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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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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 촘스키, 차베스를 꾸짖다
ㆍ“국정 독주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 날선 비판
미국 진보적 지식인의 대명사인 노엄 촘스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명예교수(83)가 사상의 동지 격인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57)을 향해 “국정 독주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고 날선 비판을 제기했다.
촘스키 교수는 3일 공개된 지난주 영국 옵서버와의 인터뷰에서 “차베스 대통령이 권력을 지나치게 독점해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촘스키는 “일부 예외적인 상황에서 행정부로의 권력집중이 필요한 경우가 있지만 베네수엘라가 현재 그러한 상황에 해당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면서 “내 판단으로는 행정부 권력집중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차베스의 권력독점이 베네수엘라의 정치·사회적 특수성으로 인한 필연적 현상이 아니라 권력의 필요에서 나왔다는 해석이다.
촘스키의 공개비판은 차베스가 야당에 유리한 판결을 했다는 이유로 2009년 12월 이후 가택연금한 마리아 루르데스 아피우니 판사(47·여)에 대한 구명운동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이날 ‘마리아는 충분히 고통받았다’는 제목의 공개서한에서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함께 인간적 모욕을 받아온 아피우니 판사의 가택연금 해제를 촉구했다.
촘스키와 차베스는 미국의 일방적 패권주의를 비판하면서 이념적 궤를 같이해온 사이다. 2006년 차베스는 유엔 총회 연설에서 촘스키의 책 <패권인가 생존인가>의 일독을 공개적으로 권했을 만큼 촘스키의 사상에 존경을 표해왔다.
심혜리 기자 grace@kyunghyang.com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7032123425&code=970100
2009 - 반기문 총장, 아웅산 수치 면담 거절당해
미얀마 방문…군정에 정치범 석방 등 촉구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3일 이틀간의 일정으로 미얀마를 방문했으나, 이날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 아웅산 수치와의 면담은 불발에 그쳤다.
반 총장은 미얀마 군사정부의 최고 지도자인 탄 슈웨 장군과 한 회담에서, 현재 수감중인 수치를 만나보고 싶다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고 <아에프페>(AFP) 통신 등이 3일 전했다. 반 총장은 회담을 마친 뒤 기자들에게 “탄 슈웨는 수치가 현재 재판중이라고 말했으나, 나는 바로 그 점이 수치를 면담하려는 목적이라고 답했다”며 “미얀마 군부의 심사숙고와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반 총장은 또 탄 슈웨 장군에게 여사를 포함한 2000여명의 정치범 전원을 내년 총선 이전에 석방할 것을 촉구했으며, 군정은 총선을 공정하게 치르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전했다. 반 총장은 4일 오전 탄 슈웨와 예정에 없던 2차 회담을 하기로 했지만, 수치 면담이 성사될지는 미지수다.
3일 예정됐던 수치에 대한 재판은 사전예고와 뚜렷한 이유도 없이 연기됐다. 수치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의 대변인 니얀 위는 “수치가 이날 오전 법정에 출석했으나, 재판부는 대법원으로부터 재판 배당을 받지 못해 10일로 공판이 연기됐다고 통보했다”고 말했다.
앞서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의 케네스 로스 사무국장은 2일 “반 총장은 미얀마 군사정부가 수치의 석방을 가택연금으로 되돌리는 양보를 수용해선 안 된다”며, 반 총장이 수치의 완전 석방을 성사시킬 것을 압박했다.
수치는 1990년 총선에서 군사정권에 압승한 이후 지금까지 19년 동안 구금과 해제를 되풀이하고 있다. 수치는 지난 5월 연금기간 만료를 불과 2주 앞두고 미국인의 자택 잠입 사건으로 기소돼 양곤의 인세인 교도소 특별재판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조일준 기자 /한겨레 2009-07-04 오전 02:06:46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siapacific/363894.html
2007 - “원폭 어쩔수 없었다” 발언 일본 방위상, 전격 사임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 원자폭탄 투하를 당연시한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일본의 규마 후미오(久間章生.66) 방위상이 3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에게 사의를 표명, 수리됐다.
규마 방위상은 지난 주말 강연에서의 발언이 파문을 빚자 발언을 철회하며 사과했으나 야당측이 일제히 파면을 요구하는 등 비난 여론이 고조됨에 따라 오는 29일 참의원 선거에 대한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인책 사임한 것으로 분석된다.
연금 기록 문제 등으로 가뜩이나 궁지에 몰려 있는 아베 총리는 규마 방위상의 사임으로 발언 파문을 조기에 진정시킨다는 생각인 것으로 관측되지만 임명 책임을 둘러싼 야권의 공세로 참의원 선거에 대한 타격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작년 9월 아베 내각이 발족된 뒤 9개월여 사이에 각료가 경질되기는 3번째다. 앞서 사다 겐이치로(佐田玄一郞) 전 행정개혁상이 정치자금 문제로 작년 12월 사임했으며, 지난 5월에는 마쓰오카 도시카쓰(松岡利勝) 전 농수산상이 역시 정치자금 의혹 문제로 자살했다.
규마 방위상은 이날 아베 총리에게 사의를 표한 뒤 기자단에게 "(발언에 대해) 좀처럼 이해를 얻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총리에게 '스스로 매듭을 짓고 싶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아베 총리는 "여러가지 일을 했는데 매우 유감이다"며 사의를 수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규마 방위상은 지난달 30일 지바(千葉)현 가시와(柏)시 레이타쿠(麗澤)대학에서 가진 강연에서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투하돼 비참한 상황을 맞았지만 그것으로써 전쟁이 끝났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에 대해 미국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원폭 투하가 소련의 대일 참전을 저지하는 목적도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잘못했으면 홋카이도(北海道)도 소련에게 먹힐 뻔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아베 총리는 당초 그의 발언에 대해 "미국의 당시 생각을 소개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문제가 없다는 인식을 보였다. 그러나 나가사키(長崎) 시장이 3일 상경해 직접 항의를 전달하고 연립 파트너인 공명당이 사임을 압박하는 등 여권내에서도 비판이 제기됨에 따라 스스로 거취를 정리한 것으로 전해졌다.
규마 방위상은 나가사키 2구 출신 중의원 9선 의원. 도쿄대를 졸업한 뒤 농수산성 관리와 나가사키현 의회를 거쳐 중앙 정계에 진출했으며, 방위청 장관과 자민당 간사장 대리, 총무회장 등을 역임했다. 지난해 아베 내각 출범시 재차 방위청 장관에 취임한 뒤 금년 1월 방위성으로 승격됨에 따라 초대 방위상이 됐다.
이홍기 특파원 lhk@yna.co.kr (도쿄=연합뉴스) /한겨레 2007-07-03 오후 01:33:39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219916.html
2005 - 아르헨티나가 2005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나이지리아를 꺾고 우승
아르헨, 나이지리아 꺾고 청소년선수권 5번째 우승
남미축구 적수가 없다
개인기·빠르기 결합…브라질과 함께 주요대회 석권
바야흐로 세계 축구는 ‘남미의 전성시대’다.
특히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최근 올림픽, 컨페드컵, 세계청소년대회 등 각종 국제 대회의 우승을 나눠 가지고 있다.
3일(한국시각)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의 갈겐바르트 스타디움에서 열린 2005 세계청소년축구대회(20살 이하) 결승전. 아르헨티나는 나이지리아를 2-1로 꺾고 사상 첫 5회 우승의 금자탑을 쌓았다. 2005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브라질이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세계청소년대회까지 남미 축구가 석권한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이날 이번 대회 6골로 득점왕은 물론 최우수선수, 팀 우승까지 ‘3개의 왕관’을 차지한 리오넬 메시(FC바르셀로나)의 페널티킥 2방으로 아프리카의 돌풍을 잠재웠다. 아르헨티나는 브라질(4회 우승)을 제치고 역대 최다 우승국이 됐다. 메시는 전반 40분 골문으로 돌진하다 얻은 페널티킥을 직접 차 넣었고, 1-1로 팽팽하던 후반 30분 동료가 얻어낸 페널티킥을 대신 마무리해 승패를 갈랐다.
20살 이하 세계청소년축구에서 남미 강세는 2001년(아르헨티나 우승), 2003년(브라질 〃) 등 21세기 들어 전혀 약화되지 않았다. 브라질은 17살 이하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도 우승했다.
성인 축구에서도 2003 컨페드컵(프랑스 우승)을 제외하고는 2002 한-일월드컵(브라질)을 비롯해 2004 아테네올림픽(아르헨티나), 2005 컨페드컵(브라질)까지 남미가 우승을 휩쓸고 있다.
이용수 〈한국방송〉 해설위원은 “완벽한 개인기를 추구했던 남미 축구가 현대 축구에 필수적인 스피드에 빠르게 적응하면서 더욱 강점을 나타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창금 기자
〈전적〉
△ 결승=아르헨티나 2-1 나이지리아
△ 3~4위전=브라질 2-1 모로코
/한겨레 2005.07.03(일) 18:49
http://www.hani.co.kr/section-006002000/2005/07/006002000200507031849158.html
연예인 `노예 계약` 보도와 관련해
가수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조선
2001 - 한국연예제작자협회, `연예인은 매니저의 노예` 보도에 항의하며 MBC 출연 거부 결의
250여개 연예회사들 모임인 한국연예제작자협회(회장 엄용섭)는 2001년 7월 3일 비상총회를 열고 7일부터 MBC TV에 대해 소속 가수, 탤런트, 개그맨, MC들의 출연을 전면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연예제작자협회는 "6월 17일 방송된 MBC TV `시사매거진 2580`이 제작자와 연예인의 계약 관행을 `노예 계약`이라고 왜곡 보도, 명예를 크게 손상시켰다"며 이같이 결의했다. 협회는 "MBC가 공식 사과방송과 반론권 제공, 관련자 문책을 할 때까지 무기한 출연거부한다"며 "기존 계약 기간이 남은 탤런트, 개그맨, MC는 계약이 끝나는 대로 동참할 것"이라고 밝혔다.
`시사매거진 2580`은 6월 17일 방송된 `한·일 비교, 연예인 대 매니저`편에서 "노예문서라고 불리는 전속 계약의 허구성을 파헤친다"며 "나이 어린 연예인들이 불평등 계약의 주요 대상이며, 음반사가 노래에 대한 절대적 권리를 갖고 가수는 몇푼의 인세만을 챙긴다"고 보도, 제작자들로부터 `일방적 매도`라는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연예제작자협회 회원사엔 김건모 조성모 g.o.d. 박진영 포지션 김현정 엄정화 핑클 등 대부분 가수와, 이영애 이미연 안재욱 차태현 남희석 신동엽 등 인기 탤런트·개그맨들이 소속돼 있다. /조선
2001 - 러시아 여객기 시베리아 남부에 추락, 145명 사망
러시아여객기 추락… 탑승객 145명 전원 사망
승객과 승무원 등 145명을 태운 러시아 여객기가 3일 남부 시베리아 상공에서 추락,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러시아 내무부는 3일 블라디보스토크 항공 소속 Tu154 투폴레프 여객기가 예카테린부르크를 이륙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던 중 이날 오후 9시10분(한국시간 4일 오전 2시10분)쯤 이르쿠츠크를 20㎞ 정도 남겨놓고 관제탑과 교신이 두절됐다고 밝혔다.
사고 항공기에는 승객 136명과 승무원 9명이 타고 있었으며 재급유를 위해 이르쿠츠크에 기착할 예정이었다.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사고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을 지시했으며 검찰 당국은 사고 수습 및 원인 조사에 착수했다.이타르타스 통신은 이르쿠츠크에서 30㎞ 떨어진 부르다노브카 마을 인근에서 여객기 잔해가 발견됐다고 전했다.
러시아 비상대책부는 4일 사고기의 블랙박스가 추락지점 인근에서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한편 블라디보스토크 항공사측은 추락 사고가 연료 공급 시스템의 결함 때문에 야기됐다고 4일 밝혔다.Tu154 제트기는 옛 소련시절부터 운항해 왔으며 180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는 러시아 국내선 주력 기종 가운데 하나다.그러나 1968년 개발된 이후 그동안 모두 28차례나 추락 사고가 발생하는 등 안전성에 의문이 제기되어왔다.특히 옛 소련 붕괴 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민간 항공사의 난립과 정비 불량 및 감독 소홀 등이 러시아에서 항공사고가 빈발하는 한 원인으로 지적된다.
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외신종합 /국민일보 쿠키뉴스 2001.07.04 16:31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18201755&code=11141100
프랑스 선수들이 유로2000 결승전
에서 이탈리아에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후 우승컵을 안고 기뻐하고 있
다. /조선
2000 - 프랑스, 2000 유럽축구선수권대회 우승
프랑스가 2000년 7월 3일 네덜란드 로테르담 데퀴프경기장에서 벌어진 2000유럽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윌토르의 동점골에 이은 다비드 트레제게의 연장전 골든골로 이탈리아에 2대1로 승리했다.
프랑스는 98월드컵에 이어 2년 만에 유럽선수권대회를 제패함으로써 세계최강임을 과시했다. 1984년에 이은 두번째 유럽선수권 우승이었다. 이탈리아는 32년 만의 패권탈환을 노렸으나 1982년 친선경기 이후 2무3패로 생긴 `프랑스 징크스`를 극복하지 못했다.
