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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4. 묵상글 ( 연중 제2주일. - 조금 더 가까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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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4. 연중 제2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조금 더 가까이>
“와서 보아라.”(요한 1,39)
나를 찾는 사람아
조금 더 가까이
나의 숨소리가
들리는 곳까지
와서 보게나
나를 찾는 사람아
조금 더 가까이
나의 눈길이
가는 곳까지
와서 보게나
나를 찾는 사람아
조금 더 가까이
나의 손길이
닿는 곳까지
와서 보게나
나를 찾는 사람아
조금 더 가까이
나의 발길이
머무는 곳까지
와서 보게나
나를 찾는 사람아
조금 더 가까이
나의 마음이
느껴지는 곳까지
와서 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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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4. 연중 제2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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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ThomasMoreSeoul/UtFb/406
연중 제2주일 당쇠(김찬선)신부님 묵상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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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4. 연중 제2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제1독서에서 사무엘은 주님의 성전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야훼 하느님을 섬기던 신전, 즉 시나고가(Synagoga)에서 비롯되었는데 하느님의 대궐, 혹은 하느님의 집을 말합니다. 제 2독서에서 사도바오로는 성전의 장소적 개념을 넘어서 우리 몸을 성령의 궁전으로 바라봅니다.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시몬을 베드로라 부르시면서 그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바위 같은 성전인 살아 있는 교회를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 몸은 성령이 거하시고 하느님의 어린양을 모시는 궁전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지체인 반석 같은 교회임을 말해 줍니다. 바로 성령의 뜻에 따라 살며 하느님의 어린양을 닮고 살아있는 교회를 지니고 다니라고 주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음성에 귀기울이고 살도록 성령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느님의 성령은 우리들이 알아야만 할 것을 알게하고 무시해도 될 일을 무시하게 하시며 기억해 두어야 할 것도 기억하게 하십니다. 잊어야 할 일은 잊게 하시며 우리들이 사랑해야 할 것은 사랑하게 하시고 하느님이 아닌 것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들을 지켜 주십니다.
우리 신앙인은 또한 하느님의 어린양을 닮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양(羊)은 구약 시대 제물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무죄함과 양순함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옛 이스라엘에는 1년에 한 번 흠 없는 양에게 민족이 지은 모든 죄악을 뒤집어씌워, 광야로 내쫓는 종교 의식을 하였습니다.
우리 내면은 어린양을 닮지 못하게 하는 죄와 닮게하는 은총이 힘겨루기 하는 전쟁터와 같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힘과 은총의 도움을 청하며 죄로 파괴된 우리 안의 하느님의 어린양의 모상을 회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양이 되어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부르심은 우리 각자는 살아있는 교회를 지니고 다니고 있기에 한 마음 한 뜻으로 교회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들은 교회 공동체 구성원 덕분에 일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니는 감사의 삶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준비를 시켜준 사람, 자신 한테 시간을 내준 사람, 자신에게 충고해 준 사람,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그런 정신을 전수해준 사람, 자신의 일을 대신해 주고 식사를 마련하고 공동체일을 감당하는 사람, 자신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자신의 못다한 충실함을 대신 채워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답게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를 스스로 묻고 시대의 표지를 분별하여 주변의 현실과 대화를 하며 자신이 살아 있는 성전이자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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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체브레로( Cebrero) 고개에서의 성변화(聖變化) 기적
스페인 -13세기
9 세기에 사도 야곱의 묘지가 스페인 북서쪽에 위치한 곳에서 발견되었을 때 전유럽의 용감한 가톨릭 신자들은 산티아고의 콤포스텔라로 순례 하기 시작하였다. 그 길은 종종 여러 주일 혹은 여러 달 걸렸다. 그래서 어느 한 독실한 신자가 성 야곱가(St. Jakobs Strasse)의 중요한 지점에다 작은 성당과 병원 그리고 숙소를 지어 순례자들에게 무료로 개방을 하고 치료도 해 주었다. 또한 이 곳에서 1,300미터나 떨어져 있는 체브레로(Cebrero) 고갯길에다 기랄도 드 아우릴라(Giraldo de Aurillac) 라는 프랑스 성주(城圭)는 이미 9 세기에 산티아고로부터 나흘이나 걸리는 이 곳에 숙박소와 병원을 갖춘 베네닥토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하여 많은 순례자들과 또한 그 근방에서 사는 농부와 양치기들이 이 곳을 이용하였다. 19세기에 철도가 생기자, 몇몇의 순례자 거리와 숙
