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門)
문(門)이란 드나들거나 통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구조를 말한다.
흔히는 대문 방문 창문 등과 같이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게 되어있으나
기념 환영의 뜻으로 세운 독립문 개선문 아치(arch) 등과 같이
늘 통하게 되어있는 것도 있다.
넓은 뜻으로 사건 사물이 출입 경유하는 곳을
문이라 일컫기도 하는데
등용문이나 좁은문이란 것들이 그것이요
난관을 관문(關門)이라 하고
출세의 관문을 뚫으면 승승장구한다고도 한다.
뒷문은 집의 뒤쪽이나 옆으로 난 문을 말한다.
정당하지 못한 수단이나 방법으로
해결하는 길을 뜻하기도 하고
뒷문으로 입학했다거나
뒷문으로 들이민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열녀문(烈女門)은 열녀를 표창하여 세운 문을 말한다.
홍살문은 능이나 묘 또는
궁전 관아 등의 정면 입구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경건성의 문을 말한다.
산문(山門)이라 하면 산의 어귀를 말하거나
절 또는 절의 바깥문을 말하지만
절 안으로 들어가는 곳엔
흔히 일주문(一柱門)을 세워놓는데
분별없는 경지에 들어간다는 의미를 전해준다.
금강문(金剛門)은 입구 양쪽에
금강신(金剛神)을 세워놓은 절문을 말하고
사천왕문은 절을 지키는 의미에서, 동서남북의
사천왕(지국천왕, 광목천왕, 증장천왕, 다문천왕)을 만들어
좌우에 세운 문을 말한다.
해탈문(解脫門)은 미망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방법이 되는
선정(禪定)으로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의 상태를 말하며,
이와 달리 여성의 음부인 산문(産門)도 해탈문이라 하는데
이는 고통과 함께 다른 생명체를 배출하는 문이란 뜻이다.
고생문(苦生門)이라면 고생을 당할 운명을 말하며
입문(入門)이라 하면
스승의 문에 들어가 제자가 됨을 말하거나
어떤 부문에 처음으로 들어감을 말한다.
삶의 마디마디에서 자신의 특별한 의지를 행동에 옮길 땐
길에 나섰다 하고
그 길에 완전히 들어서면 문에 들어섰다고도 한다.
그러기에 바른 길로 가라는 말은
바른 의지를 행동으로 바르게 옮기라는 뜻이요
고생문이 열렸다 함은
바르지 않은 길로 들어서 난관에 봉착했음을 말한다.
돌이켜보면 숱한 길과 문을 거쳐
그나마 용케도 여기까지 온 셈이다.
지난날들이야 되돌릴 수도 없는 것이니
이젠 어느 문으로 들어서야 할지 생각해 보게 되는데
그러노라면 가쁜 숨은 조용히 가라앉기도 한다.
삶을 이야기하는 이들의 모임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불로문(不老門)'이었다.
창덕궁 후원 연지(蓮池)에 들어서려면 불로문을 지나야 하는데
바로 그 불로문의 글자체(전서체)와 모형을 빌려 만든 문인 듯했다.
생명을 이어나가는 동안엔 왕후장상이 아니더라도
범부 필부 모두 불로장생을 꿈꾸게 마련이다.
불로문에 들어서며 늙지 않길 바라는 마음
자연스러운 일이겠으나
나는 그걸 불노문(不怒門)으로 고쳐 내세우고 싶었으니
탐진치(貪嗔痴)의 그 분노와 노여움을 달래 가며
살아보자는 심사였다.
이젠 싫다는 이들 틈새로 억지로 비집고 들어갈 일도 아니다.
반겨주는 이들 틈새로 들어가면 그게 가장 편안한 곳이려니
들어가서 무얼 하든 그거야 크게 상관할 바도 아니다.
하얀 모시옷 곱게 차려입은 접시꽃을 바라보며
칠월 능소화의 안내를 받아 그런 문에 들어서서 조우했던 것인데,
이렇게 삶의 마디마디에서 만남을 이루게 되느니
만나면 마음을 열어야 할 게다.
사랑하려면 가슴을 열어젖혀야 하고
우주공간에서 도킹하려면 해치를 열어야 하느니
그러지 않고야 어찌 만남이 이뤄지겠는가.
마음을 열면 손해도 보게 마련이다.
열탕과 냉탕이 만나면 평형을 이루어 나가지만
열탕은 열기를 빼앗기고 냉탕은 냉기를 빼앗기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야 어찌 평형의 평온을 이룰 수 있겠는가.
그래서 손해도 보게 된다고 해보는 것이다.