프랑스는 후반 10분 이탈리아의 델베키오에게 선취점을 내준 뒤 윌토르, 트레제게, 로베르 피레스를 잇달아 투입해 공세를 펼쳤지만 이탈리아 골키퍼 톨도의 선방에 막혀 쉽게 만회골을 넣지 못했다. 윌토르의 극적인 동점골로 기세를 올리고 나서야 경기의 주도권을 잡았다. 연장 13분 이탈리아 진영 왼쪽을 파고 든 피레스가 센터링한 공이 골지역 정면으로 뛰어 들던 트레제게의 왼발에 정확히 걸려 들었다. 공은 이탈리아 골그물을 흔들며 23일간의 `축구 잔치`를 마무리지었다. /조선
1999 - 조선통신사 일기 日서 발견
임진왜란 말기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이뤄진 조선·일본·명나라 3국간 강화교섭을 위해 일본을 찾은 조선통신사 박홍장(朴弘長) 부사(副使)의 일기가 일본 간사이(關西)지방의 한 고서점에서 발견됐다고 교도(共同)통신이 3일 보도했다.
부산과 오사카를 왕복하는 사이에 관찰한 일본의 풍물과 당시 발생한 대지진의 피해상황이 자세히 기록돼 있으며, 강화를 성공시키기 위해 사절단 영접에 배려하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 일본무장의 모습이 극명하게 묘사돼 있는 등 일급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도쿄=이신우 특파원 /문화일보 1999-07-05 11:39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1999070529000701
1998 - 북한 잠수함 승조원 시신9구, 판문점을 통해 북한에 인도
1997 - 정승화씨, 12.12사건관련 무죄선고
1997 - 성수대교, 붕괴 후 2년 8개월 만에 재개통
1997 - 성수대교, 붕괴 2년 8개월 만에 재개통
성수대교붕괴사건 [聖水大橋崩壞事件]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잇는 성수대교가 붕괴되어 5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
1994년 10월 21일 아침 7시 40분께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잇는 성수대교 중간 다섯째와 여섯째 교각 사이의 상판 48m가 붕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붕괴사건으로 출근 및 등교길의 승객 32명이 죽고 17명이 부상했다.
교량 상판을 떠받치는 트러스(철제구조물)의 연결이음새의 용접이 제대로 되지 않고 10mm 이상이 돼야 하는 용접두께가 8mm밖에 되지 않았으며 강재 볼트 연결핀 등도 부실했던 것으로 검찰 조사결과 밝혀졌다. 또한 관리를 맡고 있는 서울시에서도 형식적인 안전점검과 관리를 소홀했고, 부식된 철제구조물의 에 대한 근본적인 보수 없이 녹슨 부분을 페인트로 칠하는 방법으로 위험을 숨겼다.
이 붕괴사건으로 공공시설에 대해 일제히 안전점검이 이루어졌고, 당산철교 등 부실 징후가 드러난 시설물은 사용을 중지하고 보강공사를 실시했다.
그 뒤 서울시는 1995년 4월 26일부터 기존의 성수대교를 헐어 내고 새 다리를 짓기 시작하여 사고발생 2년 8개월 만인 1997년 7월 3일 차량통행이 재개했다. /네이버
[성수대교 연혁]
1979-10-16 성수대교 개통
1994-10-21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7-07-03 성수대교 재개통
1995 - 정부, 대북 쌀 지원 재개 발표
1995 - 미국의 테니스 선수 곤잘레스 사망
1992 - 한국-카자흐스탄, 무역협정 체결
소설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
명희의 큰아들 홍기문. /조선
1992 - 월북 국어학자 홍기문 사망
소설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의 큰아들이자 일제말기 ‘조선학’을 개척한 대산 홍기문이 88세를 일기로 1992년 7월 3일 북한에서 사망했다. 충북 태생인 대산은 아버지 홍명희 선생의 영향으로 학구적인 가풍에서 자랐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성장하면서 민족 언어인 조선어문법 연구를 시발로 국어학, 언어학, 음운학, 국문학, 역사학 등으로 학문의 폭을 넓혀 나갔다. 중국과 일본에 유학한 후 귀국해 일제시대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와 부장으로 신문지상에 국어학, 국문학, 국사학 등 국학 전반에 걸친 많은 논설을 발표했다. 해방 후에는 주로 서울신문을 통해 국학관련 논설을 발표했다.
홍기문은 해방후 1947년 아버지 벽초와 함께 월북한 뒤 김일성 대학 교수와 사회과학원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이조실록과 팔만대장경 등 주로 고전번역사업에 공적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월북작가라는 이유만으로 그에 대한 폭넓고 깊이 있는 조명이 미진한 상태다.
1997년에 이르러서야 1927년부터 1947년까지 대산이 신문-잡지에 발표한 국학관련 논술과 저술 중 현대인이 읽고 배워야 할 것들을 간추려 현대식 표기로 바꾼 ‘조선문화론선집’이 발표됐다. /조선
1988 - 이란 에어버스 페르시아만에서 미군함에 의해 격추, 290명 사망
1988 - 미국 순양함, 이란 여객기 격추
[1988년 7월 3일] 미국 순양함, 이란 여객기 격추
1988년 오늘 페르시아만에서 미 해군의 최첨단 이지스(AEGIS) 순양함 '빈센스(Vincennes)' 호가 이란항공 소속 여객기 A-655기에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사일을 맞은 여객기는 공중폭발했고 승객과 승무원 등 290명의 탑승자 모두가 사망했다.
미국은 빈센스호가 이란의 초계함을 추적하다 레이더에 나타난 민간 여객기를 전투기로 오인해 벌어진 사고라고 해명했다.
/YTN 2010-07-03 6
https://www.ytn.co.kr/news/etc_news_view.php?s_mcd=0422&key=201007022059235457
1987 - 독일의 자동차 경주 선수 제바스티안 페텔(Vettel, Sebastian) 출생
페텔 [Vettel, Sebastian, 1987.7.3~ ]
제바스티안 페텔(독일어: Sebastian Vettel, 1987년 7월 3일 ~ )은 포뮬러 원에서 활동하는 독일의 자동차 경주 선수이다. 현재 레드불 레이싱 팀에 소속되어 있으며, 2010, 2011년 포뮬러 원 시즌 월드챔피언이다.
페텔은 2006년부터 자우버(당시 BMW 자우버)의 테스트 드라이버로 활동하다, 2007년 시즌 도중 부상을 입은 로버트 쿠비차를 대신하여 미국 그랑프리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출전과 함께 그랑프리에 참가한 최연소 드라이버(만 19세 53일) 기록을 경신한 그는 8위를 차지하여 포인트를 획득한 최연소 드라이버 기록도 함께 세우게 된다. 이후 그는 스쿠데리아 토로로쏘로 팀을 옮겨, 2008년 이탈리아 그랑프리 우승을 통해 최연소 폴 포지션 기록(만 21세 72일)과 최연소 그랑프리 우승 기록(만 21세 73일)을 경신한다. 이 기록은 그가 당시 소속되어 있던 토로로쏘 팀과 그 전신 미나르디를 통틀어 최초의 폴 포지션, 최초의 그랑프리 우승이기도 하다.
그는 이듬해인 2009년 레드불 레이싱으로 팀을 옮겨 2009년 드라이버 챔피언십 2위를 차지했다. 2010년에는 시즌 막판까지 치열한 경쟁을 벌이다 시즌 최종전인 아부다비 그랑프리에서 드라이버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했다. 더불어 최연소 드라이버 챔피언십 우승 기록(만 23세 135일, 전 기록 루이스 해밀턴) 또한 경신했다.
2011년 포뮬러 원 시즌에도 레드불 레이싱에서 활동하고 있는 페텔은 일본 그랑프리에서 드라이버 챔피언십 포인트 1위를 확정하고 2년 연속 드라이버 챔피언십 우승을 하면서 최연소 더블 드라이버 챔피언십 우승 기록(만 24세 106일, 전 기록 페르난도 알론소)을 경신했다.
페텔은 이외에도 많은 "최연소" 포뮬러 원 기록을 갖고 있다. 그 중에는: 그랑프리의 공식 연습 세션에 참가한 최연소 드라이버, 챔피언십 포인트를 획득한 최연소 드라이버, 레이스에서 선두에 선 최연소 드라이버, 폴 포지션을 획득한 최연소 드라이버, 레이스에서 우승한 최연소 드라이버 가 있다.
경력 /위키백과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 권인
숙 양이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1988년 1월
30일) /조선
1986 -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주민등록증을 변조, 위장취업한 혐의로 경기도 부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던 권인숙(서울대 의류학과 4년 제적)양이 문귀동 경장으로부터 성적모욕과 폭행을 당해 1986년 7월 3일 문경장을 고소했다.
문경장이 5.3인천사태 관련 수배자 소재지를 파악하기 위해 1986년 6월 6일 권양에게 성고문을 가하며 진술을 강요해 사건발생 약 1개월이 지난 7월 3일 권양은 문경장을 강제추행혐의로 인천지검에 고소했다.
5일에는 권양의 변호인단이 문경장과 부천경찰서장 등 관련 경찰 6명을 독직,폭행 및 가혹행위 혐의로 고발했으나 문귀동은 사실을 은폐한채 권양을 명예훼손 및 무고혐의로 맞고소했다. 그후 3년여만인 1989년 대법원은 문귀동에게 징역5년의 실형을 선고하였고 권양에게 위자료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조선
1986 - 부천서 성고문 사건: 변호인단이 가해자를 고소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다. /위키백과
부천서 성고문 사건(富川署性拷問事件)은 당시 부천경찰서(지금의 부천남부경찰서)의 경장이던 문귀동(文貴童)이 조사과정에서 당시 22세이던 대학생 권인숙을 성적으로 추행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공권력이 추악한 방법까지 동원하여 민주화운동을 탄압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며, 권력에 굴복하여 불의를 용인한 사법부와 언론의 부도덕한 모습까지 보여줬다. 또한 군사정권의 언론 통제 수단 보도 지침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이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는 등,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건 개요 /위키백과
[실록민주화운동] (70) 부천서 성고문 사건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되게 된 이 사람,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성만으로 알고 있는 이름 없는 유명 인사, 이 처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하였으며 지금까지 당하고 있는가. 국가가, 사회가, 우리들이 그녀에게 무엇을 하였으며 지금도 하고 있는가.”
1986년 11월21일 인천지법 법정에서 변호사 조영래는 떨리는 목소리로 변론 요지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권인숙 사건의 변호인단 199명을 대표해 며칠간 밤을 새워 쓴 글이었다. 흰 한복 수의를 입은 피고인석의 권인숙도, 변호인석의 변호인들도, 방청석의 민가협 어머니들도 모두 함께 울었다. 그날 검찰은 그녀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다. 그녀가 저지른 범죄는 정녕 무엇이었던가.
85년 봄,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 권인숙은 경기 부천시 소재 가스배출기 제조업체에 ‘허명숙’이라는 친지의 이름으로 취업한다. 이른바 위장취업이다. 이듬해 6월4일 권인숙은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혐의로 경기 부천경찰서에 연행된다. 관련 사실을 거리낌없이 시인했으므로 그 다음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6일 새벽과 7일 심야 두번에 걸쳐 조사계 형사 문귀동은 뜻밖에도 5·3인천사태 관련자의 행방을 추궁하면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폭행과 고문을 자행했다. 자신의 성기를 고문의 도구로 쓰면서 뒷수갑이 채워진 저항불능 상태의 여성을 모독하고 유린하고 협박했던 것이다.
권인숙은 극한적인 수치심과 절망감에 몸을 떨었다. 며칠간 고통의 나락에서 허우적거리던 권인숙은 드디어 다시는 이 땅에 추악한 공권력으로부터 희생당하는 여성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중대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조영래·홍성우·이상수 등 변호사들이 접견을 하러 찾아왔다. 권인숙은 젊은 미혼 여성으로서의 수치심과 앞으로 받게 될지 모를 엄청난 수난을 각오해야 했다.
공권력의 추악한 타락상은 조영래 등이 작성한 고발장에 의해 삽시간에 전국에 알려졌다(그녀는 사건 진상이 외부에 알려진 뒤에도 아주 오랫동안 이름 없이 ‘권양’으로만 불렸다). 7월3일 권인숙은 문귀동을 고소하면서 진상 규명을 요구했지만, 바로 이날 그녀는 공·사문서 위조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된다. 문귀동은 이를 틈타 곧바로 명예훼손과 무고 혐의로 권인숙을 맞고소했다.
뒤늦게 수사에 나선 검찰은 7월16일 수사결과 발표에서 권인숙이 성적불량자, 가출자이며 급진좌경 사상에 물들어 ‘혁명을 위해 성적 수치심까지 이용’하는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했다. 아울러 고소·고발장에 나타난 문귀동의 혐의는 인정되지 않아 기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당국의 보도지침에 따라 각 신문의 1면은 ‘성적 모욕 없었고 폭언·폭행만 있었다’라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이에 변호인단은 “권양의 모든 주장은 단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다. 이 전대미문의 만행의 진상이 백일하에 공개되고 그 관련자들이 남김없이 의법처단되기 전까지는 이 나라의 모든 국민과 산천초목까지도 결코 잠잠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비장하게 선언했다.
