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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때부터 조선말까지 수정과 보완을 거쳐 완성된 <증보문헌비고>에 등재되어 있는 인물 가운데
유일로 천거된 인물을 씨족별로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유일'은 초야에 묻혀있는 선비로서 학식과 인품을 갖추어 명망이 높은 학자를 추천에 의해 관직에 등용하는 것을 의미하였으며, 그러므로 학문을 하는 선비들에게 유일로 천거가 되는 것은 매우 명예로운 일이었다.
은진송씨 10분
송준길(宋浚吉)〔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이조 판서(吏曹判書)였다. 시호가 문정공(文正公)으로 문묘(文廟)에 종사〕
송시열(宋時烈)〔유일로서 벼슬이 좌의정이었다. 시호가 문정공(文正公)이다. 문묘(文廟)에 종사, 효종 묘정에 배향〕
송준길의 현손 송명흠(宋明欽)〔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찬선(贊善)이었다.〕
송명흠의 손자 송계간(宋啓榦)〔유일(遺逸)로서 경연관(經筵官)이었다.〕
송준길(宋浚吉)의 7세손 송내희(宋來熙)〔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찬선(贊善)이었다.〕
송시열의 현손 송능상(宋能相)〔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지평(持平)이었다.〕
송시열의 현손 송덕상(宋德相)〔유일로서 벼슬이 이조 판서(吏曹判書)였다.〕
송시열의 5세손 송환기(宋煥箕)〔유일로서 벼슬이 좌찬성(左贊成)이었다. 시호 문경공(文敬公)〕
송시열의 6세손 송치규(宋穉圭)〔유일로서 벼슬이 판서였다. 시호가 문간공(文簡公)이다.〕
송시열의 7세손 송달수(宋達洙)〔유일로서 벼슬이 승지(承旨)였다.
파평윤씨 7분
윤원거(尹元擧)〔유일로서 벼슬이 사도시정(司導寺正)이었는데, 서원에 배향되었다.〕
윤순거(尹舜擧)〔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상의원 정(尙衣院正)이었는데, 서원에 배향되었다.〕
윤선거(尹宣擧)〔유일로서 벼슬이 집의였다. 시호가 문경공(文敬公)으로 서원에 배향되었다.〕
윤선거의 아들 윤증(尹拯)〔유일로서 벼슬이 우의정이었다. 시호가 문성공(文成公)으로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윤추(尹推〔유일로서 벼슬이 진선(進善)이었다.청백리(淸白吏)로 뽑혔고,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윤추의 손자 윤동수(尹東洙)〔유일로서 벼슬이 승지(承旨)였다.〕
한성공 윤희제의 10대손이며,강문 8학사인 윤봉구(尹鳳九)- 대제학 윤봉조(尹鳳朝)의 종제(從弟)-〔유일로서 벼슬이 공조 판서(工曹判書)였다.시호가 문헌공(文獻公)으로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안동김씨 (신안동) 6분
김병준(金炳駿)〔유일(遺逸)로서 벼슬이 호조 참판(戶曹參判)이었다.〕
김창흡(金昌翕)〔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집의(執義)였으며, 시호는 문강공(文康公)이다.〕
김창흡의 종손자 김원행(金元行)〔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좨주(祭酒)였다.〕
김원행의 아들 김이안(金履安)〔유일로서 벼슬이 좨주(祭酒)였으며, 시호는 문헌공(文獻公)이다.〕
김양행(金亮行)〔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참판(參判)이었다.〕
김양행의 손자 김직순(金直淳)〔유일로서 벼슬이 집의(執義)였다.〕
여흥민씨 5분
민건(閔騫)〔유일(遺逸)로서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이었다. 시호가 장절공(章節公)이다.〕
민순(閔純)〔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예빈시정(禮賓寺正)이었는데,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민익수(閔翼洙)〔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장령(掌令)이었다. 시호가 문충공(文忠公)이다.〕
민우수(閔遇洙)〔유일로서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이었다.〕
민우수의 손자 민이현(閔彝顯)〔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장령(掌令)이었
