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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산 원문보기 글쓴이: 심규한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서구의 공동체 이론 소개 3. 공동체운동의 선구자들 4. 네가지 유형의 협동조합 흐름 5. 서구의 공동체운동이 우리에게 갖는 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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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최근에 들어 ‘공동체’라는 용어를 더욱 자주 접하게 된다. 그것은 80년대 운동을 회고하는 과정에서 이 공동체라는 것이 하나의 대안으로 자주 거론되곤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공동체라는 용어가 갖는 실체, 내용은 무엇인가? 사실 공동체라는 말은 사용되어 온 역사나, 사용되는 빈도에 비해 명확히 개념지어지지 않고 있다. 공동체에 대한 개념정리는 특히 서구의 사상가들에 의해 수 없이 많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은 각기 공동체의 한 단면들만을 분석하기 일쑤였으며, 또 나름대로 여러가지 실험들을 통해 정리하고자 하는 시도도 명확하게 공동체란 이런 것이다하는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주로 종교집단에서 이 공동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여 왔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공동체라는 용어를 종교집단의 소모임을 일컫는 말쯤으로 치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공동체라는 말이 갈수록 물질중심적으로 변해가는 사회, 그래서 인간성이 소멸되는 사회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주 사용되곤 한다. 즉, 현대 산업사회에서 물질과 자본에 의해 이끌리는 사람관계를 사람이 중심이 되어 정서적인 유대감을 강화시킨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곤 한다. 신용하씨는 공동체라고 하는 것이 높은 정도의 인격적 친밀, 정서적 깊이, 도덕적 헌신, 사회적 응집력, 시간의 연속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모든 형태의 사회관계를 포괄하는 용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기초로 하고 있는 이념은 인간으로, 이는 인간의 부분들에 대한 이해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전체성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공동체는 단순히 의지나 이해의 차원으로 형성․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동기의 수준에 있으며, 사상과 감정, 전통과 헌신, 소속과 의지가 하나로 융합된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는 이성에 의한 인간결합과는 다르다1).
공동체라는 말은 의미에 따라 여러가지로 사용될 수 있다. 영어로는 코뮤니티(community)라는 말이 공동체라는 의미로 가장 많이 사용된다. 여러 학자들이 개념정의한 것들을 종합해보면 코뮤니티라고 번역하는 공동체의 기본적인 속성은 지역성, 긴밀한 사회적 관계, 동질적인 유대감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전통적인 공동체의 속성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공동체의 속성중 지역성이 갖는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물론 집단적인 생활공동체를 지향하는 공동체에는 해당되지 않지만, 아마도 교통 등의 발달과 함께 굳이 동일한 지역에 거주하는 것이 그리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런데 지역성이 줄어든다는 것은 더 이상 공동체라는 개념을 함께 생활한다는 의미보다 성원간의 원활한 관계망(network)을 형성하는 것에로 그 중요성이 넘어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겠다.
이 글에서는 공동체에 관한 개념의 문제를 길게 다루지 않을 것이다. 다만 공동체에 대한 전반적인 개념을 돕기 위해 공동체에 관한 서구 사상가들의 입장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역사적으로 드러난 공동체 운동, 이 글에서는 특히 협동조합운동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것이 갖는 함의를 우리 입장에서 해석하는 작업으로 마칠 것이다. 보다 자세한 글들은 계속 이어지는 글들에서 충분히 다루어질 것이다.
2. 서구의 공동체 이론 소개
공동체에 관한 관심이 폭증하게 된 시기는 19세기이다. 그것은 19세기가 중세 봉건의 악습을 깨치기 위해 일어섰던 계몽주의가 서구의 사상을 풍미하였던 시기라는 것과 대비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18세기부터 시작된 이성의 시대는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으나, 19세기에 들어서며 공동체에 대한 재발견이 사회이론으로 중요시되었다. 이러한 원인은 산업화와 함께 이성의 시대는 도래하였으나, 중세의 공동체가 무너짐으로써 생긴 사회의 분열과 물질중심의 사회현상, 집단적이기 보다는 개인의 이성에 의존한 사회에 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것이다.
또한 19세기의 역사학에서는 중세의 공동체에 대한 연구가 큰 흐름을 이루었다. 즉, 이들은 민회, 장원, 주회(州會), 신분 등 한때는 경멸되었던 맥락에서 민주주의의 기원을 추적하고 있다.
19세기의 사회학(19세기에 콩트 등의 영향으로 정립되었다) 역시 다른 어떤 것 보다도 공동체를 주된 대상으로 삼았다. 사회학에서 관심을 가지는 공동체는 단순한 집합(societas)이 아니라 공동(communitas)이라는 어원을 갖는 것이다. 콩트는 근대 계몽시대를 비판하고 공동체의 사회학을 강하게 주창하였다. 그는 근대계몽주의 시대 이후 상실된 공동체의 회복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콩트의 실증주의는 종교개혁 이후 사회를 풍미하던 개인주의, 자연법적 권리, 세속주의 등 보다는 중세사회의 정신적, 사회적 범주들과 훨씬 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는 실증주의적으로 가족, 교회, 마을, 길드 등의 윤곽을 공동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사회란 단순한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공동체가 확대된 것으로 보았으며, 사회는 논리적, 심리적으로 개인에 선행하며, 사회는 개인을 형성시킨다는 입장을 강하게 견지하였다. 이러한 콩트의 사회학의 기저에는 개인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가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콩트의 사상은 사회가 각 개인으로 분리될 수 없고 공동체로만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며, 그러한 면에서 그는 가족을 강조하였다.
