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4일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홍)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조재형 신부
복음; 요한1,45-51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그때에 45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46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 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명심보감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물 속 깊이 있는 고기와 하늘 높이 떠, 나는 기러기는 쏘고 낚을 수 있거니와 오직 사람의 마음은 바로 지척 간에 있음에도 이 지척 간에 있는 마음은 헤아릴 수 없다. 범을 그리되 모양은 그릴 수 있으나 뼈는 그리기 어렵고, 사람은 알되 얼굴은 알지만 마음은 알지 못한다. 바다는 마르면 마침내 그 바닥을 볼 수 있으나 사람은 죽어도 그 마음을 알지 못한다.(명심보감 성심편) ‘내 마음 나도 몰라’라는 말도 있습니다. 착하게 살고 싶지만 행동은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가겠다고 했지만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장)” 이렇듯이 우리는 남의 마음을 알기도 어렵고, 나의 마음 또한 쉽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재능과 능력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바둑은 몇 번 두면, 상대방의 실력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력에 맞게 게임을 할 수 있습니다. 하수는 바둑 판 위에 실력에 맞는 정도의 돌을 먼저 놓습니다. 이것을 접바둑이라고 합니다. 골프도 평균 타수가 있습니다. 하수는 자신의 실력에 맞는 타수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핸디’라고 합니다. 저의 바둑 수준은 아마추어 7급의 수준입니다. 저의 골프 핸디는 100 정도의 수준입니다. 인품과 영성도 몇 번 만나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인품과 영성은 능력과 재능에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품과 영성은 오랜 정진과 성찰을 통해 드러납니다. 마치 샘이 깊은 물은 쉽게 마르지 않고, 뿌리 깊은 나무는 거센 바람이 불어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만과 위선에 빠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계명을 안다고 하지만 율법과 계명의 정신을 삶으로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과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들은 비록 율법을 모를지라도, 인품과 영성이 깊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들었던 물고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코이라는 잉어입니다. 이 잉어의 치어를 작은 어항에 넣어 기르면 5-8센티미터 정도로 자라고, 좀 큰 수족관이나 연못에 넣어 두면 25센티미터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그런데 코이를 넓은 강물에 방류하면 놀랍게도 90-120센티미터까지 성장한다고 합니다. ‘로고스(Logos)와 ‘ 뮈토스(Mythos)’를 생각합니다. 로고스라는 어항에 갇히면 사람의 이성과 지성은 그 ‘틀’에서만 갇히게 됩니다. 관찰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과정입니다. 인과관계를 따지고, 물질과 자본이라는 도구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것들이 우리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학혁명은 로고스의 세상입니다. 뮈토스라는 바다로 나가면 이성과 지성은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직관과 깨달음의 세상입니다.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세상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한 세상입니다. 물질과 자본이 아니라 에너지와 파동의 세상입니다. 소유의 세상이 아니라 존재의 세상입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고스와 뮈토스를 뛰어넘은 큰 바다였습니다.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지불했습니다. 삶 속에서 자신이 본 것을 실천했습니다. 목숨을 바치면서 주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사도는 단순히 예수님을 본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가 아닙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길을 죽기까지 충실하게 따라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교회, 사찰, 사원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보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와 가치를 보았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 것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지금 가진 것들을 포기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밭에 묻혀 있는 진주(하느님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을 팔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미주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성당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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