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00
9월1일[연중 제21주간 금요일(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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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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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Tf2Z5h8squU (김명겸 사도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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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지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하고 청하였다.”
<사랑의 가장 큰 표현, 잘 준비하는 것>
신학생 시절 설교학 교수님 말씀께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부디, 미리 미리 강론 준비 잘 하십시오. 혹시라도 강론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차라리 강론대에 서지 마십시오.”
곰곰이 생각해보니 교수님 말씀 참으로 지당한 말씀입니다. 강론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을 때, 이것 저것 잡다하고 엉뚱한 말을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말실수도 하게 되고, 괜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 싸잡아 야단치게 되고, 그러다보면 강론이 강론이 아니요 언어폭력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제로서 강론을 잘 준비한다는 것은 강론을 듣는 신자들에 대한 예의이자 교회와 하느님을 향한 당연하고도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비단 강론뿐이 아니라 미리 미리 잘 준비한다는 것은 서로 서로에 대한 예의이자 배려입니다. 한 가정의 어머니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데, 미리 생각하고, 미리 챙겨놓고, 미리 계획해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정성껏 밥상을 준비하는 것은 가족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예의이자 배려입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친구들과 떠들다가 식사시간 10분전에 도착해서, 찬밥에, 어제 먹다 남은 찌개에, 대충대충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가족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지요.
마찬가지로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학생들이 시험을 잘 준비하는 것은 선생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도리요 예의, 배려, 존경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총무부 직원이 회사 창립기념 행사를 정성껏 준비하는 것은 그 회사와 경영자를 위한 가장 큰 애정의 표현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이처럼 미리 미리 잘 준비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향한 가장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잘 준비하기 위해 갖춰야 할 한 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깨어있음’입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잠이 덜 깬 흐리멍텅한 얼굴이 아니라, 세상 다 산 것 같은 무기력한 표정이 아니라, 갓 낚아 올린 싱싱한 은갈치 눈동자처럼 살아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롱초롱하고 맑은 정신으로 잘 준비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자세, 언제든 뛰어들 수 있는 적극성을 의미합니다.진정으로 깨어있다는 것, 이 세상에만 시선을 두지 않고 이 세상 너머의 또 다른 세상, 영적인 세상,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얼굴을 찾음을 의미합니다.
진정으로 깨어있다는 것은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으며, 나를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 자신에 대한 사랑, 하느님의 모상인 이웃들에 대한 사랑...
우리 영혼은 성찰이 부족하면 쇠락되기 마련입니다. 오늘의 나에 결코 만족하지 말고 부단히 나를 돌아보고, 나를 갈고 닦으며, 이웃을 살펴보고, 세상을 직시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나가는 노력이야말로 깨어있음의 중요한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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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W6EM9WwSJ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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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처녀들이 기름을 나누어 줄 수 없는 이유>
오늘 복음은 현명한 처녀 다섯과 미련한 처녀 다섯의 이야기입니다. ‘다섯’은 보통 육욕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을 상징합니다. 그러한 인간에게 기름이 주어지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다. 곧 성령과 성자가 합하여 ‘일곱’이 되는 것입니다. ‘7’은 하느님 자녀를 상징합니다.
하느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명한 처녀들은 왜 기름을 나누지 않았을까요? 그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하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름은 ‘도움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도움의 은총은 생명의 은총을 얻기 위해 필요한 은총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은총이 가득하다고 하셨을 때 그 은총은 다른 이와 나눌 수 없습니다. 그 은총으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을 따름입니다.
동방 박사들도 별을 보고 아기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오직 동방 박사들만이 별의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은총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도움의 은총은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나의 노력으로 챙겨야 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한 준비물입니다.
현명한 처녀들은 그것들을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얼마든 원하면 얻을 수 있는 지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지 못하는 지혜는 언제나 나누기에 부족한 지혜입니다. 참 지혜는 좋은 감정이 꺼지지 않게 합니다.
아이유와 이선균 주연의 ‘나의 아저씨’에는 현명한 처녀와 미련한 처녀가 등장합니다. 동훈은 학교와 회사 모두 입사 후배에게 밀려 말단 과장인 불쌍한 남자이고, 지안은 빚을 갚기 위해 위장 취업한 불쌍한 아이입니다. 정당방위이기는 하지만, 아이유는 어렸을 때 자기 가족을 괴롭히는 이를 죽인 살인자입니다. 지안에게 아버지가 죽임을 당한 아이에게 지안은 끊임없이 돈을 갚아야만 합니다.