르 플레이와 막스는 노동계급에 대한 연구의 집중이나, 이들의 지위상승을 통해 도래하는 사회의 장기적인 풍요와 존엄을 간파한 점 등에서 매우 유사한 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막스와 르 플레이와는 상이한 역사적 시각과 윤리적 평가가 존재한다. 공동체의 문제에 있어 막스도 일정한 유형의 공동체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그의 공동체는 전세계 노동계급의 결속이었으며, 정치적 혁명이 완수된 후에 사회주의를 진전시키기 위한 기법으로서 소위 민족의 광범한 결합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많은 사회학자들이 주장한 공동체라는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막스는 유럽에 있어서 근대의 시민사회가 붕괴시킨 가족, 직업유형, 신분, 길드 등은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해 정치적 의식을 해방시킨 사건이라는 평가를 하고 있다.
프루동과 같은 경우는 막스와 달리 소규모의 공동체를 본질로 하는 지방주의에 근거한 유럽의 건설을 주장하였다.
퇴니스는 기르케와 메인, 쿨랑쥬 등의 영향을 받아 공동사회와 이익사회Gemeinschaft und Gesellschaft라는 책을 집필하였다. 퇴니스가 이들의, 단체적․공동체적인 것으로부터 개인주의적․합리적인 것으로의 서구정치의 이행, 귀속적 지위로부터 계약적인 것으로의 서구사회조직의 이행, 성적(聖的)-공동체적인 것-으로부터 세속적-결사체적인 것으로의 서구사상의 이행이라는 내용을 이론적으로 접합하여 유형화함으로써 보편적인 응용을 가능케 하였다. 퇴니스가 사용한 공동사회라는 것은 Community라고 하는 완전한 의미의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익사회라고 하는 것은 의지 또는 완전한 이해(利害)에 의해 생겨나는 높은 정도의 개인주의, 비인격성, 계약주의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성격의 것이다.
퇴니스에 의하면 유럽사회의 발전은 합일적 공동사회(unions of Gemeinschaft)로부터 결합적 공동사회(associations of Gemeinschaft)로, 그 다음 결합적 이익사회(associations of Gesellschaft)에서 마지막으로 합일적 이익사회(unions of Gesellschaft)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이중 네번째 단계는 과거의 공동체적인 안정성을 어느 정도 회복하기 위한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단계로, 의사공동사회(Pseudo-Gemeinschaft)와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여기서 합일적 공동사회의 유형은 가족과 같이 존재 그 자체에 의한 관계에 의한 것이고, 결합적 공동사회는 친구나, 동업조합, 교회 등과 같이 공통의 신념에 기초를 둔 정신과 마음의 공동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이익사회의 두가지 단계는 유럽사회의 근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익사회는 어떤 것을 획득하기 위한 한정된 목적과 한정된 수단들에 제한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일종의 이념형으로써 경험적인 인간관계에서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구분은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익사회가 가져오는 문화적 융성과 그 진전은 공동사회의 해체를 전제로 한다. 이러한 개념은 법적, 경제적, 문화적, 지적인 현상들 뿐만 아니라 남녀간의 구분까지도 구체화시킨다.
베버는 퇴니스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역사를 중세사회의 특성인 가부장제와 형제애가 쇠퇴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쇠퇴는 퇴니스에 의해 이익사회로 표현되었으며, 베버에 있어서는 합리화 과정의 결과였다. 베버에 의하면 어떤 관계가 공동체적이라는 것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서로에게 소속되어 있고, 서로서로의 총체적 존재에 연루되어 있다고 느끼는 주관적 감정에 기초하고 있을 때이다. 또 어떤 관계가 결사체적이라는 것은 이해(利害)가 합리적으로 조정되었거나 이와 유사한 동기에 대한 동의에 근거하는 것이다. 베버 역시 이들 사회관계가 같은 사회구조에 참여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베버는 이러한 구분이 개방적이냐, 또는 폐쇄적인 것이냐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공동사회는 폐쇄적인 요소가 강하며, 이익사회는 개방적인 요소가 강한데, 그 대표적인 예로 ‘도시’를 들 수 있다.
오웬을 비롯한 협동조합 공동체를 지향한 이들은 산업화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노동자들과 농민 등의 고통에서 출발하여, 이들이 공동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공동체를 통해 스스로의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기독교 사회주의자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막스에 의해 ‘이상적 사회주의자’라 불리기도 하였다.