박소는 이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체브레로 고개에 있는 베네덕토 수도원 성당은 13세기에 그 곳에서 일어난 경이스러운 기적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유명한 곳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 기적은 베네딕토 수도회의 연대기 편찬자인 옙스(Yepes) 신부와 두 장의 교황 교서에 의해 역사적으로도 증명되고 있다.(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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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4. 연중 제2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연중 2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부르심과 응답, 그리고 그 사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무엘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 말씀의 ‘들음’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전해줍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8)
<화답송>에서 시편작가는 응답의 사명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데 있음을 노래합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시 40,8)
<제2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어 당신의 “지체”(1코린 6,15)로 삼으시고 “성전”(1코린 6,19)으로 삼으시니, 그에 합당하게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20)라고 권고합니다.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로 안내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곧 ‘제자 됨의 길’을 깨우쳐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곱 개의 동사, 곧 일곱 가지 행동을 요청합니다. 곧 ‘듣다.’ ‘따라 가다’, ‘함께 가다’, ‘보다’, ‘함께 묵다’, ‘말하다(선포하다)’, ‘그분께 데려가다.’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에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따라 갔습니다.”(요한 1,37). 여기서 제자가 가는 두 가지를 길을 말해줍니다. 곧 “듣다”와 “따라가다”라는 동사는, 제자 되는 길이 단지 동의하고 받아들인다는 수동적인 측면을 넘어 자발적으로 응답하는 순명의 자세를 포함하며, 단지 추종한다는 것을 너머서 운명을 같이하고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게 따라오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곧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진정 찾아야 할 것을 무엇이며, 진정 향해야 할 곳이 누구인지를 일깨워주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라삐, 어디에 묶으십니까?”(요한 1,38) 하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그분이 “묶으신 곳”이라는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라는 당신 인격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1,39).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인격적 체험을 직접 하도록 초대하십니다. 곧 원하는 그것을 “보게 되리라”는 약속과 보장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신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습니다.”(요한 1,39). 여기서, 제자들이 가는 길 세 가지를 말해줍니다. 곧 그분과 “함께 가”는 일, 그분께서 묵는 곳으로 인도를 받아 함께 가는 일이요, 그곳을 “보는” 일, 그분이 누구신지를 깨닫는 일이요, 그분과 “함께 묵는” 일, 그분을 체험하여 사랑으로 흠뻑 젖는 일입니다.
그러니, “와서 보아라.”(요한 1,39)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쪽으로 걸어라’, ‘이렇게 걸어라’라는 제자들의 삶의 방향과 방식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체험을 통하여 배우야 함을 깨우쳐줍니다. 사실 ‘제자’라는 히브리어(탈미딤)와 희랍어(마테테스)의 뜻은 ‘배움에 헌신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 모범을 우리는 엘리사에게서 볼 수 있는데, 그는 엘리야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시종이 되어 섬기고 전적으로 헌신하면서 전인격적 유대로 변형을 이루어 갑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스승과 사별할 때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2열왕 2,12)라고 부르짖으며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스승과의 인격적 관계는 친아버지를 넘어서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랍비가 다 같이 인질로 잡혀가면, 제자는 랍비의 몸값을 먼저 지불해야 한다.”, “아버지와 스승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면, 먼저 스승의 짐을 덜어드린 후 아버지의 짐을 거들어야 한다.”
결국, 제자가 된다는 것은 진리나 스승에 대한 정보적인 접근이 아니라, 교리적인 진리를 배우고 신념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승을 따라 사는, 스승을 닮아가는 진정한 변형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예수님과 함께 묶은 그들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갑니다.”(요한 1,42 참조). 여기에서 제자들의 두 가지 사명이 드러납니다. 곧 그분을 ‘말하는’ 일, 증언하고 선포하는 일이요,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가는’ 일이입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마태 28,19) 사명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동반자요 반려자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향하여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우리 주님의 동행을 바오로 사도는 참으로 아름답게 표현해줍니다.
“그분께서는 늘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내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2코린 2,14)
그렇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바로 그것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동행에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이 복된 길을 동행하시는 우리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증언하여 선포하고 증거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것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요한 1,39)
주님!
말씀을 듣고 단지 동의하지만 말고, 받아들여 따르게 하소서.
