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01
9월2일[연중 제21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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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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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TSHvKO0HIBk
{김형균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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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맞춤형 선물은 무엇입니까?>
나이 탓인지 자주 슬슬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기쁘고 보람된 순간들도 떠오르지만, 부족하고 부끄러운 순간들이 더 많이 떠올라 가슴을 칩니다.
그러나 동시에 과분할 정도로 흘러넘치는 다양한 은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더 빨리 불러가실 수도 있었는데, 하느님께서 큰 자비를 베푸셔서, 우여곡절 속에서도 오늘까지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한없이 부족하지만, 이런저런 탈렌트를 선물로 주셔서 이웃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시니, 사방이 온통 감사꺼리로 충만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생명으로 불러주시고, 그 위에 그리스도인으로, 수도자로 불러주시고 다양한 탈렌트를 선물로 주신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그저 내 한목숨 지탱하라고, 나 하나 호의호식하면서 즐기라고 불러주신 것이 절대 아닐 것입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탈렌트가 무엇인지 잘 살펴보고, 최대한 계발해서, 이웃과 교회, 세상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고 기여하라고, 결국 적극적인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최종적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라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불러주신 것이 아닐까요?
오늘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봅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탈렌트는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맞춤형 선물은 무엇인가? 어느 정도인가? 어떻게 계발할 것인가?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어떻게 하느님께 봉헌할 것인가?
여차하면 드러누워 하릴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제일 절친 같은 소파와 안락의자, 티비나 모니터와 과감히 결별하고, 부단히 일어서야겠습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시간을 하늘나라를 위해 어떻게 하면 창의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겠습니다.
하늘나라는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 나른한 꿈이나 공상을 통해서 절대로 획득할 수 없습니다. 잠에서 과감히 깨어나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매일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시간과 기회, 재능과 에너지를 활용해서 적극적으로 헌신하고 봉사함을 통해서, 우리 앞에 하늘나라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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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생각하는 것보다 더 받았다.>
저희 성당 옆에는 수녀원에서 하는 노인 요양원이 있고 대부분은 많은 장애를 지니신 분들입니다. 제가 한 달에 한 번씩 미사를 드려드리는데 알아들으시는 분이 거의 없으십니다. 본래 지난주에 미사를 해야 했지만, 눈병으로 한 주 연기를 해서 오늘 미사를 드려드리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제 저녁 성경공부 강의를 마치고 오늘 오전에 일본으로 떠나는 동기 신부와의 마지막 모임이 있다는 것이 늦게야 생각이 났습니다. 수원에 가서 모임을 하고 내려오면 매우 늦을 것이고, 그래서 눈병이 아직 낫지 않아서 미사를 더 연기해야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은 눈병은 거의 나아가고 있었지만, 오전에 피곤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본당 수녀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예비신자 한 분이 교통사고가 나서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할 일도 많은 데다 피곤했지만, 요양원 어르신들에게 미사를 해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고 또 수녀님이 은근히 같이 가자고 하시는 것 같아서 병자방문 준비를 하고 나갔습니다.
가는 도중 예비신자교리 봉사자분이 그 분은 근래에 들어서 집에 우환이 많아서 남편이 성당 나가는 것을 매우 반대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자매님은 너무 소극적이라 말도 잘 안하시는 편이고 우울증 증세도 있는 분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는 신자분들도 익히 잘 아십니다. 그래서인지, 그리고 저의 잘못이겠지만 봉사자분도 제가 예비신자 병자 방문 가는 줄 모르고 병원에 예약이 되어 있어서 가는 줄로만 알았다고 합니다.
사실 그만큼 신자 한 명 한 명에게 신경 쓰지 못하고 사는 것이 저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병실에 들어섰는데 얼굴도 익숙하지 못한 한 자매님이 일어서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수줍게 인사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서 바로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제가 찾아올 줄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저는 얼굴도 바로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해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몸은 크게 다치시지는 않고 타박상으로 마무리 될 듯 싶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또 남편이 교통사고가 났었고, 아들이 희귀병에 걸렸었는지 등을 울고 웃으시면서 열심히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봉사자들은 돌아오면서 그 자매가 그렇게 행복하게 또 목소리도 크게 말씀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들 하셨습니다. 자매님은 지난 주 교중 미사 때 제가 미사 때 평화의 인사를 가장 처음으로 악수하면서 해 주셨던 것을 가슴에 새기고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는데, 결국 교통사고가 났다고 하시며 웃으셨습니다.
