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지루한 옛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는 주범 적곡 마로입니다.
회원분들을 또 피곤하게 해드려 송구스러운대로 오늘은 지난 번 선우와 사비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인물인 운에 대해서 한 번 야그해보고자 합니다.
『바람의 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각자에 어울리는 단어를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무휼의 경우는 '찬바람' 내지는 '제왕', 이지는 '가증스러움' 가희는 '맹목적 사랑' 같은 것들이 있겠지요.(경우가 잘 맞는 것을 골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제가 생각한 것 내지는 회원분들이 보편적으로 판단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을 기준으로 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 글의 주인공(?)인 운은 어떠할까요?
개인적인 생각일지나 최 운 왕자만큼 '애틋'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사람도 드물다고 봅니다
스토리 내 입장이든 팬의 입장이든 그 점은 그리 변함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개인적으로 '연민'에 있어서는 마로를 제일로 꼽은 적이 있기는 합니다.)
(해) 용이의 경우도 그렇지만 운이도 낙랑국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람으로 나온 것일텐데 '폼나는 엔딩'을 위해서 이렇게도 매력적인(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캐릭터가 희생 되어야 한다는 것은 참 씁쓸한 기분입니다.
좀 엄한 비교이겠지만 이지를 운과 대비해보면 그 차이는 의외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저는 회원분들 개개인과 조금 관점은 다를지 몰라도 이지가 '전혀' 불쌍하지 않다는 그 기본 취지에 공감하실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 감히 판단합니다.
이지가 자신의 인생을 나름대로 개척하고자 배 극과 '짜고 치는 고돌이'를 한 것 자체를 저는 나무라지 않습니다.
무휼을 갈구하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도 나무랄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지의 속성을 가만히 뜯어보면 그 바라는 바가 '밑도 끝도 없음'을 확인하기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나 열을 얻으면 백을 바라고 백을 차지하면 천을 바라는 사람에게 줘야 할 연민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라면 애정의 실이 안 끊어지는 것이(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겠지만) 이상할 것입니다.
제가 이지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인간 본연의 천성인 욕심을 가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욕심을 상당히 숭고한 무엇으로 치장하려는 '치졸함' 때문입니다.
그녀의 사랑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익'이 보장된 형태의 것이어야만 하지 '숭고함'과는 한참 거리가 있음은 이미 여타의 논객 분들께서 밝혀주신 바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에 비해 운은 어쩔 수 없이 '정치적 인간'을 표방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결코 놓지 않는 모습을 봅니다.
혹 회원분들 중에 이렇게 말씀하실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야! 사람이 욕심을 가지는 게 인간적인 것 아니야? 그러면 이지도 지극히 인간적이지!"
이러한 경우 '인간적'이라는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저로서는 잘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인간의 '이기심'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위의 언급은 백 번 옳을 것입니다.
하나 '연약함'이라던가 여타 '사람답다'라고 불릴만한 요소들을 모두 고려한다면 과연 이지가 그렇게나 '인간적'인지는 솔직히 저로서는 의문입니다.
이지를 인간적이라 할 바에야 차라리 충을 편들고 싶은 심정입니다.
연로한 부왕을 보좌하면서도 사랑에 괴로워하는 동생을 나라를 위해 다그치는 역할은 그가 아니면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운이 낙랑국 몰락의 상징이라면 충은 '낙랑판 무휼' 같은 존재라고 봅니다.
야그가 새는 느낌이지만 이참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할 것이 있습니다.
본시 낙랑이라는 국호 자체가 '배달'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즉 낙(樂)은 몽골어로 baxada- 혹은 baktai라고 하고(여기서 낙은 즐거울 낙의 의미입니다) 랑(浪)은 말음 [L]을 표시하는 첨가어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발음이 대략 bakdal(혹은 baxdal)이 된다 합니다.
이것은 향찰식으로 '박달'이라 하는 것과 일치한다 하는군요.
국어학자 강 길운 교수님에 의하면 이 '박달'은 '평양'에서도 도출될 수 있는 말이며 '배달'의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강 길운,『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
최씨 낙랑국의 수도가 평양임을 추론할 수 있는 한 단서가 될 수도 있겠지요.
적어도 낙랑과 평양이 본시 같은 발음이라는 것은 북한의 국어학자 류 렬의 연구에서도 나옵니다.(류 렬,『세 나라 시기 리두 연구』)
낙랑(여기서의 낙은 풍류 악의 의미입니다)이나 평양이나 모두 '부루나'라고 고중세 국어에는 발음이 된다는 군요.(지면상 자세한 설명은 다음 기회에 드리도록 하지요.)
사실 이 말을 하려고 길게 끌고 왔는데… 최씨 낙랑국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국호 자체가 고조선의 부활을 꿈꾸던 나라였고 그 정점에 선 인물들이 바로 최 리 왕과 최 충, 최 운 형제라는 것입니다.
특히 최 충의 경우는 말이지요(아내가 있음에도 나는 나라와 혼인했다, 뭐 그런 자세).
해서 제가 감히(!) 충을 무휼 같은 존재라 본 것입니다(『바람의 나라』설정만이 아니더라도).
여하간 운의 애정을 이지의 그것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아니 이러한 비교를 한 것 자체가 독자 분들에게 공해(!)일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책임감과 의무 준수'라는 점에서 운과 이지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계약 엄수라는 의무 준수는 커녕 그 이상을 계속 요구하는 이지를 과연 좋게 봐줘야 할런지도 의문이고 적어도 저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운이 자신에게 주어진 무거운 책임에 대해 고민을 가질지언정 나름대로 해결해나갔던 것에 반해 이지에게는 그런 것 조차 없습니다.
이 점에 있어 충은 '운은 물론' 이지와는 또 다릅니다.
충은 '왕이었을 때'의 무휼의 모습이 사생활에까지 배어든 인물일 것입니다만 그래서인지 자제력도 남달리 뛰어나 보입니다.
그러니 운에 비하면 인간 같아 보이지도 않겠지만요.
다만 무엇보다도 충에 비해서 운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자신의 직무를 나름대로 감당해내면서도 토로하는 '자기가 처한 현실에 대한 부정' 때문일지도 모를 것입니다.
운은 어쩔 수 없이 선우를 보내야만 했고 낙랑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등 자기 임무는 다하지만 그렇다고 충 같은 식으로 '낙랑을 지키는 왕자로서의 사명감' 따위에 불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법도 속에서 사랑을 잃고 방황하는 개인의 모습.
이것이 제가 왕자 최 운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마침내 그는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지만(뮤지컬에 근거한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곧 운이 자신을 올바로 찾은 모습이 아닌가 제 마음대로 생각해봅니다.
회원 적곡 마로가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