3. 공동체 운동의 선구자들 ;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협동조합운동의 유래를 찾아보면 고대 에집트나 바빌론 제국에서도 존재했었다. 그러나 근대적 형태의 협동조합운동은 산업사회 이후에 유럽 각 지역에서 로버트 오엔 등 협동조합 사상가들과,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급격한 소외현상을 겪게 되는 노동자, 농민들에 의한 자위운동(自衛運動)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협동조합운동은 소비자 협동조합 운동이 영국을 중심으로, 생산자 협동조합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신용협동조합은 뒤늦게 산업혁명의 대열에 뛰어 든 독일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협동조합운동들은 조합운동의 지나친 이상주의적 경향, 치밀함의 부족, 지도자들 간의 의견대립 등으로 거의 실패를 하고 만다.
그러나 1884년에 창립된 롯치데일 공정 개척자 조합은 이전까지의 실패를 교훈삼아 확고한 협동조합의 기본원칙을 제정하고 준수하여, 단순한 소비자 협동조합운동의 효시일 뿐 아니라 각종 근대 협동조합운동의 뿌리로 평가되고 있다.
1) 영국의 소비자협동조합
로버트 오엔은 협동조합의 아버지로 불리우며 협동조합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운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자기 장인으로부터 2명의 동업자와 함께 ‘뉴라나크’공장을 인수하여 하나의 거대한 실험을 성공적으로 이끈다. 그는 이러한 실험을 통하여 자율적인 노동방식, 노동시간의 단축, 유년노동의 제한, 그리고 저임금을 보완해 주는 복지시설(공장내 노동자들을 위한 점포, 유통과정의 이윤착취를 없앰으로써 싼 가격에 양질의 상품생산), 주택의 건설, 청소년을 위한 학교 등을 운영해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그는 이러한 실험을 통해 ‘성격형성론’이란 책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주위의 환경에 의한 성격형성과 환경개선을 통한 성격개량의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
오웬은 뉴라나크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협동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New Harmony(뉴 하모니)협동촌을 건설하였으나 실패하고 영국으로 다시 귀국하였다. 이 협동촌이 실패한 이유는 자급자족을 지향했음에도 자립자족경제에 필요한 생산적 노동력과 조직, 설비에 관한 기술 등이 어느 하나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적 조건이 노동자들의 성격을 곧게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이다.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라는 것이 명확하였음에도 그러하지 못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뉴하모니 공동체는 공동체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자립적인 노동보다 위로부터 주어진 것들이 너무 많았다. 따라서 이 공동체에는 어중이 떠중이가 다 모이는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영국에 돌아온 그는 생산자가 생산한 물건을 착취당하지 않고 팔아 필요한 물건을 원가로 살 수 있는 노동수표를 고안해 등가교환(等價交換)을 시도하여 중간착취를 배제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오웬은 협동조합의 목표를 이상적인 협동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웬에게 있어서 이 협동촌은 소규모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급자족이 가능한 대규모였다. 따라서 이를 위한 자본은 노동자들 스스로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독지가들의 도움에 의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또한 오웬은 이러한 운동이 정치가들을 비롯한 사회 유력인사들에 의해 사회의 주요한 구조로 정착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윌리암 톰슨은 노동자들 스스로의 기금에 형성되는 소규모 공동체건설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맞서, 결국 협동조합의회에서 대다수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윌리암 킹은 오엔의 이상촌 건설 실패를 교훈삼아, 공상적인 협동촌 건설보다는 구체적으로 상업이윤 배제를 목적으로 하는 소비협동조합을 실천하려고 하였다. 그는 생산과 소비의 중간착취를 배제하고, 자본가와 노동자의 구별을 없애면 누구든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특히, 기독교의 정신이 가난한 이들에서 나왔고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라 보며, 바로 이것이 협동조합의 정신이라고 하였다.
킹은 협동조합을 실현하기 위하여 부자들의 기부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신의 자본을 출자하여 소비조합 점포를 개설하고, 상업이윤을 배제하여 얻은 이윤을 조합의 공동자금으로 만들어 점차 다양한 협동조합 사업으로 확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협동조합인」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노동자들에게 협동조합정신을 널리 퍼뜨리는 데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협동조합운동은 협동촌이라는 공동체형성을 최종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치데일공정자 협동조합은 이러한 이상을 거부하였으며, 생산자협동조합과 협동촌건설을 주장하는 오웬주의와 일정정도 차별성을 가지고 있었다. 로치데일공정자협동조합의 성공과 베아트리스 웹의 생산자협동조합에 대한 비판은 영국에서 100여년 동안이나 생산자협동조합의 전통을 멈추게 하였다. 웹은 생산자협동조합이 자본가들의 연합으로 단지 이윤을 증가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결국은 협동조합의 정신에 맞지 않으며, 또한 다른 자본가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맹렬히 비난한다. 이에 반해 소비자협동조합은 판매를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소비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영리를 추구하는 자본가를 배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884년에 창립된 로치데일 공정 개척자 조합은 이전까지의 실패를 교훈삼아 확고한 협동조합의 기본원칙을 제정하고 준수하여, 단순한 소비자 협동조합운동의 효시일 뿐 아니라 각종 근대 협동조합운동의 뿌리로 평가되고 있다. 로치데일 생산자협동조합은 외상을 금하고 이용고배당이라는 특이한 방식을 사용하여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특히 이용고배당이라 하는 것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으나, 이윤을 남긴 사람에게 잉여이윤이 배당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결국은 통과되었다.