저는 기억하지도 못하지만, 그 분은 자신의 손을 처음으로 제가 잡아주었다는 것이 매우 큰 기쁨이셨던 것입니다. 물론 기도하고 안수를 해 드리는 내내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 정도의 교통사고는 바쁘다는 핑계로 오려고 하지 않았겠지만, 오늘 우연찮게 방문해 보면서 사제라는 존재의 힘을 다시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실 사제라는 존재가 신자들에게 이만큼 큰 기쁨을 주는 존재라는 사실을 저조차도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큰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서 방문하려고 했을 것이고, 악수 한 번 해 주는 것도 신자 한 분에게 이렇게 기억에 남는 일이 된다면 모든 분의 손을 잡아 드렸을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하느님이 주신 능력이 매우 작다고만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게을러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양원 어르신들이 한 달에 한 번 제 얼굴을 보기 위해 기다리셨지만 이번 달은 이렇게 지나버리게 한 것에 대해 더욱 미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탈렌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종에겐 다섯 탈렌트, 어떤 종에겐 두 탈렌트, 어떤 종에겐 한 탈렌트를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탈렌트의 차이를 심리적인 차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 주셨는데 어떤 사람은 많이 주셨다고 느끼고 어떤 사람은 적게 주셨다고 불만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이 주셨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열심히 활용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반면, 적게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불만으로 노력도 안 하고 게을러지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 한 탈렌트만 받아서 불만으로 가득차서 그것을 땅에 묻어놓기만 했던 사람은 주인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즉 주인을 무서운 짠돌이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짠돌이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다른 종들보다 적게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의 재산을 불려드릴 필요도 느끼지 못하게 되고 자연적으로 게을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받았습니다. 나의 미소가 자살하려는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나의 작은 관심이 아무도 고치지 못하는 우울증을 고칠 수도 있습니다.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여 게을러지는지, 게으르기 위해서 적게 받았다고 믿으려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받은 능력은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을 믿지 못하면 자연적으로 게을러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섯 탈렌트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한 탈렌트밖에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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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5,14-30: 탈렌트의 비유
오늘 복음에서 탈렌트는 각 사람의 능력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활용하는 능력을 말한다. 모두가 자신의 능력을 아무것도 아니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 자신의 구원과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재산을 맡기신다. 이것은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적 선물을 주신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또 한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맡겼다. 이들은 저마다 다른 액수를 받았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한 탈렌트를 받았다고 결코 적은 액수를 받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한 탈렌트는 엄청난 돈이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그 탈렌트를 이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그리고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이처럼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주인의 돈을 땅에 묻었다. 이것은 자신이 받은 탈렌트를 주인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욕망을 충족시키며 사는 모습이다. “오랜 뒤에”(19절) 주인이 와서 종들과 셈을 하게 된다. 첫째 종은 자신감에 차서 주인에게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20절) 주인은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21절). 이 말씀은 온갖 축복의 나라로 들어오라는 뜻이다. 두 탈렌트를 더 벌은 사람에게도 같은 칭찬과 함께 영원한 보상으로 인도되었다.
한 탈렌트를 받아 땅에 숨긴 종은 자신의 것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볼 마음이 없었다. 게으른 종은 묻어두었던 탈렌트를 찾아 주인에게 돌려준다. 주인은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26절) 하면서 종을 꾸짖은 다음,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종에게 주라고 한다. 그리고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9절) 한다. 사랑을 지닌 사람은 누구나 다른 선물들도 받는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그가 받은 것처럼 보이는 선물들마저 빼앗긴다. 자기 능력을 잘 사용하지 않으면, 그 능력이 자기에게 있는지도 모르며,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빼앗겨도 빼앗긴 줄도 모르게 된다. 그때 주인은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30절) 선언할 것이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내가 받은 탈렌트를 늘리려 노력하는 삶을 살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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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제가 미국에 와서 하는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신문사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직원들이 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구독자를 늘리기 위해서 홍보를 다니고, 광고주인 여행사와 함께 성지순례를 다니고 있습니다. 상반기에 3번 다녀왔고, 가을에 1번 더 다녀올 예정입니다. 신문사의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아직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동북부 ME 대표신부를 맡아서 봉사하였고, 올해부터는 동북부 꾸르실료 지도신부를 맡아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2020년 8월부터 브루클린 한인 공동체의 주일미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어느덧 3년이 넘었습니다. 퀸즈 한인성당에는 평일미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매일 새벽에 복음 묵상을 나누고 있습니다. 어느덧 10년이 되어갑니다. 제가 이렇게 자랑 아닌 자랑을 하는 것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달란트의 비유에서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진다고 하셨습니다.
생각해보니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신문사는 제게 잠자리를 주고, 먹을 것을 주고, 월급을 줍니다. 신문홍보를 다니면서 타주로 여행을 가기도 하고, 성지순례를 다닐 수 있으니 성화가 되어서 좋습니다. ME 주말 봉사를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팬데믹의 터널을 함께 지날 수 있었습니다. 줌으로 하는 강의와 영상 강의에 도움을 받았습니다. 브루클린 한인성당에서 미사를 하면서 저 또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교우들이 서품 30주년을 축하해 주었고, 올해는 회갑도 축하해 주었습니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듯이, 사제들은 신자들과 함께 할 때 힘이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퀸즈 성당 평일미사를 도와주면서 신부님들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함께 캠핑도 가고, 여행도 다녔습니다. 자칫 외로울 수 있는 미국생활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사제관에 숙소가 있어서 손님이 오면 사제관에서 지내기도 합니다. 매일 아침 복음 묵상을 하면서 제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 기뻤습니다. 물론 저 자신의 영적인 생활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달란트의 비유는 제게도 맞는 말씀입니다.
