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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경전야 / 공선옥
식탁에 밥을 차렸다. 혼자 먹는 밥상은 고적하다. 고적함을 핑계삼아, 반주로 딱 한잔만 하자고 단단히 결심하고서 지난 주에 마시다 남긴 소주병 마개를 연다. 어제는 맥주를 마셨더니, 잠자는 내내 요의尿意 때문에 잠이 편하지 못했다. 음식이 들어가기 전 빈속에 먼저 들어간 술기운은 끝내 밥생각 같은 건 잊어버리게 만들기 십상이다. 특히 소주가 그렇다. 나는 어쩌면 내심 그러기를 바라서 소주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반찬은 결국 안주가 되었다. 소주맛은 달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 텔레비전은 종종 유용한 친구가 된다. 친구를 불러내듯 텔레비전을 켠다. 지역주의를 극복하자는 모토로 만들어진 집권 여당이 내가 마시는 소주 이름처럼 처음으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창당 3주년 기념행사를 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그러나 박수를 치는 면면들이 잔뜩 굳어 있는 게, 지지율 바닥인 그 정당이 처음으로 돌아가기는 술기운 오른 내 눈으로 보기에도 요원해 보인다. 처음처럼, 처음으로 돌아가면, 그러면 현재까지의 모든 오류들, 시행착오들, 실수들, 그로 인한 참담함, 무참함들까지도 모두 지워지는 것인가. 정녕 그러한가. 처음으로 돌아가자고 한들, 돌아갈 수나 있는 것일까.
며칠 전 사다 놓고 아직 보지 않은 「태백산맥」의 작가가 오랜만에 쓴 한 권짜리 장편「인간연습」을 펼쳐 본다. 때로 소설은, 문학은 적당히 술기운 오른 기분으로 읽을 때 색다른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83년인가, <현대문학>에, 그때만 해도 젊어 뵈던 작가가 쓴 「한의 모닥불」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제 생각해보니, 이 작가가 쓴 글을 읽고 나서 나는 언제나 술을 마셨던 것 같다. 「한의 모닥불」을 읽기 전까지 나는 <현대문학>을 끼고 다니던 내 친구 경자와 그때까지의 관계보다 더 가까워지는 걸 경계한답시고 진땀깨나 흘렸다는 것을 나는 아직도 경자한테 말아지 못하고 있다. 고등학교 동창인 연탄집 딸 경자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단짝이었던 내가 대학에 들어가더니 저를 피해 다니는 것이 서러웠던지 어느 날 내 앞을 딱 가로막고 서서 말했다.
"야, 기집애야, 우리 오늘 술 한잔 하자."
그 애가 딱 그렇게 나오는 데는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해서 내 생애 처음으로 술을 입에 댔다. 그 시절의 여학생들에게 처음 술을 마시게 되는 계기를 보편적으로 제공했던 남학생도 아닌, 선배도 아닌, 동지도 아닌, 경자한테 술을 배웠다. 술잔을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내게 경자가 일갈했다.
"술도 못 마시는 계 무슨 운동은 한다고 지랄이냐?"
나중에, 술 마시고 싶을 땐 목숨을 걸어라, 운운하는 노래가 나왔을 대 그날 경자가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문학 쪽에 관한 한은 비우호적이거나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하는 분위기가 분명히 있었던 당시에 '용기 있게도' 문학을 지망했던 경자는 그날, 술값이 충분하지 않았던가 보았다. 경자는 책가방을 주점 주인에게 맡겼다. 돈 대신 책가방이든 입고 있던 외투든, 차고 있던 시계든 물건을 맡기는 것은 주로 남학생들이 하던 짓이었다. 곱상하게 생긴 여학생이 가방을 맡기자, 주점 아줌마가 남학생들이 물건을 맡길 때와는 다르게 큰 소리로 핀잔을 줬다. 그것이 상처가 됐던지 경자는 가방 찾아오는 심부름을 내게 시켰다. 가방을 찾으러 갔다가 주점에 있던 써클 선배에게 붙잡혀 나는 이번에는 정말로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술잔을 비웠다. 내가 안고 있는 경자 책가방 안에는 「문학개론」과 함께 <현대문학>이 들어 있었다. 나는 주점의 흐린 불빛 아래서「한의 모닥불」을 읽었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흐른 뒤 「태백산맥」에서 「한의 모닥불」의 등장인물을 다시 만나게 됐을 때 마치 오래 전에 잊었던 지인을 다시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었다. 새 책을 사면 언제나 그렇듯이 본문보다 책 맨 뒷장에 씌인 작가의 말부터 읽는다.
'인간은 기나긴 세월에 걸쳐서 그 무엇인가를 모색하고 시도해서 더러 성공도 하고 많이는 실패하면서 또 새롭게 모색하고 시도하고... 그 끝없는 되풀이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자 한 연습이 아닐까 싶다. 그 고단한 반복을 끊임없이 계속하는 것, 그것이 인간 특유의 아름다움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자 한 연습, 고단한 반복, 인간 특유의 아름다움, 술기운 때문인가? 나는 작가의 말에서부터 벌써 가슴이 먹먹해지고 만다.