따르지만 말고, 전적인 헌신으로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오늘도 무엇을 찾고, 무엇을 원해야 할지를 일깨워주시고
저를 향해 계시는 당신을 향해 달려가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흠뻑 젖게 하시어,
당신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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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4. 연중 제2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와서 보아라
사랑합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모두를 줍니다. 좋은 것을 줍니다. 나를 생각하지 않고 너를 생각하며 함께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안드레아와 요한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곧게 하고, 외치는 소리로써의 임무를 완수하고, 추종자들을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요한은 자기가 누구인지 주제 파악하고 있었고, 분수를 알며,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나’에게서 ‘너’에게! 로 향하는 쉽지 않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하고 고백한 대로 주님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몫을 충분히 해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은 자신만이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도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정말 내면 깊은 곳에서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신 것입니다. 그러고는 ‘와서 보아라’ 하셨으며 함께 묵으시고 당신을 알 수 있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나중에 주님을 체험하다 보면 ‘무엇을 찾느냐?’ 는 물음은 ‘누구를 찾느냐?’의 물음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미사 참례하면서 만나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어떤 은총의 결과물, 그 무엇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저는 주님을 찾습니다!” 고백해야 합니다.
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1,38).하며 예수님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고,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아라”(요한1,39). 하시며 그 마음을 기꺼이 받아 주시고 그날 함께 묵었습니다. 함께 묵었다는 것은 그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머물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15,4).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5,9). 이는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그리고 우리 모두가 사랑의 관계 안에서 하나가 됨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함께 묵음으로써 예수님의 삶을 보고 느끼며 살 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과 묵으니, 그의 모든 것을 얻게 되었고 얻은 것이 복된 것이니 그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세상이 어둡고 고통스럽고 살기 힘든 곳이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그냥 내버려 두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랑이신 예수님 안에 머물러 n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몬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과 함께 머문 다음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형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과 머물면서 큰 은총을 입었으니 자기 형제와 그 은혜를 나누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형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1,41). 하고 믿음을 고백하고, 형을 예수님께로 데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눈여겨보시고 “너는 케파(베드로)라고 불릴 것이다”(요한1,42). 하시며 당신이 베드로를 통해서 무슨 일을 하실지 예고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이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다음은 그분께서 몸소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십니다.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셨듯이 우리의 손을 통해서 인도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산다는 것이 기쁨이어야 하고 또 그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내가 구원을 확신한다면 혼자만 누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전해야 할 소명이 주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와서 보아라’ 하시며 당신을 드러내셨듯이 우리도 ‘와서 보시오’ 할 수 있는 당당하고 떳떳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 혼자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이기적이고 닫힌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이웃 사랑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열린 마음으로 제자의 삶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1고린6,15) 물으시며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고린6,20). 하고 권고합니다.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니 그 품위를 지켜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품위를 지킨다는 것은 지켜야 할 도리에 충실하다는 의미이며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결국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13,35).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앞산을 보려고 앞산에 오르면 앞산을 옳게 보지 못한답니다. 역시 뒷산을 보려고 뒷산에 올라도 뒷산을 옳게 보지 못합니다. 결국은 앞산을 옳게 보려면 뒷산에 올라서 봐야 하고, 뒷산을 옳게 보려면 앞산에 올라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한발 물러서서 보아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옳게 보려면 내 눈으로 보지 말고 이웃의 눈으로 봐야 하고, 특히 믿는 이들은 주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주님의 사람인가를 옳게 바라봐야 합니다. 과연 내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을 손과 발을 통해 증거하고 있는지요?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는지요……
내 생각만 가지고, 내 편에 서서, 내 이익을 따져서는 결코 볼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볼 것을 제대로 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과 하루를 묵는 것으로 족했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하루를 보내고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었음을 기뻐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든, 성체 조배를 하든 기도 안에서, 이웃 사랑 안에서, 미사 안에서 주님과 함께 묵으십시오! 그리고 내 삶을 ‘와서 보시오’할 수 있는 떳떳함, 당당함을 키워야 합니다. ‘와서 보아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이제 내가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합니다. 보여줄 것도 없으면서 ‘와서 보아라’ 하는 부끄러움에서 다시 일어서는 한 주간의 시작이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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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4. 연중 제2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198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 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힘만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를 불러주셨습니다. 