2) 프랑스의 생산자 협동조합
프랑스의 쌍 시몽은 국가와 시민사회를 분리해 파악해야 하며 정치는 경제를 위해서 있어야 하고 정치권력은 산업계급에 주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온갖 부의 원천이 농업자, 제조업자, 상업자들인 산업자들이라고 보았으며 봉건계급에 대한 산업자계급의 승리를 역사의 기본방향이라고 보았다. 그의 산업주의는 노동자와 자본가를 대립적인 집단으로 파악하지 않고,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부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수용하고 있었다. 대신 그는 자본주의의 사적 소유가 대중의 빈곤과 사회적 갈등의 원인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현재의 지배적, 봉건적, 군사적 제도에서 관리적, 산업적, 평화적 제도로 이행하는 순수산업체제를 확립함으로써 대혁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그는 정치권력의 변혁보다는 생산력의 발전에 주목하여,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가 물질에 대한 인간의 지배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협동조합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수공업자들의 협동조합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샤를르 푸리에는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상인이 될 계획이었으나 상거래의 수많은 부정과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체험하고, 상업자본에 대한 증오와 반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윤추구를 근본동기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익만을 추구하는 인간, 즉 자신에게 주어진 직업에만 몰두하는 금욕적인 인간상이 정착하게 된다고 설명하며, 정념인력론에 의해 이러한 자본주의의 인간상에서 노동자들을 해방시키고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자본주의적인 노동 또한 기쁨과 쾌락의 노동으로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생산과 소비의 불통일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팔랑쥬(Phalange)라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 팔랑쥬는 생산과 소비를 직접 연결하는 협동조합 사회조직으로, 일정한 면적의 토지위에 일정한 수의 인원이 협동생활을 경영하는 조직으로서, 각종 산업 중에도 특히 농업을 중요시 하고 개인의 자유, 개인적 이익과 전체적 이익과의 원만한 조화를 유지하려는 이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분배의 문제에 있어서도 수익을 노동과 자본, 그리고 재능에 대하여 일정한 비율로 분배하도록 하였다. 푸리에의 팔랑쥬 계획은 출자자가 나서지 않아 실패하였고 후에 그 제자들에 의해 생산자 협동조합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는 사유재산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인간의 생산활동, 특히 노동의 공동화를 이상사회의 기초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 역시 오웬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부자들의 자선에 기대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푸리에가 프랑스 협동조합사상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공동체적인 인간상과 노동관의 창조를 기초로 하는 생산공동체를 꿈꾸어 전 생활영역의 공동화를 구상함으로써, 이후 나타나는 프랑스의 생산협동조합운동의 튼튼한 사상적 뿌리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필립 붓세는 자본주의 사회가 자본과 노동을 분리시켜 놓아 노동자는 빈곤할 수 밖에 없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스스로가 직접 생산수단을 소유해야 하며 이를 통해 빈곤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붓세는 동일직종의 노동자들로 까유조합을 결성하여 공동생산 공동분배를 원칙으로 하였다. 여기서는 이익금의 80%를 노동량에 따라 분배하고 20%는 공동기금으로 적립하여 노동자 해방과 사회문제 해결을 위하여 사용하였다. 후에 붓세는 파리에 목공노동자 생산조합을 설립하기도 하였으나 까유는 자본 부족으로, 목공협동조합은 소자본회사로 변질되어 실패하였다.
루이 블랑, 모든 인류가 갈망하는 자유는 강자가 약자를, 부자가 빈자를, 특권자가 비특권자를 협박하고 파멸시키는 경쟁의 자유로 왜곡되어 지며 노동자들의 무한 경쟁은 저임금을 부채질하고 있고, 기계의 등장은 이를 더 부추겨 노동자들을 직장에서 추방하고 극심한 빈곤으로 떨어뜨린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자본가들간의 무한 경쟁도 역시 중소자본가들을 희생시키므로 이러한 자유경쟁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러한 개혁으로 국가의 신용원조를 수반하는 ‘사회공장(Ateliers Sociaux)'이라는 노동자 생산조합의 설립을 제창하였다. 그는 이 ‘사회공장’을 통해 노동자들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이상적 사회주의 원칙을 실현할 수 있으며 공황현상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는 기계 자체도 노동자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그는 2월 혁명에 파리 노동자들과 함께 참여해서 입각한 후 ‘국민공장’이라는 노동자협동조합을 설립하나 자금부족과 6월혁명으로 실패하였다.
