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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황제 | 성경의 사건 |
BC27-AD14 | 가이사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 | 예수의 출생, 나사렛에서 소년시절 |
AD14-37 | 디베료 가이샤 (티베리우스) | 예수의 공생애 때의 황제, 죽으심, 부활 |
AD37-41 | 갈리굴라(가이우스) | 교회의 성장, 바울의 회개-사도행전 초기 때 황제 |
AD41-54 | 글라우디오 | 바울의 초기선교 야고보의 순교(행12장)-헤롯왕이 죽임 큰 흉년이 들었으며(행11:28) 유대인들 로마로 추방(행18:2) |
AD54-68 | 네로 | 폭군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크게 박해, 바울의 후기선교, 대부분의 신약성경이 이 기간에 기록. 베드로 바울 로마에서 순교 |
AD68-69 | 갈바,오토,비텔리우스 | 유대, 로마전쟁 |
AD69-79 | 베스파시안 | 예루살렘 함락과 파괴(티투스 장군에 의해) |
AD79-81 | 티투스(디도) | 70년: 티투스 장군이 유대의 멸망과 분산시킴 79년8월: 티투스가 왕으로 오르고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폼페이 몰락 |
AD81-96 | 도미티안(도미티아누스) | 요한의 밧모 섬 유배, 그리스도인들 대 박해 |
신약성경과 연관된 시대의 로마황제들이며 이후에도 동서로마가 갈라지기 까지 20여명의 황제가 더 이어졌다.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AD395년 죽은 후 제국은 두 아들에 의해 동로마 서로마로 나누어지게 되었으며 동 로마는 콘스탄티누스황제가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세워 천도하고 1,000년 정도 더 유지하다가 1453년 5월29일 오스만 트루크제국의 술탄 메메드2세에게 멸망한다.
서로마는 급격한 쇠퇴의 길로 들어서서 게르만 족의 침입으로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멸망하게 되나 게르만 왕국이 등장한 옛 서로마제국은 로마가톨릭이라는 종교권으로 새롭게 통합되었다.
로마제국은 전체적으로 예수와 유대인과 교회를 박해한 나라이며 콘스탄티누스 때 긴긴 박해가 끝나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가 종교가 되었으나 이방종교의 사상, 철학, 미신들과 결합된 거짓된 종교였을 뿐 이 거짓 기독교가 국가의 세력을 입고 참된 신앙을 가진 성도들을 박해했으므로 또 다른 박해의 시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큰일을 로마제국을 통하여 이루었는데 바로 신약성경의 기록과 복음의 전파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공용어로 만든 헬라어로 신약성경이 기록되었고 로마가 지중해와 유럽을 통일함으로써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도 바울과 그 외의 다른 복음 전파자들이 한 나라의 테두리 안에서 무역과 군사적 목적으로 확보된 로마의 길들을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2. 헤롯 왕가의 통치자들
BC37-3(4) | 헤롯대왕 | 유대의왕, 대 건축가, 헬라화한 자 마2:1-22, 눅1:5 |
BC3(4)-AD6 | 아켈라오 |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의 분봉 왕 마2:22 |
BC3(4)-AD39 | 헤롯 안디바 | 갈릴리와 베뢰아 분봉 영주, 세례요한을 죽임 마14:1-11, 막6:14-29, 눅3:1,19, 눅13:31-33, 눅23:7-12 |
BC3(4)-AD34 | 빌립(헤롯 빌립 2세) | 갈릴리 바다 북쪽과 동쪽의 분봉 영주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 눅3:1 |
AD37-44 | 헤롯 아그립바1세 | 유대의 왕 행12장 |
AD44-100 | 헤롯 아그립바2세 | 칼키스의 분봉영주이자 왕 행25:13-26:32 |
1) 안티 파테르
이두매 출신(에돔: 에서의 후예) 이지만 명목상으로 유대인이다. 이유는 마카비가문의 요한 힐카누스가 BC125년에 이두매를 정복하여 모든 이두메인들을 강제로 할례를 받게 하여 유대인화 하였기 때문이다.