한편 야당과 재야가 연대해 결성한 ‘고문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위원회’는 토요일인 7월19일 오후 2시 명동성당에서 ‘고문·성고문·용공조작 범국민폭로대회’를 개최했다. 명동은 경찰과 집회 참가자들 사이의 격렬한 몸싸움과 자욱한 최루탄 연기에 휩싸였다. 7월27일 서울 성공회 집회를 시작으로 청주·이리(익산)·부산·대전·광주로 이어졌다.
8월25일 대한변협은 문귀동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 결정에 대해 변호사 166명으로 재정신청 대리인단을 구성하고 법원에 재정신청을 낸다. 이 재정신청을 심리한 서울고법은 10월31일 ‘이유없다’며 기각했다.
기각 결정문은 스스로 모순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고발장의 범죄내용 대부분을 인정했지만, ‘문귀동이 손으로 그녀의 음부를 만지고 자신의 성기를 꺼내 그녀의 음부에 대어 수회 비비는 등 추행하였다’라는 권인숙의 진술은 목격한 증인이 없으므로 인정할 수 없고, 따라서 문귀동에 대한 검찰의 기소유예는 정당하다는 것이었다.
조영래 등은 재정신청 사건과는 별개로 9월1일 권인숙의 변호를 위해 199명의 변호인단을 구성하고 법정에서 진실을 가릴 준비에 임한다. 12월1일 인천지법은 권인숙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한다. 이날 선고가 끝나자 부천경찰서 성고문공동대책위는 “싸움은 이제부터다. 성을 도구화한 자들은 운동권이 아니라 군사독재와 그 하수인임이 드러났다”며 방청객과 함께 어용 재판부를 향해 격렬하게 항의했다.
87년 2월 항소심 법정에서 분노는 폭발했다. 민가협 회원 이중주(민정당사 점거사건로 구속된 서울대생 이기정의 어머니)는 재판장이 권인숙의 진술을 도중에 막는 것을 보고 격분, “성고문 범죄자를 비호하고 피해자를 재판하는 게 사법부냐”고 고성으로 항의했다. 법원 정리에게 끌려나가던 중 그녀는 교도관의 모자를 벗겨 재판부를 향해 던지며 외쳤다. “이 더러운 군사독재의 시녀들아.”
이틀 후 그녀는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다. 신성한 법정을 모독한 죄였다. 구치소에 입감되는 순간, 그녀는 외쳤다. “우리 딸들, 여기 있느냐. 이 엄마가 너희 곁으로 왔다. 권인숙 재판부하고 싸우다 들어왔다. 엄마가 왔으니 같이 더욱 힘내서 싸우자.” 복도 양쪽 방에서 함성과 환영의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 재판은 거꾸로 된 재판입니다. 여기에 묶여서 재판받아야 할 이는 이 연약하고 순결무구한 처녀가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쓰고 차마 저지를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법질서와 인권과 인륜도덕을 그 근본에까지 남김없이 유린하고 우리로 하여금 인간성에 대한 마지막 신뢰까지 지닐 수 없게 만든 극악극흉한 문귀동 그 사람입니다. 권양은 우리에게 ‘진실에의 비밀은 용기뿐’이라는 교훈을 온몸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변론 요지서)
대법원은 6월 항쟁 이후인 88년 2월9일 끝내 재정신청을 받아들였고, 문귀동은 89년 6월 사건 발생 3년 만에 징역 5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22살 처녀가 폭력적인 정치권력과 정면으로 대결해 결국 승리한 사건이었다. 군사정권의 총체적 부도덕과 인권유린의 실상을 국내외에 알린 지극히 부끄러운 사건이었다. 권력의 수족으로 전락한 검찰과 경찰, 이들을 원격조종하는 정체불명의 공안당국, 당근에 길들여진 언론, 불의한 권력 앞에 한없이 나약한 사법부 등등의 추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
민족모순이 먼저냐, 계급모순이 먼저냐는 운동론으로 분열돼 있던 진보진영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 여성문제는 격렬한 정치투쟁에 가려져 있었으나, 이 사건은 이후에 활발한 페미니즘 담론을 불러오는 계기가 됐다. 묻노니, 치욕스런 정권의 하수인이 된 관련자들 중에 스스로 반성한 이가 있는가.
-권인숙씨 대학서 여성학 강의-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을 폭로했던 권인숙 교수(40)는 지난해 9월부터 명지대 강단에서 여성학을 가르치고 있다. 권교수가 1987년 가석방으로 출소 후 한때 ‘노동인권회관’ 대표간사로 활동했을 당시만해도 ‘민주화 투사’의 이미지가 늘 그를 뒤따랐다. 그러다가 94년에 뒤늦게 대학을 졸업하고 서른 살의 나이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여성학은 단순한 선택이라기보다는 터질 것 같은 머리를 수습하기 위한 절박한 선택이었다.” 그는 2002년 펴낸 자전에세이 ‘선택’에서 노동운동가에서 여성학자로 변신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털어놨다. 그는 유학간 지 6년 만인 2000년 미 클라크대에서 ‘한국의 군사화된 여성의식과 문화’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 뒤 사우스플로리다 주립대에서 재직하다 지난해 귀국길에 올랐다. 지난 4월에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의뢰로 군대 내 성폭력 실태 조사를 맡아 “사병 15.4%가 성폭력 피해를 받았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경향닷컴 2004-09-19 17:35:3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409191735381&code=210010
1983 - 미국 칼빈 스미스, 육상 100미터에서 9초93으로 15년만에 세계신기록
1982 - 정부 예금, 주식, 국공채, 사채 등에 실명거래제 83년 실시키로(7.3조치)
1982 - 실명제 소용돌이
5. 실명제 소용돌이 - 1982년 국내 10대 뉴스
하반기 국내 경제는 실명제 소용돌이로 지고 샜다. 파격적인 금리 인하(6·28조치)를 전주곡으로 대폭적인 세율 인하 구상 과 함께 몰아친 7·3실명제 태풍은 글자 그대로 메가톤급. 금값 상승 에 따른 한국은행 보유 金 매각엄포, 부동산 투기, 정부 여당간 줄다리기 속에 주가가 춤을 추는 등 실명제 파동의 부산물이 연이어 나타났다. 「86년 이후 실시」로 연기된 실명제는 결국 엄청난 비용만 치른 채 해프닝으로 끝난 셈.
http://home.megapass.net/~jsamen/news02.htm
1982 - 중국, 고령관리 200만 퇴진
1980 - 정부, 아사히(朝日)신문 및 시사통신 서울지국 폐쇄
1980 - 압둘 하미드 샤라프 요르단 수상 사망
1979 - 한국종합전시장(KOEX) 개관
무역전시사업
배경
무역전시회와 국제박람회 등의 무역전시사업은 무역 거래비용과 정보비용을 최소화하고 신상품 소개 및 최신정보 습득 등에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중요한 무역거래 인프라 중의 하나이다. 이 무역전시사업은 또한 호텔, 음식료품, 여행, 관광, 항공운송, 인쇄업 등 관련 산업에 대한 파급효과가 지대하다는 점에서도 21세기의 고부가가치산업으로 인식된다. 또한 무역전시회는 WTO 등 국제규범에서도 무역촉진 활동으로 분류되어 지원이 가능한 분야이며, 독일, 일본, 싱가포르, 홍콩 등의 선진국 및 경쟁국들은 자국의 무역전시산업을 육성하기 위하여 각종 지원시책을 추진한다.
경과
우리나라 무역전시사업은 1960년대 초반 정부의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이 전개되면서 시작되었다. 1962년부터 정부의 수출주도 성장정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국내 중소기업의 발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품목별 전시회 및 지방순회 전시회 등의 소규모 전시회가 부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동시에 해외로의 적극 진출을 위해 1963년 시카고 국제무역박람회와 1964년~1965년의 뉴욕 세계박람회(New York World's Fair)를 비롯한 만국박람회(EXPO) 참가로 외국의 무역전시사업 현장에서 노하우를 습득하였다. 이처럼 해외에서 쌓은 경험과 기술을 토대로 하여 1968년 가을, 서울 구로동 수출공단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제l회 한국무역전시회(Korea Trade Fair)가 개최되었다. 이어 1969년에는 서울 덕수궁에서 한국전자제품전시회(Korea Electronics Show, 현재의 한국전자전람회)가 전문상품 전시회로는 한국에서 최초로 개최되었다.
내용
한국전자박람회는 1980년대 중후반 이후 우리나라 수출을 주도하게 되는 전자산업 육성을 위한 제도의 하나로서 1969년 이후 매년 개최된다. 이 전자박람회의 목적은 전자산업에 대한 일반 국민의 관심을 제고하는 것과 기술도입 촉진으로 품질향상을 도모하고, 수출증대를 위해 해외 전자상품전에 출품할 우수 전자제품을 지정하려는 것이었다. 전자박람회에서는 많은 수출상담이 이루어져 1970년 제2회 박람회 때 50만 달러, 1976년에는 1억 달러의 수출계약이 이루어졌다. 전자박람회에는 대통령이 매년 참석함으로써 전자산업 육성의 중요성과 육성 의지를 명시적으로 나타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1976년 서울 여의도에서 한국기계전시회(Korea Machinery Fair)가 개최되면서 한국 무역전시사업은 점차 발전하게 된다.
상품전시회가 전시현장에서 우리 상품을 국내외에 직접 홍보하고 외국의 선진기술 및 신제품에 대한 정보를 쉽게 입수하는 동시에 새로운 구매처를 직접 발굴하여 상거래를 촉진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의 하나임에 틀림없지만, 당시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나라에 이러한 상품전시회를 전문적으로 개최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후 정부에서도 전문 전시장 건립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되어 1976년에 한국무역협회 산하로 종합전시장 건립추진위원회가 설립되고 마침내
1979년 7월 현 COEX인 한국종합전시장이 개관되면서 한국의 전시산업은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이후로 사무자동화기기 전시회, 반도체산업 전시회 등의 전문상품 전시회들이 태동하였으며, 전시주최 전문조직들도 나타났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막대한 자금(토지구입비 제외한 건설비만 74억 원 소요 추정)을 투자해서 건립된 계획이었지만 협소한 국내시장, 충분한 노하우를 지닌 전시주최자의 부족, 전시장 운영경험 부족 등으로 인해 의도했던 만큼의 괄목할 만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1982년에 현 COEX에서 서울 국제무역 전시회(Seoul International Trade Fair)가 개최되면서 그 동안 국내에서 성장하던 수출업체들이 전시회를 통한 상품정보 교류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특히 해외에서 개최되는 유수한 상품전시회 참가에도 보다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완만하게 발전하던 한국의 무역전시사업은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1990년대 이후 한국의 무역전시사업은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엄밀하게 평가해서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전자전람회, 한국기계전시회 등 몇몇 상품 전시회만을 제외하고는 본궤도에 진입했다고 할 수 있는 전시회가 별로 없었지만,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서울 국제조명산업 전시회, 리빙 디자인페어, 한국 국제공장자동화 종합전시회, 서울 모터쇼, 서울 국제화학 플랜트 전시회 등 많은 전시회들이 양과 질 모든 측면에서 국제수준급의 전문상품 전시회로 발전, 국내산업 발전에 일익을 담당해 오고 있다.
이연호(충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국가기록원 나라기록 2007. 12. 01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6724
1978 - 중국, 대(對)베트남 원조 전면중지 발표
1978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김보민 출생 /위키백과
김보민(金寶民, 1978년 7월 3일 ~ )은 대한민국의 KBS 아나운서이다. 2007년 12월 8일에 축구선수 김남일과 결혼했다.
경력
* 학력 : 홍익대학교 경제학과 학사,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 입사 : 2003년 KBS 제29기 공채 아나운서
/위키백과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에게 피납됐다
가 엔테베공항에서 약 1주일 만에
극적으로 구출된 이스라엘인 인질들
이 7월 4일 텔아비브 공항에 도착,
가족 친지들과 눈물의 상봉을 하고
있다. /조선
1976 - 이스라엘, 엔테베 기습작전
1976년 7월3일 오후, 이스라엘 특공대원 100여명을 태운 허큘리스 C-130H 수송기 4대가 펜텀 제트기의 호위를 받으며 이스라엘을 출발했다. 목적지는 장장 3840km나 떨어진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이었다.
엔테베 공항에는 승객ㆍ승무원 268명을 태우고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을 출발해 파리로 향하던 에어 프랑스기가 6월27일 그리스 아테네에서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에 의해 납치돼 강제 착륙해 있었다. 납치범들은 이스라엘을 비롯, 서독ㆍ프랑스ㆍ케냐에 수감돼 있는 자신들의 동지 53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협상과정에서 많은 인질들이 풀려났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106명은 아직도 인질로 잡혀있었다.
‘선더 볼트’로 불린 기습공격이 시작된 시간은 7월4일 0시. 하지만 서독인 2명을 포함한 7명의 납치범들은 기습작전을 느낄 겨를도 없이 불과 1분 만에 모두 사살됐다. 20명의 우간다 군인과 11대의 전투기도 살해되거나 파괴됐다. 예행연습 때는 55분이 걸렸던 작전시간이 실제 작전에는 52∼53분 밖에 걸리지 않은 정도로 작전은 치밀하게 전개됐다. 이스라엘 특공대원 1명과 인질 3명도 목숨을 잃었지만 완벽한 작전성공이었다. /조선
엔테베 구출작전[ ─ 救出作戰, Entebbe raid ]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된 103명의 인질을 구출하기 위한 이스라엘 특공대의 기습 작전(1976. 7. 3~4).