그 손해는, 또는 상생이익은 서로의 입장 차이로 생기는 것이니
그래서 입장도 바꿔 생각해 보자고 해보는 것이다.
그리곤 버릴 인연이 아니라면 관심을 가져야 하리니
그러면 또 고운 기억으로 떠올려지게 되는 게 아니던가.
인간은 자기 현시욕구와 남을 들여다보려는 호기심이 있다 한다.
그게 지나치면 노출증과 관음증이 된다고도 하지만(프로이트)
자연스레 들어내고 자연스레 들여다보는 건
서로의 욕구에 부응하는 걸 테다.
어제의 모임은 그런 것이었다 하겠으니
'삶은 서로 다름으로 해서 풍요로워진다'는
불란서 시인 폴 발레리의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2012년 7월 어느 날의 단상)
위 글은 지난날의 단상이다.
어제는 베리꽃님의 <좁은 문>을,
오늘은 단석 님의 <경계의 바람>을 읽었다.
베리꽃님의 글로는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이 떠올랐고
단석 님의 글로는 요즘 긴장감이 도는
남북관계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떤 문이든 바라는 문으로 들고
평온이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우주만물은 138억 년 전 빅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한다.
마치 부풀어 오른 고무풍선의 작은 구멍에서
터져 나오듯, 그렇게 말이다.
이를 두고 좁은 문을 빠져나온 우주만물이라 하면
안 될까 모르겠다.
본시 모든 생명은 좁은 문을 통해 탄생된다.
우리가 어머니의 좁은 문인 산도(産道)를 통해 나오듯,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지만
식물인들 작은 씨앗을 뚫고 나오니 말이다.
누에고치가 성숙되면
작은 틈을 뚫고 나방이가 나오는데
그걸 쉽게 나오게 하려고
고치에 인공적으로 구멍을 뚫어줬더니
나방이가 나오자마자 죽더라는 것이다.
좁은 문의 통과의례를 거쳐야
온전한 생명이 탄생됨을 일러주는 대목이다.
한 생명이 탄생되었다 하여 탄탄대로를 살아가는 건 아니다.
온갖 다난한 환경의 문을 뚫거나 거치면서 살아간다.
그 길이 허허한 평탄대로라면 어떨까...?
하나님은 견뎌낼 수 있는 시련만 준다고 했으니
이 은유는 생명의 역동성이 어디서 오는지 말해준다.
좁은 문,
이건 통과해야 하느냐, 통과할 수 있느냐의
갈래길이기도 하다.
인간은 그 앞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마련이며
그런 과정을 통해 성숙해 가는 것이겠다.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좁은문>을 썼다.
사랑하는 사람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이야기인데
두 사람은 사랑하되 다른 길을 고집한다.
제롬은 알리사와 에로스의 사랑을 원하지만
알리사는, 성은 영혼을 혼탁시키는 것이라면서
이를 거절하는데
그러다가 알리사는 병을 얻어 생을 마감하게 된다.
여기서 좁은 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철학적 사고와 문학적 상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좁은 문,
앙드레 지드가 <좁은 문>에서 이야기했듯
우리는 살아가는 길목마다에서
생각하며 담을 돌고 문에 들어서는 것이겠다.
2026. 10. 24.
*사진은 송광사의 무무문(無無門)이다.
문이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란 말일까...?
첫댓글
때는 바야흐로
가을의 절정기인가 싶습니다.
사색하는 계절인가 싶기도 하고...^^
어제 오늘 글이
모두 심각하게 철학적으로 다가 옵니다.
좁은 문으로 시작해서
경계의 바람과
門이 여러가지 문으로 이어갑니다.
지금 껏 여러 문을 거쳐 여기에 있지요.
이제 어떤 문이 남았을까요.
닫힌 문보다 열린 문이 좋을까요.
열린 문은 행운의 문이요
닫힌 문은 개척의 문이라 하겠지요.
어떤 문이든 우리는
수없는 문에 들어서서
살아가는 것이겠습니다.
요즘엔 다시 오지않는 가을문이 활짝 열려있는데
자연은 부르지만~~~
하루하루가 아까운 계절이지요.
'삶은 서로 달라서 더 풍요로워진다'는 말이 가슴 깊이 남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면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결국엔 서로를 살리는 길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읽을수록 마음이 따뜻해지는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만약 모든사람들이
나와 같다면?
재미없겠지요.
다름을 보려면 내가슴도 열어보여야 할테고요.
베리꽃님의 글을 읽고
저의 글을 내보이는 이유가 그런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