하스몬 왕조 세 번째 통치자인 알렉산더 얀네우스에 의하여 이두매 지방의 통치자로 임명된다. 그 이후 안티 파테르는 얀네우스 아들 힐카누스 2세에게 밀착되어 그를 조정함으로써 조금씩 권력을 쌓아간다.
(*하스모니안 왕조는 구약의 대제사장 계보에서 참조) 로마의 폼페이가 얀네우스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2세와 힐카누스 2세와의 권력다툼에 개입하여 마침내 명목상으로는 요한 힐카누스2세를 대제사장에 임명하였으나 실질적으로 이두메 사람 안티 파테르에게 권력을 쥐어준다. 아리스토불루스2세는 로마로 잡혀갔고 힐카누스2세와 안티파테르는 아리스토불루스의 의 두 아들 안티고누스와 알렉산더가 이끄는 반란을 수차례 진압하여 로마의 신임을 얻는다.
로마의 삼두정치에서 폼페이와 케사르(=율리우스가이사르=시이저)와의 싸움에서 케사르가 권력을 잡는다. 안티파테르가 프톨레마이오스 군대에 의하여 위기에 처한 케사르를 도와주어 로마 시민권과 행정관직을 수여 받는다. 마침내 케사르는 안티파테르를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한다. 안티파테르는 그의 두 아들 바사엘과 헤롯을 예루살렘과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한다. 안티파테르가 BC43년 암살당한다.
2) 헤롯대왕
BC40년 파르티아(바대)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포함해 로마의 속주들을 침략한다. 파르티아는 아리스토불루스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한다. 이 침략 때에 요한힐카누스2세는 바벨론으로 축출당하고 바사엘은 사망을 하고 헤롯은 가족과 함께 마사다로 피신했다가 혼자 로마로 건너가서 원조를 청한다. 안토니우스와 원로원의 신임을 얻어 유대의 왕으로 임명받은 헤롯은(BC40년) 삼년간 그의 반대자들과 전쟁을 치르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안토니우스에 의해 왕으로 임명된 헤롯은 안토니우스가 실각하고 옥타비아누스가 정권을 잡자 위기를 느끼게 된다. 로마로 건너가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를 만나 당당한 자세로 자신이 안토니우스에게 충성을 바쳤듯이 옥타비아누스를 위해서도 충성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보이고 유대의 왕위를 지킬 수 있었다.
헤롯은 로마의 정세가 변해도 새로운 권력자들의 신임을 얻어낼 수 있을 만큼 민첩하고 권력에 대한 애착이 많은 인물이었다. 로마 황제를 위한 충성심은 그가 도시를 건설하고 황제의 이름을 따라 도시를 명명한 것에도 나타난다.(가이사랴, 세바스테의 경우) 헤롯은 로마의 상류층과 특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위인 마르크스 아그립바와는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지속시켰으며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권익을 보호하기위해 이러한 관계를 적절히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내국의 유대인과 헤롯의 관계는 좋지 못했으나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는 헤롯이야말로 헬라 세계에서 유대인을 보호하는 실력자로 여겨졌다. 헤롯의 통치 기간 중에 헬라문화의 물결은 쉽게 유대인 세계로 유입되었다.
헤롯대왕의 아내와 자녀들
헤롯 대왕 (마 2장)
(a) (b) (c)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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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빌립 아리스토블르스 빌립 +-------+-------+
(눅3장) | (마14장) | |
+------+---------------------------+ 헤롯안티파스 아켈라오
| | (눅3장) (마2:22)
헤롯 아그립바1세 헤로디아
(행 12장) |
+-----------------+----------+ 실로매
헤롯 아그립바2세 버니게 | (마14장)
(행25장) (행25:13,26: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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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루실라
(행24:14)
도표설명>
* 통치자의 위에 오른자의 이름 아래에는 줄을 그었음.