이스라엘을 출발해 아테네에서 중간 기착한 뒤 프랑스로 향하던 프랑스 여객기가 6월 27일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에게 공중납치되어 우간다의 엔테베에 강제착륙되었다. 납치범들은 엔테베에서 이스라엘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제외한 258명의 승객을 풀어주었고, 이스라엘·케냐·서독 등에 수감되어 있는 53명의 동료 테러리스트의 석방을 요구하며 나머지 승객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이에 대응해 이스라엘은 7월 3일 펜텀 제트 전투기들의 호위 속에서 100~200명의 대원을 태운 4대의 허큘레스 C-130H 화물수송기를 파견했다. 이스라엘군은 이스라엘에서 우간다까지 4,000㎞를 비행해 착륙한 지 1시간 만에 인질을 구출했다. 7명의 테러리스트가 죽었으며 소련이 우간다에 제공해준 11대의 미그 전투기가 파괴되었다. 한편 작전 도중 이스라엘 군인 1명과 인질 3명이 목숨을 잃었다. 작전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이스라엘 비행기들은 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기다리고 있던 병원 비행기를 만났으며,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연료를 제공받았다. 엔테베 구출작전의 성공은 이스라엘의 사기를 높였다. /브리태니커
홍수환 선수와 아놀드 테일러 선수
의 경기 /조선
1974 - 홍수환 WBA 밴텀급 세계챔피언 획득
1974년 7월 3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홍수환 선수가 챔피언 아놀드 테일러를 꺽고 WBA 밴텀급 세계챔피언 밸트를 차지했다. 이때 그가 유행시킨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는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한국 최초로 두 체급에서 세계챔피언을 지낸 그는 이름뒤에 `씨`字보다는 여전히 `선수`字가 어울릴 것같은 영원한 권투선수다. 1980년 12월 염동균과의 라이벌전을 끝으로 링을 떠났다. 홍씨는 두번이나 세계타이틀(74,77년)을 차지했지만 단명 세계챔피언이었다. 두번 다 2차방어전에서 무너졌기 때문이다. /조선
1974 - [오늘의역사]홍수환 밴텀급 챔피언 등극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1974년 오늘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전파를 타고 날아온 낭보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위스트릿지 테니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세계복싱협회(WBA)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홍수환은 아놀드 테일러를 15회 판정승으로 누르고 챔피언에 등극했다.
지칠대로 지친 홍 선수는 경기 뒤 가진 인터뷰에서 감격의 순간을 이 한 마디에 담았고 이 말은 기쁨의 순간을 함께한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됐다.
홍 선수는 이어 1977년 파나마에서 열린 WBA 슈퍼밴텀급 타이틀 결정전에서 헥토르 카라스키야를 3회 KO로 눌러 한국 선수 최초로 2체급 세계챔피언이 됐다.
이 경기에서 홍 선수는 2회에 4번 쓰러진 뒤 3회에 KO승해 ‘4전 5기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충청투데이 2009.07.02 19: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5079
1974 - [오늘의 역사]홍수환, 챔피언 등극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1974년 오늘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전파를 타고 날아온 낭보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위스트릿지 테니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세계복싱협회(WBA)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홍수환 선수는 아놀드 테일러 선수를 15회 판정승으로 누르고 챔피언에 등극했다.
지칠대로 지친 홍 선수는 경기 뒤 가진 인터뷰에서 감격의 순간을 이 한 마디에 담았고 이 말은 기쁨의 순간을 함께한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됐다. 홍 선수는 이어 1977년 파나마에서 열린 WBA 슈퍼밴텀급 타이틀 결정전에서 헥토르 카라스키야를 3회 KO로 눌러 한국 선수 최초로 2체급 세계챔피언이 됐다. 이 경기에서 홍 선수는 2회에 4번 쓰러진 뒤 3회에 KO승해 '4전 5기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충청투데이 2008.07.02 18: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0147
1974 - 미국-소련 지하핵실험제한협정 조인
1973 - 불국사(佛國寺) 복원공사 준공식
1970년대 복원공사 진행과정
1969년 늦봄, 박정희 대통령이 3선개헌을 과연 할 것이냐 아니냐에 정가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던 때, 5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은 불국사 복원을 지시하였다. 이리하여 시작된 불국사 복원공사는 만 4년 만에 준공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것은 막대한 예산이 들어간 엄청난 공사였다. 이 불국사 복원 과정은 '불국사 복원공사 보고서'에 40단계로 상세하게 일지로 기록해두었는데 이 일지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의 문화재 복원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가를 알 수 있으며, 당시 경제 실정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재원을 강력한 통치력으로 밀어붙어 완공하였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주요 사항을 날짜별로 줄여 소개한다.
1. 1969년 5월 12일 박대통령 복원 지시
2. 1969년 5월 21일 신범식 문공부장관이 본사업 추진을 위한 경제인 간담회 개최
4. 1969년 6월 17일 청와대 정무비서실에서 불국사 복원이 행주산성, 도산서원, 진주성 보수, 정화사업과 함께 토의
5. 1969년 6월 23일 코리아 하우스에서 불국사복원위원회의 운영, 고증, 설계위원회 구성
8. 1969년 7월 30일 세종호텔에서 불국사 복원재원 염출을 위하여(경제인) 시주자 감담회 개최
13. 1969년 8월 29일부터 10월 30일까지 64일간 불국사 발굴 조사 실시
18. 1969년 11월 14일 불국사 복원공사 기공식
35. 1972년 2월 6일 대통령 각하께서 불국사 현장을 순시하시고 당청공사에 대하여 밝고 은은하게 하고 각별한 정성을 들여 충실한 공사가 되도록 지시하시면서 관계관에게 노고를 치하하심
36. 1972년 6월 18일 대통령 각하께서 불국사 현장에 오셔서 불국사 벽단청을 좀더 은은하게 하도록 지시하심
39. 1973년 7월 3일 대통령 각하를 모시고 불국사 복원공사 준공식 거행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安齋의 쉼터 > 길이 아끼고 싶은 2007-07-29 07:15:03
http://blog.joinsmsn.com/media/folderlistslide.asp?uid=bytylp&folder=35&list_id=8318929
/museum.posco
1973 - 포항제철 제1기 설비 종합 준공식
1973 - 포항제철 준공(1973)
1973년 오늘, 포항제철이 준공됐다.
착공한 지 3년 3개월 만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용의 3배인 1,200억 원을 들여 만들었다.
제선,제강공장 등 10개 단위 공장과 12개의 부대시설을 거느렸다.
단일 사업체로서는 우리 나라 최대규모였다.
포항제철은 3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의 3대 목표 가운데 하나인 중화학공업 건설의 중추역할을 떠맡게 됐다.
이에 따라 포항제철은 73년 1기 설비 준공 이후 생산설비 확장을 계속 추진해 나간다.
1976년 5월 2기 설비, 78년 12월 3기 설비, 83년 5월 4기 2차 설비 준공으로 9백10만 톤의 조강 능력을 확보한다.
포항제철이 1987년 준공한 광양제철소는 1,180만 톤 규모의 조강능력을 지녔다.
포항제철은 조강 능력 기준으로 세계 1위의 철강회사로 발돋움하고 2000년에는 민영화됐다. /YTN
쇳물이 흘러나오자 만세를 부르는
박태준 사장(가운데 회색)과 포항제
철 직원들. /조선
1973 - 포항제철 3년3개월 만에 준공식
1973년 6월9일, 이른 아침부터 박태준 사장과 직원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고로(용광로) 아래 출선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태양열로 채화한 원화(元火)로 점화로에 불을 지핀지 어느덧 21시간이 지난 오전7시반, 이윽고 출선구가 열리고 용암처럼 시뻘건 쇳물이 힘차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우리 손으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일관(一貫)제철소 고로에서 쇳물이 생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 4월 착공 이래 3년3개월간을 기다려온 그 순간, 사람들은 너나없이 부둥켜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에서 작업을 시작한지 5년 만이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1966년 방미 때 미국의 제철공장을 둘러본지 7년 만이었다.
공사비 만 1215억원,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용의 3배나 되는 엄청난 금액이었고, 단일사업으로는 단군이래 가장 큰 대역사였다. 7월3일에 치러진 준공식 이후 포항종합제철은 30년 만에 서울 여의도의 3배에 이르는 270만평의 거대한 부지에 도로 길이만 80km가 넘는 ‘철의 메카’가 됐다. 이름 만 ‘포스코’로 바뀌었을 뿐이다. /조선
(발췌) 70년 4월1일 마침내 포항제철 1기 설비가 착공되고, 3년 후인 73년 6월9일 첫 화입식(火入式)이 거행됐다.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용광로에서 시뻘건 쇳물이 쏟아져 나오는 장면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이후 제선 제강 압연 등 총 22개 공장 및 설비로 구성된 종합제철 일관 공정을 모두 마무리하고 73년 7월3일 마침내 포철 1기 설비가 종합 준공됐다. 무자본과 무경험, 무기술 상태에서 허허벌판을 현대식 제철공장으로 탈바꿈시킨 “영일만 신화”였다. 연인원 581만명이 동원됐고, 건설자금은 경부고속도로의 3배에 해당하는 1205억원이 투입됐다.
['영일만 신화'...박태준과 포항제철]
이종석 기자 iskra3639@chosun.com /조선경제 2011.12.14 09:40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2/14/2011121400878.html
1973 - 포항제철 제1기 설비 종합 준공식
1973년 7월 3일에 오후 3시 포항 현장에서 있었던 포항 1기 설비 종합준공식 장면입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조강연산 103만 톤의 종합제철공장을 완공하게 된 것은 우리나라가 중화학 공업의 문턱을 넘어서 휠씬 깊은 곳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포항제철은 우리나라 중화학공업 발전에 핵심적이고 근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치하했습니다.
/the posco museum
http://museum.posco.co.kr/museum/docs/kor/mTour/s91b3050115c.jsp
[포항제철(POSCO) 연혁]
1968-11-12 박정희 대통령 포철현장 방문(13차례 방문 중 첫번째)
1969-01-15 제철연수원 현판식
1970-04-01 포항종합제철소 1기 착공식
1970-06-23 중후판공장 설비공급 계약체결
1970-09-19 열연공장 설비공급 계약체결
1972-10-03 첫 열연제춤 출하, 박태준 사장 첫 제품에 "피와 땀의 결정" 휘호
1972-11-19 제품 해외수출 시작, 후판제품 7,400톤을 미국과 대만에 수출
1973-06-08 제선공장 준공식 및 용광로(고로) 화입식
1973-06-09 용광로(1고로) 쇳물 출선 시작
1973-07-03 1기 설비 종합준공식
1973-12-01 2기 설비 종합 착공식
1974-10-21 직업훈련원 개소 및 1기생 입소식
1975-11-29 1억불 수출의 탑 수상
1978-12-08 3기 설비공사 완공
1979-02-01 4기 설비 종합착공식
1979-09-27 4본주 입주식
1981-02-18 4기 설비 종합준공, 조강 연산 850만톤 규모
1981-09-01 4기 2차 설비 착공식
1983-05-25 4기 2차 설비 종합준공식
http://museum.posco.co.kr/museum
1973 - 유럽안보협력회의, 35개국 외무장관 참석하여 헬싱키에서 열림
1973 - 일본 자민단 총재에 다나까 가꾸에이 선출
1973 - 소련의 초음속 여객기 TU-144S, 파리 에어쇼에서 공중분해 사고 - 6월 3일로~
1972 - 부토 파키스탄 대통령과 간디 인도수상, 시물라평화협정에 조인
1972 - 인도-파키스탄 '심라 평화협정' 발표(1972)
1972년 오늘!
인도와 파키스탄의 두 정상이 '심라 평화협정'에 조인했다고 발표한다.
인디라 간디 총리와 파키스탄의 줄피카르 부토 대통령(Zulfiqar Bhutto)은 인도 북서부의 휴양지 심라(Shimla)에서 전날 밤 늦게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이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조인식을 서둘러 시작하느라 식장의 커튼을 뜯어내려 테이블보로 쓰고 간디 총리는 바로 옆에서 취재하던 기자에게 펜을 빌려 서명했다.
이로써 25년 동안 끌어 온 두 나라의 적대관계가 해소된다.
1년 전인 1971년 3월 동파키스탄의 벵골인 독립주의자들이 방글라데시공화국 독립을 선포한 데 대해 파키스탄군이 유혈진압에 나서자 인도가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지지하며 내전지역에 군대를 파견했다.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는 과정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이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두 나라의 전쟁은 같은 해인 71년 12월 16일 파키스탄의 항복에 이어 다음 날 휴전에 들어갔다.
두 나라는 이듬해 오늘 발표한 '심라 평화협정'에서 서로 주권을 존중하고 내정간섭하지 않으며 관계 정상화를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벌이기로 약속했다. /YTN
1971 - 박정희 제7대 대통령 취임 - 1일로~
1971 - 한국-모리셔스 국교 수립
1971 - 한미합동 제1군단 창설
1971 - 미국의 가수, 작곡가 짐 모리슨(Morrison, Jim) 사망
모리슨 [Morrison, Jim, 1943.12.8~1971.7.3]
1971 - 짐 모리슨 사망
[어제의 오늘]1971년 7월3일 짐 모리슨 사망
ㆍ60년대를 풍미한 반항의 아이콘
1971년 오늘, 그룹 도어스의 보컬리스트 짐 모리슨이 프랑스 파리 자신의 아파트 욕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미국 플로리다에서 태어난 모리슨은 미 해군 제독의 아들이었으나, 아버지와는 사뭇 다른 삶을 살았다.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대학교(UCLA)에서 영화를 공부한 모리슨은 학교에서 키보디스트 레이 만자렉을 만나 그룹을 결성했다. ‘도어스’(The Doors)라는 그룹 이름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인식의 문’(The Doors to Perception)이라는 시구에서 따온 것이다.
