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열왕기상 19:1~7
싸움에서 나를 알고 적을 알면 승리할 수 있죠. 그런데 적을 아무리 잘 안다고 할지라도 현재의 나를 알지 못하면 싸움에서 이기기 어렵고 패하기 쉽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한계점을 알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좀 더 쉬운 생활을 펼쳐나갈 수 있습니다. 주어진 일 또한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되지요. 때때로 무리해서 그 한계점을 넘었다 할지라도 빨리 회복할 수 있는 쉼을 가지게 되기에 나의 한계점을 알고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일상의 생활을 살아가면서도 육체의 한계를 알아야 하고, 내 믿음의 한계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더 폭넓게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를 통해서 우리들은 “나의 믿음의 한계는 어디까지 인가?”를 파악하고 그 한계에 다다르기 전에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하고, 그 한계치를 넘었을 때 일지라도 하나님께 꼭 붙어있는 용기를 낼 수 있도록 그전에 항상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특히 본문의 말씀은 모든 열정을 하나님께 쏟아붓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 구원, 건져주심, 은혜, 응답 등등의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고 난 이후, 또는 열심을 다해 몸과 시간과 돈을 들여서 주의 일을 하고 난 후 마음에 감사가 자리 잡지 못해서 찾아오는 공허함, 또는 허무감에 빠져들게 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이런 상태를 영적 탈진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 탈진은 쉬면 회복되지만 영적 탈진은 쉼으로 회복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즉 목사나 성도들에게 가장 위험한 병이 영적 탈진입니다. 이것이 오기 전 회복의 행동을 취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입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해서 영적 탈진에 놓이게 되면 그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형식적이어도, 마지못해서라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또 다른 하나님의 은혜의 기쁨을 맛보게 되고, 더 좋은 것은 보혜사 성령님의 돌보심의 장중에 놓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형식적이고 마지못해서 하나님께 감사한 것을 찾아 고백하면 돌보시기 위해 내 곁에서 대기하고 계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길의 문을 여는 선택은 오로지 나 자신이 반응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즉 이 행동은 예수님이 문밖에 서서 두드리실 때 문을 열어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행동은 엘리야에게 천사가 와서 어루만지셨을 때 반응한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02년 8월 4일: 처음 춘천에 옴. 대흥 교회로
12일: 계약
19일: 이중 계약이 되어 계약이 일방적으로 파기 됨. 마음이 많이 상했지만, 감사했습니다. 더 좋은 것으로 채우실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21~24일: 사임 전 마지막 사역. 담임 목사님 기도원 사역, 찬양 인도 도우며 기도, 기도원 원장으로부터 청빙이 옴
26일: 지금의 장소는 소개 받음, 30일까지 기도
9월 4일: 현장 방문
10일: 전세 계약
15일: 첫 예배 후 청소 및 전기 시설 재정비
그런데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동시에 육체적, 영적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입니다. 그 심각성을 우리는 엘리야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이것을 가르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엘리야에게 제일 먼저 찾아온 것이 실망이고, 그다음에 더 깊은 수렁에 스스로 자신을 밀어 넣은 것이 원망입니다. 여기에 한 단계를 더한다면 모든 것을 부정의 시선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우리들이 겪는 종합세트 시험에 들게 된 것입니다. 왜 시작했다고요? 주의 일을 하고 난 후 마음에 감사가 자리 잡고 있지 않아서입니다.
우리들이 이런 믿음의 상황에 놓여있다면 앞에 말씀드린 것에 이것을 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느헤미야가 이런 상황에 놓인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조한 것입니다.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라> 왜냐하면 실망이 너무나 큰 자리를 차지해 그 어떤 소리, 성령님의 외침이 들려지지 않게 되죠. 그때 이런 자리에서 일어나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이해해 주시고, 복 주시고, 지켜주시고, 평강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열심히 살아가다가, 어려운 생활 때문에 두려운 생각의 마음에 사로잡힐 때, 그 자리나 환경에서 벗어나 마음의 여유의 쉼을 가지면, 다시 일어날 힘이 충전됩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한 자여 떠나라.”라고 말하잖아요. 열심히 일해서 육체적으로 지쳐있을 때 휴가는 꿀맛 같은 것입니다. 계속해서 쉬고 싶어서 계속 쉬면 안 되겠지만 적절히 쉬는 것은 참 행복을 알게 해 주는 활력소라 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 한계에서 쉬고, 영양을 보충하면, 다시 현장으로 돌아갈 힘이 충전되어 다시 그 길을 걸어가게 되죠.
그런데 영적인 힘은 떠나고, 쉼으로 충전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힘은 하나님께 달라붙어 있도록 용기를 내어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다가서는 것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기억하세요. 언제나 먼저 예수님께서 여러분 문밖에서 항상 대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요. 이것이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그럼 엘리야가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때 행동을 살펴보겠습니다.
* 도망침<자신이 생활했던 곳에서 도망침>
북이스라엘에서 유다에 있는 브엘셀바로 시종과 함께 도망침. 거기서 엘리야 혼자 광야(사막) 하룻길(38km)을 더 가서 로뎀나무 아래 앉아있죠.
* 하나님께 원망했다.<육체적, 영적 탈진 상태.> 혼자인 것 같은 처지에 놓은 것 같은 마음.
