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30일(화)
* 시작 기도
주님...
아무리 둘러봐도 나의 죄성은 감출 수가 없어 심히도 불안하고 주눅이 듭니다.
공의의 심판은 죄를 그치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하였는데, 나는 어찌하여 주님의 심판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죄에 종노릇을 하는지 그저 참담할 뿐입니다.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 그리고 탐심 등 심지어 하나님을 우상으로 삼고 섬기는 나는 금송아지 우상을 섬김으로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나이다.
이 종을 미쉬파트 곧 온전히 교정하여 주옵소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져내신 주께서 다시는 죄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도록 나를 강한 주님의 오른손으로 장악하여 주옵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케 하시고 새 영과 새 마음을 빚어주시고 주의 영으로 조명하사 생명의 양식을 맛나게 먹을 수 있도록 나를 도우소서.
육신의 양식을 먹을 때는 탐하는 마음을 가질 정도로 잘 먹으면서 어찌 생명의 양식인 주의 말씀은 억지로 먹곤 하는지 나 자신이 그저 불쌍해 보일 뿐입니다.
옛 사람으로 행하는 탐심 등 땅의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거룩한 불구자로 서게 하시고 이 하루도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땅의 것에 혹하지 않도록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만족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막 10:32-45
제목 : 얘들아, 철 좀 들어라.
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3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나의 묵상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따르는 무리들이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그들 중에 제자들은 놀라며 또한 따르는 무리들은 두려워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들보다 제일 앞서서 걷고 계신다.
물론 제자들과 다른 무리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것 곧 십자가 수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세베대의 두 아들이 예수님께 청탁을 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들의 청탁은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면 자기들을 좌우에 앉혀달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이 예수님의 수난 당하실 것 때문에 놀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따라서 그들이 놀라고 무리들이 두려워했다는 것을 다른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문제와 충돌의 단초를 제공하는 예수님이 너무나 당당하게 앞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것이다.
분명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모든 종교지도자들과 충돌할 것이 뻔한 일인데 그런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보무도 당당하게 앞서 가시는 일로 인하여 제자들은 놀라고 다른 무리들은 그렇게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렇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길목에서 제자들을 따로 부르시고 그들에게 세 번째 수난 받으실 일에 대하여 말씀하신다(33-34).
첫 번째 수난예고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하셨다(막 8:31).
두 번째 수난예고는 갈릴리 지역을 지나실 때 하셨다(막 9:31).
이제 오늘 본문에서처럼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세 번째 수난예고를 하신다(막 10:33-34).
이처럼 주님은 사역 중간중간에 능욕을 당하고 침뱉음과 채찍질을 받으며 죽임 당할 것과 함께 3일 만에 살아나실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싶은 말만 들었다.
우리와 같은 일반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중요한 말을 많이 할지라도 자기와 상관이 없으면 들리지 않는다.
그 말이 나와 상관이 있을 때 내 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제자들이 바로 그러했던 것이다.
그들 중에서 특히 야고보와 요한 이 두 형제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수난예고는 자기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주님께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면 우리를 주의 좌우편에 하나씩 앉혀달라고 요청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주의 영광중에서’는 주님이 로마를 정복하고 유대인의 왕이 되면, 그렇게 해달라는 말이다.
이처럼 그들은 오직 예수님이 빨리 로마를 정복하고 정치적인 메시야 곧 유대의 왕이 되기만을 고대했던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의 이런 청탁에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너희들은 너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구나.
너희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이에 대하여 그들이 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것이다.
하지만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자리들은 정해진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머지 열 명의 제자들이 화를 내기 시작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들이 아는 것처럼 이방인의 통치자들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그 고관들도 사람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려고 한다.
하지만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면 종이 되어야 한다.
또한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고 하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곧 인자인 나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왔다.
나는 나의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온 것이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첫 번 수난예고를 말씀하실 때에는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로 들이받았다.
당신이 그렇게 죽어버리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닭 쫓던 개밖에 더 되느냐는 것이다.
그 때 주님께서는 그를 주장하고 있는 사탄을 꾸짖으면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다.
두 번째 수난예고에서는 갈릴리 지역을 지나가시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셨다.