"선생님, 거기 비 와요?"
"누구니? 아, 영원이구나, 영원아, 영원아?"
"선생님, 비가 와서, 선생님 생각나서 전화했어요. 그냥 생각나서요. 산생님, 주무시고 계셨다면 죄송해요."
"죄송하긴,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
영원에게서 전화가 오면 나는 늘 영원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만 같다.
"아니요, 괜찮아요, 선생님 생각나서요. 그냥 그럼 끊을게요."
비가 와서인가. 영원의 목소리는 잔뜩 젖어 있다. 생각난다. 내가 오영원, 하고 출석을 부를 때면 영원이는 언제나 화들짝 놀라며 옛? 했다. 언제나 딴 짓을 하던 영원이. 딴 짓을 즐겨 하던 영원이. 그때부터 이미 결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뭔가를 시작하다가 곧잘 중간에 다른 길로 새버리기를 반복하는 무슨 일이든지 영원하지 않은 영원의 인생이. 십여 년 전, 연세대 점거농성 사태에 연루되어 온 영원이를 경찰서로 면회간 적이 있었다. 시장통을 방불케 하는 경철서 안 풍경이란, 86년의 소위 '건대사태' 때의 풍경과도 흡사한 바가 있었다. 조금 놀라고 긴장해서 달려간 내게 영원은 뜬금없이 "선생님, 제가 왜 여기에 있는 줄 알아요? 바로 선생님 때문이에요." 하며 싱글거리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옛날에, 우리에게 가르쳤잖아요. 불의 앞에 분노하고 저항하지 않는 젊음은 젊음이 아니라고, 닭장차에 실리는데 딱 선생님 생각이 나지 뭐에요."
내가 그 어린 중학생 아이들 앞에서 그런 말을 했던가?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아이들을 다 구속시킬 수 없어서라도 곧 풀려나겠지, 풀려나면 연락하하고 해놓고 영원에게서 소식 오기를 기다렸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어쨌거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이젠 얘도 졸업도 할 때도 됐겠다, 싶을 무렵 영원에게서 오늘처럼 이렇게 뜬금없이 전화가 왔다.
"선생님, 여기 남원이에요. 실상사 밑 마을요."
영원은 그러면 경찰서를 나와서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남원 실상사 밑 마을로 갔던 것인가.
"거기서 뭐 하는데?"
"농사져요."
농사는 남자도 혼자 짓기는 힘드는 법. 당연히 결혼도 했단다. 남원에 한번 내려가야지, 가야지, 하면서도 이 녀석한테 웬일인지 전화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떤 예감 같은 것의 작용 때문이었으리라.
그래도 내심 일말의 희망은 버리고 싶지 않은 완강함으로 영원의 초대가 오길 기다렸으나, 영원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어느 날 갑자기 온 영원의 전화는 남원으로의 초대전화가 아니었다.
"선생님 저 이혼했어요. 이혼 사유는 묻지 마시구요. 저 지금 사는 곳은 공주에요. 마곡사라고 아세요? 그 절 아랫마을인데요. 선생님 언제 놀러 오세요."
영원의 절 아랫마을, 이라는 말에 얼핏 김정한의 '사하촌'이 생각났다.
"야, 너는 절 밑에 사는 게 니 취미냐?"
"아니, 뭐 그냥 살다 보니까... 하여간 오세요 선생님."
그래도 실상사 살 때는 오란 소리 안 했는데 마곡사 살 땐 오라고 하니, 반갑기도 하고 얼떨떨하기도 해서 차마 이혼 건에 대해서는 묻지 못했다. 실상사나 마곡사나 내가 가보지 않은 곳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실상사서 결혼하고 마곡사에서 이혼했나? 이혼하고, 어쩌면 애도 있을지도 모르는데 마곡사 아랫마을에서 뭘 해먹고 사는지 한번 가보기는 가봐야 할 갓 같았다. 내 제자든 누구든, 그 사람이 뭘 해서 먹고사는지가 나는 왜 가장 궁금한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가장 묻기 어려운 게 또 생계문제다.
시계를 본다. 열두 시. 밤 열두 시다. 아홉시 뉴스를 들으며 소파에서 잠들었다. 소파에서 잠들었다가 굴러 떨어지면 방으로 들어가곤 한다. 소파에서 굴러 떨어지느니, 오늘처럼 이렇게 한밤의 전화가 깨어주는 게 낫다. 어젯밤만 해도 오른쪽 어깨를 된통 찧었다. 잠들기 전 마셨던 맥주컵이 그렇잖아도 시원찮은 어깻죽지를 강타했다. 맥주컵 입장에서야, 웬 육중한 몸피의 아줌마가 저한테 달려들어서 저딴에는 정당방어를 하느라고 그랬다 할 테지만, 맥주컵은 금이 가 있었다. 아침에 컵을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아깝다는 생각보다 문득, 미안하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내 육중한 몸, 나라는 사람이 주는 욱중한 무게의 정신적 타격을 받고 그 몸에, 그 마음에 금간 사람 어디 없는가. 나는 유독 습한 날이 지속되는 가을 아침에 문득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영원이와의 전화가 왜 끊어진 것일까. 나는 더 이상 잠들지 못하고 전화벨 울리기를 기다린다. 내가 해볼 수도 있지만 그냥 기다리고 싶다. 영원에게는 왠지 그래 주고 싶다. 영원이가 하고 싶어 한 전화였을 것이다. 이 밤중에 그래도 제가 전화 걸 수 있는 사람이 나였을 것이다. 이럴 땐 그저 전화를, 그애의 호출을 기다려주면 된다. 그리고 받아주면 된다. 응답해주면 된다. 그러나, 영원에게서 전화는 오지 않는다. 베란다 밖 외등이 아파트 주차장에 동그랗게 떨어진다. 한밤중에 깨어나 베란다 밖 풍경을 내어다 본 지는 오래되지 않는다. 그 전에 나는 혹여 한밤중에 깨어나면 화장실을 갓으면 갔지 결코 베란다고 나오지는 않았다.