1965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도어스는 67년 데뷔 음반을 내놓았다. ‘라이트 마이 파이어(Light my fire)’가 수록된 이 음반은 단숨에 차트 상위권에 오르며 모리슨에게 유명세를 안겼다. 잇달아 내놓은 ‘스트레인지 데이스’ ‘웨이팅 포 더 선’ 등의 음반도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모리슨은 얌전히 노래만 하는 가수가 아니었다. 짐 모리슨의 자유롭다 못해 자기파괴적인 행동이 그를 60년대풍 반항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모리슨은 공연 중 옷을 벗어던져 체포되기도 했다. 무명 시절부터 사귀던 오랜 연인이 있었으나, 모리슨은 한 여자와의 관계에 목을 매지 않았다. 팬, 동료 음악인, 평론가와 거리낌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그의 삶을 일찍 끝낸 것은 술과 마약이었다. 이는 모리슨과 함께 60년대의 ‘3J’라 불렸던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도 마찬가지였다. 3J는 히피, 사랑, 자유, 록, 젊음의 시대였던 60년대를 화려하게 살아냈으나, 모두 30대가 되지 못한 채 70~71년 잇달아 숨을 거뒀다.
모리슨의 공식적인 사인은 심장마비였으나, 이는 과도한 술과 마약에 기인했다는 추정이 지배적이다. 유명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둘러싸고는 온갖 말이 나오게 마련이다. 공식적인 부검이 실시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유명세에 지친 모리슨이 죽음을 위장하고 잠적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로커에게 어울리는 죽음은 따로 있다. 모리슨은 그런 죽음을 맞았다.
백승찬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7-02 18:01:3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7021801315&code=100100&s_code=ap005
1970 - 미국의 화가 버넷 뉴먼(Barnett Newman) 사망
뉴먼 [Newman, Barnett, 1905.1.29~1970.7.4]
1970 -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서 시가전. 영국군이 가톨릭교도지구를 습격
1969년 3월22일 위장귀
순으로 밝혀져 구속된 북
한출신 이수근씨가 검찰
의 기소심리를 받기 위해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
다. /조선
1969 - 위장간첩 이수근 사형 집행
1960~70년대를 뜨겁게 했던 위장간첩 사건의 주인공 이수근씨(45)가 ‘위장’ 8백33일 만에1969년 7월 3일 오전 11시 59분 교수형에 처했다.
1967년 3월 판문점 정전위원회가 끝나고 유엔군 수석대표 치콜렐라 소장이 승용차에 오르는 순간, 북한측 기자가 잽싸게 밴크로프트 준장 차에 뛰어올랐다. 그가 바로 북한 중앙통신 부사장 이수근이었다. 기자를 태운 승용차는 남쪽으로 돌진했다.
그로부터 2년후 1969년 1월 29일 콧수염과 가발로 변장한 이수근이 위조여권으로 한국을 탈출했다. 그러나 홍콩 카이탁 공항에서 영사관 직원들에게 발각돼 한국정부의 정보요원에 의해 체포, 압송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이수근은 항소를 하지 않음으로써 사형이 확정됐고 1969년 7월 3일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사형집행 후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그가 위장간첩 활동을 함으로써 환대해준 대한민국을 배신했다는 주장과 함께 그의 귀순이 위장이 아닌 사실이며, 남한에 정착한 후 갖게 된 실망감과 배신감으로 제3국 탈출의 모험을 강행하게 됐다는 주장이 팽배했다. ‘위장간첩’ 이수근. 그는 남북 양체제의 극심한 대립과 갈등이 빚어낸 비극이 아니었을까. /조선
1962 - 아데나워 서독총리, 프랑스 방문(1962)
1962년 오늘!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 서독 총리가 프랑스를 공식 방문한다.
아데나워 총리는 파리의 개선문에 있는 프랑스 무명용사의 묘에 헌화하고 애도의 뜻을 표했다.
아데나워 서독총리의 프랑스 방문을 놓고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두 번에 걸쳐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과거사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 총리의 프랑스 방문을 전후해 프랑스와 서독 두 나라는 EC, 즉 유럽공동체 창설을 주도하게 된다.
아데나워 서독 총리는 1944년 히틀러 암살사건에 연루돼 게슈타포에게 체포됐다가 살아남아 1949년 국회의원 당선에 이어 서독 정부의 초대 총리에 취임했다.
아데나워는 1963년 10월 총리직에서 물러나기까지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서독의 경제부흥을 이룩했다. /YTN
1962 - 알제리 독립선포
1962 - 알제리 독립
1962년 7월 3일 알제리가 독립했다. 1830년 프랑스군은 바르바리 해적의 약탈이 수세기 동안 지중해 무역을 위협했다는 것을 구실로 알제리를 점령했다. 1847년까지 프랑스군은 알제리인들의 저항운동을 대부분 진압했으나 접전은 1884년까지 계속되었다. 1954년 알제리 젊은 군인들을 중심으로 만든 조직된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은 튀니지와 모로코의 민족주의자들과 힘을 합쳐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싸웠다. 1962년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은 평화협상을 제안했고 에비앙레뱅에서 알제리와 휴전 협정을 맺었다. 1962년 7월 3일 알제리는 독립을 이루어냈지만 이후 사회주의 국가로 출발하면서 FLN 내분과 장기집권으로 인한 반정부 운동, 이슬람교 근본주의 세력과의 갈등으로 내전에 휩싸였다. /브리태니커
(위키백과에는 7월 5일로 기록되었는데, 7월 3일 드골정부의 독립승인이 나고 프랑스군이 철수한 후 5일에 독립을 선포한 것으로 보입니다. 알제리 독립기념우표도 7월 5일 발행되었네요.. ^.@)
(참고) 알제리 독립(1962.7.5)
1962년 오늘 아프리카 북서부 나라 알제리가 독립했다.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지 132년 만의 일이다.
1954년 11월 4일 발족한 민족해방전선(FLN)이 8년 동안 벌인 독립운동이 마침내 열매를 맺었다.
알제리의 무장 독립투쟁 기간에 무려 150만여 명이 사망했다.
프랑스 드골 정부는 앞서 이틀 전인 7월 3일 알제리의 독립을 승인했다.
수도 알제의 시민들은 프랑스군이 철수하고 독립이 선포되자 해방의 기쁨을 만끽했다. /YTN
알제리 독립
1830년 프랑스군은 바르바리 제국의 해적행위가 수세기 동안 지중해 무역을 위협했다는 것을 구실삼아 알제리로 들어왔다. 1847년까지 프랑스군은 알제리인들의 저항운동을 대부분 진압했으나 접전은 1884년까지 계속되었다.
그후 1954∼55년에 알제리 독립운동이 절정에 달해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프랑스는 50만 명의 군대를 파견해 FLN을 탄압하고 독립운동을 진압하려 했다.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은 평화협상을 제안했고 1962년 독립에 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이후 정권을 장악한 FLN은 1962년 7월 3일 독립을 이루어냈고, 대부분의 프랑스인 거주자들은 알제리를 떠났다. 후아리 부메디엔(1965∼78 집권) 장군과 차들리 벤제디드(1979∼92 집권) 장군의 집권하에서 알제리는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고,원유와 가스개발을 국가가 운영하는 중앙계획경제 형태를 띄게 되었다.
http://www.eyeofeagle.co.kr/Eagle/Area/SubMain2_2.asp?MLoc=300101&Pid=113&Itid=2
1962 - 미국의 배우 톰 크루즈 출생 /위키백과
1962 - 미국의 영화배우 톰 크루즈(Cruise, Tom) 출생
크루즈 [Cruise, Tom, 1962.7.3~ ]
1961 - 반공법 제정 공포
1961 - 반공법 제정
1961년 7월 3일 법률 제643호로 반공법이 제정·공포되었다. 1948년 제정된 구국가보안법은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사례가 많았다. 결국 1960년에 4·19혁명으로 폐지되었지만, 같은 해 6월 다시 새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군사정부가 1961년에 반공법을 제정했다. 반공법은 정부를 전복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들 중 공산주의 계열의 노선에 따라 활동하는 단체를 처벌대상으로 했다. 이후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이 중복되는 점을 고려해 1980년 12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통합해 반공법을 폐지시켰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의 악용에 대한 끊이지 않는 논란으로 최근 국가보안법 역시 폐지가 거론되고 있다. /브리태니커
1961 - [오늘의역사]‘공산주의자 처벌’ 반공법 공포
1961년 오늘 공산주의 활동을 처벌하기 위한 법률이 ‘반공법’이라는 이름으로 공포됐다.
공산주의 계열 활동에 가담하거나 이를 방조한 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조치였다.
국가보안법이 일반적인 반국가행위에 대한 처벌법인 데 비해 반공법은 공산계열의 활동에 관한 특별법으로 장 면 정권이 제정하려다 국민적 저항에 부딪쳐 실패한 바 있다.
전문 16조와 부칙으로 구성된 반공법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 식으로 광범위한 자의적 해석이 가능해 언론탄압의 근거로 악용됐으며 평화통일운동에 참여했던 모든 국민이 이 반공법에 소급적용 되기도 했다. 반공법에 대한 비난 수위가 높아지자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는 반공법을 폐기하는 대신 일부를 국가보안법에 삽입했다.
/충청투데이 2009.07.02 19: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5078
1961 - [오늘의 역사]반공법 공포
1961년 오늘 공산주의 활동을 처벌하기 위한 법률이 '반공법'이라는 이름으로 공포됐다.
공산주의 계열 활동에 가담하거나 이를 방조한 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조치였다.
국가보안법이 일반적인 반국가행위에 대한 처벌법인 데 비해 반공법은 공산계열의 활동에 관한 특별법으로 장면 정권이 제정하려다 국민적 저항에 부딪쳐 실패한 바 있다.
전문 16조와 부칙으로 구성된 반공법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 식으로 광범위한 자의적 해석이 가능해 언론탄압의 근거로 악용됐으며 평화통일운동에 참여했던 모든 국민이 이 반공법에 소급적용 되기도 했다.
반공법에 대한 비난 수위가 높아지자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는 반공법을 폐기하는 대신 일부를 국가보안법에 삽입했다.
/충청투데이 2008.07.02 18: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0146
1961년 7월 3일 박정희 부
의장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해 취임사를
하고 있다. /조선
1961 - 박정희(朴正熙) 소장,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1961년 7월 3일 회의에서 최고회의의장 겸 내각수반인 장도영 중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최고회의의장에 부의장인 박정희 소령을 즉시 선출했다.
내각수반에는 현 국방부장관 송요찬씨를 임명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최고위원인 장도영 중장, 송찬호 준장, 박치옥 대령, 김제민 중령 등 4명의 최고위원직 사표를 수리하고 최고회의법 제4조1항을 개정하여 의장이 당임위원장을 겸임하도록 했다. 이로써 군사혁명내각의 수반이었던 장도영 중장은 지난 5월 20일 취임한지 44일 만에 최고회의의장 및 내각수반직을 사임케 된 것이다.
이날의 뉴욕타임즈는 `한국이 강자표면에 나섰다`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박정희 소장이 반공한국의 스트롱맨으로 표면에 나섰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박 소장이 지금까지 이면에서만 권력을 행사했으나 당초의 혁명 목표와 반공 공약에는 아무런 변경도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최고회의가 언제 민간에 정권을 이양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에 관해서는 박소장 자신도 조속한 시일이라고만 말할 뿐이다. 너무도 적은 자원에 너무도 많은 생명들이 매달려 살아야 하는 남한의 운명은 지금 44세인 박정희 소장에게 달려있다. " /조선
반군사혁명 세력으로 몰려 구속된
장도영 장군이 선고공판을 받기위해
법정의 피고석에 앉아 개정을 기다
리고 있다. /조선
1961 - 최고회의서 장도영중장 등 44명을 반혁명 혐의로 구속
5.16군사정변 이후 표면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직과 혁명내각수반직에 있던 장도영 중장의 추종세력 44명이 1961년 7월 3일 반혁명음모협의로 구속됐다.
내각수반 장도영씨는 5.16군사정변 당시 참모총장으로 쿠데타군의 출동을 저지하기 위해 한강다리 위에 헌병 등으로 구성한 저지군을 투입, 총격전을 벌이게 했다. 또 최고회의 의장 겸 내각수반이 된 뒤에도 `참모총장직 겸임해제` 조항을 삭제키 위해 최고위원을 포섭하려 했다. 이에 실패하자 측근 세력을 규합하여 중앙정보부의 권한을 제한하거나 폐지하고 쿠데타 주동세력을 제거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처음에는 끌려 들어가 듯 쿠데타 진영에 참가한 장도영 육참총장은 쿠데타 성공이 확연해진 5월 16일 오후 군사혁명위원회의장과 계엄군사령관직을 공식 수락하고 취임했다. 이어 19일 쿠데타군의 평의회인 국가재건 최고회의의 의장으로 취임했으며 20일에는 임시정부 내각수반과 국방장관자리까지 차지했다. 이미 육참총장직을 보유하고 있던 그는 형식상 정부와 군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그러나 그는 6개월 만에 반혁명사건으로 무기형을 선고받았다가 형 면제로 풀려난 뒤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조선
1961 - 장도영 중장 등 44명, 반혁명 혐의로 구속
[역사 속의 인물] 격동기 비운의 장군, 장도영
배성훈 편집2부장 /매일신문 2013.07.03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3072&yy=2013
1961 - 송요찬 내각수반 취임
1954 - 문교부, 한글 간소화안 발표
한+한글 간소화 파동?