동훈의 아내는 동훈을 몰아내려는 후배와 바람을 피웁니다. 동훈은 그것을 알면서도 가족을 지키고 회사에서 버티기 위해서 참아냅니다. 가족까지 무너지면 더는 살 의미가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동훈의 후배 대표이사에게 지안은 이용당합니다. 자신을 믿고 써 준 과장이었지만, 당장 돈이 더 급했기 때문입니다. 동훈의 모든 것을 녹취하고 심지어 동훈을 꼬시기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대표이사에게 받은 돈으로 지안은 빚을 갚아나갑니다.
시간이 지나며 동훈은 자신이 뽑아준 지안이 살인을 저질렀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동훈은 자신과 같은 불쌍한 처지인 지안을 오히려 지지해줍니다. 자기를 가장 사랑해주는 사람의 등에 칼을 꽂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지안은 점점 동훈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게 됩니다.
만약 지안이 동훈을 도청하지 않았다면 동훈의 마음을 몰랐을 것입니다. 지안은 동훈의 아내에게 가서 동훈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해주고 동훈의 아내까지 용서를 빌게 합니다. 동훈의 마음을 알면서도 바람을 피운 동훈의 아내와 자신을 희생하여 동훈을 구하려는 지안의 모습에서 우리는 미련한 처녀와 현명한 처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동훈의 아내에게는 감정이 없었습니다. 비로 미안함과 감사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랑을 맞을 준비가 안 된 미련한 처녀였습니다. 반면 지안은 미안함과 감사, 그리고 사랑의 마음을 키워갔습니다. 이는 더 알아감을 통해 생겨나는 감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동훈에게 더 가까운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감정은 나누어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감정 없이 바치는 제물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동훈의 아내가 동훈에게 밥을 차려줘도 그것은 올바른 제사가 아닙니다.
구약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제사는 번제, 곡식제, 친교제, 보상제, 속죄제 등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하느님께 대한 미안함과 감사함의 마음이 들어있는 제사입니다. 이 제사를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미안함과 감사함, 그리고 나아가서 사랑의 마음까지 성장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그 감정이 별이 되어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합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만드는 세상의 지혜에도 관심이 없었던 이들이었습니다. 창조자를 알거나 왜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는지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미안함과 감사, 사랑이 줄어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알아보게 만드는 지혜를 얻기 위해 스스로 노력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미련한 처녀들처럼 “나도 너희를 모른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제가 『하.사.시.』를 읽을 때 그러한 새로운 지식들을 나누려고 해 보았습니다. 누구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수녀님은 화를 내셨고 형들은 다 아니까 너나 잘하라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신학교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책을 읽어보라고 권합니다. 도움의 은총은 자기 노력으로 얻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상인에게 가서 미안함과 감사함, 그리고 사랑이 증가할 수 있는 지식이 떨어지지 않게 꾸준히 살 수 있도록 합시다.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감정입니다. 감정은 나누어줄 수 없으니 우리가 키워가야 합니다. 감정 없는 전례가 되지 않게 합시다.
부모가 차려준 음식을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사랑의 감정을 키우며 먹읍시다. 이것이 우리 기름을 꺼지지 않게 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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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5,1-13: 열 처녀가 등불을 가지고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시며,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여기서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2절) 슬기로운 처녀들은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 헤아리고서 신랑의 오심에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신랑이 언제 오더라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들이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방종하고 부주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현재의 것들에만 마음을 쏟으며 노력하지 않았다. 신랑이 언제 올지는 별 관심이 없다. 모두가 등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떤 처녀들은 슬기롭고 어떤 처녀들은 어리석었다. 그것은 기름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였다. 이 기름의 의미는 아주 큰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왜냐? 사도 바오로께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주겠습니다.”(1코린 12,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13,1)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것 위에 있는 뛰어난 길이며 기름이다. 이 기름은 더욱 뛰어난 길이다. 이 사랑이 없으면서 신랑이신 주님을 맞이할 수 없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순간에 대해 준비만 하고 앞날은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석었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앞날에 대비하여 사랑의 행실을 쌓아 기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슬기로웠다. 그런데 신랑이 늦어진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5절) 그 신랑은 한밤중에 온다. 예기하지 못한 시간을 말한다. “신랑이 온다!”(6절) 처녀들은 저마다 등불을 챙긴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다오.”(8절)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9절) 하였다. 하느님 앞에서 선은, 사랑은 얻을 수도 빌릴 수도 없는 것이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10절) 그 뒤에 어리석은 처녀들이 왔다. 그들은 기름을 사서 왔을까? 기름을 파는 사람들을 만났을까? 아니다. 단지 문이 닫혀있는 것만을 본다. 문을 두드리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12절) 그러니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놓쳐 지나치지 않도록 깨어 있는 삶을 항상 노력하며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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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살면서 때로 ‘황당’한 일을 경험하곤 합니다. 