지난여름 그가 한밤중에 내게로 온 적이 있었다. 나는 그의 뜻밖의 방문이 신선하고 행복했다. 그 뒤부터일 것이다. 밤이면 혹시 그 날 밤처럼 문득 그가 오지 않을까, 싶은 막연한 기대감에 나도 모르게 베란다 밖을 주시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는 그러나 이후로 단 한 번도 한밤중의 방문 같은 건 하지 않았다. 필요에 잔뜩 전 퇴근길에 잠깐 왔다 갈 뿐, 학교 급식 재료 중 생선납품업을 하는 그의 몸에서늘 들 생선 비린내가 났다. 그거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식당에 생선 배달 왔을 때 우리는 20년 만의 재회 앞에서 잠시 말을 잊었다. 그의 머리는 검은 머리보다 흰머리가 주류를 이 루었고 눈가의 주름은 굵고 깊었다. 그가 보는 나도 실은 그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84년인가, 85년인가 학원안정법 반대 투쟁 현장에서 나는 그에게 후방에서 제조한 꽃병을 건네줬고 그는 그것을 전방을 향해 날렵하고도 유연하게 투척했다. 그는 그러니까, 내가 경자 책가방을 찾으러 갔다가 붙잡혔던 써클 선배,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어느 늦은 겨울 밤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었고 그때 그는 연인도 아니면서 내 차가운 손을 잡아 자신의 호주머니로 가져다 녹여주었다. 그가 내 집에 올 때면 들고 오는 냉동 생선처럼 그와의 기억들이 내 생에 어딘가에 냉동 저장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가 한밤중에 내 집에 왔을 때, 그와의 기억의 편린들이 해동되어 온 밤을 흥건히 적시는 동안, 그러나, 그에게 딸린 목숨들은 불안과 알 수 없는 적의로 온 마음이 꽁꽁 얼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사 알았다. 그는 이제 내 집에서 방을 쓰는 '사건' 따위를 다시는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의 방문으로 그가 치른 대가는 혹독했으니까. 사춘기 접어든 그의 세 딸들의 홀 아버지 단속이란, 죽은 마누라도 아마 혀를 내두를 것이라고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의 앞은 유쾌한 것이었으나 뒤끝은 쓸쓸함이 묻어나고 있음을 그러나 나는 모르는 척했다. 내색하지 않는 것이 예의일 것만 같았다. 그는 아내를 졸경에 잃었다.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의 대량해 직 사태가 봇물을 이루던 시기, 노조 간부였던 그는 삭발을 하고 노조원들과 함께 무기한 연좌 농성에 들어갔다. 회사는 인수합병되었고 구조 조정은 단행되었고 고용승계는 이뤄지지 않았고 그는 구속되었다. 그가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아내는 남편의 옷가지를 싼 가방을 들고 새벽 찬바람 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택시를 기다렸다. 새벽이라 차가 뜸했다. 급해진 그의 아내는 찻길로 내려섰고 멀리서 다가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휘젓던 그의 아내를 새벽 귀가 길에 나선 음주운전자의 차가 와서 덮쳤다. 나라는 한창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사태라는 생경한 이름의 재난을 맞아, 금모으기를 해야 한다고, 금모으기를 해서 애국자 되라고 연일 시끄러울 때, 또 누군가는 쑥쑥 올라가는 은행 이자에 웃고 싶지만 차마 그 웃음을 참지 못해 고 도의 표정관리를 하느라 애깨나 써야 했던 때, 그는 아내를 잃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둔 채 바퀴 밑에서 기어 나와 쓰레기통 쪽으로 조심스레 접근한다. 뒤뚱거리는 걸음새다. 자세히 보니 다리 한쪽은 한쪽다친 모양이다. '인간 연습' 첫머리를 읽고 있는 중에 관리실과 연결된 인터폰이 울렸다. 아파트단지 내에 부쩍 창궐하기 시작한 고양이로 인한 피해가 증가하고 있는 실정인바, 고양이의 서식환경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음식물 쓰레기를 배출하는 데 각별한 주의를 요망한다, 만약 음식물 쓰레기를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고 비닐 봉지에 싼 채로 쓰레기통 주변에 던져놓다가 발견될 시에는 당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의결한 바대로 벌칙금을 물릴 것이다, 라는 요지의 방송이었다.