전주이씨 5분
덕천군파 : 이상수(李象秀)〔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진선(進善)이었다.〕
효령대군파 : 이태수(李泰壽)〔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자의(諮議)였다.〕
경녕군파 : 이동규(李同揆)〔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승지(承旨)였다.〕
밀성군파 : 이봉상(李鳳祥)〔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지평(持平)이었다. 시호가 문경공(文敬公)이다.〕
덕양군파 : 이기홍(李箕洪)〔유일(遣逸)로서 벼슬이 집의(執義)였다.〕
반남박씨 4분
박필주(朴弼周)〔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찬성(贊成)이었다. 시호가 문경공(文敬公)이다.〕
박성양(朴性陽)〔유일(遺逸)로서 경연관(經筵官)이었다.〕
박세채(朴世采)〔유일(遺逸)로서 좌의정(左議政)이었고, 시호 문순공(文純公), 문묘(文廟)와 숙종묘정에 배향〕
박세채의 손자 박필부(朴弼傅)〔유일로서 벼슬이 참의(參議)였다.〕
창녕성씨 4분
성운(成運)〔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사섬시 정(司瞻寺正)이었는데, 서원에 배향되었다.〕
성혼(成渾)〔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참찬(參贊)이었다. 시호가 문간공(文簡公)으로 문묘(文廟)에 종사되었다.〕
성혼의 아들 성문준(成文濬)〔유일(遺逸서 벼슬이 현감(縣監)이었다.〕
성근묵(成近默)〔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집의(執義)였다. 시호가 문경공(文敬公)이다.〕
광산김씨 4분
김장생(金長生)〔유일(遺逸)로서 형조 참판(刑曹參判)이었고, 시호는 문원공(文元公), 문묘(文廟)에 종사(從祀)〕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유일(遺逸)로 벼슬이 판중추부사였고, 시호 문경공(文敬公). 인조묘정(廟庭)에 배향(配享)〕
김장생의 7세손 김정묵(金正默)〔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지평(持平)이었다.〕
김장생의 9세손 김낙현(金洛鉉)〔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이었으며,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안동권씨 3분
권시(權諰)〔유일로서 벼슬이 좌윤(左尹)이었는데,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권상하(權尙夏)〔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이었다. 시호가 문순공(文純公)으로 서원(書院)에 배향〕
권상하의 증손 권진응(權震應)〔유일로서 벼슬이 자의(諮議)였다.〕
경주이씨 3분
이유태(李維泰)〔유일(遣逸)로서 벼슬이 이조 참판이었다.〕
이세필(李世弼)〔유일(遣逸)로서 벼슬이 대사헌이었다. 시호가 문경공(文敬公)인데, 서원에 배향되었다.〕
이세귀(李世龜)〔유일로서 벼슬이 장령(掌令)이었는데, 서원에 배향되었다.〕
연안이씨 3분
이기설(李基卨)〔유일로서 벼슬이 장령(掌令)이었다.〕
이희조(李喜朝)〔유일로서 벼슬이 이조 참판이었다. 시호가 문간공(文簡公)인데, 서원에 배향되었다.〕
이직보(李直輔)〔유일로서 벼슬이 좨주(祭酒)였다. 시호가 문경공(文敬公)이다.〕
덕수이씨 2분
이우신(李友信)〔유일(遣逸)로서 벼슬이 자의(諮議)였다.〕
이우신의 아들 이민덕(李敏德)〔유일로서 벼슬이 참의(參議)였다.〕
청풍김씨 2분
김간(金榦)〔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참찬(參贊)이었으며,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김간의 종증손 김종후(金鍾厚)〔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자의(諮議)였다.〕
흥해최씨 (전주최씨에서 분파) 2분
최효순(崔孝淳)〔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장령(掌令)이었다.〕
최효순의 아들 최숙하(崔淑河)〔유일로서 벼슬이 지평(持平)이었다.〕
우봉이씨 2분
이유겸(李有謙)〔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참의였는데, 서원에 배향되었다.〕
이유겸의 아들 이상(李翔)〔유일로서 벼슬이 대사헌이었는데, 향사에 배향되었다.]
