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가해 11월 29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루카 10,21-24)
복음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21-24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너희는 성령으로만 기뻐하여라>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복음 전파를 마치고 많은 성과를 내고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하니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우리 기쁨의 원천이 성과가 아닌 성령이어야 함을 우리는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복음을 전하면서도 ‘업적 주의’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의 기쁨을 성과에 두는 것입니다. 이런 때의 특징은 1. 숫자에 집중한다, 2. 아랫사람을 다그친다, 3. 기도 시간이 줄어든다 로 들 수 있습니다.
한 대전의 개신교 목사님이 10년 동안 열심히 목회하였습니다. 하지만 성과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기도원에 들어가서 이렇게 기도 드렸습니다.
“예수님, 저는 실패한 목사입니다. 아무리 해도 신도가 늘지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실패한 것이다.”
목사님은 억울해 하며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제가 실패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만약 신도가 많이 늘었다면 너의 신도가 는 것이냐, 나의 신도가 는 것이냐?”
우리는 그저 그분의 종일 뿐입니다. 해야 할 일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다가 문득 숫자를 세기 시작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가 끝나가면서 이전 신자들의 숫자를 회복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회복되지 않는 것을 볼 때는 마음이 조급해지고 우울해 집니다. 이렇게 숫자에 집중할 때 성령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소식을 듣고 ‘성령’으로 기뻐하셨습니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어머니들은 특별히 행복을 자녀에게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녀의 자유를 빼앗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재 발굴단'에서도 아이들은 어머니의 강요에 혼자 방에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이 나옵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34회에서도 숨이 턱 막히는 엄마의 공부 강요와 꾸중 때문에 혼잣말을 계속해서 하는 금쪽이가 나왔습니다. 참으로 예쁜 아이인데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가고 있습니다. 엄마는 다 자기를 위해 해 주는 관심인데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는 딸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결국엔 세상 것에서 기쁨을 찾으려다가는 공허함만이 남고 후회만이 남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어떤 기쁜 일이 있을까?’라며 우리는 여전히 기쁨의 원천을 밖에서 찾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면 기쁨의 원천을 성령께 두어야 합니다.
저도 새로 온 본당에서 사목 하며 신자들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조심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강요와 설득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자유는 건들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유는 자존감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빼앗기고 강요 받으면 자존감이 줄어듭니다. 신앙도 결국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을 올려주는 것이기에 자유를 빼앗긴 상태에서는 어떤 성과도 교회적이지 못합니다.
부모가 자녀들의 공부를 위해 학원은 보내면서 미사는 빠져도 괜찮게 내버려 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밥을 주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는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이때 신앙을 먼저 가르치지 않으면 결국 부모는 자녀 때문에 우울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계명은 성령으로만 성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공부시켜봐야 결국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 시키시고 무엇을 하셨을까요? 하.사.시.에 보면 제자들에게 힘을 주시기 위해 극기하시며 혼자 기도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분은 그 기도 덕분으로 성령으로 가득 차서 기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도 정해 놓은 기도 시간을 일 때문에 줄이지 않으려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의 기도 시간을 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기쁨임을 믿는다면 적어도 대죄는 짓지 않고 기쁨으로 살 수 있는 정도의 기도 시간은 내가 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하면서 그 기도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성령이 기쁨임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과 살 때 어떤 때가 제일 기뻤을까요? 부모님께서 하라고 가르치시는 대로 했는데 일이 잘되어 기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른들에게 인사를 잘하라고 해서 잘하고 다녔는데 정말 인사성 밝다고 칭찬받았습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것이 부모에게 오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말씀을 통해서도 받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에 노트 한 권 씩을 신자들에게 나누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하루를 살 말씀의 양식을 먼저 적게 할 것입니다. 한 문장이면 족합니다. 성경 말씀이면 좋고 하.사.시. 혹은 기도하다 떠오른 말이나 유튜브를 보다 느낀 말도 좋습니다. 그 한마디를 적고 하루 동안 되새기며 살면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기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부모님의 굳은살을 보았을 때입니다. 부모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 때 행복합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그래서 한 말씀 쓴 다음 밑에다가는 감사일기를 쓰게 할 것입니다. 결국 은총은 감사를 낳기 때문입니다. 물론 강요할 마음은 없지만 잘하면 상을 주려고 합니다. 어쩌면 이런 것이 성령으로 기쁨을 느끼며 살도록 해 주어야 하는 사제의 몫인 듯싶습니다. 모든 기쁨은 성령에게서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출처: 원글보기; ▶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강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