다섯 달란트를 가진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이웃을 위해서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나눌 것이 없어서 나누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에 나누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선을 베푸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음이 부활로 열매를 맺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고,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깁니다. 웃으면 웃을 일이 생기고, 찡그리면 찡그릴 일이 생깁니다. 이해하면 이해할 일이 생기고, 오해하면 오해할 일이 생깁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능력과 힘을 주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감사와 기쁨, 이해와 사랑은 우리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힘입니다. 미움과 분노, 오해와 불신은 우리의 능력을 땅에 묻는 가장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늘 마음에 담고 살면 좋겠습니다.
“형제애에 관해서는 누가 여러분에게 써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느님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지시한 대로,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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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반석, 걸림돌>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1-23)
루카복음에 있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보면, 두 제자는 메시아로 믿고 있는 분이 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셔야만 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두 제자가 “메시아라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일을 당한 것을 보니 메시아가 아니었나 보다.”라고 의심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메시아이신 분이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 이해할 수 없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두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 24,25-26)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와 이유와 목적을 설명해 주셨을 텐데, 복음서에는 그 설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냥 구약성경을 설명해 주셨다는 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루카 24,27)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히브리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히브 9,15)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히브 9,26)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10)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로마 5,8-9) 인용한 말들을 요약해서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다.”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 일을 ‘대속(代贖)’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대속’은, 인류의 죄를 대신 씻어서 구원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왜 꼭 그런 방법이어야만 했는가?”라고 물으면, “하느님의 뜻이 그렇다.”라는 말 외에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어떻든 부활 전에는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부활 후에는, 그리고 성령을 받은 후에는 모든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십자가의 길을 가시려는 예수님을 강하게 말린 것은, 수난의 의미와 이유와 목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꼭 그런 방식이어야 하는가? 쉽고 편한 방식은 없는가?”
<메시아를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메시아로 오해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류 구원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께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더라도 사도들은 그 설명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라는 말은,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가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길을 바라보고 계셨는데, 베드로 사도는(사도들은) 십자가의 길이 아닌, 쉽고 편한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사탄아’라고 부르신 것은 그가 사탄이라는 뜻도 아니고, 마귀 들렸다는 뜻도 아니고, 당신의 길을 가로막는 것은 사탄이 하는 일과 같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내게서 물러가라.”라는 말씀은, 원문대로 번역하면 “내 뒤로 가라.”, 즉 제자로서 스승의 뒤를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라는 말씀은,“걸림돌이 되지 말고 반석의 본분을 지켜라.”라는 뜻입니다. <똑같은 ‘바위’이지만,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 반석이 되고, 예수님을 가로막으면 걸림돌이 됩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의 방식이고, ‘사람의 일’은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방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수난 예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 예고 말씀도 하셨습니다. 세 번 다 그렇게 하셨습니다.(마태 17,22-23; 20,17-19) 제자들의 반응을 보면, 첫 번째 예고 때에는 베드로 사도가 강하게 말리다가 크게 혼났고, 두 번째 예고 때에는 제자들이 몹시 슬퍼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세 번째 예고 때에는 제자들의 반응이 아예 없습니다. 제자들은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들었거나 무시했고, 수난 예고 말씀에 대해서만 반응한 것으로 보입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십자가는 바로 앞에 있는 생생한 현실이고, 부활은 십자가보다 더 이해하기 어렵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서 그랬던 것일까? 십자가는 가깝고 부활은 멀었기 때문에 그랬을까? 제자들의 그 모습이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일 때가 많습니다. 지금 걷고 있는 길의 끝에 주님께서 주시는 승리와 영광과 기쁨과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믿지 못하거나 생각하지 못하고, 가시밭길을 걷는 것만 같아서 너무 힘들다는 생각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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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지난 이틀 동안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자세에 관한 두 비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길을 떠나며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긴 주인에게 충실하였던 종의 모습(그제 복음), 그리고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신랑을 맞이하려고 등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던 다섯 처녀의 모습(어제 복음)은 ‘깨어 있는’ 신앙인의 표상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같은 주제를 심화하는 세 번째 비유 이야기를 듣습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주인의 재산을 맡게 된 종들은 재산을 늘리도록 임무를 받는데, 그 실행 과정이 대조적으로 그려집니다. 탈렌트를 잘 활용하여 좋은 성과를 거둔 종들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주인에게서 ‘착하고 성실한 종’으로 인정받으며 더 많은 일을 맡게 됩니다. 반면에 땅에 그대로 묻어 둔 셋째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비난받고 ‘쓸모없는 종’으로 여겨져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됩니다.