3) 독일의 신용협동조합
독일은 후발자본주의 국가로 다른 나라에 비해 자본주의의 발달이 늦었다. 따라서 독일의 산업화는 국가의 지도에 의해 강력하게 수행되었는데, 이는 일찌기 독점자본의 출현을 가져왔다. 따라서 수공업자들은 독점자본과의 경쟁에서 밀려 계속 노동자화되고 있다는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에 프란츠 헤르만 슐체델리취는 중산계급, 특히 수공업자들의 경제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1849년 수공업자들의 원료구매협동조합 등을 추동하며, 유능하고 근면한 수동업자들이 망해가는 이유가 자본 및 신용의 부족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수공업자들에게 유리하게 자금을 대부해주는 대부조합을 설립하였으나, 조합원의 의무를 거의 강조하지 않았다. 그 후 슐체는 자조와 연대정신을 바탕으로 대부조합을 재편한다. 이를 통해 그는 국가나 외부의 원조에 의한 지원을 거부한다. 이러한 슐체계 협동조합의 원칙은 출자자와 이용자, 운영자가 3위일체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한, 자조에 의한 상호협력이라는 이념으로 일관되어 있다.
이러한 슐체의 정력적인 활동은 독일의 도시에 많은 슐체계협동조합들을 태동시켰는데, 1859년에는 단위조합간의 의사소통을 담당할 중앙연락기관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슐체계 협동조합은 강력한 연합조직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것은 대부분의 단위조합들이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자세를 존중한다는 인식에 기반했기 때문이다.
슐체가 도시의 수공업자들을 위한 협동조합을 구상한 반면, 프리드리히 빌헬름 라이파이젠은 농촌의 빈농들을 위한 협동조합을 구상했다. 1807년 프로이센은 빌헬름 3세에 의해 농노해방칙령이 반포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의 칙령에도 불구하고 농노들이 실질적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일정한 액수의 돈을 지불해야만 했다. 따라서 농민들은 겨우 손에 넣은 토지를 저당잡히게 되었고, 결국 고리대자본의 수탈 하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이 당시 불어닥친 흉작은 농민들로 하여금 더욱 더 고리대자본에 수탈당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라이파이젠은 농민들의 가난이 흉작보다도 고리대금에 의한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고, 이에 기독교적 박애사상을 바탕으로 신용협동조합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처음에 프람멜스벨트 빈농구제조합을 설립하여 가축을 일괄 구입하고, 그 대금은 5년 분할로 상환한다는 조건으로 농민들에게 가축을 양도하였다. 이러한 빈농구제조합이 대부조합으로 변모하게 된 배경은, 조합이 가축을 농민들에게 양도하는 것이 아니라 5년 분할로 자금을 직접 대출하는 방식이 채택되면서 부터이다. 그 후에도 라이파이젠은 대부조합과 같은 형태의 조합에 정성을 기울였으나, 결국은 자선과 자발적인 원조를 보수없이 오랫동안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조를 원리로 한 전환을 하게된다.
라이파이젠은 1866년, 그의 16년 겅험을 중심으로 「농민이 처한 빈곤의 구제수단으로서의 대부조합」이라는 저서를 발표하였으며, 이 책은 관청 등에서 널리 읽혔다. 이로 인해 라인주 농업회의에서는 직접 라이파이젠 조합을 조직하기도 하여 라인주에 라이파이제계의 조합들이 활성화된다. 1872년에는 노이비트에 라인농업협동조합은행이 설립된다. 이 협동조합은 각 대부조합을 구성원으로 하는 연합적인 협동조합이었고, 단위조합에 대한 대출이나 결산 뿐이 아니라 중앙구입기관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이는 농촌지역의 특성상 단기간의 차입을 통해 장기간의 융자를 농민들에게 실시함으로써 다가올 자금고갈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연합은행은 1874년에 베스트팔렌 및 헷센 농업중앙금고와 합병하여 독일농업종합은행이 되었고, 후에 중앙대부금고로 대치되었다. 이 대표연합은 후에 라이파이젠협동조합 총연합으로 명칭을 변경한다.
슐체와 달리 라이파이젠은 단위조합의 범위를 교구나 마을 단위에 하나라는 소규모 조합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라이파이젠의 기독교적 사상에 의한 것인데, 이를 통해 조합원들이 서로간의 신용에 의해 조합을 운영할 수 있었고, 그 마을의 어른을 중심으로 효과적인 교육을 강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의 <표>는 라이파이젠계의 협동조합과 슐체계의 협동조합간의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표> 라이파이젠계의 협동조합과 슐체계의 협동조합간의 차이
구분 내용 |
슐체계 |
라이파이젠계 |
지역 |
광범위하다 |
교규단위의 농촌에 한정 |
조합원 |
모든 사회계층 |
농민에 한정 |
임직원 |
조합의 관리자도 유급 |
회계실무자 이외에는 무보수 |
사업 |
모든 은행업무 |
대인신용에 의한 농업대출 |
대출기관 |
단기대출 |
장기대출 |
배당 |
지분중시 배당제한 없음 |
조합원의 지분을 인정하기 않음 |
책임영역 |
유한책임제 |
무한책임제 |
잉여금 |
잉여금은 준비금 공제후 배분 |
잉여는 대부유보 |
가입절차 |
가입금 징수 |
가입금 없음 |
연합조직 |
지방분권 |
중앙집권 |
하부조직 |
전혀 생각하지 않음 |
하부조직을 중시 |
특징 |
정부원조의 부정 출자권 매매의 인정 |
조합원교육의 중시 복합적인 사업의 인정 |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슐체계 조합과 라이파이젠계 조합의 중요한 차이점은 도시와 농촌의 차이라는 것에서 연유함을 알 수 있다.
