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 랍비였던 시드니 그린버그는 이렇게 청년과 노인의 기준을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을 믿고 사람을 신뢰할 줄 알면 당신은 청년이다. 그러나 사람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신하면 당신은 노인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행복을 갈망하고 미래에 대한 꿈을 갖고 있으면 청년이다. 그러나 과거만을 회상하면 노인이다. 남을 사랑할 줄 안다면 당신은 청년이다. 그런데 끊임없이 남에게 사랑받기만 원하고 있다면 당신은 노인이다.” 청년과 노인의 기준을 나이로만 생각했는데 랍비는 청년과 노인의 기준을 생각과 인식의 차이로 구분하였습니다. 저도 이제 60이 되면서 나이를 먹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늙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인식을 바꾸면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었어도, 아마에 주름이 깊이 패었어도, 근력이 예전 같지 않아도 청년입니다. 꿈이 있다면, 신뢰가 있다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오늘 주어진 일에 감사할 수 있다면, 꿈을 위해서 거친 들판을 걸어갈 수 있다면 청년입니다.
생각하니 대림시기는 청년들의 이야기입니다. 2000년 전에 우리에게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이가 청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꿈, 예수님의 나눔, 예수님의 헌신,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청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다시 오시는 청년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대림시기에 우리는 이사야 예언서를 묵상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임마누엘, 말씀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꿈을 가졌습니다. 그는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손을 잡고 다니는 꿈을 꾸었습니다. 사막에 샘이 넘치는 꿈을 꾸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청년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황금, 유향, 몰약을 준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청년입니다. 평생 성전에서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렸던 시메온과 한나는 비록 나이가 80이 넘었어도 청년입니다.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했던 마리아는 나이 때문에 청년이 아닙니다. 권세 있는 자리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시는 하느님을 찬미했기에 청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던 요셉은 나이가 많았어도 청년입니다.
저는 가톨릭평화신문에서 언제나 대림시기를 지내는 ‘청년’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법대를 졸업하고 평생 판사로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나눔의 집’을 운영했습니다. 비록 부모님의 권유로 법대엘 갔고, 판사가 되었지만 정년퇴임을 한 후에 60이 넘어서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학생 때 좋아했던 물리학을 공부하였고,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80의 생일잔치에는 작은 음악회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틈틈이 악기를 배웠고, 그동안 함께 했던 이웃들을 위해서 80 생일에 작은 음악회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끊임없이 배우려는 의지, 가진 것을 나누려는 선행, 어려운 이웃을 도우려는 자선의 마음이 있기에 80이 넘었지만 그분은 청년입니다. 베들레헴에서 구세주가 나올 수 없다며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는 많은 지식이 있었지만 노인입니다.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2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였던 헤로데는 권력을 가졌지만 노인입니다. 1년 가까이 전쟁으로 러시아의 젊은이들을 죽음의 사지로 몰아넣는 푸틴은 노인입니다.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이 땅에서 참된 평화와 자유를 꿈 꿀 수 있다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함께 할 수 있다면 고난과 시련을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디딤돌’로 여길 수 있다면 우리는 청년 예수의 제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