고양이는 다른 날과는 다르게 말끔한 쓰레기통 주변을 맴돌가다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저녁에 남긴 냉장고 속 음식들이 생각난다. 냉장고 야채카에는 한약봉지도 있다. 시집간 제자 성란이가 소개해준 한의원에서 거금 30만원을 주고 지은 약이다. 성란과 영원은 내 첫 부임지의 첫 제자들이다. 첫 제자들 중에서도 성란은 공부를 못했던 축에 속했다. 아무리 첫 제자라 해도 공부 못하는 축들이 선생을 아는 체하는 예는 극히 드물다. 천성이 밝아서인가. 길에서 우연히 나를 봤을 때 그냥 지나쳐도 상관없었을 텐데 성란은 그러지 않았다. 내 기억 속에서 이제 막 털갈이 하는 약병아리처럼 밉상으로 남아 있던 성란이를 우연히 조우한 건 92년 겨울이다. 대선에서 막 승리한 당선자는 '안정 속의 개혁'을 '반드시 이루어서 '신한국'을 건설하겠다고 말했지만, 그 신한국건설 플랜에 해직교사 복직 카드는 없는 모양이었다. 양 김씨 중에 '정권 교체'를 이루지 못하고 패배한 한 김씨가 눈물을 흘리며 정계 은퇴를 선언하던 날, 아동도서 방문판매원이던 나는 동료였던 한 해직교사를 조문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해직되고 나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많은 교사들이 나처럼 방문판매원이라든가, 막노동이라든가, 식당배달원 같은 일로 생업을 삼고 있었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끝내 죽음을 맞은 그 교사도 사정은 비슷했다. 산동네 월셋집으로 이사 들어간 지 한 달도 안 됐다고 했다. 다. 조문을 온 동료들이 산동네 시멘트블럭집 좁은 마당에 화톳불을 피워 놓고 들러앉아 있었지만 다들 입을 굳게 다물고 다만 눈시울만 붉힐 따름이었다. 집에서 아이가 기다린다는 평계로 상가집을 서둘러 나와서 산동네 가파른 계단길을 내려오던 중, 저녁 어스를 속에서 웬 아가씨가 내 턱 밑으로 고개를 쑥 디밀었다. 그렇게 재회하게 된, 성란이 그해 봄 어느 주말 저녁 불쑥 내 집으로 찾아왔다
"선생님. 돈 좀 빌려주세요."
"무슨 일 있어?"
나쁜 놈이 돈을 안 주잖아요.
"어떤 나쁜 놈이?"
"나 임신시킨 놈 말이에요."
말하자면 애 지울 돈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성란을 데리고 산부인과를 갔다. 스무 살의 첫봄을 성란은 그렇게 맞았다. 그 뒤에도 몇 번 성란은 내게 돈을 빌리러 왔다. 물론 산부인과 비용은 아니었다. 영구임대아파트에 입주하려고 하는데 보증금 180만원이 없다고 했다. 나는 성란의 가족이 살고 있는 산동네 단칸 블럭집을 안다. 그런 경우에는 늘 그렇듯이, 그러니까 식구들의 배역이 이미 정해져 있기나 한 것같이, 그 집에서 성란은 무능력자 아버지, 힘없는 어머
니 그리고 아직 어린 동생들을 부양하는 처녀가장이었다. 물론 성란은 자기가 가장이라고만 말했을 뿐 무슨 일을 하는지는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내가 왜 말하지 않느나냐니까 성란이, 떳떳치 못한 직업이니까, 그렇죠, 라며 눈을 내리깔았다. 나는 성란의 가족이 영구임대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는 돈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때 180만원은내게 버거운 액수였다. 그래서였던가. 성란은 나와의 연락을 뚝 끊었다. 나는 미안해서그 애에게 전화하지 못했다. 성란은 그 당시 내가 학교에서 쫓겨난 상태였다는 결 몰랐던 것일까.
'조금많이보고싶다'
낯선 이로부터 온 문자였다. 휴대폰이라는 물건이 생겨나기 전,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가 잘 생각나지 않을 만큼 이 새로운 통
신수단은 얼마나 기막힌 물건이란 말인가. 그 편리한 물건 중에 문자메시지라는 의사전달 방식은 가히 그 물건이 수행할 수 있는 능력 중
의 압권이다. 휴대폰으로 음악을 다운받고 영화를 보고 인터넷을 하는 시대라 하지만 내게는 아직 문자만큼 절실하게 와 닿지 않는 기능들이다.
조금 많이 보고 싶다니. 조금이면 조금이고 많이면 많이지 조금많이라니. 그러나, 휴대폰 문자라는 게 말이 되고 안 되고를 따질 것이
못 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요지는 보고 싶다는 것 아닌가. 보고 싶다는 이로부터는 그 며칠 후 주말에 전화가 왔다.
"너는 나 안 보고 싶었냐?"