우리는 셋째 종의 태도, 곧 자신이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한 이유를 주인에게 돌리는 모습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주인이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는 데에서 모으는 모진 사람이기에 두려워서 그러하였다는 그의 항변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주인이 그런 사람인 줄 알아서 정말 두려웠다면, 오히려 어떤 노력이든 더 기울여야 하지 않았을까요? 만일 그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겼다면 결과가 달랐을까요? 어떤 이는 그에게 맡긴 금액이 너무 적어서 성과가 없었을 것이라고 그를 두둔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한 탈렌트도 노동자 하루 품삯(데나리온)의 육천 배나 되는 굉장히 큰 화폐 단위입니다. 주인은 셋째 종의 태도를 정확히 ‘게으름’으로 지적합니다. 그는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자녀에게 ‘탈렌트’를 주셨습니다. 탈렌트는 우리 분수에 넘치는 큰 능력과 은사들로, 주님께서 활용하라고 맡겨 주시고, 결실을 거두는 도구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게으른 종이 아닌 성실한 종으로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다른 이들보다 너무 적게 받았다는 실망감 때문에 지금 가진 것을 하찮게 여기거나, 그것을 땅에 묻어 버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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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하느님에게서 사랑의 계명을 받아 잘 실천한다고 칭찬하면서 더욱더 그렇게 하라고 권고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디아서 5장 6절) 은총은 풍부한 열매를 맺게 해 주는 생명의 씨앗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향하여 탈렌트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멀리 떠나는 부유한 주인이 자기 재산을 세 명의 종에게 맡겨 저마다 제 능력에 따라 벌어들이게 합니다.
분명 비유에서 주인은 예수님을, 주인의 여행은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심을, 주인의 돌아옴은 주님의 재림을 나타냅니다.
종들은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깨어 있어야 하는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나타냅니다. 셈을 하는 것은 심판의 심사를, 판결은 다시 한번 축제의 관례적인 모습으로 상징되는 하늘 나라에 함께하거나 거기에서 내쳐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실수하는 죄인임을 살펴보고 깨닫는 일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과도한 안전의 열매인 무책임과 무관심, 게으름과 편안, 이기주의와 경직된 두려움은, 그리스도인이 오늘날에 저지를 수 있는 사회적인 대죄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당신의 탈렌트를 적극적으로 잘 활용하였는지 물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받는 탈렌트는 당신 나라의 재산과 재물, 곧 구원, 믿음, 당신 사랑과 우정 ……, 그다음에 자연적인 선물, 곧 생명과 건강, 지식과 의지, 가족과 교육, 계획과 노동 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교 성소는 다른 모든 것을 요약하는 큰 탈렌트입니다. 이 모든 선물과 탈렌트는 우리가 개인적이고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선물과 탈렌트의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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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유재훈 솔로몬 신부님]
<하느님은 참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참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각자의 능력―신앙·지성·건강―에 따라서 재능(달란트)을 주십니다.
저는 동기 신부들의 재능을 부러워한 적이 있습니다. 왜 나는 박모 신부처럼 운동신경이 좋지 않을까? 왜 나는 김모 신부처럼 노래와 악기 다루는 실력이 없을까 하며 제 자신의 부족한 재능에 대하여 하느님께 원망하였습니다.
동기 신부들의 재능을 부러워하다 보니 제 모습만 초라해 보였습니다. 어느날 초라한 제 모습 속에 어떤 재능이 있나 살펴보니 저만의 독특한 재능이 숨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키워 나갈 생각은 않고 남이 가진 재능만 부러워하며 사는 일이 많습니다.
하느님은 공평하십니다. 한 재능을 가지기 위해서는 신앙과 지성과 건강이 겸비되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꼴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의 능력에 맞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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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사도 바오로는 자신과 일행이 공동체에 폐를 끼치는 것을 늘 피 하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우리에게도 큰 교훈이 됩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사랑하는 진심과 그의 삶의 원칙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공동체에 사도 바오로는 이런 글을 씁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더욱더 그렇게 하고, 우리가 여러분에게 지시한 대로,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십시오.”(테살로니카 1서 4장 10절)
사도 바오로가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을 때 그는 폰토스 출신의 아퀼라와 프리스킬라라는 유다인 부부를 만납니다. 그들이 로마에서 있을 때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칙령에 따라 추방되어 그곳까지 왔는데 공교롭게도 그들 직업이 같아서 더 가까운 친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천막을 만드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장 1절-3절)
그는 공동체에 폐를 끼치지 않고 당시 군인들 천막을 위해서 쉽게 납품할 수 있기 때문에 사도 바오로는 생업을 하며 재물에 억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사도행전 20장 34절)
사도바오로는 테살로니카 둘째 편지에서 게으름 생활에 경고하면서 격언처럼 자신의 삶을 들어 다음과 같이 당부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어떻게 본받아야 하는지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테살로니카 2서 3장 7절-10절)
그래서 그는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테살로니카 2서 12절)라고 당부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탈렌트 비유를 들어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사람의 삶의 태도에 대해서 가르침의 말씀을 하십니다. 비유의 말씀에서 다섯, 둘, 한 탈렌트를 주인으로부터 받은 종들처럼 사람은 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각 다른 능력의 선물을 받는다고 설명하십니다.
