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2월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청년수련회와 해외선교를 계획합니다.
복음으로 충만한 청년, 선교하는 청년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알려주시고 이끌어 주시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오염된 영혼을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진리를 밝히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본문 주해)
1~6절 :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서 나귀를 풀어오게 하시는 것을 예수께서 미리 그 사람에게 말해 두었다고 하는 해석도 있지만, 이것은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쓰시고자 함을 나타낸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쓰시려고 끌어오라고 하신 이유는 스가랴서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것이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그런데 나귀 새끼 타고 오시는 왕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고 오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라고 한다.(슥9:10~11)
예수님은 전쟁으로 적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무기들을 없애버리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은 자기 백성만이 아니라 이방 나라까지 평화를 전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7~10절 :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니 예수께서 타신다. 무리들이 길에도 자기들의 겉옷을 펴고 또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주님께 환호한다. 그리고 호산나 찬송을 한다.
겉옷을 나귀 위에나 길에 펴는 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는 모습이다.
무리들은 지금 미약한 이 나라를 다윗 시대처럼 세워줄 그런 강한 왕을 바라면서 자신들만의 메시아 관에 맞추어 자기들을 구원하여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스가랴서의 말씀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가셨지만 첫날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성안의 성전을 둘러보고 저물게 되자 열두 제자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가시는 것이다.
(나의 묵상)
예수님은 당신이 왕은 왕이되 제자들(무리들)이 꿈꾸는 힘의 왕이 아니라, 겸손의 왕, 섬기는 왕이시라는 것을 가르치셔야 했다. 그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이유도, 군림하고 가진 자들의 힘을 빼앗아 세상에 또 다른 왕국을 이루시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죄에 죽을 인생들을 구원하셔서 천국 백성 삼으시려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입성하시는 것임을 세 번이나 이미 말씀하셨다.
그러나 주님을 둘러싼 제자들과 무리들은 한결같이 현재 자신들의 미약함과 로마의 압제로부터 건져줄 힘의 메시아를 기대하며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를 외치는 것이었다.
복음을 알기 전 나도 주님과 다른 꿈을 꾸면서 주님을 따랐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지만 주님의 뜻과는 천리만리 먼 것을 구하는 자였으니, 오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께 호산나 하며 환호하는 자들과 꼭 같았던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잘 되고자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지만, 주님은 그런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들의 생명을 내게 주시고자 계획하셨다.
나는 아들의 생명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나와 가족들이 이 땅에서 잘 먹고 건강하게 잘 살면 그뿐이었다. 그렇게 해 주실 예수님을 기대했고 또 믿는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만약 천국이라는 것이 있다면 보너스로 가게 될 것을 믿었다. 천국 보험을 들었으니 염려없다고.... 그래서 교회 중심의 모든 신앙생활에 열심을 냈었다.
나는 주님과 거래하는 종교인이었다.
그랬던 자에게 신실하신 주님의 은혜가 부어졌다.
영적 귀머거리요 소경이 복음에 귀가 열리고, 십자가를 보는 눈이 떠진 것이다.
창세전 약속하신 아들의 생명을 사모하는 마음이 되고, 그 생명을 주신다는 아버지의 약속이 믿어졌다.
그러니 세상을 향한 모든 욕망이 다 헛된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영원한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자가 되었다. 그것은 훗날 죽어서 갈 천국이 아니라, 아들의 생명을 가진 자가 이 땅에서부터 누리는 하나님 나라였다.
오늘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주님께서는 무엇을 보여주시는가?
백마가 아니라, 나귀를 타신 겸손의 왕을 구하고, 죽음으로써 생명을 주시는 참 섬김의 왕이신 주님을 구하라는 것이다. 자신이 만든 왕이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기를 구하는 자가 되길 원하신다.
이미 세 번이나 수난예고를 하셨지만 귓구멍이 막힌 제자들과 주님의 기적에만 눈이 먼 무리들에게 인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분이 단순히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이 진리를 앎으로 ‘교인’이 아니라, ‘성도’가 되길 원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알게 하신 이 진리로 내 안에 기쁨이 충만하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내 주변에 이 진리를 더 잘 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가득하다.
복음을 전하고, 생명의 삶을 전하라고 주님께서 이 땅에 나를 보내셨으니, 주님께서 지혜로 채워주시고, 성령께서 나의 갈 길을 인도해 주실 것을 믿는다.
(묵상 기도)
주님,
나귀 새끼를 탄 우스꽝스런 모습의 주님이 잘 적응이 되지 않았을 것임에도
호산나 외치며 열광하는 무리들의 열심을 봅니다.
자기 확장이라면 무엇이라도 해 낼 것같은 세상의 인간들 모습입니다.
그 세상에서 구별시키셔서 참 섬김의 주님을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볼품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오셔서 죽음으로써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알게 된 은혜입니다.
자기를 위해 주님을 외치는 자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주님을 구하고 외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