이제 중년이 된 남자가 대 물었다. 내가 그를 보고 싶어 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때사 생각났다. 88년 5월인가, 명동성당에서 서울대 학생 조성만이 양심수를 석방하라고 외치며 할복 투신. 백병원으로 옮겼으나 끝내 사망했다는 소식을 나는 버스 안에서 들었다. 광산노동우동을 하겠다고 태백으로 간 그가 파업주동 혐의로 감옥에 들어갔다. 딱히 애인이라기도 친구라기도 애매한, 우리는 그런 관계였다. 그래도 나는 그에게게 영치금을 넣어주고 면회도 갔다. 그날도 그를 면회하러 전주로 가던 길이었다. 거리에는 연일 화염병과 최무탄이 난무했다. 바깥세상 소식과 발령받은 지 2년째인 내 초임교사 생활 같은 것을 묻고 대답하고 난 어름쯤에 내가 슬쩍 물었다.
'내가 기다릴까?"
그가 말했다.
"우린 그냥 동지일 뿐이잖아."
그를 면회하고 온 지 얼마 안 돼 나는 내가 근무하는 학교 체육선생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나는 내 동지를 잊었다. 18년 전 일이다
"니 전화번홀 오영원 씨를 통해 알았지. 우리 의원님 자서전을 영원 씨가 썼잖아."
나는 그와 나 사이가 진짜 동지인지 뭔지, 뭘 두고 그가 날 동지라고 했는지 18년이 지난 지금도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동지라고 하니까. 동지이나 보다. 여길 뿐이다. 18년 만에 나타난 내 동지가 집권 여당 의원 보과관이라는 것도, 영원이가 자서전을 쓰는 일을 한다는
것도 그때사 알았다.
길을 걷다가 동지가 나를 데리고 들어간 곳은 고깃집이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소주나 한잔 하자. 그리고 얘기는 천천히 하자."
동지가 옷을 벗어 옷걸이에 곁었다. 또래 남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내 동직의 배도 적당하게 나와 있었다. 동지가 나를 은근히 건너다 봤다.
"너는 하나도 안 늙은것 같다. 여전히 예뻐."
뭔가 대꾸를 하야 할것 같았으나, 별 할 말이 없었다. 내 침묵이 어색했던지 동지가 메뉴판을 일변했다. 봐라, 뭘 먹을까. 야, 너 저기 먹어볼래, 차돌배기' 나는 차돌배기가 뭔지 그때까지도 몰랐다. 동지는 고깃집에서의 동작이 몸에 익은 듯했다. 그때 주문을 받으러온 여자가 섬란이었다. 나는 처음에 성란을 못 알아봤다. 몸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난 탓이다. 거기다 배부른 보니 임산부인 것 같았다. 예전에 오천평이라는 배우가 있었다. 성란은 오천평을 넘어 육천평은 족히 돼 보였다.
"선생님, 여기 사시는 줄 진짜 몰랐어요. 여보, 여기 나와봐요."
성란이 주방에 대고 외쳤다. 고기를 들고 나오는 남자는 삐쩍 말랐다.
"제 남편이에요. 이 남자가 나를 이렇게 살찌워놨지 뭐에요."
내 동지는 그날 술을 많이 마시지 못했다. '보고 싶은 여자'의 제자 때문에 신경이 쓰여 술맛이 나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동지에게서는 더는 전화도 문자도 오지 않았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성란이 양념고기를 싸들고 내 집에 왔다. 성란이는 결혼한 지 5년이 지나도록 임신이 안 되다가 동네 미장원 아줌마가 소개해준 한의
원 약을 지어 먹고 임신을 했다 한다.
"성란아, 임신 축하해."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성란이 눈에 눈물이 어렸다.
"선생님, 우린 비록 빚으로 이 강사 시작한 거거든요. 그래도 어쨌든 시작했으니까 잘해보려구요. 그래서 말인데요. 선생님. 옛날에 저와의 일은 잊어주셔요. 그인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안 되면 임신도 됐겠다. 전 경말 이제부터는 새롭게, 진정 새롭게 거듭나는 삶을 살고 싶거든요."
성란에 대해서 모르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산부인과 건은 나도 잊은지 오래되었다. 성란이 싸들고 온 양념불고기는 양이 너무 많았다. 냉동칸에 보관했다가 그가 오면 즐까. 그는 내가 뭔가를 주는 걸 좋아할까. 후라이팬에 덜어내고 남은 불고기를 서툴게 비닐에 담는 내 모습을 보고 안 되겠다 싶었던지 성란이 잽싸게 나를 밀쳤다.
"선생님, 혼자 사시면서 통 안 챙겨 잡수시죠? 냉장고 너무 믿지 마시고 그때그때 해 드셔야죠.'
냉동간 문을 열어보고 정리 상태가 영망인 것을 보고 냉장간까지 열어젖혀 놓고 성란이 딸네집 살림 살피러 온 친정엄마처럼 말했다.
"세진이는 미국 가서 공부 잘한대요?"
냉장고를 말끔히 정리해 놓고 저와 나 사이가 조금은 긴밀해졌다고 느꼈는지 성란이 불쑥 아이의 안부를 물었다.