주인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다섯, 둘, 한 탈렌트를 나누어 준대로 돌아와 종들에게 셈을 하도록 합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종은 다섯 탈렌트를 더 벌고 두 탈렌트를 받은 종은 두 탈렌트를 더 벌지요.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종은 그것을 땅에 묻어두는 것입니다.
다섯 탈렌트를 번 종이나, 두 탈렌트를 받은 종은 칭찬과 함께 많은 일을 맡기겠다고 주인이 말합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그대로 묵힌 종에게는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호령과 함께 엄한 심판의 말씀이 내려집니다.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오 복음 25장 30절)
예수님께서는 탈렌트를 묵히는 종을 향해 게으름을 나무라십니다. 그리스 철학의 풍조 중에 <일리아스와 오데세이>이 작가 <호메르스>는 그의 작품에서 신이 인간을 미워해서 노동을 강요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노동을 경시했고. 로마 제정기 스토아 학자 세네가도 그의 글 중에 그리스인들의 노동을 떠나 휴식을 즐기는 여유로움의 풍조를 인용하지요.
아테네 사람들은 노동은 종들에게나 하는 것으로 여기는 모습입니다. 이런 풍조가 테살로니카 이방인 공동체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점을 강하게 반대하며 직접 노동하며 먹을 것을 자신이 마련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 시대나 비단 테살로니카 공동체에 국한 된 문제가 아닙니다. 공동체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하지는 않고 입으로 여기저기 간섭하며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도 각자 다르게 받은 탈렌트이지만 성실하게 그것을 쓰며 최선을 다하라고 이르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비추어 보며 우리도 우리가 받은 탈렌트를 묵묵히 생활하며 성실하게 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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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자의 그릇대로 알맞은 탈렌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모두가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바탕으로 나의 노력을 더해 무엇인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최선을 다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더 많은 것을 받지 못하였다고 아쉬워하며 때때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만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받지 못했다고 투덜댑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 될 것을, 스스로 비교하여 놓고는 교만하거나 비참함을 맛보기도 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복음을 보면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과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 그리고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중, 둘은 자기에게 주어진 탈렌트를 활용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것을 땅에 묻어 두고 말았습니다. 각자의 능력대로 주었으니 할 수 있는 만큼 활용하면 되는데 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탈렌트를 주었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기대가 있었을 터인데 그 바람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더더욱 처음부터 주인의 동기를 오해하고 하고 있었습니다. 더 벌지 못한 것에 대해 잘못하였다고 고백하면 될 것을 오히려 뻔뻔스럽게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마태25,24). 하고 주인을 비난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구제 불능입니다. 주인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내 안에 가둬놓은 안다는 것이 병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허락하신 각자의 탈렌트를 최대한 활용하기를 바라십니다. 각자는 자기가 받은 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결실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긴다.’ 는 말씀은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잃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뻔히 잃을 것을 알면 어떻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작은 일에 성실하며 큰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성실하지 못한 사람에게 큰일을 맡으면 그야말로 큰일을 내고 맙니다. 매사에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역량에 따라 귀한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것을 받은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실 것이며 적게 받은 사람에게서는 적은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꼭 정해진 일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무엇인가 더 풍요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충실하게 관리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증가시킬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25,21).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삶의 자리에서 자기 몫에 충실함으로써 주님과의 기쁨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탈렌트가 어떤 것이든 개의치 않습니다. 또한 많고 적고는 물론 크고 작음에도 상관치 않고 그저 최선을 다해 유용하게 쓸 뿐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쓸 뿐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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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고통의 가장 큰 특징은 겪는 이에게 절대적이라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의 고통스러운 일에 대해 누군가가 “당신의 고통은 다른 사람의 고통과 비교했을 때 별것 아닙니다.”라고 말한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기 고통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처럼 여기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연필을 미리 많이 깎아 놓고서 계속 글을 씁니다. 그런데 깎은 연필의 뾰족한 연필심이 손톱 밑을 찌른 것입니다. 너무 아팠습니다. 피까지 나고 있었습니다. 너무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저의 모습을 보고는 “죽을병 아니야, 괜찮아.”라고 말하면, “맞습니다. 별것 아닙니다.”라면서 제 고통이 별것 아니라고 할까요? 아닙니다. 그 순간에는 다른 사람의 죽을병보다 더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고통은 주관적이며, 나의 기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남이 나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또 공감하지 않는다며 불평불만하고 억울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통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 다행인 것은 주님께서 이 고통에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사랑의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 누구도 같이 못 하는 고통에 함께해주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남이 이해해주길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대신 주님께 매달리며 그 안에서 힘을 얻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종들을 불러서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나는 주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마음이 들지요. ‘왜 똑같은 돈을 맡기지 않고 차별했을까?’ 또 ‘주인의 재산을 잃지 않기 위해 땅에 묻어두는 안전한 방법을 왜 혼내는가?’
