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새소식 617호 (2024. 1.)
선생님 그립습니다
이봉원 <작가, 하와이문화연구가>
내 대학 시절 사진첩을 보면, 내 전공 학과(심리학) 교수님들과 찍은 사진은 없고, 타과(언어학) 교수이신 허웅 선생님과 찍은 사진들만 있다. 졸업 직전에 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던 학군단 장교 임명식날도 그러했으니.. 선생님과의 인연이 특별했던 건 분명한 것 같다.
나는 신입생이 되고나서도 첫 학기가 끝날 때까지는 사실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계신 분인지, 그 존함조차도 잘 모르고 있었다. 대학가에서 한말글운동을 시작해 범국민사회운동으로 펴나가고 싶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방문한 한글학회 사무실에서, 처음 뵌 외솔 선생님이 일러 주시기 전까지는.
허웅 선생님을 학교 연구실로 찾아뵙자, 선생님은 ‘뭐 그렇게 운동단체까지 만들 것 있나? 뜻있는 학생끼리 모여 연구하고 실천하면 되지 않겠나?’고 하셨다. 이듬해 봄 학내 동아리로 국어운동학생회를 만들기 위해 학교에 제출할 서류를 가지고 가서 지도교수 취임 도장을 받았는데.. 그때 선생님의 목도장이 한자로 돼 있어 조금 실망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우리 동아리가 교내외로 한말글사랑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언론의 관심까지 크게 받게 되자, 선생님의 한자 목도장이 어느 틈에 한글로 바뀌고, 선생님께서는 이내 연구실의 조용한 학자에서 운동가로 변신을 하셨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1970년 5월, 선생님께서는 외솔 님의 뒤를 이어 한글학회 이사장직을 맡으셨고, 아호도 우리말로 ‘눈뫼’라 지으시며 바야흐로 이 나라 한말글운동의 대들보, 큰 어른이 되셨다.
선생님은 그 시대 그 연세에.. 학회의 어느 젊은 학자들보다도 진보적인 사고를 가지고 계셨다. 몇 가지 예를 들면, 1989년 전교조가 창립되었을 때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셨고, 친일파 청산 운동을 펼치며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펴낸 민족문제연구소에 개인 이름으로 후원을 하시고, 이 단체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연설도 하셨다.
선생님의 훌륭하고 자상한 살아행적을 조금이나마 기록으로 남기려고 나는 한동안 카메라를 들고 선생님의 일상을 지켜본 적이 있다. 그런 중에 사모님과 함께 댁에서 휴식하시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은 적이 있는데, 사모님께서 돌아가시자, 내가 찍은 동영상에서 정사진 한 장을 뽑아 확대인화해 거실에 거셨다. 그러고는 선생님은 마치 살아계신 분과 하듯이 사진과 대화를 하셨다. 내가 찾아뵙던 날도 그러했다. “여보, 이군이 왔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아, 선생님,, 가신 지 하마 스무 해라니, 그립고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