아이는 제 아빠 있는 플로리다로 갔다. 내가 체육선생과의 결혼을 그토록 서둘렀던 것을 보면 감옥에 있는 그 알량한 '동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딴에는 컸던가 보았다. 서두른 결혼이 뭔가 중대한 실수인 것을 깨달았던 건 입덧이 가라앉고 임산부로서의 자세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던 무렵이 었다. 5월 저녁이었다. 열어둔 창문으로 라일락 향기가 바람에 실려와 코끝뿐 아니라 괜히 마음까지 간질이던 늦은 봄밤. 남편은 체육선생답게 단단한 근육질을 가진 건강한 사나이였다. 솔직히 말하자. 내 속의 가녀린 처녀는 어쩌면
바로 그의 그 사나이 성에 확 끝려버렸던 것임에 틀림없다. 내가 다닌 대학의 대운동장만큼이나 넓은 그의 가슴을 밀쳐낼 마음을 먹기란 상당한 의지가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 의지를 발휘하기엔 나는 그때 그야말로, '풀밭같은 너의 가슴에 뛰어놀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했던 건지도 모른다. 본능이 내뿜는 들척지근하고도 음울하고도 활달하고도 거대한 기운을 무엇으로 이기랴. 나란히 퇴근하여 그는 목욕탕으로 나는 부엌으로 직행해야 하는 결혼의 현실에 대해서 내가 불만이 있었던 건 전혀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가 목욕하는 소리를 들으며 음식 만드는 것이 즐거웠다. 이옥고 목욕탕에서 나온 그가 싱그러운 비누냄새를 풍기며, '보자, 뭘 만느시나' 하면서 내 등뒤로 밀착해 들어올 때의 짜릿한 순간이라니, 그러나 그날 나는목욕탕에서 나올 그의 싱그러운 숫성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그날만큼은. 그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켜 놓은 텔레비 전에서 때가 5월이니만큼, 광주특집, '어머니의 노래'라는 프로가 방영되고 있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목욕탕에서 나온 그가 내게 밀착해 들어왔지만, 나는 그때 문이 아니라, 어머니의 노래 때문에 내 팔뚝의 솜털들이 잔뜩 긴장되고 있음을 알았다. 내 팔뚝의 솜털이 일제히 곤두서고 있는 것이 순전히 자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것이 틀림없는 그가 그토록 저돌적으로 돌진해 들어오지만 않았더라도, 그도 나와 같이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우리시대의 고통에 대해 잠시 묵념의 염을 가지
는 태도만 취했더라도 나는 그날 그에게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력성을 드러낼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리라.
'당신, 저때 어디서 뭐 했어?"
나는 불쑥 물었다.
"언제?
"80년 5월에."
"태권도 교관 했지."
"어디서?"
"군대서"
그는 너무나 당연히, 쉽게, 내 나이가 그때 딱 군대 있을 나이 아니냐? 알면서 왜 물어? 하는 태도로 가볍게 응수했다. 손은 여전히 내 몸중의 어딘가를, 안정적으로 착지해서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장소를 찾아 헤매느라 분주한 채로, 내 의지는 잠시 그 손의 움직임이 멈추기를 기다렸으나, 내 감정은 의지를 배반했다.
"오늘만이라도 좀 경건하면 안 될까?"
드디어 남편의 손이 멈추었다. 그러고 나서 떨떠름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손가락으로 텔레비전을 가리켰다. 그의 시선이 텔레비전으로 옮겨갔다. 우리는 내가 원했던 바대로 잠시 그렇게 경건함을 유지했다. 어머니가 아들의 묘지에 엎드려 통곡하는 장면에서 나는 그만 가슴이 울컥했했다. 그가 문득 물었다.
"당신은 그때 뭐 했어?"
"나? 고등학생."
그러고 나서 우리는 침묵했다. 어머니의 노래도 끝났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뭐 했느냐고 그는 묻지 않았다. 나 또한 군대서 제대하고 뭐 했느냐고 문지 않았다. 둘 다 대학생이라는 사실을 알아서 묻지 않은 건 아니리라. 라일락이 지고 장미가 한창이던 6월 어느 날. 저녁 밥상머리에서 그가 불현듯 말했다.
"많이 생각해봤거든. 결론은 딱 하나야, 각자가 애국하는 방법이 달랐다는 것!"
순간 뒷덜미에 뭔가 둔중한 물체가 쿵 내려앉은 듯 얼얼해졌다. 그가 쐐기를 박듯, 입매에 힘을주고 말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애국하는 방법이 달랐다고 해서 부부관계가 깨질 수는 없어. 북한이 왜 욕을 먹는 줄 알아? 사상 검증에 따른
인민재판 때문이지. 당신 혹시 운동권 중에 있다는 그 뭐냐. 김일성 따르는 사람들, 주체사상파 아냐? 만약 그렇다면 나를 위해 전향하도록 해."
이번에는 미세한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느낌이 배꼽 언저리로부터 시작해서 온몸으로 스멀스멀 퍼져가고 있었다. 말을 마친 남편의 이마에 지그시 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그 말을 하기까지 그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가를 알았다. 내게 전향할 것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내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내가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가입의사를 철회하지 않아 해직통지를 받았던 날 그가 구
청에서 가지고 온 서류를 내밀었다.
