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을 위한 '흑해 곡물 협정'이 지난 7월 러시아에 의해 파기된 뒤, 새로 개척된 '임시 안전 항로'에 러시아 미사일이 날아왔다. 순항 중으로 알려진 '임시 항로'에 불길한 기운이 덮친 것.
민간 상선들은 지난 몇 개월간 우크라이나 정부를 믿고 '임시 항로'를 통해 우크라이나 흑해 항구에서 곡물과 철광석을 꾸준히 실어날랐다. '임시 항로'는 우크라이나의 서부 흑해 연안을 따라 나토(NATO) 회원국인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영해로 이어져 상대적으로 안전한 것으로 여겨졌다. 나토 회원국의 초계기가 흑해 인근 상공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고도 한다.
이 항로의 이용은 '흑해 곡물 협정'이 파기된 지 두 달 정도가 지난 9월 16일 처음 확인됐다. 우크라이나 흑해항구 초르노모르스크에 입항한 두 척의 외국 상선이 곡물을 싣고 사흘 뒤(19일) 루마니아 흑해 해역에 안전하게 도착한 게 시작이었다. 이 항로를 통한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졌고, 우크라이나 항구로 접근하는 민간 선박들도 많아졌다.
곡물 선적 모습/사진출처:ics-shipping.org
지난 9월 흑해 임시 항로를 운항중인 민간인 선박/사진출처:텔레그램 @miUkraune
급기야 블룸버그 통신은 지난달 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흑해 항구로 접근하는 민간 선박의 통행을 통제하지 않고 있으며, 흑해를 통한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이라고 예견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이 항로의 안전에 대한) 그리스 방공망을 믿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몇 달간 우크라이나 흑해 항구를 출입하는 선박은 점차 증가하는 흐름을 보였고, 우크라이나는 모스크바의 통제 없이 곡물과 철광석 등 원하는 게 무엇이든 해상 수출입 기회를 얻은 것으로 여겨졌다.
문제는 '러시아가 이 흐름을 계속 지켜보고만 있을 것이냐'였다. 결국 사건이 터졌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라이베리아 국적의 상선이 8일 흑해 유즈니 항구에 입항하던 중 러시아로부터 공대지 미사일 Kh-31P(러시아어로는 Х-31П)의 공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1명이 사망하고 필리핀 국적의 승조원 3명 등 4명이 부상했다.
스트라나.ua는 "이 사건은 흑해 곡물 협정 파기 후 모스크바의 허가 없이 우크라이나 항구에 입항하기 시작한 만간 선박을 공격한 것으로, 매우 중요하다"며 "이 공격으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항구로의 선박 흐름을 중단시키려고 하고 있으며, 누구도 선박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측은 이 사건이 러시아군이 오데사 항구를 공습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올렉산드르 쿠브라코프 우크라이나 인프라부 장관은 이날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러시아가 또다시 오데사 항구의 인프라를 공격했다"며 "이는 러시아가 흑해 곡물 협정을 탈퇴한 이후 21번째 공격"이라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측은 "민간 선박을 공격하는 러시아는 국제적 테러국가임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고 강조했지만, 러시아는 이미 전시 중 '흑해 봉쇄'를 선언한 상태였다. 위험하니 민간 선박은 절대로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한 뒤다.
이튿날(9일)에는 흑해에서 러시아 여객선과 팔라우 국적의 선박과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흑해 운항 중 충돌사고로 파손된 슬라뱌닌호/사진출처:cfts.org.ua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러시아 국적의 '슬라뱌닌'(Славянин)호는 9일 불가리아의 샤블라 곶 근처 흑해에서 팔라우 국적의 뉴 라우프(New Raouf)호에 의해 측면을 받쳤다. 지난 10년간 액화천연가스를 싣고 불가리아 바르나~카프카스 항로를 운항해온 '슬라뱌닌'호는 불가리아 바르나 항구로 되돌아갔다. '슬라뱌닌'호가 예정 항로보다 다소 북쪽인 샤블라 곶 근처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상·운항정보 웹사이트인 ‘베셀파인더(VesselFinder)’는 지적했다.
지난 10월 초에는 터키 화물선이 흑해의 루마니아 해안에서 기뢰에 의해 폭파된 바 있다.
이같은 일련의 해상 사건·사고들이 당장 민간 선박들의 우크라이나 흑해 항구 진출입 움직임에 어떤 영향을 줄 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꾸준히 늘어나는 민간 상선들의 우크라이나 항구 입항 흐름에 적지 않는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당국은 지난달 27일 벌크선 4척이 약 13만 톤(t)의 곡물과 1만 t의 철광석을 싣고 '임시 항로'를 따라 아프리카와 아시아, 유럽 국가로 나갔다고 발표했다. 또 상선 11척이 오데사와 체르노모르스크, 유즈니 항구에 입항해 거의 22만5,000t에 달하는 농산물 및 철광 제품을 선적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총 62척의 민간 선박이 이 항로를 이용했으며, 37척은 이미 130만t 이상의 농산물 등 화물들을 싣고 출항했다고도 했다.
발표로만 보면 '임시 항로'가 거의 정상궤도에 올랐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 같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루마니아 방문/사진출처:텔레그램
앞서 루마니아를 방문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10월 10일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새로운 '곡물 수출' 루트에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우크라이나-루마니아-몰도바 삼각지대에서 물류 공급망 확보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며 "몰도바와 루마니아를 통과하는 새로운 '곡물 통로'의 개통이 임박했다"고 주장했다. 클라우스 이오하니스 루마니아 대통령도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의 60%가 루마니아 항구 등 루마니아를 통과한다고 맞장구를 쳤다.
우크라이나 측의 자신감은 일부 언론에 의해 뒷받침됐다. 미 블룸버그 통신은 지난 10월 초, "크렘린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흑해 곡물 협정'에 포함됐던 우크라이나의 흑해 항구 3곳이 모두 곡물 수출을 재개했다"며 "자체 항로를 만들겠다는 우크라이나의 대담한 계획이 성과를 거뒀다는 신호"라고 보도했다. 또 보험 중개인 밀러(Miller)와 항해 기술 회사 클리어워터 다이나믹스(Clearwater Dynamics) 등이 안전 운항을 위해 힘을 합쳤다고도 했다. 클리어워터 다이나믹스는 자체 기술을 이용해 '선박이 위험 지역을 벗어날 때까지 24시간 추적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러시아측의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임시 항로에도 위험은 늘 상존하고 있었다. 예컨대 러시아 전투기가 흑해 상공에 뜨면 이 항로가 일시 중단된다. 가장 최근에도 10월 26일 러시아 전투기가 이 지역에 나타나자 임시 항로가 이틀간 폐쇄됐다.
주목되는 것은 러시아측의 추가 조치다. 우크라이나 측은 "이 지역에 출현한 러시아 전투기들이 임시 항로를 따라 알려지지 않은 무기 35개를 떨어뜨렸다"며 구경 533㎜의 바닥형 기뢰(мины типа МДМ)로 추정했다. 이 기뢰는 해저에 가라앉아 있지만, (배가 지나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세찬 물결에 의해 폭발한다.
우크라이나는 '임시 항로'의 안전성을 보증한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러시아군의 군사적 행동에 따라 언제든지 외국 상선이 공격을 받거나 항로에 부설된 기뢰에 의해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 가능성과 운항으로 얻는 수익을 비교한 뒤, 외국 선주들은 '임시 항로' 운항을 계속할 것인지 중단할 것인지 결정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