4. 네가지 유형의 협동조합 흐름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협동조합 공동체에 대한 수많은 실험이 있어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동체들은 그 실험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모든 시도들이 실패했다고 볼 수 없다. 협동조합 공동체의 역사에는 비교적 성공적인 실험들도 있어왔는데, 그것들의 공통점을 중심으로 나눠보면 대체로 자유민주주의적 전통을 가진 공동체와 맠스주의적 전통을 가진 공동체, 사회주의적 전통을 가진 공동체, 그리고 공동체적인 전통을 가진 공동체로 나눠볼 수 있다2). 마지막에 언급한 ‘공동체적 전통’이라는 말의 공동체는 집단생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1) 자유민주주의 전통
자유민주주의적 협동조합의 특징은 ‘사유재산의 강조, 자본주의에 대한 기본적 용인, 실용적인 단일기능주의’이다. 여기에는 1인 1표원칙의 민주주의와 출자배당 제한의 원칙으로 ‘이윤추구라는 동기를 배제하는 장치’가 전제되어 있다.
이 전통에 속해 있는 공동체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안에서 자본주의와 잘 경쟁하면서 실리적으로 이상보다는 이기심에 호소하고, 노동자 몫의 증가를 요구하며, 전체를 취급하기 보다는 경제문제에 촛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이 협동조합 공동체내에는 거대한 조합원층이 존재하면서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위협하지는 못했다. 자유민주주의 전통을 가진 협동조합 공동체는 사적부분을 대체하려는 협동조합의 이상을 상실했고, “공적부문과 사적부문의 중간적 위치”를 점하는 ‘제3의부문’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자유민주주의적 협동조합의 전통은 정치적 민주주의가 사회적으로 현재상황을 유지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시키는 경제적 민주주의를 제공했다. 여기에는 몇가지 기본적 모순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①유토피아적 목표와 실리주의적 목표사이의 모순: 실리주의가 협동조합을 대중화 시켰지만 이 대중화는 자본주의의 관리 및 통제와는 연결되지 못했다, ②협동조합 구성원 개개인의 자기이익 촉진과 협동의 촉진사이의 모순, ③대중적 참여와 관리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전문적인 경영 및 기업으로서의 성장을 강조하는 모순, ④생산자 협동조합과 소비자 협동조합 사이의 모순: 협동조합들이 개개의 조직단위로 되면서 협동과 마찬가지로 ‘상호경쟁’이 일반적 원리로 채택되었다는 것이다.
2) 막스주의 전통
공산주의적 협동조합은 개념과 실천의 양측면에서 혁명적이고, 언제나 국가에 의해 설립․추진․유지되었다. 또한 중앙계획을 통한 정부관리 경제체제의 일부로 취급되었다. 사람들은 집단을 기초로 일하고 생활하며 집단의 자산에 의존하고 있다.
소련의 경우에는 공산정권 세워진 후에 농업생산을 완전히 포괄하는 협동조합 네트워크인 콜호즈 집단농장이 구성되었고, 농민들은 집단적 생산에 편입되도록 강요되었다. 조합원은 이를 자유로이 이탈할 수 없으며, 농산물을 인위적인 저가격으로 사들이는 정책에 의해 분배해야할 잉여를 거의 지니지 못했다.
중국공산당 정권은 협동조합을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의 일부로 간주하고, 생산과 유통의 사회화를 통해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협동조합을 통해 집단화의 기초를 견고히 하기 위해 활용하였다. 이 협동조합이 바로 인민공사이다. 인민공사의 세가지 특징은 ①국가의 의해 설립되고 중앙계획경제에 포함된 것, ② 민족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③ 전국을 지배하는 단일형태로 만들어 졌다는 것 등이다.