"우린 이상이 서로 달라."
남편이 내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이혼을 하고 나서 남편은 월남전 참전용사 출신인 그의 맏형이 태권도 도장을 하고 있는 플로리다
로 갔다. 내 밑에서 자란 아이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1년 다니다 제가 사는 이곳이 공부 못하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는 곳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제 아빠에게로 갔다. 아이는 말했었다.
"내가 공부를 못한 건 엄마 아빠가 이혼했기 때문이야."
떠난 세진에게서는 이따금 지나치게 건강한 소식이 날아왔다. 그동안 키워준 엄마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자신은 태권도인으로
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매일매일의 삶을 충실히 보내고 있다. 태권도 종주국 한국인의 아들로서 한치의 부끄럼없이 살기 위해 노력하겠다.. 엄마 아빠 이혼이 어쩌구 하면서 저딴에는 대못이다 하고 내게 서슬퍼런 악다구니를 퍼붓고 간 깐에는 그래도 잘 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안심이면서도 또 나는 휑했다. 내 속에서 나와서 내 품에서 자란 아이지만 나보다 제 아빠의 유전인자만을 뒤집어쓰고 나온 듯한 아이. 나는 내 아이가 그렇다는 사실을 몰랐다. 사사건건 내게 찍자를 붙이고 짜증을 내고 내 속을 긁는 것이 유일한 제 취미 운운했던 것이 어쩌면 애초부터 나와는 맞지 않는 존재라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세진은 제 아빠하고 잘 맞았다. 나하고 있는 것보다 제 아빠하고 있는 것이 아이도 편한가 보았다. 중요한 것은 그러니
까, 우리가 어떤 관계냐가 아니라, 함께 있을 때 서로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일 것이다. 나는 내 아이와 좋은 관계 맺기에 실패한 것이 분명하다.
"선생님,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선생님 술 많이 드시지 마세요. 선생님도 이제 나이를 생각하실 때가 됐잖아요. 이제 보니 선생님 얼굴도 영 안 좋으세요. 몸 안 좋으시면 거기 저 약 저 먹었던 건데 약 먹음 직빵일 텐데."
성란이 볶아낸 불고기는 포도주 안주엔 제격이었다.
"성란아."
"네. 선생님."
"이제 가봐야지."
"네. 선생님, 언제라도 심심하시면 전화하시고 또 놀러 오세요. 혼자밥 먹기 싫음 저희집에 오셔서 드시구요."
성란을 보내고 나서야, 나의 음주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성란이 충고한 대로 나이를 생각할 때가 된 나이에 나는 나이 같은 건 무시하기로 단단히 결심하고서 성란이 임신하는 데 결정적 역할
을 했다고 믿고 있는 한의원으로 갔다. 의사가 어디가 안 좋아서 왔냐고 물었다.
"사실은, 그게, 위도 좀 안 좋은 것 같고·. 변비도 좀 있고… 늘 기운이 없고 졸음이 와서… 약간의 우울증 증세도 좀.."
"가끔 열나고 가슴 두근거리고 그러지는 않습니까?"
"그럴 때도 있고. ”
"생리는 어때요?"
나는 왠일인지 가슴이 뜨끔했다.
"괜찮아요."
"혹시 생리주기가 빨라졌거나 그러진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다. 28일 주기였던 것이 언제부턴가 25일 주기, 지지난달부터는 23일 주기가 되었다.
"맞는 것 같아요."
"전체적으로 갱년기 증세인 것 같네요. 체질적으로 빨리 오는 사람은 40대부터 오기도 하거든요. 약을 지어 드릴까요?"
나는 그때, 단호하게 아니라고 했어야 했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약 얘기를 하는 의사 앞에서 약 짓지 않겠다는 말을 할 용기가 없었다. 용기를 말하자면 사실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 아닌가.
'임신이 하고 싶어서 왔다' 는 그 말을 할 용기가. 그래서 지금 냉장고엔 '임신을 도와줄 수도 있는' 약이 아니라, '갱년기 증세를 완화해줄' 봉지 한약이 야채박스에 그득한 것이다.
만나기로 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화단가에 그가 앉아 있었다. 나는 잠깐, 나무둥치 뒤에 몸을 숨겼다.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때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보고 싶었다. 그는 어깨를 구부리고 다리를 벌린 특유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토요일 오후의 대학로는 무슨 잔칫집처럼 흥청거리는 기운이 넘쳐났다. 그는 그런 잔칫집에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사람이 뜸한 구석자리에 홀로 앉아 있었다. 우리가 약속한 시간은 아직 5분쯤 남아 있었다. 그 5분을 나는 나무둥치 뒤에서 다
채울 요량이었다. 그가 발치께에 놓인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먹고 있었다. 약인 것 같았다. 비아그라일까?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그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아이들은요?"
"할머니하고 저희 큰집에 갔어."
"그럼 오늘은 해방이 네요?"
그가 빙긋 웃었다.
"연극... 봐?"
그가 물었다.
