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나서던 날 전두환의 고향인 합천에서는 플래카드를 걸어놓고 고향마을에서는 축제를 벌였었다. 그런데 지금 합천군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하여 언제 그랬냐 하듯이 전 대통령을 고향에서조차 외면하고 있다. 왜일까.
이랬다 저랬다의 속성은 줏대가 없을 때 흔히 그렇게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줏대가 없다는 것은 자존심이 없다는 말로도 해석된다. 자존심이 없다면 인간으로서 가치부여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으로 지닐 수 있는 마지막 양심 이기 때문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는 이양심을 저버리기 시작했는데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청군에게 항복하던 날이다. 청군에게 항복하면서 50만 명이 청군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되었는데 청군에게 항복할 때 약조를 하였는데 포로가 도망을 하면 다시 돌려보내주기로 약조를 한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청나라를 탈출해서 조선으로 온다면 다시 돌려보내던지 탈출 포로자들의 위약금을 물기로 약조를 한 것이다.
50만 명이 20명 단위로 사람의 목을 대나무로 엮어 끌고 가는 줄이 백리가 넘었다고 하였으니 그 당시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끌고 가는 도중 요행 중 탈출에 성공하여 압록강을 간신히 건너 고국으로 돌아가도 인조는 포로의 보상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약조 때문에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와도 분담금 때문에 포로를 받아주지 안 했던 것이다.
조선의 왕이었던 인조의 양심 없는 행동으로 50만 명의 백성들이 갈 곳을 잃어 죽거나 다치거나 또는 우환으로 타국을 그렇게 떠돌았다는 것이 실록에 나와 있다. 당시 조선의 왕정은 백성을 종으로 삼아 정치를 하였으니 그들의 일탈들이 얼마나 심했었고 백성들이 핍박을 당했는지 얼추 짐작이 간다.
그런 왕정을 겪은 민족이라고 그래서인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통령이 감옥을 들락 거려도 당연시하면서 바라보는 습관이 어느 때부터인가 시작되었다. 그런 배반의 정치를 바라보면서 어느 사이 국민성도 변하기 시작했는데 정치권은 그런 국민성을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정치권의 그러한 단면을 들어낸 것도 따지고 보면 역사의 한 단면에서 보면 왕정을 생각할 수 있는데 국가가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백성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는 그때의 시절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정치권과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사법부 행정부를 중심축으로 소위 국민을 아우르는 이권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집단 이기 위주의 정치로 수단과 방법에서 국격을 훼손하는 일이 발생하곤 하는데 그 방법이 너무도 교묘해서 국민들은 알면서도 속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그 예로 반일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해서는 말보다는 언론과 방송을 동원하는 방법이다 지금 상영하는 서울의 봄 이라던가 노량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감성을 자극하는 일이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언론과 방송에서는 정부를 비판하는 일들이 교묘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선거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선거를 유리하게 이끌어 정권을 재창출하기 위해서는 의석수 과반을 이루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일이 제일 쉽고 빠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에서는 이념을 달리하는 정치세력들을 지원하는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생겨 났다 그들의 주변에 무방비로 노출이 되어있는 국민들이 걱정이다. 일희 일비 하는 국민성을 어느 때고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버리는 공산주의자들의 교묘한 숫법을 피할 수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에 맞서 어떻게 대응을 할 것인가. 이념을 달리하는 이들에 맞서 어느 유언비어에도 휘둘리지 말고 나 자신의 마지막 보루인 양심을 지켜내는 일이다 더불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을 자유민주주의의 대한민국을 지켜 내야 할 것이다.
이참에 자신을 한번 돌아보며 자신의 국민성은 어느 형에 해당하는지 한번 유추해 보는 것은 어떤지. 지금 합천군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나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는 것은 어떤지.
필터
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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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y Hopkin Those Were The D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