이것은 혹여 주님이 받으실 수난과 부활을 방해하고 막아설 자들 때문이었다.
이런 수난예고로 인하여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고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다.
(막 9: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한편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 번째 수난예고에서 주님은 제자들이나 무리들에게 침묵명령조차 하지 않으신다.
그 이유는 이제 예루살렘에서 받으실 수난이 바로 코앞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주님은 앞선 두 번의 수난예고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처음과 두 번째 수난예고에서는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 그리고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마지막인 세 번째 수난예고에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져 그들이 나를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줄 것이며 능욕하고 침 뱉으며 채찍질을 하여 죽일 것이다.
하지만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철체절명의 순간에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런 말씀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자기들은 육신의 왕으로 오신 그 분을 철저히 민속 메시야 사상에 의거 로마를 정복하고 유대의 왕으로 모셔야 하는 나름대로 최고의 호기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생각하며 높은 자리로 올라갈 것만 생각했을 것이다.
이들은 동상이몽(同床異夢) 곧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조차 전혀 다른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철이 없어도 너무 없다.
그런데 나는 과연 어떤가?
나야 말로 그런 제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철이 없는 자가 아니던가?
제자들은 당시 많은 유대인들의 생각과 뜻을 모아서 예수를 자기들의 왕으로 모시면 진짜 자기들의 왕국 곧 다윗이 이루었던 하나님 나라를 만들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나는 그런 기회는 고사하고 단지 나의 유익과 필요만을 위하여 예수를 내가 원하는 신인 송아지 우상으로 삼아 섬기던 자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그들의 지도자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아론더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하였다.
이에 아론은 백성들에게서 금을 거두어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것을 가리켜 백성들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면서 다 자기의 필요에 따라 자기만의 신을 만들어 섬긴다.
나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나는 일명 모태신앙인이지만 참 복음을 듣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지 못하였다.
그런 나는 그저 열심히 교회에 나가고 기도 잘 하고 헌금 잘 하면 훌륭한 신앙인이 되는 줄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신앙이 좋다는 인정과 칭찬을 받으면서 살았다.
그 열심으로 또한 신학을 하여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인정과 칭찬을 받고자 하였다.
나의 열심은 승승장구하여 많은 열매를 내었고 주위 성도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이 나를 삼키고 만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자기주장의지가 나를 수렁으로 밀어넣은 것이다.
나는 그렇게 무덤에 장사되었다.
그런데 그 무덤은 나 혼자만 들어간 무덤이 아니었다.
그 무덤 안에 주님께서 먼저 오셔서 나를 위하여 성전을 지어주셨다.
그 무덤은 나만 알던 나를 죽이고 아들의 생명으로 다시 살게 하신 주님의 크신 은혜요 배려였다.
세상의 절친들조차 나를 다 떠나고 오직 주님과 성전을 지어 그 안에서 관계하게 되었다.
그 관계 곧 교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으로 인한 교제였다.
그 교제를 통하여 나는 정말 철이 없어 주님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에서 건짐을 받았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며(요 5:24)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생명의 나라로 옮겨진 것(골 1:13)이다.
나는 철없는 자에서 철이 든 자가 되어 나를 위한 자가 아니라 주님을 위한 자로 오늘을 살아간다.
그래서 내게 맡겨주신 주의 백성들에게 생명으로 인도하는 복음을 전하는데 매진한다.
무엇보다 철 든 자는 나의 뜻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어린 아이로 오신 것처럼 오직 주님의 뜻을 좇아 사는 어린 아이로 살기 원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철이 없어도 너무나 없는 제자들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기도 했었던 자가 여기 있습니다.
나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닌데 여전히 예수를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알라딘의 요술램프 정도로 생각하고 수단으로만 여겼음을 고백합니다.
이런 내가 주의 공의로 심판을 받은 것은 마땅한 처사입니다.
그 심판이 나를 세웠고 나만의 무덤에서 아들이 함께 하는 무덤으로 옮겨주셨습니다.
그 은혜가 내게 너무나 크고 또 큽니다.
이 시간 주님 앞에서 눈시울을 적십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우리 주님을 생각하면 나는 죽고 또 죽어도 부족한 자입니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주님 안에서 죽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주님이 주신 새 생명으로 일어나오니 나를 도우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