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에게 보내는 편지(126)
이맘때면 떠오르는 그림이 있습니다. 마르지 않는 그리움의 옹달샘, 즉, 어렸을 때의 고향의 풍경이 가슴에 샘물처럼 고여옵니다. 그래서 정지용 시인은 '그곳을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하고 노래했는지 모릅니다. 하루종일 하얀 솜털 같은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면 강아지처럼 뛰어 다니며, 눈사람을 만들고, 살을 에이는 추위에 추녀 끝에 주렁주렁 달린 수정고드름을 아이스케키 먹듯 아작아작 깨물어 먹었습니다.
새로운 달력을 벽에다 갖다 걸고, 지난 달력을 떼어 냈습니다. 지난 달력을 보니 여기저기에 쓰여 진 메모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한 해 동안 일어났던 일들, 만났던 사람들이 필름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새 달력을 한 장씩 넘기니 다가올 사건들이 생각 속에 떠오릅니다. 사라진 시간은 기억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데,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은 부푼 기대 속에 이미 와 있습니다. 지난 달력을 보면서 수많은 아쉬움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 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김용택/그랬다지요)
사람들은 외롭고 힘들 때 가족을 찾습니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마음을 함께 나누고 함께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가족인가 봅니다. 어느 보험회사 광고는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한 주부가 어깨가 축 처진 남편의 손을 잡고 일본 만화영화 ‘캔디’의 주제가를 부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가족의 힘이 얼마나 큰지 보여줍니다. 또 한 카드 회사는 아이들을 내세워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고 노래를 부르며 아빠를 응원합니다. 이렇게 가족은 소중한 것이고 우리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가치로 존재합니다.
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저는 건강한 사회인이며 성인으로 상당히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혼자 생활한다는 엄청난(?) 외로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문제이지만 인생이 그렇게 논리대로 정답대로 되지 않음을 항상 피부로 느끼며 삽니다. 요즘은 건강도 건강이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두려움(?)은 과연 아침에 눈을 뜰 수 있을까? 혹 아무도 모르게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소름마저 끼칩니다.
이정하 님의 ‘조용히 손을 내밀 때’라는 글입니다.
“내 마음속에 가장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사람은 내가 가장 외로울 때 내 손을 잡아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손을 잡는다는 것은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일인 동시에 서로의 가슴 속 온기를 나눠 가지는 일이기도 한 것이지요. 사람이란 개개인이 서로 떨어진 섬과 같은 존재지만 손을 내밀어 상대방의 손을 잡아주는 순간부터 두 사람은 하나가 되기 시작합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조용히 손을 내 밀었을 때 그때 이미 우리는 가슴을 터 놓은 사이가 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우리 서로 손을 붙잡아 주시지 않을래요?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던 베드로와 요한처럼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잡아준다면 영적 영아사망률은 급격히 떨어지리라 확신합니다.
연리지(連理枝)라는 말을 아십니까? 혼자 자라도 모자랄 공간에 서로 가까이 있는 두 나무가 서로 따로 자라면 둘 다 죽기 때문에 자라면서 서로 의기 투합하여 하나로 합쳐지는 현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가지끼리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에는 맞닿은 자리가 붙어 한 나무로 변합니다. 연리지 현상이 신기한 것은 합쳐지기 전의 성격과 기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흰 꽃을 피웠던 가지엔 흰 꽃이 붉은 꽃을 피웠던 가지엔 붉은 꽃이 그대로 피어납니다. 마치 불과 물처럼 제각각인 나무들이 일단 한 몸이 되면 서로의 개성을 인정하고 조화롭게 사는 모습이 그저 감탄스러울 뿐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려고 한다면 그가 믿고 희망하는 것을 넘어 그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