주님께서는 우리를 똑같이 만들지 않으십니다. 이는 똑같은 능력과 재주를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즉, 각자 맡은 역할에 따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차별을 생각합니다. 자기 입장에서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1 탈렌트는 당시의 화폐 단위로 지금으로 치면, 노동자가 16년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서 벌어야 모을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3억이 넘는 돈으로 절대로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생각조차 없었다는 것이지요.
주님과 함께할 생각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차별받는다는 마음만 가졌고, 마치 자기 고통에만 빠져있어서 하느님의 마음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도 혹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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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 탓입니다>
마태오 25,14-30 (탈렌트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나아가서, ‘주인님, 저에게 두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내 탓입니다>
당신께서
믿음 맡기셨으니
믿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당신께서
사랑 맡기셨으니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당신께서
의로움 맡기셨으니
의롭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당신께서
착함 맡기셨으니
착하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당신께서
고움 맡기셨으니
곱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당신께서
부드러움 맡기셨으니
부드럽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당신
맑음 맡기셨으니
맑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당신께서
밝음 맡기셨으니
밝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당신께서
올곧음 맡기셨으니
올곧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당신께서
굳셈 맡기셨으니
굳세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당신께서
기쁨 맡기셨으니
기쁘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당신께서
희망 맡기셨으니
희망하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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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구원 받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능력(탈렌트)을 주시고 행복을 주시며, 은사도 주시고 은총도 주신다는 것이 우리 믿음이며, 저는 오늘 이 내용으로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확립한 우리 교회의 구원론에 따르면 하느님은 인간의 공로에 따라 구원하시지 않고, 당신의 사랑에 따라 구원하시는 분이신데 우리는 그 사랑을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않으면 그 믿지 않음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오늘 비유의 메시지가 바로 이 내용입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이란 오늘 비유의 탈렌트처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우리의 다양한 은사도 다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능력을 하느님께 받은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지기 성공이나 행복이 자기 힘으로 이룬 것이라고 여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혹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믿을지라도 그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곧 하느님께서 다른 사람에게는 더 많은 능력을 주시고 은사를 주신 데 비해 자기에게는 왜 이리 적게 주셨냐며 하느님 사랑을 의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 한 탈렌트 받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게 된 것이, 실은 한 탈렌트로 이익을 내지 않은 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최선을 다했어도 이익을 내지 못했다면 하느님도 나무라지 않으셨을 것이고, 오후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이 아침 아홉 시부터 일한 사람과 똑같이 일당을 주시는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께서는 그에게도 구원의 은총을 주셨을 겁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지 않는 것 때문이고, 그래서 자비와 구원을 청하지 않기 때문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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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하느님 알기, 나를 알기, 최선을 다하기-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오늘 역시 집무실 벽에 붙어있는 십자고상과 태극기를 바라보며 십자성호와 영광송후 만세오창후 시작한 하루입니다. 나라가 백척간두, 풍전등화, 누란의 위기에 처한 작금의 상황이 계속되는 동안, 또 한반도의 평화와 국내의 안정이 이뤄질때까지 계속될 만세오창입니다. 일기쓰듯 하는 강론이요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희망을 찾는 마음으로 쓰는 강론입니다. 희망을, 빛을, 길을, 눈을, 중심을 잃은 세상이요 대부분의 사람들입니다. 이래서 방황이요 병도 죄도 많습니다. 참으로 궁극의 희망은, 빛은, 길은, 눈은, 중심은 하느님이신 예수님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참으로 가톨릭 교회는 신자들뿐 아니라 세상의, 나라의 희망이, 빛이, 길이, 눈이, 중심이 되어야 할 시대가 도래한 듯 합니다.
“+부고; 친애하는 수사님들, 2023년9월1일 한낮에 우리의 친애하는 형제, 로마누스 수사님이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평화롭게 선종하셨습니다. 로마누스 수사님은 1938년9월10일 란트하우젠에서 태어났고 1961년 5월 12일 서원했습니다. 장례미사는 9월5일 화요일 10:30에 열립니다.”
게시판에 소개된 저보다 11살 연상이니 만85세에 복된 죽음을 맞이한 독일의 수도형제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도 축제일수 있습니다. 산날보다 죽을날이 점차 가까워지니 하루하루 날마다 본질적 깊이의 선물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자각을,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희망의 순례자 교황님의 홈페이지 1면 기사 제목, “프란치스코 교황은 위대한 문화의 민족, 몽골에 도착하다”에 이어 화려한 의상을 한 우리와 흡사한 아름답고 순박한 모습의 몽골인들이 친근하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일어나자 만난 밝은 뉴스들입니다.