저는 5대(代)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물고기에게 물은 삶이 터전이듯이, 천주교는 제가 태어나면서부터 제 삶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가족들은 모두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세상의 이름보다 세례명이 더 익숙했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기일이 오면 연도를 바치고, 미사에 참례 했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은 용서가 되었지만 성당에 가지 않는 것은 밥을 먹지 못할 정도의 큰 잘못이었습니다. 아이는 말하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말을 배우듯이, 성탄 전야 미사, 부활 성야 미사, 판공, 묵주기도는 굳이 교리를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들 중에 성직자와 수도자가 되는 것을 하느님이 은총이라며 기뻐하였습니다. 맞습니다. 가정은 제 성소의 ‘못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동생은 자연스럽게 성직자와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2013년 교구장님께서 저를 성소국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성소국장의 소임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젊은이들이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식별하고, 지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학생들의 모임을 ‘예비신학교’라고 불렀습니다. 예비 신학생들은 중학생부터 만 29세의 젊은이들이 대상이었습니다. 매월 예비신학생들의 모임이 있었고, 신학생들이 예비신학생들 모임을 주관하였습니다. 저는 예비신학생 모임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부르심’이라는 예비신학생들을 위한 소식지도 발간하였습니다. 성소국에서 주관하는 큰 행사는 ‘성소주일과 서품식’입니다. 성소주일은 해마다 부활 제4주에 있었습니다. 서품식은 해마다 2월 첫째 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5번의 성소주일 행사는 화창한 날씨였습니다. 장소도 미리 예약을 해서 올림픽 체조경기장과 고척동 돔구장에서 서품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 4분의 보좌 주교님 서품식이 있었습니다. 2014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한도 있었습니다. 부족한 제가 큰 소임을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입니다.
어린아이가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수도 없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듣지 못하는 아이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무엘의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생기는 많은 갈등과 분쟁은 먼저 듣지 않기 때문에 생기곤 합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듣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예전에 읽은 책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3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밭에 잡초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미리 신경을 쓰는 농부이고, 이를 上農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두 번째 부류는 밭에 잡초가 이왕 생겼으면 크게 자라기 전에 뽑아 버리는 농부이고, 이를 中農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세 번째 부류는 밭에 잡초가 생겼는데 이를 신경 쓰지 않고 나중에 추수할 때 뽑는 사람인데 이를 ‘下農’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어떤 농부가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상농이겠지요.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면서 우리 신앙의 농사를 어떻게 져야 할까 생각합니다. 우리 신앙의 밭에는 죄라는 잡초가 생기곤 합니다. 첫 번째 부류는 죄라는 잡초가 생기지 않도록 악의 유혹을 물리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죄라는 잡초가 마음의 밭에 떨어졌으면 곧바로 그 죄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죄라는 잡초가 자라서 내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가 나중에 그 죄의 무게 때문에 쓰러지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면서 어떤 부류의 태도로 신앙의 농사를 져야 하겠습니까? 첫 번째 부류의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그저 마음만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안드레아와 시몬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주님께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악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고, 우리의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말씀과 기도로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우리도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분들에게 ‘와서 보시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적인 성장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와서 보라’고 말씀하셨던 주님처럼 우리들도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주님을 섬기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됩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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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4. 연중 제2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혹시 당신의 본당이 어디입니까? 라고, 하는데 예수님처럼 ‘와서 보시오.’라고 하실 분이 계십니까? 저는 예수님처럼 대답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요한이 말합니다. ‘저분이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말입니다. 그들이 기다려 온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누가 관심을 두지 않겠습니까? 누가 하느님의 사람과 함께 있어 보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분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말합니다. ‘랍비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이것은 진짜 어디에 묵고 있는지가 궁금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혹은 호감을 드러내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친절하게 ‘나는 어디에 묵고 있습니다.’라고 하겠지요. 그리고 그래도 충분히 그 질문에는 응답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속뜻을 알아들으십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보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말씀하십니다. ‘와서 보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이 만났습니다. 서로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가갑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합니다. 함께 하루를 살았을 뿐인데 말입니다. 하루 만에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을 믿으십니까?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모습은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고 서로에게 웃음 지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와서 보시오.’라는 말로 제자들을 받아들였듯이 말입니다.
먼저 다가가십시오. 먼저 웃어주십시오. 먼저 용서하려 노력하십시오. 이것이 마음을 나누는 길이고 이것이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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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묵무침
집밥의 대표반찬들을 나열하면….
김, 멸치, 김치, 콩자반, 어묵볶음, 소시지, 메추리알 장조림….
그중 오늘의 주제는 어묵입니다.