● 1949년 10월 9일
한글 간소화 파동. (이 승만 대통령 담화문)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맞춤법 시행 방침과 관련하여 정부측과 학계·문화언론계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 1949년 10월 9일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 현행 한글 맞춤법의 까다롭고 어려운 점을 지적, 발표한 담화문이 한글파동의 동기가 되었다.
● 1954년 7월 3일
표기법 간소화 공동안. 문교부, 공보처.
(1) 받침은 끝소리에서 발음되는 것에 한하여 사용한다. 따라서 종래 사용하던 받침 가운데 ㄱ, ㄴ, ㄷ, ㄹ, ㅁ, ㅅ, ㅇ,ㄺ, ㄻ, ㄼ 등 10개만을 허용한다. 다만, 받침으로 사용된 때의 `ㅅ`의 음가는 `ㄷ`의 음가를 가지는 것으로 하고, `ㄷ`은 받침으로 아니 쓴다. (보기: 믿다 → 밋다 밋고 미더 미드니)
(2) 명사나 어간이 다른 말과 어울려서 딴 독립된 말이 되거나 뜻이 변할 때에 그 원사(原詞) 또는 어원을 밝히어 적지 아니한다.
(3) 종래 인정되어 쓰이던 표준말 가운데 이미 쓰이지 않거나 또는 말이 바뀐 것은 그 변화된 의대로 적는다.
● 1955년 9월
표기법 간소화 공동안 폐지.
이 승만 대통령은 `민중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자유에 부치고자 한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우리 말글 현대사`에서 뽑아온 내용입니다.
좋은메 /한말연구학회 2002-03-13 (수) 12:37
http://www.hanmal.or.kr/cgi-bin/technote7/board.php?board=qqqtalk&page=23&sort=
hit&command=body&no=249&PHPSESSID=3a91e075fccdc81b653eec98c53231b2
1953 - 간통쌍벌죄 법안이 국회 통과
1953 - 국회, 간통쌍벌죄 법안 통과
1951 - 아이티의 대통령 장클로드 뒤발리에 출생 /위키백과
장클로드 뒤발리에 (Jean-Claude Duvalier, 1951년 7월 3일,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 는 아이티의 정치인이다. 애칭은 베베 독 (Bébé Doc) 또는 베이비 독 (Baby Doc) 이며, 아이티의 제33대 대통령을 지냈다.
그의 아버지는 독재자로 일컬어지는 전 아이티 대통령 프랑수아 뒤발리에 (François Duvalier) 이며, 아버지의 사후에 대통령 직을 세습하여 1971년부터 1986년까지 15년간 독재자로 군림하였다. 미국의 압력으로 축출당하여, 프랑스에 망명하여 살고 있다. /위키백과
1950 - 맥아더사령부, 미국 해병대에 한국출동령
1950 - 대한민국의 정치인 정동채 출생 /위키백과
정동채(鄭東采, 1950년 7월 3일 ~ )는 광주 출신의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제15,16,17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참여정부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냈다.
약력 /위키백과
1945 - 연합군, 베를린 공동 점령
1937 - 영국의 극작가 톰 스토파드 출생 /위키백과
톰 스토파드 경 (Sir Tom Stoppard OM, CBE, 1937년 7월 3일 ~ ) 은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영국의 극작가이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출생하고 싱가포르와 인도에서 성장했다. 영국에 건너온 것은 1946년으로 브리스틀에서 신문기자로 문필생활을 시작, 첫 희곡 <물위를 걷다>(1963)를 개작, <자유인의 등장>(1968)으로 제목을 바꾸어 런던에서 공연했다. 그동안 4편의 라디오 드라마, 3편의 텔레비전 드라마와 소설을 썼다. 그의 제2작이며 대표작인 <로젠크란츠와 길던스턴 죽다>(1967)는 영국 국립극장의 레퍼토리의 하나가 되었다. 복수 비극 <햄릿>을 복수 희극으로 쓴 것인데, 미국 공연에서 최우수 외국 희곡상을 타기도 했다. 그 외의 작품으로는 <별개의 평화> <검찰관의 사냥개>가 있다. 그는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하였다.
1978년 CBE 훈장을 받았고, 1997년 Knight Bachelor 작위로 승급되었으며, 2008년 OM 훈장을 받았다. /위키백과
/브리태니커
1935 - 폴란드의 역사가 보브진스키(Bobrzynski, Michau) 사망
보브진스키 [Bobrzynski, Michau, 1849.9.30~1935.7.3]
1933 -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이리고옌 사망
1933 - 한국-중국연합 일본토벌군, 1개여단 병력의 일본-만주연합군 격파
1933 - 소련, 7개국과 불가침조약 조인
1928 - 처음으로 컬러TV 방송. /위키백과
1928 - 존 로지 베어드 런던에서 첫 컬러TV 방영 /동아사이언스
1928 - 세계 첫 컬러TV 시연
[책갈피 속의 오늘]1928년 세계 첫 컬러TV 시연
“위아래 짙은 색 유니폼은 말레이시아 선수들이고, 약간 옅은 회색 유니폼은 한국 선수들입니다.”
1960, 70년대 흑백TV로 중계되던 축구 경기에서는 유니폼 색깔로 선수들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흰색 검은색은 구분이 되지만 파란색과 붉은색, 초록색 유니폼은 ‘약간 짙은 색’ ‘옅은 회색’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 한국에서 컬러TV 방송이 시작된 뒤 뉴스 일기예보에서는 ‘빨간색 고기압과 파란색 저기압 전선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흑백TV 수상기를 컬러로 바꿔야겠다는 욕망에 들떴다.
세계 최초로 컬러TV 방송이 시연된 것은 1928년 7월 3일 영국 런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발명가 존 베어드(1888∼1946)에 의해서였다. 비누와 젤리를 만들어 파는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한 그는 네온등이 발명되자 이를 이용해 텔레비전을 만들 생각을 했다. 베어드는 1925년 아버지와 친구에게 250파운드를 빌려 다락방에서 기계식 텔레비전 시스템을 제작했다. 연장을 넣어 두던 낡은 상자로 모터의 받침대를 만들고, 빈 과자 상자로 네온등을 넣는 케이스를 만들었다. 주사용 원판은 마분지를 잘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텔레비전은 30개의 주사선을 가지고 1초에 10번씩 번쩍였다. 베어드는 이를 ‘텔레바이저(televisor)’라고 불렀다. 영국 BBC방송은 1929년 9월 베어드가 발명한 텔레바이저를 이용해 TV 방송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 기계식 TV는 곧이어 발명된 ‘브라운관’을 이용한 전자식 TV에 밀려 사라졌다.
컬러TV 방송이 세계 각국에서 보편화된 것은 196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1974년 아남산업이 일본 내셔널전기와 합작해 최초의 컬러TV를 생산했지만, 과소비와 계층 간 위화감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방송은 번번이 연기됐다. 결국 5공 정권을 창출한 신군부가 1980년 8월 컬러TV 시판을 허용했고, 1981년 1월 1일부터 컬러TV 방송이 시작됐다.
총천연색 TV는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흑백 교복과 흑백 사진의 추억에 갇혀 있던 우리 사회는 각계에서 저마다 개성과 색깔을 분출해 내기 시작했다. TV 수상기를 통한 색채혁명은 이제 고화질(HD)TV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21세기에도 ‘흑백 광고’를 통해 자신을 알리려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다. 지지자를 모으기 위해 흑백논리와 이분법을 즐겨 사용하는 정치인이 바로 그들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동아닷컴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60703/8325110/1
1921 - 혁명적 노동조합 국제연합(프로핀테른) 창립대회
1919 - 영국-미국-프랑스 3국 협약 발표
1918 - 오스만 제국의 제35대 술탄 메메드 5세(Mehmed V) 사망
메메드 5세 [Mehmed V, 1844.11.2~1918.7.3]
1916 - 제4차 러일협약 조인
1915 - 미해병대, 아이티에 상륙하여 혁명 운동 진압
1909 - 오나시스와 경쟁 선박왕 니아르코스 출생
[역사 속의 인물] 오나시스와 경쟁 선박왕 니아르코스
그리스의 선박왕 스타르보스 니아르코스(1909~1996)는 그보다 잘 알려진 아리스토틀 오나시스(1906~1975)와 평생 경쟁 관계였다. 1909년 오늘 태어난 니아르코스는 삼촌들이 경영하는 제분공장의 밀 운송 비용을 절감하려고 화물선을 사들인 것이 계기가 되어 30살에 선박회사를 차렸다. 공교롭게도 그의 성 '니아르코스'는 선주(船主)를 의미했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회사가 성장을 거듭하자 그는 거대한 유조선들을 많이 구입하고 건조하는 경영 방침에 따라 한때 80척이 넘는 유조선을 운영할 정도로 크게 성공했다. 막대한 부를 쌓은 그는 거액의 미술품들을 사들였으며 세계 각지의 저택과 개인 전용 섬을 소유하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오나시스 역시 해운업과 항공업 등으로 세계적인 부호가 되어 사치스럽게 살았다.
두 라이벌은 여성 편력도 화려했으며 이마저도 경쟁 관계가 작용했다. 니아르코스는 해군 제독의 딸, 포드 가문의 여성 등과 5번 결혼했고 오나시스는 그리스 선박업주의 딸과 결혼한 뒤 이혼했으며 성악가 마리아 칼라스와 연인 관계로 지내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재클린 케네디와 재혼했다. 특히 니아르코스의 5번째 아내는 오나시스의 첫 번째 배우자였다.
김지석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2년 07월 03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9778&yy=2012
1908 - 미국 소설가 해리스(Harris, Joel) 사망
해리스 [Harris, Joel Chandler, 1848.12.9~1908.7.3]
1907 - 헤이그 밀사 사건, 대한매일신보 통해 처음으로 국내에 보도됨
1907년 7월 3일 국내에 <대한매일신보> 편으로 보도된 헤이그 밀사 사건은 국가 전체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갔습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이것을 핑계로 친일내각을 이용, 황제의 퇴위를 요구했고, 결국 7월 19일 양위조칙이 내려져 고종황제는 퇴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던 당시 시위 제 2연대 3대대는 궁내부대신 박영효와 공모하여 황제를 직접 보위하며 일본군으로부터의 협박을 완화하고, 실질적인 전쟁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는 군부대신 이병무에게 탐지되었고, 결국 이들이 움직임을 시작하려던 자정무렵 일본군 제 51연대 1, 3대대의 동원으로 실패했습니다. 3대대는 경운궁의 각 문을 가로막아 통행을 막는 한편, 1대대는 시위 2연대 3대대의 본영을 기습포위한 후 병사들의 출동을 사전 저지했던 것이지요. (발췌)
[작은전쟁사 5 - 대한제국군의 마지막 전투]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vietcon92&logNo=40006588530
1907 - 대한매일신보 ‘헤이그 밀사 파견’ 보도
[책갈피 속의 오늘]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 보도
“李完用氏 드르시오/修身齊家 못한 사람/治國인들 잘할 손가/前日事는 如何턴지/今日부터 悔改하야….”
구한말 대한매일신보는 할 말은 기어코 했다.
일제의 검열과 탄압은 혹독했으나 ‘을사5적’과 ‘정미7적’의 매국 행위를 호되게 꾸짖었다. 1907년 7월 3일, 고종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고 보도한 것도 이 신문이었다.
대한제국은 그 이태 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돼 껍데기만 남은 채 ‘밭은 숨’을 내쉬고 있었으되!
밀사 사건으로 고종은 기어이 퇴위(退位)하고 만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친일파들을 앞세워 ‘양위(讓位)’를 가장했으나 왕위를 ‘날치기’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12세에 궁에 들어와 망국(亡國)의 한을 삼켜야 했던 고종.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첫 황제(皇帝)가 되었고, 퇴위한 다음에는 ‘태황제(太皇帝)’가 되었다가 다시 ‘이태왕(李太王)’으로 강등되는 그의 삶은 신산(辛酸)했다.
혹자는 그 굴욕의 삶을 고사성어 ‘와전(瓦全)’에 빗댄다. “어찌 하찮은 기와(瓦)로 구르며 구차한 삶을 부지(全)했던가….”(중국 ‘북제서’)
만국평화회의에 한국을 초청한 것은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였다.
그러나 막상 고종의 밀사들이 헤이그에 도착하자 러시아는 뒤통수를 쳤다.
평화회의 의장국이었던 러시아는 현지에 긴급전문을 보내 이들의 회의장 입장을 막도록 지시했다. 뿐인가. 밀사 파견 사실을 일본에 흘렸다.
러시아는 그때 일본과 비밀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대한제국과 만주, 몽골을 맞바꾸는 비밀협상이 타결되기 직전에 고종의 밀사가 나타났으니 당황할밖에.