유고에서는 소련과의 구별을 위해 ‘노동자자주관리’라는 독자적 사회경제체제를 개발했다. 이는 관료주의적 자의성을 억제했고, 자유시장 경제가 지닌 장점을 수용했다. 자주관리는 ①노동자의 의해 선출된 평의회에 의한 기업의 자율적 관리를 제공하고, ②가격결정과 이윤확보를 위한 경쟁적 시장기구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③국가적 자산에 대립하는 사회적 자산의 개념을 지니며, 사회적 자산을 국가의 가장 중요한 형태로 보고 있다. 이는 노동자를 노동력 판매자로부터 자주관리하는 생산자로 전환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자주관리가 당면한 하나의 문제는 기업이 노동과 판매를 위해 경쟁하는 시장사회주의의 구조안에 있다는 점이다. 이는 서구측 자본주의와 경제적으로 연결되게 했으며 이는 자본주의 경제순환에 따라 심한 타격을 받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공산주의 집단기업의 모순은 ①노동자와 국가 사이의 모순: 집단기업의 구성원은 생산하는 잉여의 처분에 대한 관리 및 결정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 ②사상과 현실 사이의 모순: 사상적으로는 노동자 계급을 지향하고 있지만, 미발달된 가난한 농민사회에서 혁명이 진행되었다는 점, ③공산주의의 이상주의적 동기부여와 사회주의 단계에서의 물질적 보수의 필요성 사이의 모순, ④협동조합의 이상과 달리, 정부가 권위주의적이며 독재적이라는 목표와 현실 사이의 모순이다.
3) 사회주의 전통
사회주의적 협동조합의 특징은 “비마르크스적 사상과 비공산주의적 정치운동에 의해 생겨났고, 정부의 주도에 의해 생겨나지 않았다는 점과 혁명전쟁을 통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전통과 구별되고 자유민주주의 협동조합과 많은 점에서 유사하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사회주의적 전통은 첫째, 사유재산과 자본주의적 관행에 반대하는 격렬한 입장을 지니며, 둘째, 비사회주의적 환경안에서 사회주의 원칙에 근거하여 운영되는 협동조합적 공동체이다. 사상적으로 공산주의 집단기업과 자유민주주의 협동조합의 중간에 위치한다.
이스라엘의 키부츠는 직접민주주의에 의해 모든 것을 처리하는 사회주의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생산수단은 공동체의 구성원에 의해 소유관리되고, 필요한 물건은 공동체에 의해 평등하게 제공된다. 키브츠는 시오니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적 사상을 동시에 반영하고 있다. 그들은 국민경제 및 그 정치적 과정과 완전히 결합된 강력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그렇지만 키부츠의 내부모순은 공업부문에 있어서 고용노동자에 의존했다는 점에 있다. 계급없는 사회 건설을 임무로 한다면 피고용자의 존재는 그 목적에 위배된다.
탄자니아의 우자마마을은 ‘우자마’라는 탄자니아의 전통적 협동행위를 일종의 사회주의로 보면서, 이는 마르크스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식민지 이전시대의 아프리카 생산양식과 소비의 전통적 양식에 근거한 일련의 원칙과 행동이라고 말하면서 시작되었다. 탄자니아 정부는 ‘알사선언’을 통해 적극적으로 협동조합적 설립과 유지를 지원한다는 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선언 이후 5년간 여기에 참여한 농촌인구는 전체 농촌인구의 15%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자발적이 아닌 정부의 이념이며, 위로부터의 요구였기 때문이다. 또한 참여자에게 커다란 이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는 1973년 이후 강제적으로 사람들을 우자마에 들어가도록 했다. 우자마의 강요는 오히려 문제를 복잡화하고 부정적인 반응을 강화 시켰고, 내용없는 공동체의 외피만 남은 모양이 되었다.
스페인의 몬드라곤은 기독교적 사회주의, 바스크 민족주의, 협동조합적 가치관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진 협동조합체라고 할 수 있다. 주택, 교육, 소비, 사회복지에 관한 협동조합을 포함하면서 그 중심은 노동자 협동조합이다. 몬드라곤의 특징은 잉여를 고정된 비율로 분배하였고, 잘 통합된 조직구조를 그 체계내에서 발전 시켰다.
사회주의적 협동조합 공동체의 사상적 자극제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두 원칙이다. 사회주의 협동조합과 그 협동조합이 위치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국민 사이에 존재하는 유일한 국민적 합의는 민족주의적인 것이었다. 민족주의는 사회주의적 협동조합 모델을 다른 나라에 전파하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실천적으로 특정한 지역에 한정되고 만다. 사회주의적 협동조합 사상은 비사회주의적 발전목적을 지닌 사회 속에서 사회주의 공동체를 만듬으로써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조화를 도모하고 있다.
4) 공동체주의 전통
공동체주의의 특징은 보다 강력하고 밀접하게 편성된 공동체로서 스스로가 창조한 자신들의 존재양식을 추구하는 고립지향적인 경향이 있고, 카리스마적 지도력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점, 직접적 인간관계를 중시한다는 점, 소유․생산․소비의 완전한 평등주의를 들수 있다. 그러므로 공동체주의 전통에 묶여있는 공동체들은 서로 다른 가치관이 전제되므로 서로간의 연결성을 거의 지니고 있지 못하고 있다. 이는 주로 종교적인 지향과 정치적인 지향으로 생성된다. 종교적인 경향의 대표적인 형태가 가톨릭의 수도원이고, 정치적인 지향의 대표적인 형태가 60년대 미국의 반전세대들에 의해 생겨난 현실도피적 공동체들이다.