나의 뜻과 다르게 상황이 전개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국으로 유학 온 신부님들이 며칠 간 머무르겠다고 했습니다.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트렁크에 짐을 옮기면서 황당한 일이 생겼습니다. 차는 약간 경사진 곳에 있었고, 짐을 옮기는 과정에 그만 카트가 경사면을 타고 내려갔습니다. 워낙 운동 신경이 둔한 저는 미처 몰랐고, 카트는 내려가면서 하필이면 주차된 차에 부딪치면서 멈추었습니다. 차의 주인은 저보다 더 황당했을 것입니다. 급히 내려가서 차 주인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서로 원만하게 해결하면 될 수 있었는데 차 주인은 경찰을 불렀습니다. 경찰은 자초지종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차량에 의한 사고가 아니기에 저의 운전 면허증이나, 보험은 상관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차량 주인에게 보험으로 차를 수리하고, 나중에 법원에 가서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경찰은 갔고, 저는 차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약간의 수리비용을 주면서 문제는 해결 되었습니다. 고정 장치가 있는 카트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저보다 더 황당한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과 같다고 하십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에 기름을 채워서 기다렸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잔에 기름을 채우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등잔에 기름을 채웠던 슬기로운 처녀들을 기쁘게 신랑을 맞이했고, 혼인잔치에 참여했습니다. 등잔에 기름이 없었던 어리석은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고,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나라는 그냥 기다린다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나라는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등잔은 우리의 몸과 마음입니다. 여기서 기름은 우리의 ‘행동’입니다. 가난한 이, 불쌍한 이, 외로운 이를 따듯하게 돌보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해 준 선행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는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기름은 잘못된 행동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사람 한 사람을 하느님나라에서는 더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벌이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크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뉘우치지 않기 때문에 구원에서 멀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기름은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 하느님의 아들이 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여기서 기름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식별할 줄 아는 ‘지혜’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해야 할 것을 알았지만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알았지만 하였습니다. 그들은 교만하였고,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차도 ‘기름’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도 기름이 필요합니다. ‘선행, 회개, 겸손, 지혜’의 기름을 채울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더러움 속에서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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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열 처녀의 비유>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마태 25,1-4)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0-13)
‘어리석은 처녀들’이라는 말을,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여기서 ‘불쌍한’은, 뜻으로는 ‘어리석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주시는데, 그것을 받기를 희망하지도 않고, 받으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현세의 복을 받기만을 바라는 사람, 최고로 좋은 것은 안 받겠다고 하고, 안 좋은 것을 달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몰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이미 신앙을 받아들여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마음이 다른 데 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어리석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어리석은 처녀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라는 말씀은, “겉으로는 신앙인으로 보이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껍데기만 신앙인으로 살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쭉정이’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1ㄹ-12)
알곡과 쭉정이는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릅니다. <쭉정이처럼 사는 신앙인은, 사실상 신앙인이 아닌 사람과 같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신랑이 도착했을 때 그 자리에 있느냐? 없느냐? 신랑을 맞이하느냐? 아니냐?”입니다. 어리석은 처녀들 처지에서는 “우리는 억울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나름대로 잘 기다리고 있었다. 신랑이 너무 늦게 온 것이 문제다. 우리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놀러갔기 때문이 아니라 기름을 사러 갔기 때문이다. 기름을 사러 간 것은 신랑을 위한 일이다. 우리의 심정과 사정은 몰라주고 왜 이렇게 무자비하고 냉정한가?”
<“나도 처음에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했다. 그랬는데 먹고사는 일에 바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라는 변명과 비슷합니다.> 이 상황이 실제 상황이라면, 어리석은 처녀들의 심정을 헤아려서 너그럽게 받아줄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 혼인잔치라면 좀 늦게 왔더라도 못 들어오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는 비유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맨 끝에 있는 말씀, “깨어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비유의 세부 사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말과 재림과 심판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빨리 이루어질 수도 있고, 아주 늦게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날이 바로 오늘일 수도 있고, 백 년 뒤나 천 년 뒤에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제가 아직 준비가 덜 되었으니 나중에 오십시오.”라고 말씀드릴 수도 없고, “제가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저도 모르니까 준비가 되어있는 지금 바로 오십시오.”라고 말씀드릴 수도 없습니다.