그러나 고종은 국제정세에 어두웠고 비밀협상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는 퇴위한 뒤에도 러시아에 ‘망명 의사’를 타진하는 등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그 얼마 뒤 새로 취임한 러시아 총영사는 본부의 훈령을 받는다. “평화회의에 갑작스러운 대한제국 밀사의 출현은 ‘무질서’를 발생시켰다. 한인들의 항일투쟁 고무발언은 삼가야 한다.”
고종이 ‘변함없는 우정’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니콜라이 2세.
그는 이 훈령 상단에 친필의견을 남겼다.
“공감한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동아닷컴 2004-07-02 20:01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40702/8079138/1
1905 - 프랑스의회, 정교분리법 가결. 정치와 종교 분리
1904 -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작가, 시온주의자 헤르츨(Herzl, Theodor) 출생
헤르츨 [Herzl, Theodor, 1860.5.2~1904.7.3]
1900 - 멕시코의 비행사 사라비아(Sarabia, Francisco) 출생
사라비아 [Sarabia, Francisco, 1900.7.3~1939.6.7]
1897 - 미국의 수학자, 필즈상 수상자 제시 더글러스 출생 /위키백과
제시 더글러스(Jesse Douglas, 1897년 7월 3일 ~ 1965년 10월 7일)은 미국의 뉴욕 주에서 태어난 수학자였다. 그는 1920년에서 1924년까지 컬럼비아 대학교를 다녔었다. 1936년에는, 최초로 수여된 필즈상을 수상한 두 명의 수학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의 필즈상 수상 업적은 그가 1930년에 해결한 플라토의 문제(Plateau problem)에 대한 공로로 인한 것인데, 플라토의 문제란 임의의 주어진 테두리에 대해서 어떤 최소곡면이 존재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1760년에 라그랑주가 학계에 질문을 던진 이후 그때까지 증명되지 못하였는데, 변분법의 한 분야였었으며, 일반적으로는 비누 거품 문제로도 알려져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공로로 더글러스는 1943년에는 미국 수학회로부터 보커 상(Bôcher Prize)을 수여받았다.
더글러스는 뉴욕 시립대(City College of New York, CCNY)의 교수가 되었고, 그곳에서 그가 사망할 때까지 가르쳤다. 그 당시에는 CCNY는 학사학위만을 수여하고 있어서 대학원생들이 없었고, 그래서 학부생들이 실변수 해석학에 대한 기초 과목들을 필즈상 수상자에게서 직접 수강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위키백과
1896 - 프랑스인 그라유에게 경의철도 부설권 허가
1893 - 독립운동가 문익상 출생
1888 - 일본의 화가 무라카미 가가쿠[村上華岳] 출생
무라카미 가가쿠 [村上華岳, 1888.7.3~1939.11.11]
1886 - 세계 첫 가솔린 자동차 등장
[책갈피 속의 오늘]1886년 세계 첫 가솔린 자동차 등장
최대 출력 0.75마력, 최고 속도 시속 15km, 1기통 엔진의 배기량은 954cc.
독일의 자동차기술자 카를 벤츠가 1886년 7월 3일 만하임에서 공개한 세계 최초의 가솔린엔진 자동차 ‘벤츠 페이턴트 모토바겐’의 제원이다.
앞바퀴가 하나인 이 차는 혁명적이었지만 한계가 많았다. 7년 뒤 4바퀴 자동차 ‘빅토리아’에 이르러 제대로 된 차의 모습을 갖췄다. 최고 시속은 35km.
본격적인 자동차의 시대가 열린 데는 경쟁이 일등공신이었다. 고틀리에프 다임러가 1890년 다임러자동차회사를 세우면서 신규 진입했고 6년 뒤 최초의 트럭을 만들었다. 이어 1896년 처음 엔진을 차 앞쪽에 배치한 승용차 ‘피닉스’를 발표했다.
오스트리아의 사업가 에밀 옐리네크는 1900년 다임러의 새 모델 차량 36대를 사겠다며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는 오스트리아 프랑스 미국 등지의 대리점 영업권을 달라는 것, 둘째는 차에 자신의 딸 ‘메르세데스’의 이름을 붙여 달라는 것이었다.
다임러는 제의를 받아들였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메르세데스란 이름의 차는 큰 인기를 끌었다. 1902년 나온 메르세데스 심플렉스는 4기통 40마력 엔진으로 최고 시속 75km를 냈다. 다임러에 추월당한 벤츠는 18마력 엔진을 얹은 최고 시속 60km짜리 ‘파지할’ 세단을 내놓으며 추격에 나섰다.
두 회사가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독일의 자동차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극심한 불황으로 이들 라이벌은 동시에 경영난에 봉착했고 1926년 합병을 통해 활로를 모색한다. 벤츠가 경영을 맡았고 브랜드 이름은 ‘메르세데스 벤츠’로 정했다. 상표는 1916년부터 다임러가 써 온 ‘세 꼭지별’을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이후에도 다임러 벤츠는 세계 최초의 기록들을 이어갔다. 1935년 디젤 승용차, 1930년대 말에는 안전도어 잠금장치를 처음 개발했다. 1959년에는 안전벨트를 처음 장착했다.
두 회사 통합 72주년이던 1998년 5월 다임러 벤츠는 미국의 크라이슬러를 합병한다고 발표했다. 세계 3위의 거대 자동차회사가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9년 뒤인 지난해 다임러는 크라이슬러를 팔아야 했다. 수익성이 떨어지는 크라이슬러가 벤츠에 부담이 됐기 때문이다.
박중현 동아일보 기자 /동아사이언스 2008년 07월 03일
http://news.dongascience.com/PHP/NewsView.php?kisaid=
20080703200000000003&classcode=0109
1886 - 카를 벤츠 ‘페이턴트 모토바겐’ 공개
[어제의 오늘]1886년 카를 벤츠 ‘페이턴트 모토바겐’ 공개
ㆍ세계 최초의 휘발유 자동차
‘세 바퀴’가 세상을 바꿨다. TV 오락프로그램 이야기가 아니다. 바퀴 세 개를 달고 세상에 나온 세계 최초의 휘발유 자동차 ‘모토바겐’ 이야기다.
스스로 움직이는 ‘말(馬) 없는 마차’를 향한 인류의 꿈은 수백년간 커져만 가고 있었다. 1482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구상한 태엽 자동차와 1672년 페르디낭 베르비스트가 설계한 증기 자동차는 그 시작이었다. 1769년 프랑스 포병장교 니콜라 조제프 퀴뇨는 2기통 증기엔진을 얹은 삼륜 증기 자동차를 만들어냈다. 불행히도 이 증기 자동차는 시연회 직후 다시 창고에 처박혔다. 커다란 증기기관의 무게 탓에 사람들이 차에 깔리는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증기 자동차들이 잇달아 개발됐지만 공해와 도로파손이라는 반발의 목소리도 높았다.
1870년 독일에서 니콜라우스 오토가 개발한 4기통 휘발유 엔진은 새 전기가 됐다. 오토의 조수였던 고틀리에프 다임러는 1885년 자동차용 휘발유 엔진을 만들었고, 이듬해 2인승 마차에 그 엔진을 얹었다. 그러나 다임러의 성과는 빛이 바랬다. 카를 벤츠가 1년 전 최초의 휘발유 자동차 ‘모토바겐’을 개발해 1886년 초 영국에서 특허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250㎏의 무게에 최고 시속 15㎞를 낼 수 있는 ‘페이턴트 모토바겐’은 같은 해 7월3일 대중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동차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린 벤츠 모토바겐 뒤에는 든든한 조력자 베르타 벤츠가 있었다. 카를 벤츠는 계속 새로운 모델을 만들면서 모토바겐의 시판을 늦추고 있었다. 보다 못한 벤츠의 아내 베르타는 1888년 여름, 남편이 자고 있는 틈을 타 모토바겐 세 번째 모델에 시동을 걸었다. 엔진에서 연기가 나면 시냇물을 퍼다 냉각수로 넣었고, 연료가 떨어졌을 땐 근처 약국에 멈춰섰다. 만하임에서 하이델베르크를 거쳐 포츠하임까지 총 106㎞. 차가 말썽을 일으킬 때마다 모자핀과 가터벨트까지 활용했던 베르타의 기지 넘치는 ‘세계 최초 장거리 주행’은 벤츠가 자동차 산업의 선구자가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독일 만하임에서는 2년마다 모토바겐을 타고 베르타 벤츠의 발자취를 따르는 축제를 열고 있다.
임소정 기자 sowhat@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07-02 17:51:4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7021751475&code=100100&s_code=ap005
카프카 /브리태니커
1883 - 체코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 출생 /위키백과
1883 - 체코 출신의 독일 소설가 카프카(Kafka, Franz) 출생
카프카 [Kafka, Franz, 1883.7.3~1924.6.3]
카프카는 환상적인 작품세계를 보이며 20세기 인간의 불안과 소외를 특출하게 표현해낸 독일의 작가이다. 프라하의 중산층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현실적이고 권위적이며 사업욕이 강한 그의 아버지는 내향적이고 섬세한 감정의 소유자인 아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아버지의 형상은 카프카의 존재뿐만 아니라 작품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카프카는 프라하대학교에서 별 흥미 없이 법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막스 브로트를 알게 되었다. 카프카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된 브로트는 훗날 카프카의 글을 장려하고 구제하고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영향력있는 전기작가가 되었다. 카프카는 1906년 박사학위를 받고 1907년 한 보험회사에 근무하기 시작했으나 긴 근무 시간으로 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1908년 프라하의 보헤미아 왕국 노동자 상해보험회사라는 준국가기관으로 직장을 옮겼다. 이곳의 근무 시간은 2시까지였기 때문에 카프카는 일을 마치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작품에는 절망적인 시대와 인간 존재의 불안, 사회구조의 불가해성 등이 매우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어서, 풍부한 해석을 야기시켰다. /브리태니커
"우리가 죄인인 이유는 지식의 나무를 먹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생명의 나무를 먹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 프란츠 카프카
[역사속의 오늘]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 카프카
프란츠 카프카는 늘 불안했다. 그는 ‘문학이 아닌 것은 모두 날 지루하게 한다’고 할 정도로 열정을 쏟았지만, 글쓰기의 완성도에 대해 불안해했다.
1883년 오늘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나 폐결핵으로 41세에 삶을 마칠 때까지 소설, 편지, 일기 등 글쓰기에 전념했다. 중편 소설 ‘변신’(1914년)을 완성한 뒤 ‘사업여행으로 방해를 받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잘 쓸 수 있었을 텐데’라고 글쓰기 이외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삶과 작품에는 고독과 불안이 깊이 스며있다. ‘변신’에서는 벌레로 변한 한 인간을 통해 인간이 처한 실존적 부조리와 소외, 고독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지에 대해 통찰했다. 밤을 꼬박 새워 글을 쓰고 또 쓰면서 글쓰기에 대한 매혹에 푹 빠졌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만큼 완성도 높은 작품을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평생지기 막스 브로트에 의해 사후 그의 작품이 큰 빛을 보게 됐지만, 유언으로 자신의 수많은 작품 원고를 읽지 않은 상태 그대로 파기해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작품 속에 담긴 불안과 소외는 자신의 삶을 투영한 것이었고, 결국 그 작품은 카프카를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도록 했다.
김병구기자 /매일신문 2009년 07월 03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9829&yy=2009
1879 - 미국의 철학자 코지브스키 출생
"인생을 쉽게 살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모든 것을 믿는 것과
온갖 것을 의심하는 것이다. 어느 편이나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된다."
1878 - 미국의 뮤지컬 배우, 대중가요 작가 코핸(Cohan, George M.) 출생
코핸 [Cohan, George M(ichael), 1878.7.3~1942.11.5]
1878 - 조지 마이클 코핸 출생
[책갈피 속의 오늘]1878년 조지 마이클 코핸 출생
“난 브로드웨이의 일부를 가질 때까지는 행복할 수 없을 걸세. 단지 작은 일부분이네. 바로 최정상의 부분이라네!”(조지 마이클 코핸)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의 심장부인 타임스스퀘어. 이곳엔 브로드웨이 각 극장의 할인티켓을 판매하는 매표소인 ‘TKTS’가 있다.
세계 공연의 메카인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한편을 보려는 관광객으로 늘 북적대는 이곳에 동상 하나가 서 있다. 바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아버지’ 조지 마이클 코핸(1878∼1942).
코핸은 1878년 로드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 제리와 넬리 코핸은 아일랜드계 떠돌이 엔터테이너였다. 그는 이미 열 살 때 부모와 함께 여행을 다니며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기 때문에 학교라곤 거의 다녀보질 못했다. 11세 때부터 부모랑 누나와 함께 전국을 순회하며 가무극을 하기 시작했다.
15세가 되던 해 조지는 부모에게 순회공연을 다니는 것에 지쳤으며 브로드웨이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뮤지컬에서 쓰는 노래와 노래 사이를 대사로 연결하는 포맷을 처음으로 만들었으며, 탭댄스를 뮤지컬에 적극 활용해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대표하는 춤의 양식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리틀 자니 존스’(1904년) 등 51개 뮤지컬과 500여 개의 싱글 넘버를 작곡했다.
작곡가, 작사가, 극작가, 프로듀서, 댄서, 배우로서 불가사의한 능력을 선보였던 코핸은 브로드웨이에 뮤지컬 시대를 연 주인공이었다.
