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콘 |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한국기독교연구소 | 2021년 12월 17일 | 240쪽 | 14,000원
“한 여자가 자기 삶의 진실을 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세계는 터져 버릴 것이다.”
페미니즘 경구로 종종 언급되는, 뮤리얼 루카이저의 시 한 구절이다. 어째서 “한 여자가 자기 삶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 세계의 폭발로 이어지는 것일까? 한 사람 안에는 차별과 억압을 포함한 사회의 모든 맥락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겪는 몸은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것이기에 이해의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강렬하며 진실하다. 그 이질성이야말로 ‘세계를 터뜨리는 힘’일 것이다.
이 책에서는 한 흑인이 자기 삶의 진실을 말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자기 삶의 진실을 말해 버렸다. 그러므로 제임스 콘이 삶을 회고하며 쓴 이 책은 한 흑인이 진실을 말했고, 세계가 터져버린 이야기다.
시대에 응답하는 신학
제임스 콘은 칼 바르트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아드리안 대학에 임용된다. 거기서 그는 “좋은 니그로가 되기 위해 애썼”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가 살던 시대는 그런 다짐을 품고 살아갈 수 없는 시대였다. 1967년, 디트로이트에서 흑인 차별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여 일어난 대규모 ‘폭동’(riot)이 그의 삶에 균열을 낸 결정적 순간이었다. 이러한 상황 앞에 그가 배운 신학은 무력했다. 아니, 무관심했다.
학교에서 배운 백인 신학자들의 신학으로는 흑인의 역사와 고통, 경험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들이 흑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에는 나이지리아 소설가 치누아 아체베의 말이 인용된다. “시인은 노예 상인이 될 수 없다.” 콘이 깨달은 것이 이것이다.
신학자는, 그리고 하나님은 노예 상인이 될 수 없다. 차별과 폭력에 침묵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선적으로 출애굽의 하나님, 노예 된 백성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이러한 격렬한 깨달음 속에서 흑인신학이 탄생한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표지 ⓒ한국기독교연구소
고통의 언어로 글쓰기
그는 자신 앞에서 강렬하게 분출되는 이 모든 것을 글로, 책으로 쓰기 시작한다. “흑인들과 흑인들이 정의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데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하느님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유럽인들과 미국 백인들의 지도에 따라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글을 쓸 수” 없었다.
한 사람이 애써 외면해 온 모든 것을 용감하게 직면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를 통해 보게 된다. “나는 단어들이 종이 위에서 춤을 추듯, 내 글이 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거의 다 들을 수 있었다. 글쓰기는 나를 놀라게 만들었고, 나는 항상 이 어휘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잘 알 수 없었다. 단어들은 나를 초월한 자유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자신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그것이 정리되고 공인된 생각에서 나온 언어가 아니라, 자신의 ‘몸’의 경험에서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한 사람의 진실이 개방될 때 당사자를 포함한 세계는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를 강렬히 휘두르고 불태우는 힘은 무엇보다 고통이다. “흑인신학을 만들어 낸 것은 바로 도시 중심가와 남부 린칭트리의 뿌리에서 타고 있던 흑인의 불꽃이었다”는 그의 말처럼, 고통의 역사가 그를 관통했던 것이다.
자신의 신학을 한다는 것
흑인신학의 창시자로 신학계와 세상과 씨름한 콘의 삶은 말 그대로 하나의 폭발이었다. 세계의 아픔 앞에 자신을 폭발시킨 힘의 근원, 평생 그치지 않고 뿜어져 나온 에너지의 근원은 그가 자신의 신학을 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모든 성도는 신학자’라는 루터의 말처럼, 우리는 (넓은 차원에서) 자신의 신학을 가지고, 또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나에게 절실한가, 나의 고통과 고민과 투쟁을 온전히 담아내는 신학이며 신앙인가 하는 질문 앞에서는 머뭇거리게 된다.
“니버가 그러했고, 아우구스티누스도 마찬가지였는데,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신학을 대신할 수 있는 신학자는 없다.… 우리 스스로 말하는 것의 한계를 자각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시대와 우리가 선 자리에서 신학을 해야 한다.”
물론 모두에게 이러한 신학을 획일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다. 불편하고 부담스러워서 뒤로 물러서고 싶은 마음이 들지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높게 치솟는 한 인생의 불꽃에 뒷걸음질하게 된다. 그러나 맹렬히 뿜어져 나오는 불길에는 이해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힘이 있다. 주춤주춤 물러나던 우리는 이내 한 발짝씩 그 뜨거움을 향해 다가가게 되고 마는 것이다.
박예찬 IVP 편집자
이 글은 기윤실 <좋은나무>의 기사를 허락을 받고 전재한 것입니다.
https://cemk.org/34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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