶여 살아온 내 삶 하늘과 땅과 산과 들, 바다만 보이는 섬에서 태어나 나의 어린시절은 그렇게 손에는 슬리퍼 발에는 운동화를 신고 네발로 기어 다녔다
엄마등에 업혀서 초등학교 입학식을 하러가면서 어렴풋이 장애에 대한 의식을 했지만 부모님 가슴에 수없이 많은 못을 박으며 겨울이면 손바닥이 트고 갈라지도록 기어다녔다
학교 갈때는 엄마 오빠들 친구들 등에 업혀서 다녔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아버지께서 깍아주신 막대기를 짚고 세발로 걷기 시작했다
문화 ,의료, 모든 정보들이 뒷전이었던 내 어린 시절은 그렇게 너무도 무지한 체 목발이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살았다
초등학교 졸업 후 친구들은 읍내로 나가 자취를 하며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부모님은 고민 끝에 동네 한가운데다 구멍가게를 차려주셨다
열네살에 난 장사라는 걸 시작했다 아버지는 통통배를 타고 물건을 해오시고 엄마는 매 끼니를 날으시고 그런가운데서도 불쌍한 사람만 오면 그냥집어주고 어쩌면 돈 받고 파는 것보다 외상과 한 웅 큼 씩 집어 주는 게 더 많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든다
결국은 몇 개월이 못가 가게를 정리하고 돌담 대문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면서 내 삶에 대해 슬픈 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라디오를 통해 “장애인취업” 이라는 가슴 설레는 정보를 들었고 몇달을 졸라 엄마와 함께 서울에 올라왔다
내기억으로는 처음으로 16년만에 섬밖으로 나왔고 복잡한 서울에서는 살수없다시며 다시 날 업고 섬으로 내려가셨다 다행히도 목발을 사가지고 내려갔고 난 그 목발을 짚고 들로 산으로 다니면서 서울에 대한 동경을 떨칠수가 없었다
궁리끝에 아버지께서 맡겨놓은 미역 판 돈을 가지고 읍내에 나가 닭을 사왔다 닭장사를 해 서울가야지 하는 엉뚱한 생각의 행동이었다
결국 내성화에 못이겨 부모님은 허락하셨다
뱃전 선착장에서 눈물을 훔치시던 엄마 완도 읍내에 나오셔서 버스를 태워 주시면서 거칠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시던 아버지 어쩌면 그눈물이 날 지금까지 버티게 하는 버팀목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그렇게 해서 나의 사회생활은 영세한 지하 인형공장에서 시작됐다 늘 도전하는 내게 만만치 않은 현실은 날 늘 슬프게 했다
공부가 하고 싶어 밤늦도록 일을 하고 수유리에서 신설동까지 새벽반으로 학원을 다녔다
때로는 목말은 목발데로 내몸은 몸데로 가방은 가방데로 버스안에서 뒹굴기도 했고 안내양 목을 조이며 넘어지는 바람에 실컷욕을 먹고 내린적도 있었다 체력의 한계에 지속할수 없었던 배움 지금까지도 날 갈망하게 한다
55000원의 월급을 받으며 밤낮없이 일을 했던 그때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을 알았고 삶의 대한 새로운 도전을 꿈꾸며 살았다
하늘과 땅과 바다만 바라보며 살다 많은 변화앞에 장애로 인한 열등의식과 홀로 이겨가야 된다는 강박관념은 가슴 에리도록 눈물겹게 했다
동등한 작업능력인데도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아야 했고 영세 지하공장을 나와 여러군데를 돌아다녔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취업문은 너무 좁았고 문전 박대가 일쑤였다 많은 일을 일년동안 해보면서 날 감동케 하는 많은 사람도 만났고 80년대만 해도 수공업 제조분야의 수출이 활발했었다 우연히 눈썹제조공장에 갔고 난 거기에서 앞으로의 나아가야할 방향을 계획했다
난 또 엉뚱한 생각으로 대통령님께 글을 보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난 배우고 싶고 일반인처럼 나도 걸으며 살고 싶다는 내용으로.......