모든 조리는 그 재료에서 그 승부가 갈립니다.
좋은 재료를 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묵도 예외는 아닙니다.
생선 살 함량이 많은 어묵이 맛있습니다.
좋은 어묵을 구매하셨다면
오늘은 볶지 마시고 무쳐보겠습니다.
우선 먹기 좋게 썰고, 볼에 담아 뜨거운 어묵에 부어주세요.
30초면 충분합니다. 그 후 아주 찬 물로 살살 헹궈주세요.
물기를 탈탈 털어주시고 양념장을 만드세요.
간장1, 설탕2/1, 간마늘2/1,
굴소스2/1, 고춧가루1, 올리고당3, 송송대파2,
이제 준비된 어묵을 무쳐주세요.
이렇게 오늘도 장금이를 이겼습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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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4. 연중 제2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신부님께서 쓰신 책을 읽다가 신부님의 목표가 적혀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표가 조금 이상합니다.
“대한민국에서 고해성사를 가장 잘 주는 사제가 되는 것.”
아니 사제가 당연히 고해성사를 잘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잘 준다는 것이 무엇인가도 의문이 들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이런 목표를 갖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적어 놓으셨습니다.
보좌신부 때 판공성사를 주면서 있었던 일입니다. 판공성사이기에 많은 사람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한 여학생이 들어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울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님께서는 “뒤에 사람이 많으니까 다시 준비해서 들어오세요.”라고 차갑게 말했습니다.
문제는 이 여학생이 다음날 자살을 시도한 것입니다.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신부님은 심한 가책을 느끼게 되었고 죄책감에 사제 생활을 그만둘 생각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너무 미안한 마음에 직접 찾아가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때 이 여학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 그렇게 미안하면 앞으로 조금만 더 고해성사 잘 주는 신부님이 되어주세요.”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기 사제 생활의 목표를 대한민국에서 고해성사를 가장 잘 주는 사제가 되는 것으로 정했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삶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누구는 이 사건으로 좌절에 빠져서 포기하는 반면에, 또 누구는 더 나은 자기로 변화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또 다른 부르심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요한의 두 제자가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스승의 말을 듣고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물었고, 주님은 “와서 보아라.”라고 답변하십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께서 직접 불러야만 가능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즉, 주님과 함께 머물고 그분을 따라가야겠다는 자기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찾고 있는지 직접 가서 보아야 했습니다.
삶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결단이 그리고 자기의 적극적인 변화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삶 안에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결단이 계속 요구됩니다. 절대로 좌절하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은 두 사람이 계속 서로만 쳐다볼 때가 아니라, 자신들을 넘어서 편협하지 않은 공동의 목표를 바라볼 때 오래도록 생존한다(엘루셰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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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4. 연중 제2주일. 키엣 대주교님.
주님의 부르심
오늘 복음은 ‘부르심(성소)’에 대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신 것과 안드레아, 요한을 부르신 것은 다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4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름
주님의 부르심은 어느 순간 갑자기가 아닙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처음에는 천천히 조용하게 그러나 점점 강해집니다. 부르심은 무엇보다 주님을 향한 지향이 있어야 하며 때로는 기도와 맹세를 통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사무엘은 하느님께 자식을 바치겠다는 어머니의 맹세가 있었습니다. 안드레아와 요한은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에 주님을 만났고 주님께서 그들을 하느님께 인도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아에 의해 주님께 인도되었습니다.
응답
주님의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한다면 어려움을 맞이할 때, 고통의 순간마다 주님의 인도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에 답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응답할 때까지, 순명 할 때까지 점점 더 강하게 부르실 것이고 더욱 더 분명한 대답을 요구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3번이나 사무엘을 부르셨다는 것은 그만큼 절대적으로 그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반면 안드레아와 요한을 당신이 계신 곳으로 부른 것은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주님과 하나됨
성소란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친밀한 삶 즉 주님과 하나되는 삶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교리나 주장을 따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론적인 학문을 배우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삶을 따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삶을 따르는 영적인 삶이란 아버지와 자녀로서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신성한 영적인 생명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는 진정한 행복을 일깨워주는 사랑의 삶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서 모든 죄의 사함을 받고 주님 사랑 안에서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맞이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이 됩니다. 진정한 주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헛된 꿈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사랑을 체험한 사무엘은 자신의 모든 생애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예수님과 친밀한 저녁을 보낸 안드레아와 요한 역시 그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했습니다.