5. 서구의 공동체운동이 우리에게 갖는 함의
공동체운동의 역사는 비단 서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에도 공동체운동의 모델이 있는데, 그것은 계, 두레, 향약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특히 두레의 경우 동일한 지역의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노동과 생활규범이 아우러진 전통적 공동체의 형태라 할 수 있다.
서구의 경우는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중세 봉건사회가 몰락하고 근대 시민사회로 넘어오면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중세의 권위주의적, 집단적인 체제가 갖는 인간성의 상실을 근대의 계몽주의가 파괴시켰다는 이면에, 중세의 공동체적인 문화가 근대로 넘어오며 개인주의적인 문화로 바뀐 데에 대한 역작용이었다. 또한 산업혁명을 통한 자본주의의 발달과 그로 인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황은 많은 사상가들과 실천가들에게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였다. 특히 협동조합을 통한 공동체의 건설이라는 주제는 생산자들이 겪는 착취의 문제에 응답하고자 하는 취지가 강하였다.
협동조합을 통한 공동체의 건설은 점점 개별화되어가고,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겪는 생산대중의 빈곤을 함께 해결하고자 하는 취지가 강하였다. 그러나 공동체라는 것은 이상만으로 건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초기의 이상주의적 사회주의라 불리는 이들이 주도한 협동조합을 통한 공동체 건설은 외형적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우리에게 남긴 의의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이들은 여러가지 실패를 겪으면서 또한 여러가지 실험들을 수행하여 왔다. 하지만 그들이 언제나 주목한 것은 그들이 처한 구체적인 사회경제적․구조적 상황이었다. 맠스는 이들은 이상주의자라 비난했지만, 이들의 이상은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성실한 응답이었던 것이다. 비록 그들의 실험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경험과 그들이 왜 협동조합 공동체를 만들려고 했는가 하는 것은 오늘 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소중한 공동체 전통이라 할 수 있다.
모든 협동조합은 ‘스스로 돕는 집단활동에 의해 착취관계를 더 이상 지속시키지 않는다는 이상주의적 목표’와 ‘경제활동을 성공시키려는 실용주의적 목표’를 공통적인 특징으로 하고 있다3). 그러나 이러한 조화는 각 사회가 처한 상황에서 다르게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협동조합의 역사를 네가지 전통으로 분류하였는데, 그러한 분류는 각 민족과 그 공동체가 처한 사회의 정치․사회․경제적 특성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나타나곤 했다. 그 어느 형태도 일반적인 형태를 갖지 않고, 철저히 자신들이 처한 사회적, 시간적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움직임에 대한 적절한 자기변화나 대응이 없는 경우, 경제적으로 파산의 위기에 처하거나 공동체의 가치를 포기하거나의 기로에 설 수 밖에 없음을 협동조합의 역사는 우리에게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협동조합을 통한 공동체의 건설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부분을 함께 나누고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공동체와 협동조합이라는 용어가 항상 동일어는 아니지만, 협동조합이란 공동체운동의 한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공동체운동이 80년대의 이념을 대체해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대안’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대안에 대해 무척이나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한다.
90년대의 사회는 80년대 세대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형태로 우리 곁에 다가왔다. 90년대 사회의 특징은 경제를 포함해 사람들 마저도 다원화되어 있고, 이러한 변화는 집단적인 힘을 분해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 그 속에서 가난한 노동자들은 조직의 구심을 잡지 못한 채 생산현장과 소비현장 모두에서 계속적인 착취에 시달리고 있다. 대기업노동자들은 절대적으로 저임금 수준을 벗어났으나, 중소기업 이하의 영세업체 등에서는 아직도 최저생활비가 문제되고 있다. 그러나 영세한 공장에서의 파업은 공장이 바로 도산하는 결과를 낳게된다. 이는 실업율을 증가시켜 그 피해는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전가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사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공동체운동은 모든 이들이 인간적인 존재 자체의 유대를 강화하는 포괄적인 운동이다. 이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운동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형태 및 내용은 매우 추상적이다. 그러한 추상성 속에서 협동조합이라는 구체적 형태를 지향하고자 하는 공동체운동은 확고한 ‘대안’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유력한 모색의 한가지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협동조합은 제3의 대안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 자체도 무척 무의미하다는 느낌이 든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우리의 대안을 위한 모색을 구체적으로 실험하고자 하는 다양한 실천이다. •한국도시연구소•
1) 신용하 편, 공동체 이론, 문학과 지성사, 1985
2) 이 분류는 George R. Melnyk가 쓴 공동체 탐구-유토피아에서 협동조합 사회로(김기섭 譯, 신협중앙회)의 분류에 따른 것이다. 각 분류에 대한 설명은 김기돈 목사가 1994년 생산공동체 지도자교육을 위해 발제한 내용은 재정리한 것이다.
3) George R. Melnynk, 상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