어제는 하루종일 아름다운 영혼들을 가득 만났던, 참 아름답고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아침식사후 매일미사에 참석했던 참 좋은 자매님이 직접 수녀원까지 차량봉사를 해줬고, 수녀님들의 친절한 환대에 이어 9;30-12시까지 여러 수녀님들에게 면담고백성사를 드렸습니다. 만났던 모든 수녀님들의 영혼이 참 아름다웠고 모두가 진지했고 한분한분이 참 귀한 고유의 성소자임을 발견했습니다.
새삼 고백성사는 벌이 아니라 화해와 일치, 치유와 위로의 성사임을 깨닫습니다. 지옥같은 험난하고 힘겨운 세상 안에서도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위로와 치유, 격려의 따뜻하고 힘있는 주님의 말씀일 것입니다. 주방소임이 행복하다던, 공동체를 참으로 사랑한다는 주방장 수녀는 무남독녀 외동딸이고 홀로 계신 노모는 전화할 때 마다 “착하게 살라!”는 마지막 말이라 했습니다. 면담성사시 수녀님들의 아름다운 영혼,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배우고 위로받고 치유받고 격려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원장수녀님도 얼마나 밝고 환한 모습인지 열정과 순수를 다해 살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좌우간 모든 수녀님들이 웃는 밝은 모습으로 성사를 봤습니다.
5월부터 시작된 대규모 리모델링 수녀원 공사는 10월 중순쯤으로 예상되는데 이런 일련의 공사가 어수선한 중에도 공동체의 평화의 일치도 견고해짐을 감지했습니다. 더구나 어제는 9월 순교성월 첫날이었고, 수녀원 리모델링 공사중 종탑을 완성한 날이라 수녀원 중심에 위치한 가장 높은 종탑에 위치한 동으로된 새벽을 깨우는 수탉의 모습이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마음 중심에 자리 잡으면서 순간 위로와 평화, 치유를 느꼈습니다.
“수녀님, 마음 중심에 종탑을 지니고 사세요!”
덕담도 드렸습니다. 마침 엊그제와 어제의 복음 주제도 “깨어 있어라!” 였는데 종탑 꼭대기의 수탉은 그대로 깨어있음의 상징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떠날 때 노동에 지친 창백하고 마른 두분 일꾼들의 휴식하던 모습도 계속 눈에 밟혔습니다. “억강부약, 대동세상, 기본사회”라는 어느 정치지도자의 비전이 꼭 실현되기를 기대하며 기도하는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더불어 그립게 떠오르는 세 얼굴, 참으로 백성을 사랑했던 세종과 정조의 성군(聖君)과 다산 정약용 학자입니다.
역시 참 좋은 두분의 수녀님들이 수도원까지 차량봉사해 주었고, 배즙과 제 아끼는 시집, “하늘과 산”을 선물했고, 고백성사를 받기전 고백신부님에게도 선물했고 고백성사를 받은후, 서로 강복도 주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시국에 대한 걱정도 나눴습니다. 모두가 공감하는바 현 시국에 갖는 위기의식입니다. 답은 기도뿐이요 하느님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저녁식사전 언뜻 봉사차 온 자매님의 일에 전념하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던지요! 참 아름답고 사랑스런 세 장면은 1.고백성사를 보기위해 겸손히 기다리는 모습, 2.기도에 전념하는 모습, 3.맡은바 일에 전념하는 모습이요, 이런 장면을 대할 때마다 감동하게 됩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향기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어제 수녀원 중심부에 세워진 수녀원 종탑을 보는 순간 깊이 각인된 영원한 바라봄의 대상, 삶의 중심인 하느님입니다. 새삼 강조하는바, 하느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요 빛이요 길이요 희망이요 눈이라는 것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한 처방도 하느님 중심의 삶뿐입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아름답고 사랑스런 행복한 구원의 삶이겠는지요?
첫째, 하느님을 아는, 하느님 공부입니다.
예수님을 공부하여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이 바로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입니다. 예수님 공부가 바로 하느님 공부요, 날마다의 복음을 통해 배웁니다. 오늘 복음에서 다섯 탈렌트를 받았다가 다섯 탈렌트를 남긴 이, 두 탈렌트를 받았다가 두 탈렌트를 남긴 이, 바로 주님을 알았습니다.
자비하신 주님을 깊이 사랑했고 신뢰했기에 최선을 다했고 똑같이 “착하고 성실한 종아!” 칭찬을 받습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바, 업적의 양이 아니라 삶의 성실도입니다. 각자의 주신 몫에 충실하면 됩니다. 이래야 자존감 높은 삶입니다. 주님을 아는 평생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둘째, 자기를 아는, 자기 공부입니다.