인동장씨 2분
장수(張脩)〔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장령(掌令)이었다.〕
장수(張脩)의 6세손 장현광(張顯光)〔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참찬(參贊)이었다. 시호 문강공(文康公), 서원에 배향〕
성주이씨 1분
이항(李恒)〔유일로서 벼슬이 장악원 정(掌樂院正)이었는데, 서원에 배향되었다.〕
벽진이씨 1분
이항로(李恒老)〔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참판이었다.〕
예안이씨 1분
이간(李柬)〔유일로서 벼슬이 진선(進善)이었다. 시호가 문정공(文正公)이다.〕
경주김씨 1분
김일주(金日柱)〔유일(遺逸)로서 벼슬이 호조 참의(戶曹參議)였다.〕
언양김씨 1분
김천일(金千鎰)〔유일(遺逸)로서 벼슬이 판결사(判決事)·창의사(倡義使)였으며,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이다. 서원에 배향되었다.〕
함양박씨 1분
박지계(朴知誡)〔유일로서 벼슬이 승지(承旨)였다. 시호가 문목공(文穆公)인데,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고령박씨 1분
박심(朴鐔)〔유일(遺逸)로서 경연관(經筵官)이었다.〕
삭녕최씨 1분
최온(崔蘊)〔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승지(承旨)였는데,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화순최씨 1분
최영경(崔永慶)〔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장령(掌令)이었는데,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연일정씨 1분
정제두(鄭齊斗)〔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찬성(贊成)이었다. 시호가 문강공(文康公)이다.〕
청주정씨 1분
정구(鄭逑)〔유일(遺逸)로서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이었다. 시호가 문목공(文穆公)으로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풍양조씨 1분
조속(趙涑)〔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진선(進善)이었으며, 청백리(淸白吏)로 뽑혔다. 서원에 배향되었다.〕
한양조씨 1분
조극선(趙克善)〔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장령(掌令)이었는데,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양주조씨 1분
조병덕(趙秉悳)〔유일(遺逸)로서 벼슬이 호조 참판(戶曹參判)이었다. 시호가 문경공(文敬公)이다.〕
여산송씨 1분
송익필(宋翼弼)〔유일(遺逸)로서 향사에 배향되었다.〕
풍천임씨 1분
임헌회(任憲晦)〔유일(遺逸)로서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이었다.〕
대구서씨 1분
서원리(徐元履)〔유일(遺逸)로서 벼슬이 함경 감사였다.〕
기계유씨 1분
유언집(兪彦鏶)〔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참의(參議)였다.〕
창녕조씨 1분
조식(曹植)〔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전첨(典籤)이었다. 시호가 문정공(文貞公)으로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나주임씨 1분
임위(林瑋)〔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집의(執義)였다.〕
나주나씨 1분
나해륜(羅海崙)〔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참봉(參奉)이었다.〕
안정나씨 1분
나양좌(羅良佐)〔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장령(掌令)이었다.〕
함종어씨 1분
어유봉(魚有鳳)〔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찬선(贊善)이었다.〕
나주정씨 (압해) 1분
정시한(丁時翰)〔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진선(進善)이었으며, 향사(鄕祠)에 배향되었다.〕
신천강씨 1분
강복성(康復誠)〔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이었다.〕
태원선우씨 1분
선우협(鮮于浹)〔조선 효종조(孝宗朝) 때 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사업(司業)이었으며,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남양홍씨 (당홍) 1분
홍직필(洪直弼)〔유일(遺逸)로서 벼슬이 형조 참판(刑曹參判)이었다. 시호가 문경공(文敬公)이다.〕
평산신씨 1분
신석번(申碩蕃)〔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장령(掌令)이었는데,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신경(申暻)〔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찬선(贊善)이었다.〕
고령신씨 1분
신응구(申應榘)〔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승지(承旨)였다.〕
청주한씨 1분
한수(韓脩)〔유일(遺逸)로서 벼슬이 도정(都正)이었다.〕
해주오씨 1분
오희상(吳熙常)〔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찬성(贊成)이었다. 시호가 문원공(文元公)이다.〕
진주강씨 1분
강학년(姜鶴年)〔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장령(掌令)이었는데, 향사에 배향되었다.〕
청송심씨 1분
심광수(沈光洙)〔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승지(承旨)였다.〕
심육(沈錥)〔유일(遺逸)로서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이었다.〕
죽산안씨 1분
안방준(安邦俊)〔유일(遺逸)로서 벼슬이 공조 참의(工曹參議)였는데,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양천허씨 1분
허후(許厚)〔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장악원 정(掌樂院正)이었는데, 서원에 배향되었다.〕
허후의 종제(從弟) 허목(許穆)〔유일로서 벼슬이 우의정이었다. 시호가 문정공(文正公)인데, 서원에 배향되었다.〕
전주류씨 1분
유말손(柳末孫)〔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집의(執義)였는데,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풍산류씨 1분
유성룡의 아들 유진(柳袗)〔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지평(持平)이었는데,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