종말과 재림으로만 생각하면 좀 막연할 수도 있는데, 개인의 임종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자기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생을 마감할지 모릅니다.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릅니다. 잘 알고 있는 지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흔히 들으면서도, 인생은 허무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그치고, 그것이 ‘나의 일’이라는 생각은 못하고, ‘남의 일’로만 생각하면서 그냥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그 모든 일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나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마태 6,27)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삶과 죽음을 포함해서 우리의 모든 것에 대한 권한을 주님께서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것과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신앙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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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열 처녀를 슬기롭거나 어리석은 인물로 구분 짓는 기준은 바로 준비성입니다. 날이 어두워질 때를 대비하여 등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신랑을 맞이할 준비는 열 처녀가 모두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관건은 얼마나 철저히 준비하고 있는가입니다. 그 시대 유다인들의 혼인 풍습을 고려하여 볼 때,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는 현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혼인 잔치를 앞둔 신랑은 아마도 신부 아버지가 될 사람과 혼인 계약서를 쓰러 길을 떠난 것으로 보이는데, 장인과 세부 사항들을 하나하나 조율하다 보면 예상 시간보다 오래 걸려서 늦게 돌아올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고려한 다섯 처녀는 신랑을 기다리는 동안 밝힐 등기름을 넉넉하게 마련하였지만, 나머지 다섯은 그러한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기름을 따로 더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는 나름대로 마지막 때를 잘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비유에서처럼 등을 마련하고도 그 등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는다면 어떠할까요? 신앙을 가지게 되었으나 그 믿음을 유지할 연료, 곧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그러한 신앙은 기름 없는 등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주님!’ 한다고 다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닫혀 버린 문 앞에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는 처녀들의 절규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종말을 슬기롭고 철저하게 준비하기를 바라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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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그러니 깨어 있어라.”>
테살로니카 첫째 편지를 쓴 사도 바오로는 공동체 교우들에게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생활을 하라고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거룩한 삶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불륜을 멀리하고 아내를 당시 이교인들에게 만연되어 있던 풍조인 ‘색욕으로 아내를 대하지 말라.’고 이릅니다.
사도 바오로는 구약성경의 깊은 지식을 갖고 있어서 레위기의 가르침을 삶의 기초로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더러움 속에서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테살로니카 1서 4장 7절)
구약성경에서 대표적으로 하느님의 성성을 강조하는 것이 레위기라 하겠습니다. 그 내용을 좀 더 본다면 레위기 17장-26장의 성결법(聖潔法)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민족으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을 소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법은 비단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그들 가운데 있는 이민족 사람들에게도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신례에 이민족 사람들도 초대되는 것입니다. 만민의 하느님 사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바탕은 하느님의 성성에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백성들에게 일러주라 하시며 모세에게 이르시지요.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기 19장 1절)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신약에서는 성령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인도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어떻게 기도하는 줄도 모르던 우리를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서 올바로 살 수 있도록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하느님의 뜻을 꾸준히 지키며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는 그 시기는 아무도 모르지만, 도둑처럼 생각지도 못한 때에 온다는 것을 신랑을 맞이하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설명해주십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들은 저마다 등을 들고 있습니다. 다섯 처녀는 넉넉한 기름을 마련해서 신랑이 왔을 때, 혼인잔치에 들어갔지만 슬기롭지 못한 다섯 처녀는 기름이 떨어져 가게에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와서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혼인잔치는 일반잔치와 다르게 신랑이 오자 문을 닫습니다. 늦게 도착한 다섯 처녀는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25장 11절)라며 애원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준엄하게 다섯 처녀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마태오 복음 25장 12절)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나 준비하지 않는 것은 각자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그날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준비된 자들만 허락되는 사실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마무리하시면 결론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오 복음 25장 13절)
마태오는 혼인 잔치를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를 들어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면 준비하는 것을 설명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이어서 ‘최후의 심판’(마태오 복음 25장 31절-46절)에서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기 위한 주님의 구체적 실천사항에 대해 전해주고 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우리도 매일의 생활에서 게으르거나 미루지 말고 하느님 말씀을 잘 알아듣고 묵상하며 그때 그때에 이웃에게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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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열 프란치스코사베리오 신부님]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마태오 복음 25장 9절)
어리석은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의 비유말씀이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신랑이 왔다는 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달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는 대답만이 돌아온다. 그리고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슬기로운 처녀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는 이야기다.