** 두줄을 그은 것은 결혼 관계를 가리킨다.
*** 헤롯 대왕의 열명의 아내중 성경과 연관된 네 여인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a) 예루살렘의 클레오파트라
(b) 죤힐카누스의 손녀 미리암네
(c) 대제사장 시므온의 딸 미리암네
(d) 사마리아 여인 말타스
아내 | 도리스 | 마리암 (하스모니안의 공주)
BC27년에 헤롯에 의해 처형됨 | 마리암 (대제사장시몬 뵈투스의 딸) BC5년에 이혼 당함
| 말다크
(헤롯의첩,사마리아 여인) | 클레오파트라
(예루살렘출신) |
자녀 | 안티파터
BC4헤롯이 죽기 4일전에 처형됨 | 아리스토불루스 알렉산더 딸 헤로디아 헤롯에 의해 아들들은 모두 처형됨 | 헤롯빌립 1세 (아내 헤로디아와 딸 살로메) 어머니의 이혼과 더불어 힘을 잃고 공직에 나가지 않음 | 아켈라오 안디바 | 빌립2세 (살로메와 결혼) |
BC43년 아버지 안티파테르가 의문의 독살을 당하자 헤롯대왕은 암살자를 처형하고 돌아와 첫 번째 부인인 도리스와 아들을 버리고 당시 유대의 왕가였던 하스몬 왕조의 공주 마리암과 결혼하여 전통적인 유대교 제사장 가문과 결합한다.
헤롯은 남아있던 하스몬의 후손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간다. 하스몬 왕조의 마지막 왕녀이자 부인인 마리암을 누명을 씌워 살해한다. 부인 마리암과 사이에 태어난 아들 아리스도불루스도 부친의 손에 죽음을 당하고 헤롯 자신이 죽기 며칠 전에도 첫 부인 도리스 사이에 태어난 아들 안티파터를 살해할 정도로 잔인하였다. 대제사장직은 하스몬 가문에서 맡아 왔으나 헤롯은 고의적으로 하스몬 가문과 연관이 없는 바벨론 출신의 하나멜을 대 제사장으로 임명한다.
3) 헤롯 대왕 이후의 팔레스타인 정치
헤롯대왕이 죽은 후 살아남은 세 명의 아들에게 팔레스타인이 나눠지게 된다.
(1) 아켈라오
폭군 정치를 했던 아켈라오는 어머니가 사마리아 사람이며 헤롯의 첩이었다. 가계가 좋은 혈통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 글라피아도 이복형제의 미망인이었다. 유대에서는 이것이 근친상간으로 간주되어 유대인들은 좋아하지 않고 미움을 샀다. 아버지를 닮아서 건축 사업을 하였고 세금도 많이 거두었으며 군중들을 동원할 때 잔혹한 정책을 써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그의 폭정으로 인해 그 땅 주민들이 황제에게 파면을 요구하여 로마의 황제가 아켈라오를 분봉 영주로 강등을 시키고 비엔나로 보내버린다. 아켈라오의 통치지역은 로마의 직할령이 되고 AD6년부터 로마 총독의 관할에 들어가 빌라도가 부임하게 된다.
(2) 안디바(안티파스)
갈릴리와 베레아를 얻은 안디바는 갈릴리 호숫가에 도시를 세우고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티베리아 라고 불렀다. 예수께서 여우라고 칭했던 것이 안디바이다.(눅13:31-32) 나바테아의 왕의 딸과 결혼하지만 헤롯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더 좋아해서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나바테아의 아레스타 왕의 딸과 이혼함으로 아레스타 왕이 전쟁을 하여 보복을 한다. 헤로디아와의 결혼으로 세례요한이 그 결혼은 간음이라고 하였다.
{헤로디아}
하스몬 왕조의 후손인 마리암과 헤롯대왕 사이에서 태어난 아리스도불루스의 딸로 세 번의 결혼을 한다. 첫 남편은 삼촌뻘인 헤롯2세(헤롯대왕의 세 번째 부인 마리암의 아들)로 반역음모에 연루되어 실각하고 암살당한다. 두 번째 남편은 삼촌인 빌립2세(헤롯대왕의 세 번째 부인 마리암의 아들)로 결혼해서 딸 살로메를 낳는다. 23년경 이혼하고 삼촌뻘인 분봉 왕 헤롯 안디바와 결혼한다. 이 결혼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지만 서로에게 유리한 조건의 결합이었다.
하스몬 왕조 후손인 헤로디아의 결합이 왕위 계승에 도움이 되었고 헤로디아도 이 결혼으로 왕비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 위배되는 것으로 여겨져 유대인의 반감을 샀고 세례요한의 공개적인 비난을 받게 된다.