사실 연극은 핑계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내 짐작은 틀리지 않은 것이었다. 이게 연애인지 아닌지 아직 확실치는 않으나, 대충 연애인 것은 같으니 연애하는 사람들 흉내는 내야 할 것 같아 마침 시간도 나겠다 주말 오후 연극 관람이라는 명분으로 나를 불러낸 것이리라.
"연극? 딴 데로 가죠, 뭐."
결국은 또 술집이었다.
"아까 무슨 약 먹던데 뭐예요?"
"진통제."
입에 댔던 술잔을 나도 모르게 내려놓았다. 비아그라가 아니라는 사실에 놀란 건 아니다.
"어디 아파요?"
"디스크가 있었어. 요추 3번, 경추 5번이 나갔대나 봐. 그래서 그런지 자꾸 머리가 짓눌려. 요샌 어깨 관절도 내려앉고. 봐, 손끝에 힘
이 하나도 없잖아."
과연 술잔을 쥔 손끝이 바르르 떨고 있었다.
"병원에 가봐야죠."
"소용없어, 디스큰걸. 함부로 산 결과지 뭐. 나이도 나이인만큼."
나는 손에 쥔 술잔을 어떻게 할까, 머뭇거리다 그냥 홀짝 털어 넣어버렸다.
"여자들 술 많이 마시면 폐경 빨리 온다던데, 조심하지."
"울엄마는 술 안 마셨어도 삼십 중반에 끊어졌대요. 그래서 나 하나 낳고 말았죠."
"그러면 더 위험한걸. 모든 병이란 가족력이란 게 있잖아."
"엄마가 더 이상 생산을 못 하게 되니까 아버지가 밖으로 나돌기시작했죠. 그거 알아요? 하얀접시꽃. 하얀접시꽃 뿌리가 여자한테 좋다죠. 엄마는 하얀접시꽃을 집 안에 가득 심었죠. 아버지 돌아오게 하려고, 나도 당신 붙잡으려고 집에 하얀접시꽃 잔뜩 심어놨어요."
"아파트잖아."
"냉장고에요."
순간, 그가 크게 웃었다.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우리 나이가 몇인데. 더구나 난 애가 셋이야, 셋."
"그게 아니라, 나는요.… 나는 처음으로 돌아가서. 맞아 처음처럼 새롭게 한번... 맞아요.. 한 번뿐인 인생..."
누군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술집주인이었다. 그는 없었다.
"그 남자 어디 갔어요?"
"막 화내면서, 뭐라더라, 애 날려고 하는 여자가 술은 왜 먹느냐고, 하면서 나가더라구요."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상처 입은 고양이가 다시 기어나왔다. 음식물 쓰레기통 위로 훌쩍 뛰어오른다. 그러나 쓰레기통 뚜껑을 열기에
는 가망이 없어 보인다. 전화벨이 울린다.
"선생니임."
영원은 취해 있다.
"영원아, 선생님이다. 말해라."
저 있잖아요. 자서전 같은 거 그만 쓰고 소설 쓰고 싶어요. 근데요. 돈 땜에요. 안 돼요. 저 농사 지으면서요, 빚 너무 많이 져서요. 안 돼요. 저도요, 소설 쓰면서 폼나게 살고 싶은데요, 지금은 안 돼요. 선생니임…"
"야, 소설 쓰려면 술부터 먹지 말아야지, 술 취한 정신으로 어떻게 소설 쓰냐? 안 그래?"
"근데요,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선생님은 소설 안 써봐서 모르시는구나. 내가 그걸 깜빡했네요. 하여간 선생님, 저요. 두고 보세요. 이딴 자서전 딱 때려치고 보란 듯이 소설 쓸 거예요. 소설가로서의 오영원 인생 새로 시작할 거라구요, 아셨죠 선생니임."
"오냐, 알았다. 그만 자."
"옛, 선생니임"
고양이는 쓰레기통 위에서 곡예를 하고 있다. 냉장고 문을 연다. 저녁에 반찬한답시고 만들었다가 고스란히 안주가 되었던 조기구이
접시를 꺼내 비닐봉지에 쓸어담는다. 야채칸에서 아른거리는 한약봉지에 눈이 간다. 냉장고라고 믿을 것은 못 된댔지. 약도 오래 두면 변할 것이다. 약봉지를 꺼낸다. 약이 너무 차갑다. 예전에는 잠들기 전 꼭 얼음 하나씩을 깨물어 먹었던 적도 있었다. 얼음도 먹었던 사람인
데 뭘, 하고서 차가운 한약을 입속에 털어 넣는다. 차가운 것이 들어가니, 정신이 번쩍 난다. 비닐봉지를 들고 현관문을 나선다. 누가 볼
까 조심하면서. 어쨌거나, 벌칙금을 물지 않아야 하므로, 바람이 많이 부는 밤이다. 마곡사 밑에 비를 뿌린 바람이 이제 이곳까지 왔는
가. 이상하게 얼음처럼 차가운 한약을 먹었는데도 춥지가 않다. 이것도 갱년기 증상인가? 아무려나, 나는 비린내 풍기는 비닐봉지를 들고 주차장을 가로질러 쓰레기통 옆으로 다가갔다. 검은 구름이 남쪽 하늘에서 몰려오고 있다. 밤은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