오늘은 조금 무서운 이야기를 해야 할 듯 하다. 그리고 간단히 끝내련다. 이 비유 말씀은 종말론적 이해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이 삶밖에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이다. 잘 살 것인지 그렇지 못할 것인지 선택할 기회는 지금 이 삶밖에는 없다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한없는 기다림과 관대한 용서 역시 이 삶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각자가 마지막을 맞이했을 때는, 기다림과 용서의 하느님이 아니신 심판의 하느님이실 수밖에 없다는 섬뜩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말씀이다. 뿌린 대로 걷어들인다는 말씀에 하느님께서 동의하신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 사랑 역시 이 삶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분 앞에 서야 할 날을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서야 함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우리의 선택과 실천만이 남아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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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기를>
맥시칸의 결혼식과 인도 사람의 결혼식, 그리고 미국인들의 결혼식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로 문화가 다르지만, 복을 빌어주고 헤어지지 않기를 기원하며 자녀의 풍요를 누리기를 바라는 기원은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신랑 신부를 끈으로 묶는 행위라든지 반지를 교환하고 부모가 자녀에게 쌀을 뿌리는 행위를 통해서 복을 기원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약의 선언 후 성모님께 꽃을 봉헌하는 모습을 통해 신앙인의 모습을 새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유다인의 결혼 풍습은 약혼을 먼저 합니다. 그리고 약혼으로 법적인 혼인이 성립되지만 약 1년간은 신부가 친정에 머물러 있고 부부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으로 갑니다. 신부의 집에서는 신부 친구들이 등불을 밝혀 들고 신랑을 마중합니다. 그리고 신랑 일행이 도착하면 함께 들어가 밤새도록 잔치를 벌입니다. 왠 등불이냐고요? 사막지역은 낮에는 너무 더우니까 밤을 이용하는 거죠. 그렇다면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처녀들은 신부의 친구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고 다섯은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신랑이 일찍 왔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늦어져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실 등잔에 기름이 없으면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등잔불을 밝히려면 언제나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저는 하루 일정을 마감하며 자동차의 주유상태를 확인합니다. 혹 급한 일이 있어도 일정한 거리를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간혹 미처, 확인하지 못하는 날이면 하필 그날에 일이 생기고 시간에 쫓기게 됩니다. 하루쯤이야! 하고 방심하는 그날이 심판의 날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기름을 채운다는 것은 준비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에 옮긴다는 말씀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천상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혼인 풍습은 다르지만, 그 안에 예식이 의미하는 알맹이가 있듯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행동하는 믿음의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예기치 않은 시간에 갑자기 오시더라도 더 큰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할 일 없이 보낸 오늘 나의 하루가 어제 죽은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한 바로 그 내일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순간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누가 보나 보지 않나 언제나 준비되어 있기를 희망합니다.
천국에 가면 놀랄 3가지가 있는데 1) 와야 될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이고 2) 못 올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와 있는 것이며 3) 내가 거기 와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남아있는 사람에게 미안한 것도 있는데 1) 이렇게 좋은 곳에 혼자 와 있어서 가족에게 미안하고, 2) 나를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 미안하고 3) 내 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혈, 성인들의 통공과 가족, 이웃들의 희생과 기도로 온 것이기에 미안하답니다. 천상의 행복을 누리는 것은 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요 은총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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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나를 기분 좋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을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나에게 최고로 기분 좋은 것이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에게도 좋은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저는 야구를 좋아합니다. 열심히 응원하는 팀이 있어서 이 팀이 이기길 간절하게 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팀이 이기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반대 팀을 응원하고 있었던 사람들의 기분은 최악일 것입니다. 이렇게 제가 응원하는 팀의 승리가 모두에게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따라 기분 나빠진 상대 팀 응원자와 말다툼할 수도 있고, 다른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결국 저에게도 좋은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기만족은 이렇게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모두 좋은 것이 될 수 있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만 좋으면 그만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나만 바라보니 이웃을 볼 수도 없고 그들과 함께하는 예수님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보지도 못하고 함께하지 못하니 자기에게 좋은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것을 늘 기억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주님께서는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가 있는데, 이 중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고 하지요. 어리석은 처녀는 등만 준비하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고, 슬기로운 처녀는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신랑이 왔습니다. 문제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처녀의 행동입니다. 그들은 슬기로운 처녀에게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합니다.