37년 헤로디아의 형제 아그립바1세가 로마의 신임을 얻어 빌립이 다스리던 지역을 얻게 되자 안디바에게 로마로 건너가 왕권을 얻어 오라고 한다. 마지못해 로마로 건너간 안디바는 왕권을 얻기는커녕 실패한다. 아그립바1세의 역공을 받아 안디바는 실각하고 헤로디아와 함께 갈리아로 유배된다. 아그립바1세는 헤로디아에게 유대로 돌아올 것을 제안하지만 이를 거부하고 남편을 따라서 유배를 자청했고 유배지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3) 빌립 2세
헤롯대왕과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북쪽지역을 물려받고 가울라니티스, 파니아스, 이두레와 드래고닛 지방의 분봉 영주로 임명된다.(눅3:1) 이 지역은 비 유대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의 사생활에 관해서는 사람들이 관심이 없었다. 갈릴리 북부를 다스리며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그의 영토는 주후 37년 이후 아그립바 1세가 다스리게 된다. 헤롯 가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그가 다스리는 동안 이 지역은 평안했다.
(4) 헤롯 아그립바1세
헤롯대왕과 둘째부인 마리암과 사이에서 난 아리스도불루스의 아들로 아버지 아리스도불루스와 할머니 마리암이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게 되는 불운한 왕자이다. 그는 로마에서 가이우스 갈리굴라와 친분을 맺고 갈리굴라가 황제가 된 후에 아그립바 1세는 빌립이 이전에 다스리던 영토(가울라니티스와 드라고닛, 바타네아)의 통치자로 임명한다.
갈리굴라는 AD40년 갈릴리와 베뢰아도 아그립바의 삼촌 헤롯 안디바를 퇴위시키고 아그립바에게 주었다. 유대사람들은 갈리굴라가 자신의 동상을 예루살렘에 세우려 할 때 아그립바가 유대 사람을 대표해서 중재에 나서자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주후41년 1월24일 갈리굴라가 근위대에 의해 살해당했을 때 아그립바는 로마에 있었고 로마에 내전의 기운이 감돌자 자신의 오랜 친구 글라우디오가 황제 자리에 오르는데 공헌하여 헤롯대왕 이 후 처음으로 분봉 왕이 아닌 왕으로 임명된다. 글라우디오는 제국 동쪽의 각 속주에 왕을 분봉시키는 정책을 따랐다.
AD41년 아그립바에게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까지 넓혀주고 자신이 삼촌이 전에 지배하던 땅과 아소도와 얌니아, 아볼로니아, 안디바드리 해안을 포함한 헤롯의 세 아들이 다스리던 땅을 갖게 되었다. 그는 헤롯대왕이 다스렸던 모든 영토를 손에 넣어 헤롯 왕가의 어느 통치자보다 막강한 영향력을 갖는다.
아그립바는 그의 얼굴과 로마 황제의 얼굴이 그려진 동전을 만들고 원형 경기장과 극장을 베리투스에 건설했으며 검투사 경기를 주최했다. 그러나 그는 비 유대 사람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그의 죽음을 많은 사람들이 기뻐할 정도였다.
헤롯 아그립바는 팔레스타인 종교 지도자들과 손을 잡고 정통 유대교 정책을 폈다. 로마는 BC 6세기부터 갖고 있던 대 제사장 임명권을 아그립바에게 넘겨주었다. 그리스도교 운동으로 발생한 문제들을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를 칼로 죽이므로 베드로를 옥에 가둠으로서 해결하고자 했다.(행12;2) 백성들이 그를 높이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아 충이 먹어 죽게 된다.(행12:23)
(5) 헤롯 아그립바2세
헤롯대왕의 증손이고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다. 아그립바가 죽을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였으며 헤롯가의 마지막 통치자였다. 글라우디오는 아그립바 1세의 아들 아그립바2세에게 모든 권한을 주기 바랐으나 그의 조언자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로마는 어린 후계자에게 실권을 넘겨주지 않았으나 주후50년 삼촌 칼키스가 죽은 후에 글라우디오는 아그립바 2세를 칼키스의 통치자로 임명한다. 주후53년에 빌립이 분봉 영주로 다스리던 영토를 칼키스가 맞바꾸어 준다.