주님 사랑에 대한 증거
주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그 사랑을 증명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움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시내물이 넘쳐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 것처럼 사랑으로 가득 찬 영혼은 주님을 찬양하고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안드레아는 그분에게 형을 소개했고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그 분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주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고 그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주님 사랑 안에서의 진정한 행복을 알았기에 진실되지 않는 세상과의 거래를 거부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로 초대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성체 성사와 성경 속에서, 교리를 배우고 피정의 순간 속에 주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강합니다.
주일미사에 참여하는 것이 주님의 부르심에 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주님께 빚을 갚듯 미사에 참석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진실된 마음으로 당신의 삶에 동참하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의 길은 주님 품으로 돌아가는 여정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주님을 만났습니까? 지금 어느 만큼 주님께 가까이 갔고 있습니까? 내가 먼저 주님께 다가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처음 그 자리에 있습니까?
주님께서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두 손을 활짝 뻗어 당신을 맞이하고 계십니다. 주님께로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가보십시오. 그곳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행복이 있는 곳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봅시다
1. 주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 있습니까?
2. 주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3. 부르심(성소)에 대해 묵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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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4. 연중 제2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하여라, 주님의 제자(弟子)답게 사는 이들!
“와서 보아라”
-머뭄, 경청, 순종, 성전-
주님의 집 수도원에서 주님의 제자가 되어 수도형제들과 함께 정주한지 어언 42년째이고 여기 요셉수도원에서는 36년째 되는 해입니다. 새삼 주님 안에서 얼마나 행복한 삶이었나 생각하면 저절로 감사, 감동하게 됩니다. 과연 스승이자 친구이신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관계에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었는지 성찰하게 됩니다. 저절로 나오는 행복기도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 사랑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정말 스승이신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길이자 진리요, 희망이자 기쁨이요, 생명이자 빛입니다. 이런 주님과의 관계가 소홀해질 때 무지와 허무의 어둠은 짙어져 병든 삶이 되고, 죄악에서 벗어나기 참 힘듭니다. 때로 산책 때는 김민기의 옛 “늙은 군인의 노래”를 일부 바꿔부르기도 하며 주님과의 우정을 새롭게 환기시키기도 합니다.
“나 태어나 수도원에 수도자되어, 꽃피고 눈내리길 어언 42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수도원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올 흘러간 내 청춘, 검은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청춘”
저에겐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교회와 마리아 성모님은 어머니이자 스승이 됩니다. 영원히 살아계신 스승이자 어머니이신 교회와 마리아 성모님을 생각하며 자주 부르는 동요입니다. 요즘은 세상 떠난 육신의 어머니보다 더 친근히 와닿는 영원한 어머니이신 교회와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높고높은 하늘이라 말들하지만, 나는나는 높은게 또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니은혜, 푸른하늘 저보다도 높은 것 같애.
넓고넓은 바다라고 말들하지만, 나는나는 넓은게 또 하나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어머니은혜, 푸른바다 저보다도 넓은 것 같애.“”
중독의 시대입니다. 인공지능 역시 인간 삶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스마트폰 중독의 폐해가 막심하니 문해력, 사회성이 저하되고 관계 능력도 현저히 떨어진다 합니다. 지난 월-화요일 한겨레 신문은 2면에 걸쳐 스마트폰 중독에 대한 경고기사였습니다. 새삼 살아있는 인간관계가,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가 얼마나 절대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정말 좋은 스승은 친구와도 같습니다. 무엇보다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스승이자 친구인 예수님과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우선적이요 절대적입니다. 길이자 진리요, 생명이자 빛이요, 희망이자 기쁨이신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관계와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 참나의 실현이요 참행복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온갖 중독의 시대에 어떻게 하면 주님의 참제자가 되어 온전한 영적 건강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 그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1.늘 참 좋은 스승이신 주님안에 머무르는 것이 제자의 첫째 자질입니다.
정말 끊임없이 찾아아 할 바 참 스승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사람은 마음 깊이 참 스승을 찾는 영적 갈망이 있습니다. 진정 좋은 스승이라면 세례자 요한처럼 제자들을 참 스승인 예수님께 인도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요한은 두 제자에게 말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의 말에 즉각 반응한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바야흐로 스승을 따르는 제자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무엇을 찾느냐?”