누구는 슬기로운 처녀가 기름을 나눠줬으면 모두에게 좋지 않겠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신부 측 들러리가 가지고 있는 등의 기름은 약 15분 정도만 태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즉, 나눠줬다가 이 결혼식 자체가 엉망이 될 수 있으므로 상인에게 가서 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기름을 나눠줬다가 모두 최악의 상황이 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어리석은 처녀는 슬기로운 처녀가 나눠주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결혼식에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등을 들고 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기억하고 가장 좋은 것을 실천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자기 만족만을 위한 삶이 아닌, 모두를 위한 삶 그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어리석은 처녀의 모습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계속해서 깨어 준비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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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 대신>
마태오 25,1-13 (열 처녀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당신 대신>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마태 25,9)
당신을
위해서라면
당신 대신
죽을 수는 있어도
당신을
위해서라도
당신 대신
당신의 삶을
살 수는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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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등잔의 기름>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태오 복음은 어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의 비유에 이어 오늘 열 처녀의 비유를 왜 또 드는 것일까?
두 비유 모두 언제가 될지 모르는 종말에 주님의 오심을 깨어있다가 맞이해야 한다는 가르침 면에서는 같은데, 그래서 다른 복음에는 이 비유가 없는데 왜 굳이 이 비유를 또 드는가? 불필요한 중복이 아닌가? 아니라면 무엇을 더 얘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차이점이 있다면 기다리는 사람이 종과 처녀라는 점이고, 오실 주님이 주인과 신랑이라는 점인데 이 차이점을 굳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차이점을 얘기하고 싶었던 거라면 기다리는 우리는 주인의 종이나 일꾼이 아니라 신랑의 연인이라는 관점에서 오늘 비유를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종이나 일꾼이 주인과의 수직관계라면 연인은 위아래가 없이 동등한 수평관계라는 점도 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 처녀의 비유에서 기다리는 대상이 신랑인 것은 분명한데 열 처녀가 신랑의 신부인지 아니면 혼인 잔치의 들러리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열 처녀가 신랑의 연인 또는 신붓감이라고 생각해봤습니다. 아직 신부가 아닌 신붓감이고 신랑을 사모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언제 신랑이 오든 잘 준비하고 깨어 기다리다 맞이하면 신랑의 신부가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신부가 되지 못함은 물론 아예 혼인 잔치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출발점은 똑같고 공평합니다. 다 처녀이고 신랑을 사랑한다는 면에서 똑같고, 신랑은 열 처녀에게 신부가 될 수 있는 똑같은 기회를 줬습니다.
그런데 목적지인 신방에는 들어갈 수도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랑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처녀들에게 달린 것입니다.
제 생각에 등잔의 기름은 신랑에 대한 사랑이고 갈망이고 열망입니다. 열 처녀 모두 신랑을 사랑하고 신부가 되고 싶은 처녀들이지만 그 사랑과 신부가 되고 싶은 갈망과 열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사랑이라는 기름은 한 번에 왕창 준비하고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그리고 매 순간 채우는 것이고 조금씩 끊임없이 채우는 것입니다.
성가를 부를 때는 성가를 사랑과 열망과 갈망을 가지고 부르고, 기도할 때도 분심잡념 가운데 하지 않고 정신을 가다듬어 바치고, 일할 때도 종이나 일꾼처럼 일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연인에게 줄 목도리를 뜨고 손수건에 수를 놓는 연인처럼 사랑으로 함으로써 사랑을 자신 안에 조금씩 계속 채워가는 것이고 마침내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불이 뜨겁게 타오른 적이 한 번도 없는 미적지근한 사랑도 안 되겠지만 한때 불같이 사랑하고 이내 사그러드는 그런 사랑도 안 됩니다.
아무튼, 매일, 매 순간을 사랑으로 채우는 것이 등잔에 기름을 채우는 것이며 사랑이라는 기름은 일생에 걸쳐 마련해야 하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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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육신은 잠을 자도 사랑은>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마태오 복음 23장은 주님께서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고 24장은 주님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자들 입장에서 23장은 그래서는 결코 안 된다는 가르침이고, 24장은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에 대한 가르침으로서 주인을 깨어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슬기로움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제는 종의 슬기로움과 깨어 있음에 대한 가르침이고 오늘은 동정녀의 슬기로움과 깨어 있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종의 슬기로움과 동정녀의 슬기로움 사이에 종의 깨어 있음과 동정녀의 깨어 있음 사이에 차이점은 뭘까요? 무슨 차이가 있기에 깨어 있음에 대한 비유를 두 번이나 이어서 할까요? 그 차이가 없다면 중복할 필요가 없으니 말입니다.
그 차이를 따지기 전이고 그래서 그 차이가 뭔지 모를지라도 막연하지만 저에게 드는 느낌은 종의 기다림보다는 동정녀의 기다림이 더 높은 차원이랄까 고상하다는 느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종이 되시겠습니까? 정배가 되시겠습니까? 정배가 되고 싶지 종이 되고 싶지 않으시겠지요.