민원으로 처리되어 동장님이 찾아오시고 그계기로 인해 난 삼육재활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다
90도 각도로 굽었던 왼쪽무릎을 펴기위한 수술은 너무도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발목의 부분마취를 해 드릴로 뼈를 뚫어 쇠막대기를 꼽고 근육을 펴기위해 3주동안을 무릎을 펴는 과정은 많이 인내하게 했고 고통을 이기고 기쁨을 안은 내생애의 가장 큰 가슴벅찬 순간이었다
왼쪽 보조기착용하고 두발을 땅에 딛고 걸을수 있었다
양손에 물건을 들고 걸을수 있다는 것 우산을 쓸수있다는 것 만큼 더큰 행복이 있었을까
수술이후 어설프지만 두발로 걸으면서 패션디자이너의 꿈을 갖고 양장도 한복도 배우고 혼자 자취를 하면서 지냈다 백마탄 이성을 꿈꾸던 내게 장애인이라는 걸 이용해 내게 다가선 사람이 있었고 너무 큰 몸과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그 이후 장애인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지금의 남편인 애아빠를 만났다
척추와 소아마비 이중장애를 갖고있는 남편....... 장애를 갖고 부부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것 내가 살아왔던 아픔보다도 절실한 현실에 아픔이 또 있을까 여탄 통을 들고 뒤뚱거리며 버릴곳을 찾아다닐때면 눈물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남편은 가방제조기술이 있어 시설에서 가방제조일을 하고 있었다 비키니옷장과 유일하게 새로 산 밥통하나가 시작의 모습이었고 늘 예기치않은 일이 일어나듯 재활 시설에 불이나 재료며 부속,기계,한순간에 재가 되어버렸고 이곳으로 오게되었다 소목장옆에 단칸 방에서 북적이는 동생들과 살면서 아이를 낳았고 진통이 있던 전날까지도 미련스럽도록 미싱의 발판을 밟았다 출산과 함께 몸무게가 느는 바람에 무릎에 근육 관절이 삭아버렸다는 정형외과 진료를 받고 많이 절망했다
10여년을 힘들어도 두발로 걸을 수 있었는데 다시 목발을 짚어야 되는 상황이 되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걸을수 없고 업어줄수 없다는 아픔은 장애를 갖고 있는 많은 엄마들의 아픔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곳 저곳 월세방을 살다 재활시설에서 정문을 지키는 수위일을 했다
4년 동안 정문을 지키며 웃고 우는 장애인들의 삶을 보았고 함께 부대끼며 생활하면서 늘 꿈꿔왔던 직업재활이라는 공동체를 계획을 했다
그리고 너무도 무지하고 어려운 가운데서 월세 공장 터를 얻었다
60평의 블록건물에 조립판넬로 칸막이를 하고 보일러를 설치했다
작업장 공간과 작업장 한켠에 방을 들여 숙소를 만들었다
사람이 모여 산다는 것 장애를 갖고 있는 우리가 모여 산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현실이다 너무도 열악한 시설에 10여명의 장애인이 모였고 나름데로의 아픔덩이들을 가지고 일을 찾아 오게된 한사람 한사람을 보며 일을 찾아 헤맸던 지난 내 삶을 본듯하다
직업 재활이라는 이름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예기치 않았던 어려움을 만났다
IMF의 여파로 시장흐름이 거의마비되고 거래처가 문을 닫고 하루 하루의 생활은 그야말로 걱정 그자체였다 마이너스 성장은 계속되고............
뭔가 새로운 날들의 대한 기대를 하면서 시작하는 하루 하루는 고통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시작된 하루
아이를 챙겨 보내고 밥하라 일하랴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많은 부분들...
일거리를 찾아다니면서 검물 앞 계단앞에 서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장애인 고용창출이라는 내자부심은 날 언제나 안타깝게 한다
일하는 가족이 넘어져 다치는 바람에 한참동안을 고생하기도 하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하루 하루 삶에 급급한 현실 하지만 난 늘 꿈꾼다 직업재활이라는 이름아래 좋은 시설과 안정된 경영속에 더많은 장애인들이 능력을 발휘하고 함께 공유할수 있는 직업공동체를............
너무 힘이들어서 가끔은 포기하고 싶지만 숨가프게 살아온 내 삶안에 포기하기엔 살아가야 되는 날들이 많고 살아내야 될 이유들이 많기에 재활이라는 긴 터널 속에서 늘 노력 할 것이며 내게 허락된다면 어렵고 소외된 더 많은 이웃과 함께 나누며 살고 싶다
작은 몸짓으로 늘 새벽을 여는 남편과 엄마,아빠보다도 더 커버린 아이와 두리원에 함께 살아가는 한사람 한사람의 아픔들을 끌어 안으며 오늘을 힘주어 살아내련다
꿈과 희망과 비젼을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