이어 등극한 네로는 아그립바에게 갈릴리 디베랴, 막달라, 데가볼리, 베레아의 율리우스를 주었다. 로마황제 앞에서 유대인의 사람을 대변했으며 대제사장을 임명하는 권한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나이 많은 누이 버니게와의 관계 때문에 유대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다. 바울은 로마 여행 전 가이사랴 감옥에 잠시 갇혀 있을 때 아그립바 2세와 버니게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변증했다.(행25:23-26,26:32)
버니게: 아그립바1세의 딸로 아그립바 2세와 근친상간함
바울을 심문할 때 아그립바 2세와 같이 심문함(행25:23)
3. 유대의 왕들과 팔레스타인 총독
유대 BC37-41 | 팔레스타인 AD44-66 | ||
BC37 | 헤롯대왕 | AD44-46 | 코스피우스 파두스 총독 |
BC3(4) | 아켈라오 | 46-48 | 디베리우스 알렉산더 총독 (배교한 유대사람) |
AD6-9 | 코포니우스총독 (아우구스투스 임명) | 48-52 | 벤티디우스 쿠마누스 총독 |
AD9-12 | 마르쿠스 암비블루스 총독 (아우구스투스 임명) | 52-60 | 안토니우스 벨릭스 총독 |
AD12-15 | 안니우스 루푸스 총독 (아우구스투스 임명) | 60-62 | 폴시우스 베스도 총독 |
AD15-26 | 발레리우스 그라투스 총독 (티베리우스 임명) | 62-64 | 글로디우스 알비누스 총독 |
AD26-37 | 본디오 빌라도 총독 (티베리우스 임명) | 64-66 | 게시우스 플로루스 총독 |
AD37 | 마룰루스 총독 (시리아의 총독 바텔리우스 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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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7-41 | 헤렌니우스 카피토 총독 (갈리굴라 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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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7-41
41-44 | 가울라니티스, 드라고닛, 바티네아통치 자 아그립바 1세 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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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1행정관 시대(AD6-41) - 로마 통치
유다는 AD6년부터 아켈라오의 폭정으로 로마황제에게 파면되어 로마 총독의 관할로 들어갔다.
2) 아그립바 1세 왕(AD41-44) - 로마황제 글라우디오는 AD41년 아그립바 왕을 임명하고 행정관을 통한 직접통치를 마감했다. 로마 행정관들의 통치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유대 사람들은 헤롯 왕조의 후예를 더 반갑게 여겼다.
3) 제2 행정관 시대(AD44-66) - 로마의 직접 통치를 다시 받는다.
7명의 행정관이나 지방장관들은 글라우디오나 네로에 의해 임명되어 가이사랴에 본부를 두고 유대 지방을 통치했다. 행정관들은 원래 로마의 재정 대리인으로서 고위 관리직이 되기를 바라는 집단에서 뽑힌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군대는 없었으며 심각한 소요가 발생할 경우 로마에서 파견된 시리아의 레가투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도록 되어 있었다. 세바스테와 사마리아 지역의 비 유대사람들로 구성된 군사 조직은 행정관이 지역 행정을 집행할 때 지원되었다. 반면 시리아의 로마군대는 바대 사람의 위협을 막아내기 위해 주둔한 병력이었다.
① 벤티디우스 쿠마누스 총독: 성지 순례자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 분쟁에서 사마리아 사람들 손을 들어준다. 이때 뇌물을 받은 혐의로 해임된다.
② 안토니우스 벨릭스 총독: 모든 잔혹함과 정욕을 저질렀고 노예의 본능으로 권력을 휘둘렀다고 책망했다.
③ 글로디우스 알비누스와 게시우스 프로루스 총독들: 이들은 부패했고 아둔했다. 이시기에 갈릴리 사람 유다의(행5:37) 후예 열심당원들은 로마의 통치에 대항해 최선을 다해 최전선에서 싸웠다. 열정적인 단검을 든 사람들인 시카리들은 로마의 지지자들을 해쳤고 시카리들은 예루살렘이 멸망 후 마사다에 도피해 살다가 96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두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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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