그것은 신분적으로 종과 정배는 차이이고, 의무와 사랑의 차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의무와 충성의 관계라면 신랑과 정배의 관계는 사랑과 자유의 관계지요.
그러니 깨어 있는 것이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의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정배의 모든 촉각이 깨어 있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관심 정도가 아니라 촉각까지 신랑에게 가 있고, 설혹 잠을 자더라도 촉각이 깨어 있을 정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퍼질러자는 것이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감각이 사랑하는 이에게 가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동정녀에게는 육신이 잠을 자도 사랑은 잠을 자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깨어 있다는 것이 오늘 제가 하는 강론의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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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화(聖化)의 여정>
- 날마다 깨어 준비하며 제책임을 다하는 삶 -
9월 첫날 웬지 느낌이 좋습니다. 국내외 상황은 특히 국내 상황은 참 어둡고 실망스런 나날의 연장이지만 그래도 웬지 하느님은 잘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도 듭니다. 9월1일은 9월 순교자 성월 첫날이자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10월4일까지 창조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창조시기에는 “오 감미로워라”로 시작되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태양의 찬가를 자주 불러보고 싶습니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기후 재앙의 결과들이 이제는 사랑의 이중 계명이 아니라 사랑의 삼중 계명을, 즉 하느님 사랑, 사람 사랑, 자연 사랑을 실천해야 할 절박한 시점에 와 있는 듯 합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가 기후 재난으로 병이 깊어지면 사람 역시 온전할 수 없습니다.
어제 8월31일부터 9월4일 까지 몽골을 향해 제43차 해외 사목 방문 여정에 오른 평화의 사도, 희망의 순례자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습도 신선한 충격입니다. 이번 사목방문의 모토인 “함께 희망하기(Hoping Together)” 란 멋진 말마디도 참 기분이 좋습니다. 궁극의 희망이신 하느님을 바라보며 함께 희망의 여정을 살아갈 때 저절로 일치에 깨어 있는 삶일 것입니다. 교황의 몽골 방문을 앞둔 국무장관 파로린 추기경의 “교황은 온세계를 위해 희망의 순례자로서 몽골을 방문하는 것이다” 인터뷰 기사도 좋았습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에 10월은 묵주기도 성월, 11월은 위령 성월, 그대로 가을은 수확의 계절임과 동시에 기도의 계절임을 실감합니다. 날로 익어가면서 마음 푸근하게, 넉넉하게 하는 가을의 열매 향기가 봄의 꽃향기보다 더 좋습니다. 우리 인생 여정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로 압축할 때 인생사계중 어느 시점에 와 있겠는지 묵상하게 됩니다. 과연 여러분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요? 인생 가을이라면 사랑의 열매들은 잘 익어가고 있는지요?
참 많이 강론시 강조했던 삶의 “여정”이란 말마디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은 사도 바오로를 통해 당대의 테살로니카 교회 신도들만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불륜 등 난잡하고 문란한 성생활을 하는 자들은 참으로 귀기울여 들어야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곧 여러분이 불륜을 멀리하고, 저마다 자기 아내를 거룩하게 또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할 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교인들처럼 색욕으로 아내를 대해서는 안됩니다.”