구도자의 우선적 자질이 진리이신 주님을 찾는, 지칠줄 모르는 열정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열정에 있습니다. 주님의 참 제자인 89세의 고령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정신력은 60세 남성 수준이라 합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와서 보아라.”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 머무르고 싶은 제자로서의 갈망을 한눈에 알아채신 주님의 초대입니다. 와서 나와 함께 머물며 보고 듣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에 배움에 대한 사랑이 제자로서의 기본적 자질입니다. 참 좋은 스승이신 예수님안에 머물며 배울 것은 무궁무진 끝이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자체가 온통 배움의 모범이니까요.
저로 말하면 주님의 집 수도원에서 42년째 주님 사랑안에 머무르는 정주의 삶이었으니 과연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충실한 삶이었는지 성찰과 더불어 더욱 분발하게 됩니다. 간절한 소망은 날로 깊어지는 사랑의 예닮의 삶 하나뿐입니다. 주님을 만나 크고 깊게 배운 안드레아는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말하면서 자기 형 시몬을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 불릴 것이다.” 두 형제가 한 스승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형제간의 우정도 주님 안에서 더욱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2.주님 안에 머무름에 이어 경청과 순종이 제자로서의 두 번째 자질입니다.
우리는 제1독서 사무엘 상권에서 참 아름다운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만납니다. 엘리의 사무엘 제자에 대한 사랑과 배려, 그리고 사무엘의 깨어 스승 엘리에게 경청하고 순종하는 자세가 너무 마음에 듭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 마다 깨어 경청하다 순종하는 사무엘의 반응이 참 제자답습니다.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내 아들아,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거라.”
세 번 반복된 후, 엘리의 가르침에 따른 사무엘의 순종적 반응이 참 아름답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아, 정말 이런 경청과 순종의 자세로 살아야 제자다운 삶입니다. 사무엘에 자라는 동안, 그가 한 말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니 그의 철저한 깨어 있는 삶이, 경청과 순종의 삶이 놀랍습니다.
3.성령의 성전인 자기의 몸을 잘 돌보는 것이 제자의 세 번째 자질입니다.
성령의 성전을 더럽히는 탐식의 식욕이요, 탐욕의 물욕이요, 불륜의 성욕입니다. 한계를 넘어선 식욕이, 물욕이, 성욕이 사람을 추하게 하고 성령의 성전인 몸을 더럽힙니다. 특히 경계할바 음욕의 불륜이요 성적 타락입니다.
“몸은 불륜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불륜을 멀리하십시오. 사람이 짓는 모든 죄는 몸밖에서 이루어지지만, 불륜을 저지르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에게서 성령을 받았고,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성전인 우리의 몸을 탐식, 탐욕, 불륜의 성욕으로부터 깨끗이 함으로 우리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때 명실공히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겠습니다.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스승이신 예수님을 닮은 제자의 삶을 원하십니까?
1.늘 주님 안에 머무르는 정주의 삶에 충실하십시오.
2.늘 깨어 주님께 귀기울이는 경청과 순종의 삶에 충실하십시오.
3.늘 성령의 성전인 몸을 깨끗이 돌보십시오. 결코 탐식, 탐욕, 불륜으로 성령의 성전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날마다의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잘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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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4. 연중 제2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요한이 자기 제자 두 명에게
예수님을 알려줍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실 것 같은데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물론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찾고 싶었을까요?
그들의 대답에 그것이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답은 엉뚱합니다.
'스승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아직 그들에게 예수님은
가르침을 주는 스승에 불과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께 다가오도록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습니다.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은 안드레아로
그는 자기 형 시몬에게 가서 말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봅니다.
즉 예수님 안에 구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들이 그토록 찾고 싶었던 것은 바로
구원이었습니다.
이 짧은 이야기에
우리의 신앙 여정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구원을 찾는 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는 것도
우리의 구원을 위한 노력입니다.
그 구원을 찾기 위해서
요한 복음은 예수님 곁에 머무르도록
초대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그분을
온전히 다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아의 말이
스승님에서 그리스도로 바뀐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 곁에 머무를 때
하느님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신앙 생활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지켜야 할 것도 많고
세상의 가치가 점점 신앙의 가치와 멀어져 가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곁에 머무르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 머무르는 힘은
구원에 대한 갈망과 연결됩니다.
구원을 원하면 원할수록
하느님 곁에 더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선 우리는
내 안에 있는 갈망
구원을 원하는 마음이 있는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 청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의 상황에도
하느님 곁에 머무를 수 있는 힘을
청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과 함께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도 하느님을 나의 구원자로 고백하면서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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