“그는 최고의 연기자, 작가, 작곡가, 댄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느 작가보다도 춤을 잘 추고, 어느 경영자보다도 작곡을 잘하고, 어느 각본가보다 경영을 잘했다. 그것이 바로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배우 윌리엄 콜리어)
코핸의 삶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뮤지컬이었다. 그의 삶은 1942년 영화 ‘양키 두들 댄디’로, 2006년에는 뮤지컬 ‘조지 엠 코핸 투나잇’으로 만들어졌다. 이 뮤지컬은 올해 9월 국내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그는 “인생에서의 커튼콜은 없다”는 말을 남겼다. 이 말처럼 우리는 무대에서 퇴장하는 순간 더는 박수를 누릴 수 없는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산다.
당신은 그 소중한 무대 위에서 과연 어떤 배우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내 인생의 주연배우는 바로 나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건 아닌지.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동아닷컴 2007-07-03 03:02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70703/8461719/1
1874 -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지도자 응가타(Ngata, Apirana Turupa) 출생
응가타 [Ngata, Apirana Turupa, 1874.7.3~1950.7.14]
1871 - 신미양요를 일으킨 미국 함대 철수
1870 - 캐나다의 정치가 베넷(Bennett, Richard Bedford) 출생
베넷 [Bennett, Richard Bedford, 1870.7.3~1947.6.27]
1863 - 미국 남북전쟁에서의 게티스버어그 전투 (1~3일)
1863 - 게티즈버그 전투 3일 째, "피켓의 돌격". 북군이 최종적으로 승리. /위키백과
피켓의 돌격은 남북전쟁의 게티즈버그 전투 3일째 되는 7월 3일, 로버트 E. 리의 남부군이 북군 진영이 위치한 묘지능선(Cemetery Ridge)을 향해 돌격한 사건을 말한다.
개요
게티즈버그 전투 중 이틀 동안 진전이 없고 리틀 라운드 탑(Little Round Top)과 빅 라운드 탑(Big Round Top) 언덕을 빼앗긴 뒤 초조해진 리는 북군의 조지 A. 커스터 장군의 기병대에 공격 당하고, 제임스 롱스트리트 장군 등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작전을 실행했다. 오후 1시경부터 포격전이 시작되었고, 4시경 포격전이 끝난 후 롱스트리트 휘하의 조지 피켓이 이끄는 12,500명의 보병부대가 1.3 마일(약 1200 미터)을 묘지능선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한다.
빗발치는 총격을 뚫고 묘지 능선에 도착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전군은 전투에서 전사하고 이 작전의 실패로 인해 결과적으로 리는 펜실배니아 공격과 워싱턴 D.C. 고립 작전에 실패하게 된다. 또한 많은 병력을 잃은 남군은 이때 이후부터 내리막길을 걷는다. 이 작전은 남북전쟁 최고의 전략가로 알려진 리의 명성에 크게 먹칠을 한다.
이 돌격작전의 실패 후, 롱스트리트는 "리가 12,500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모든 걸 망쳤다."라는 식의 말로 리를 질책했으며, 리도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며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연합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보내나, 데이비스는 이를 수리하지 않는다. /위키백과
1863 - 미국 남북전쟁 중 게티즈버그 전역: 페어필드 전투 /위키백과
페어필드 전투(Battle of Fairfield)는 미국 남북 전쟁 당시 게티즈버그 전역 중에 벌어진 전투다. 이 전투는 게티스버그 전투와 거의 동시에 펜실베이니아 주 페어필드에서 7월 3일 벌어졌지만, 게티스버그 전투에 포함시키지는 않는다. 이 전투는 중대급 규모의 소규모 전투였지만 전략적인 관점에서는 이 전투의 승리로 남군은 중요한 하게스타운 도로를 확보했고, 7월 5일 로버트 리의 북버지니아군은 이 도로를 이용하여 메릴랜드를 거쳐 버지니아로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다.
북버지니아군 기병대의 대다수는 젭 스튜어트를 따라 메릴랜드와 펜실베이니아 남부 및 중부를 거쳐 북군 포토맥군 주변에서 작전 중이었다. 리는 셰넌도어 계곡과 컴버랜드 계곡을 이용하여 진격하면서 산악 통로를 지키기 위해 몇 개 여단을 배치하고 있었고, 이들에게 북군의 위치를 찾게 했다. 후방에 배치된 여단 중에 터너 애쉬비 가 지휘했고 지금은 윌리엄 E. "그럼블" 존스가 지휘하는 로렐 여단이 있었다. 존스는 주벌 얼리의 보병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휘하 부대 중 최정예인 버지니아 기병대의 35대대를 파견했지만, 부대 규모는 큰 차이없었다. 본래 존스 여단은 리의 호출을 받기 전에 메릴랜드와 웨스트버지니아에서 볼티모어 & 오하이오 철도를 기습 공격하고 있었다. 도하지점의 여울을 지키기 위해 남겨진 12 버지니아 연대를 제외한 나머지 존스 여단은 7월 1일에 포토맥 강을 건너 펜실베이니아로 이동하여, 다음 날 밤, 펜실베이니아 챔버스버그에 도착하여 야영했다. 존스의 병력은 6, 7, 11 버지니아 기병대와 프레스턴 츄의 기마포병대로 축소되었다. 존스가 하게스타운 도로를 지키라는 리의 명령에 따라 페어필드에 도착한 것은 7월 3일이었다.
한편, 새로 취임한 웨슬리 메리트 준장은 부근에서 천천히 이동하는 남군 보급마차 대열에 관한 보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북군 6 기병대 사무엘 H. 스타 소령에게 페어필드와 보급마차 대열의 위치를 수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페어필드에서 스타 소령은 보급마차대열이 막 마을을 벗어나 캐쉬타운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스타 소령은 휘하 400명의 병력을 3개로 나누어 보급마차를 찾기 시작했다.
얼마 안가 한 부대가 존스의 7기병대 소속 전초부대와 충돌했고, 남군의 증원부대가 달려오자 철수했다. 적 출현에 대한 정보에, 스타는 작은 산등성이로 달려가 부하들을 말에서 내리게 한 후 도로 양옆의 과수원과 들판에 배치했다. 남군 7 기병대가 이 북군 부대를 향해 돌격을 시작했다. 스타 소령의 부대가 남군의 첫 번째 돌격을 저지하는 동안, 츄의 기마 포병대가 포격 준비를 마쳤고, 남군 기병대가 일단 물러나자, 북군 기병들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다. 6 버지니아 기병대의 지원을 받은 7 기병대가 다시 돌격하여 스타 소령의 부대를 능선에서 몰아내고 상당한 손실을 입혔다. 존스는 후퇴하는 북군을 쫓아 페어필드 갭으로 4.8km(3마일)을 추격했지만, 섬멸하는데는 실패했다.
북군은 전사자 6명, 부상자 28명을 냈고, 남군 7 버지니아 기병대의 손실은 8명 전사, 21명 부상, 실종 5명이었다.
존스는 페어필드 근처에 숙영지를 설치하고 리의 후퇴에 대비해 도로를 지켰으며, 7월 5일, 비바람이 몰아치는 와중에 페어필드 갭으로 후퇴하는 북버지니아군의 후방을 엄호했다.
북군 6 기병연대 H중대에서 복무하고 있던 아일랜드계 이민인 조지 C. 플래트(George C. Platt)은 1895년 7월 12일 이 전투에서 공으로 의회 명예 훈장(Medal of Honor)을 수여받았다. 서훈장에는, "연대 기수가 전사하자 연대기를 낚아채어 적에게 군기가 뺏기지 않도록 했다"고 되어 있다. /위키백과
1854 - 체코의 작곡가 레오시 야나체크 출생 /위키백과
1854 -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곡가 레오시 야나체크(Jancček, Leoš) 출생
야나체크 [Jancček, Leoš, 1854.7.3~1928.8.12]
1854 - 체코 작곡가 야나체크 탄생
[어제의 오늘]1854년 체코 작곡가 야나체크 탄생
ㆍ동양 음악풍의 독특한 작품세계
“택시 라디오에서는 FM방송의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곡은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정체에 말려든 택시 안에서 듣기에 어울리는 음악이랄 수는 없었다.… 또한 그 곡은 아오마메에게 뒤틀림 비슷한 기묘한 감각을 몰고 왔다. 아픔이나 불쾌함은 없었다.”
체코의 낯선 작곡자 레오시 야나체크(1854~1928)는 이 문장과 함께 ‘재발견’됐다. 한국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1Q84>의 도입부에는 여주인공 아오마메가 살인청부를 ‘수행’하러 가는 택시 안에서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를 듣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이 100만부 이상 팔리면서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음반도 덩달아 인기를 끌었다. 지난달에는 야나체크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내한 공연을 갖기도 했다.
소설 속 묘사처럼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는 익숙하고 편안한 음악은 아니다. 관악이 주도하는 곡 전반의 기묘한 부조화는 낯선 느낌을 준다. 스메타나, 드보르작과 함께 체코의 3대 작곡가로 불리는 야나체크이지만 그의 음악은 체코에서도 인정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고향 모라비아 지방의 동양풍의 민족음악을 소재로 한 독특한 작품세계가 서양인에게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모라비아 민요를 분석해 현대적으로 발전시키고 체코어 특유의 악센트와 억양을 살려낸 작품을 만들었다.
야나체크는 체코의 보헤미아와 슬로바키아 경계지대에 있는 북모라비아 지방에서 태어났다. 교사인 아버지의 14형제 중 10번째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고 전해진다. 11세 때 모라비아 지방의 중심지 브르노의 성 아구르스티노회 수도원의 성가대에 들어가 그곳에서 음악의 기초를 닦았다. 그는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와 빈 음악원에서 유학한 시간을 제외하고는 생애의 대부분을 브르노에서 지냈다. 브르노필하모니협회의 지휘자를 지내고 브르노오르간학교를 세워 교장을 맡기도 했다. 모라비아 지방의 민속과 전통이 그의 음악에 깊숙이 녹아든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던 셈이다.
야나체크의 작품 가운데 널리 연주되는 것은 ‘예누파’ ‘타라스 불바’ ‘신포니에타’ 등인데 대부분 50세를 넘은 뒤에 만들어진 만년의 작품들이다. 서양인의 귀에 익숙지 않은 음악을 창작한 탓에 출세작인 오페라 ‘예누파’도 브르노에서는 그의 나이 50세 때 인정되었지만 프라하의 국립극장이 이를 채택하기까지는 12년이 더 걸렸다. 세계가 이 작곡가의 작품의 위대성에 주목하여 그의 오페라가 체코 이외의 나라에서도 상연되기까지는 그 뒤로 30~40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7-03 21:18:3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7032118385&code=100100
1738 - 미국의 화가 존 싱글턴 코플리(Copley, John Singleton) 출생
코플리 [Copley, John Singleton, 1738.7.3~1815.9.9]
1511 -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 조르지오 바사리 출생 /위키백과 - 30일로~
바사리 [Vasari, Giorgio, 1511.7.30~1574.4.27]
(자료를 보면 바사리의 생일이 7월 30일과 3일 두가지로 나옵니다. ^.@)
1423 - 프랑스의 왕 루이 11세 출생 /위키백과
1423 - 프랑스의 국왕 루이 11세(Louis XI) 출생
루이 11세 [Louis XI, 1423.7.3~1483.8.30]
987 - 위그 카페(Huges Capet)가 프랑스 왕으로 선출
Huges Capet (939-996) was elected King of France on the 3rd of July 987 which started the largest and the oldest Europe royal house, the house of Capet.
The second stamp is rather impressive. I really find it beautiful. It is dedicated to Philippe Auguste (1165-1223), also known as Philip II of France who was king of France from 118à until his death.
http://my-philately.blogspot.com/2011/05/history-of-france-ii.html
683 - 80대 로마 교황 레오 2세 선종 /위키백과
교황 레오 2세(라틴어:Sanctus Leo II, 이탈리아어:Papa Leone II)는 제80대 로마 교황(재위: 681년 12월 ~ 683년7월 3일)이다.
레오 2세는 시칠리아 태생으로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통하였다. 후임자의 선출을 즉시 비잔티움 제국에 알리라는 콘스탄티누스 4세의 명령에 의해 681년 1월 10일 전임 교황 아가토의 선종 후 즉시 비잔티움 제국에 알려 그 해 3일 황제에 의해 공포되었으나 로마에는 682년 7월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더구나 주교 성성식은 오스티아, 포르토, 벨레트리의 주교들의 지연으로 682년 8월까지 미루어졌다.
681년 12월 13일 콘스탄티누스 4세 황제는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결정 사항들을 레오 2세가 재가하게 하였다. 레오 2세는 이를 승인하고 에스파냐의 주교들과 에르비지오 왕에게 서신을 보냈다.
라벤나 교구가 콘스탄스 2세 황제에 의해 자치 교구로 인정되었으나 콘스탄티누스 4세는 이를 취소시키고 라벤나의 대주교에 선출된 이는 로마에 가서 교황에 의해 임명받아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한편 레오 2세는 주교 임명과 관련된 전통적인 세금 부과를 면제시켜 주었다. /위키백과
B.C.210 - 중국 통일 이룩한 진 나라 초대 황제 진시황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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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매일 연재하고 있는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의 기초자료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