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싱싱한 오렌지를
먹으면서 향긋한 내음을 즐긴다.
그런데 향긋함은
이내 사라지고 책상 위에서 그윽한 매화 향기가 책갈피 사이로 다가온다.
매화의 그윽한 향기는
이 고요한 시간에 나의 메마른 영혼에 스며들어서 심성이 맑아지고
낮 동안의 번잡한
고뇌에서 벗어나게 한다
현란하여 쉽게 이끌리는
외래어 보다 깊은 의미의 우리말이 많아서 뿌듯하다.
그 중의 하나가 '그윽하다' 로 이 말은 세 가지 뜻으로 쓰인다.
이은상 님의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처럼 깊숙하고 아늑하며
고요하다는 뜻으로
정취情趣를 나타내는
경우, 두 번째는 뜻과 생각이 깊은 심성을 나타내는 그윽함이다.
셋째는 장미처럼
진하고 화사하거나 허브처럼 맵싸한 것이 아니고 느낌이 은근한 매화 향기
같은 것을 표현하는
그윽함이다.
그러나 ‘그윽하다’는 한마디에는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어 많은 것을 연상하게도
한다.
안개 속 같은 은밀함과
꽃 너울 아래에서의 아늑함, 그리고 꿈과 동경으로의 통로가 연결되고,
순간이 아닌 영원으로
이어질 것 같다.
그윽한 둥우리 속은
생명이 잉태되거나 딱딱한 껍질을 깨고 나오게 하는 신비함도 있다.
봄날 대지에서 삐약거리는
병아리들이 탄생한 곳이 그윽한 둥우리가 아니었던가.
세상이 혼돈에 휩싸여
있을 때 더욱 귀하게 여겨지는 말이기도 하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찬송가 구절처럼
참된 평화를 일깨워주는 그윽함의 의미를 더욱 소중하게 여긴다.
그윽한 상념에 잠긴
얼굴에 마음이 흔들리고, 사랑을 머금은 그윽한 눈길,
그 눈길은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같은 눈길보다 사람을 끌어 당기리라.
수다스러운 말로
그윽함의 본뜻을 더 이상 흐려 놓지 말아야겠다.
- 유혜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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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집 서울 간, `우리말 우리글 사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