원인은 실망에서 시작해서 공포로 번졌기 때문입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를 엘리야가 어떻게 죽였는지 이세벨이 듣고 죽이겠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왜 여기서 엘리야를 육체적, 영적 탈진 상태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엘리야는 자신의 기도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불을 내리시는 큰 은혜를 체험합니다.
이 모든 과정의 시간이 엘리야에게는 많이 힘들어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많이 지쳐있는 그 공간을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로 채우지 못한 결과가 겁에 질려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이세벨과 같은 이런 협박은 우리들의 생활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건강 악화<불치의 병에 걸림>, 잘 되던 일이 멈춰진다든가, 직장을 잃는다든가, 사업이 기울어간다든가, 모든 것을 걸고 준비한 것이 숲으로 돌아간다든가, 돈이 씨가 말라버린다든가, 협력자 모두가 등을 돌린다든가, 내일이 없는 비참한 처지에 놓일 때 등등의 이런 두려움의 느낌이 우리를 포함해서 엘리야가 하나님의 응답을 잊어버리게 함으로 원망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 포기함(될 대로 대라 즉 이세벨에게 죽든 이 광야에서 죽든)
우리는 이 포기함 이후의 행동에 집중해야 합니다. 4~5절 초입 읽겠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들이 그와 같은 처지에 있을 때 나오는 행동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위대한 선지자가 된 것은 불을 내리는 그런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답은 5~7절을 읽겠습니다. 천사가 어루만지며 먹으라 한 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먹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순종으로 받아주심으로 위대한 선지자로 남게 해주셨습니다.
그럼 엘리야가 먹는 순종의 행동이 우리에게는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이럴 때 자연스럽게 예배하러 성전을 찾고, 기도가 최소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하고, 찬양이 들리거나 나오는 거예요. 그럼 우리들도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끝없는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실망과 원망이 끝이 없고, 자포자기했지만 그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는 순종의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은 그를 죽음의 고통을 맛보지 않도록 산 채로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이야기를 기록해 놓으신 참뜻을 놓치며 살게 된 이유가 8~18절에 나오는 일들이 너무 크고 멋지기에 하나님의 참된 뜻을 놓칠 수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천사가 가져다주는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을 먹고 마시고 그의 행동은 다시 잠들죠. 첫 번째 천사가 어루만진 것은 위로해 주지 않으셨을까요?<실제적인 위로였을 것입니다. “힘들었지? 잘 한 거야. 난 매우 기쁘단다. 난 너 때문에 행복했어. 내가 도와줄게. 내가 널 보호해 줄게.” 등등> 그리고 아직 그가 해야 하는 일을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그가 먹고 마셔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동일하게 어루만지시면서 먹고 마셔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는 먹고 마심으로 자신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야의 믿음이 부럽고, 저 자신도 그런 믿음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는 항상 하나님의 생각대로 반응하려고 노력하고, 하나님의 생각대로 바른 선택이 되는 생활을 위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올립니다.
엘리야에게 그 어떤 문제나 환경이 달라진 것이 없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이후 그는 바로 일어나 그 길을 걸어갔고, 그 이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의 남은 인생의 시간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저에게 의탁해 주시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엘리야의 믿음의 행동의 선택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생활이 되길 기도합니다. 또한 막8: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라고 책망하신 이 예수님의 말씀이 저와 저에게 의탁해 주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적인 삶에 적용 대상이 되지 않도록 저는 날마다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로뎀 나무 밑에서 자고 있는 엘리야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내 믿음의 위치는 어디인가?
1 엘리야와 같이 큰 은혜를 체험, 실천 후 실망하여 원망의 소리로 가득 채우고 있는 시간인가?
2 주의 사자가 어루만지고 있는 시간인가?
3 주어지는 음식<양식일 수도 있고, 주의 말씀일 수도 있다>을 먹고 있는 시간인가?
4 일어나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순종의 시간인가?
내 믿음의 위치가 어디인지 아는 것이 좀 더 빨리 주님이 들어오셔서 나로 더불어 드시고, 나는 주님이 들어오심으로 더불어 먹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어떤 위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믿음의 위치가 어디이든 항상 하나님께 달라붙는 용기를 내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엘리야처럼 믿음이 흔들리려고 할 때, 아니 흔들려 흔적을 찾기 어려울 그때도 여전히 주의 사랑이, 주의 선하심이 나를 감싸고, 내게 공급해 주시고, 나를 이끄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힘을 가지고 용기를 내어 하나님께 착 달라붙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이번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모든 당신의 자녀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먹은 것처럼 용기를 내어 나를 사랑하시는 주를 기억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을 통해 “예수님 내 안에 들어오세요.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 사랑하고 감사드립니다.” 이 기도의 고백이 하나님께 착 달라붙어 있으려는 용기의 기도이고, 하나님이 듣고 싶어 하시는 우리들의 고백임을 알아야 하고, 용기를 내어 실천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복을 주시고, 건져주시고, 은혜와 평강으로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혀주시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시고, 발에 신을 신겨주시고, 잔치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맺어진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축복하심이 내 삶에 펼쳐지게 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위치에 항상 당당하게 주향기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이름이 기록되고, 불리는 믿음의 여정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