평생 주님 공부와 함께가는 평생 자기공부입니다. 정말 지혜롭고 겸손한 자는 자기를 아는 사람입니다. 다섯탈렌트 받아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받아 두 탈렌트 남긴이 정말 자신을 안 사람이었습니다. 비교할 것도 없이 자기 받은 몫에 충실했습니다. 비교로 인한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빠지지 않고 제받은 몫에 충실하며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자존감 높은 삶을 살았습니다.
셋째,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바로 진인사대천명의 삶이요 지성이면 감천의 삶입니다. 삶은 모험이요, 은총의 선물임과 동시에 평생과제입니다. 다섯탈렌트 받아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받아 두 탈렌트 남긴이, 모험적 인생을 결코 자포자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용감히 자기 몫에 최선을 다함으로 평생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이에 감동한 주인은 이들을 격찬합니다.
“잘 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오늘의 비유도 하늘 나라의 비유요, “깨어 있어라”에 연장되는 복음입니다. 지옥같은 세상에 천국을 살 수 있는 비결을 알려 줍니다. 언제 어디서든 깨어 제자리에서 제몫에 충실하며 제정신으로 제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바로 거기가 하늘 나라 천국입니다.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 일행 역시 이런 삶을 격려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더욱더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가십시오. 우리가 여러분에게 지시한 대로,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십시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면서 시종여일, 하느님을 아는 공부, 자기를 아는 공부, 제몫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얼마나 결정적 구원의 삶인지 깨닫습니다. 그러나 한 탈렌트 받은 이는 완전히 실패인생이 되었으니, 그는 하느님을 몰랐고, 자기도 몰랐고, 그리하여 최선을 다하기는커녕 선물이자 과제인 삶을 완전히 방치했습니다.
그는 현상유지를 택해 모험하지 않았고 무책임했고 태만했고 좌고우면 우유부단 소심했고 자기를 닫은 삶이었습니다. 그가 정녕 주님을 믿어 알고 자기를 알고 자기를 열어 최선을 다했다면 한 탈렌트 받아 한 탈렌트를 남겼어야 했습니다. 업적의 양보다는 과정의 충실도를 보시는 하느님을 잊었습니다. 영적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적든 많든 받은 은사에 태만하면 지닌것조차 잃습니다. 주님의 선언이 참 엄중합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 중심의 제 삶의 자리에서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사랑스런 행복한 삶을 원하십니까?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고, 하느님을 아는 평생 공부, 자기를 아는 평생 자기 공부와 더불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사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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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2,35)
<엄마의 표징을 본받자!>
오늘 복음(루카2,27-35)은 '시메온의 노래'입니다. 예수님의 육화 사건, 곧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는 사건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찬미가가 세 개 있습니다. '즈카르야의 노래'와 '성모의 노래'와 오늘 복음인 '시메온의 노래'입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시간경 기도인 성무일도 아침기도 때 바칩니다. 그리고 '성모의 노래'는 저녁기도 때, '시메온의 노래'는 끝기도 때 바칩니다.
아기 예수님이 성전에 봉헌되는 순간에 함께 한 시메온은 이렇게 기쁨의 찬미가를 부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2,29-32)
그러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루카2,34)
'성모님의 표징!'
우리는 성모 마리아를 사랑하고 공경합니다.
그 결정적 이유는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이시고, 우리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도 엄마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어제 합천본당에 부임해 올 때 엄마와 함께 왔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우리에게 '신앙의 모범'으로써 표징이 되셨습니다. "Fiat Voluntas Tua"(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라는 순종을 시작으로 끝까지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 모두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시고, 땀 흘리시고, 수난하시고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모 마리아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표징입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표징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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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9_cajTkB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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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마태 25, 14)
주님께
나를 맡기고
너를 맡기고
우리 모두를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맡기지 못하면
떠날 수도
없습니다.
하늘에
맡기지 못하면
땅에서도 맡길 수
없습니다.
맡기는 법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삶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가신
탈렌트를
펼쳐야 할
시간입니다.
착하고
성실한 삶은
작은 일에
성실한 삶입니다.
삶을 놓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매순간
사랑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탈렌트를
우리에게
맡긴 곳에서부터
더욱 풍요로워지는
삶의 기쁨입니다.
감추고 숨기는
것밖에 모르는
우리들에게
내어주고
나누는 삶을
가르치십니다.
삶이란
더욱 뜨거워지는
하느님과 함께
만들어가는
사랑의
드라마입니다.
맡기신
탈렌트가
나의 것이라는
착각에서 이제
벗어납니다.
사랑과 감사라는
농사는 성실한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아낄수록
탈렌트는
빠르게
줄어들고
맡길수록
탈렌트는
빠르게
늘어납니다.
탈렌트를
지나고
여행지를
지나
다시 만나게 되는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과의
계산법은
언제나 착하고
성실한
사랑과 감사의
오늘입니다.
사랑의 진가를
삶으로 만나고
깨닫는 행복한
오늘입니다.
탈렌트의 은총을
잘못 쓰고 있는
우리 삶을
반성하는
오늘
이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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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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