정말 아내를 색욕의 대상으로 대하지 말고 인격으로 우애의 대상으로 대하라는 말씀인데 여성을 대하는 믿는 형제들의 마음도 이래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건전한 성도덕에 깨끗한 성생활을 할 때 거룩한 삶입니다. 이어지는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더러움 속에서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무시하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주시는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성령의 인도 따라 깨끗한 성생활로 거룩한 삶을 강조하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독신의 수도자건 결혼한 평신도이건 성령의 인도하에 거룩한 삶은 모두의 본질적 성소입니다. 모두가 성화의 여정중에 살고 있습니다. 과연 날로 주님을 닮아 거룩해지는 성화의 여정인지요? 어떻게 성공적 성화 여정의 삶이겠는지요? 날로 주님을 닮아 거룩한 참나의 성인이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이에 대한 답을 줍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참으로 일편단심, 오매불망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깨어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늘 깨어 준비하며 살 때 저절로 성욕도 자제될 것이요 정결도 잘 지켜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기다리는 설렘으로 깨어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제자리 꽃자리에서 제책임을 다하며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아가는 것, 바로 이것이 깨어 준비하며 사는 거룩한 삶, 하늘 나라의 삶입니다. 얼마전 나눈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자리 찾지 않는다
자리 탓하지 않는다
야생화 청초한 달맞이꽃처럼
그 어디든
제자리에 뿌리내려
하늘사랑 활짝 꽃피어 내면
바로 거기가 꽃자리 하늘나라다
절망은 없다
하루하루가 축제인생이다”
이런 삶이라면 얼마나 멋진 삶이겠는지요!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입니다. 평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선하게 하루하루 깨어 준비하며 살다가 갑작스럽게 도래한 신랑이신 주님을 맞이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입니다. 준비가 부족했던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고,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이신 주님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고 문을 닫혔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큰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삶의 기름은 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하루하루 각자 주님의 뜻에 따라 선행의 삶을 통해 축적해 놨어야 했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의 애절한 부르짖음이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이미 닫힌 문은 아무도 열 수 없습니다.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청천벽력의 말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자기뜻대로 살았던 짝사랑의 어리석은 처녀들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과의 살아 있는 만남이, 친교가 참으로 빈약했던, 주님과 무관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과연 나는 어느쪽에 속하는 지요?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는 것처럼, 언제 죽음이 올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날 그 시간은 오직 한 분, 하느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답은 단하나 우보천리(牛步千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제 책임을 다하며 성화의 여정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며 언젠가의 죽음도 반가이,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준비하며 내 고유의 향기롭고 매력적인, 아름다운 명품(名品)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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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마태25,11)
<등과 기름의 의미!>
오늘 복음(마태25,1-13)은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유해서 설명하십니다.
열 처녀 가운데 다섯은 등만 준비하고 기름은 충분하게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였고, 나머지 다섯은 등과 함께 기름을 충분하게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였습니다. 그래서 한 밤 중에 신랑이 왔을 때, 슬기로운 처녀들만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어리석은 처녀들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주인님께 청합니다.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주인은 그들의 청을 거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믿음의 문제입니다. 희망의 문제입니다. 사랑(실천)의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시듯,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고, 마지막 때에 영원히 사는 길이고, 이를 위해 늘 지금 깨어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배둔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이른 새벽에 일어나 복음묵상글을 준비합니다. 오늘 10시 미사 후에 곧바로 합천성당으로 떠납니다. 왔다가 떠나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듯이, 사제의 삶도 그렇습니다. 한곳에 안주하지 않고, 늘 새로운 곳(공동체)을 향해 떠나갑니다.
합천본당에서의 새로운 삶, 보다 더 깨어있는 삶, 시노달리따스하는 삶, 영과 육이 더 건강해지는 삶을 살도록 다시 노력하겠습니다. 그동안 함께 해 주신 사랑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새로운 시작을 하는 저를 위해 계속 기도해 주시고, 저도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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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pvc3h4D2J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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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 25, 6)
빛나는 초가을
햇살이
넘실대는
9월의 첫날
순교자 성월의
첫시작입니다.
모였다 흩어지고
합쳐졌다 쪼개지는
우리들 여정입니다.
우리를
움직이게 하시는
분은 언제나
신랑이신
주님이십니다.
오시는 신랑을
맞으러 방향을
틉니다.
등(燈)과 기름도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필요한 사랑과
지혜입니다.
신랑을
맞이하고
만나는 것이
신앙의
목적입니다.
오시는
신랑을 뒤로 하고
기름을 사러
돌아서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은 아닙니다.
서로를 온전히
밝히고 서로를
담아내는 것이
등과 기름의
역할입니다.
목적을 놓치면
방향도
잃게 됩니다.
기다림을
부정하는 것은
만남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면서
깨닫게 되는
하늘 나라의
기쁨입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의
비유 이야기로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 지를
깨닫게 됩니다.
삶의 방향을
놓치지 않는
삶의 지혜가
중요합니다.
함께 어울려
사는 지혜가
공동체의
지혜이며
만남의
잔치입니다.
닫히고
열리는 것이
문(門)이며
한밤중에서
새벽으로
바뀌는 것이
모든 날들의
흐름입니다.
등과 기름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축하하고
축하받는
축복의
관계입니다.
하늘 나라의
주소와 위치는
신랑이신
주님 자체입니다.
잔치 하객이
가져야 할
자세를 배웁니다.
삶의 전부를
거시는
신랑이신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밀어주고
당겨주는
공동체입니다.
아낌없이 주시는
잔치의 초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신랑과 함께
하는 기쁨이지
기름이 떨어졌기에
기름을 사러 가는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삶의 목적과
삶의 방향을
잔치의
기쁨이게
하는 것은
사랑의
지혜입니다.
가장 좋은
사랑의 지혜는
가장 좋은 오늘을
놓치지 않는
가장 좋은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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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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