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죽오일기』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양산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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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부산동의공업고등학교 국어교사엽편소설 '풍뎅이'로 한국교육신문 가작 입선.저서, 소설집 '어머니의 방'과 수필집'죽음과 사색' 등이 있음.
1.죽오竹塢 이근오李覲吾는 누구인가
그는 영조 36년(1760) 울주군 웅촌면 석천石川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울산 학성鶴城이다. 시조는 충숙공 이예李藝이다. 이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양산 웅상과 무관하지 않다. 우선 그의 후손들이 웅상 여기저기에 많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그리고 울산북부순환도로에서 문수로를 거쳐 남부순환로까지가 이예로이다. 물론 이예선생을 기리기 위해서 명명했다. 같은 7번 국도이면서 양산 동면 개곡리 개곡교차로에서 용당터널에서 끝나는 도로가 통신사로이다. 바로 우리 지역의 웅상 두산 위브 아파트 뒤쪽에 개설된 자동차전용도로가 여기에 해당 된다. 이 두 개의 도로명을 합치면 '이예의 통신사로'가 된다. 이예(1373~1445)의 업적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지만 역시 가장 큰 것은 조선 초기 40여 차례 일본 사행을 통해 600여명의 포로를 쇄환해 온 일이다. 죽오 이근오는 이예의 11세손이다. 그는 29세가 되던 해(1788) 향시에 입격하였으며, 이후 성균관에서 유학하다가 1790년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당시 이근오의 문과 급제는 울산지역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 부정자를 시작으로 36세(1795)에 박사博士, 41세(1800)에 부사과副司果 및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43세(1802)에 후릉령厚陵令, 45세(1804)에 병조정랑兵曹正郞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2.『죽오일기竹塢日記』는 어떤 책인가
이 책은 이근오가 당시 시헌력時憲曆에 쓴 일기이다. 날짜 위나 하단에 초서체로 기록하였다. 약 9년 정도의 일기가 남아 있다. 당초에 이 책이 나올 때는 마지막 2년(1831~1832)도 이근오가 쓴 것이 아닌가 하였지만, 나중에 차남 이종화의 일기로 밝혀졌다. 그러니까 이근오가 쓴 일기는 대략 7년 정도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1804년(순조 4)~1805(순조 5), 1808년(순조8)~1812년(순조 12)까지이다. 짧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관직을 그만두기 직전의 서울의 생활상과 이후 낙향해서 엮어가는 시골에서의 일상이 잘 나타나 있다. 전재동(경북대 문헌정보학과 BK 박사후 연구원)은 이근오의 삶의 가치를 가문의식, 가족사랑, 애민의식, 문학적 성취 등에서 찾고 있다. 『죽오일기』는 2010년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에서 인쇄본을 출간한 바 있다. 그러다가 2020년 울산박물관에서 학술총서 제 11권으로 국역본을 발간했다. 앞으로 펼쳐질 필자의 이야기도 이 국역본을 토대로 했음을 밝혀둔다.
1)죽오와 용당
『죽오일기』를 읽어보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지명 중 한 곳이 용당龍塘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첫째는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근오가 태어나서 자란 석천과 양산의 용당이 행정구역상 울산과 양산으로 나뉘어져 정서적 거리감이 있다. 그렇지만 당시는 이웃마을이었다. 지금도 차로 가면 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참고로 그동안 경상도 울산군 웅촌면이던 것이 1896년 8월에 전국 8도를 13도로 분할하면서 용당 이남을 웅상면, 대여 이북은 웅하면이라 하였다. 그리고 1906년 9월에 웅하면은 울주군 웅촌면으로 편입되고 웅상면은 양산군 웅상면으로 개칭 되었다.('웅상읍지' 1995년 간행 참고)
용당龍塘 박실朴室의 사촌누이 종자從姊가 찾아와 묵었다. 그의 손자가 여기에 와서 병이 들었기에 박장朴丈께서 어제 데리고 갔다. 박자운朴子雲이 또 찾아왔다. 누이가 돌아가 무척 처량하다.(1805년/순조5, 1월 1일)
이 글을 보면 이근오의 사촌누이가 용당 박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동안 그녀의 손자가 이근오의 집에 머물렀다. 그 아이는 무슨 일로 외가에 머물렀을까. 중앙 무대에서 병조정랑 등의 관직을 두루 거치고 고향에 내려온 이근오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후학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는 석천에 재천정在川亭과 안화암安花庵을 짓고 죽오竹塢를 건립했다. 당시의 학생들은 서울과 호남 등 원근을 가리지 않고 찾아들었다. 이근오의 사촌누이의 손자도 그 중에 한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정월 초하루에 아이를 급하게 데려간 것으로 보아 병이 매우 위중했던가 보다. 당시 석천의 학성 이씨 집안과 용당의 박씨 집안 사이에 끈끈한 혼맥이 연결 되어 있었다.
희안希顔, 휴손休孫이 용당龍塘에 갔다. 한낮에 두아豆兒, 대한大漢, 득아得兒 세 아이를 데리고 용당에 갔다. 두 아이를 서재書齋로 보냈다. 자의子儀의 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자운子雲의 집에서 묵었다. 밤에 서도書徒들의 과권課卷을 검사했다.(1805년/순조5, 4월 28일)
여기서 말하는 서재는 용당서재龍塘書齋를 말한다. 희안과 휴손은 제자로 추정되며 두아, 대한, 득아는 이근오의 아들인 듯하다. 두아, 대한 두 아들은 이미 학문에 입문하였기에 서재로 보냈다. 막내는 아직 어려서 그렇게 하지 못한 것 같다. 앞서 보았거니와 박씨 집안의 자손이 이근오의 안화암에 와서 공부를 하는가 하면 이근오의 아들들이 용당의 서재에 가서 책을 읽었다. 이 이외에도 이근오는 여러 번 용당에 가서 백일장을 참관하거나 과권課券의 채점을 하게 된다. 석천의 이근오와 용당의 박씨 집안 간에 학문적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과권이란 공부하는 서동들에게 주어진 일종의 과제물이다. 이근오는 다음날에도 용당 서재에 계속 머물면서 아이들을 대면해서 가르친다. 모두 30명이었는데 '자못 총명한 이들(頗有聰慧者)'이다, 라고 말하면서 그 실력에 감탄해마지 않는다. 그 다음날도 이근오는 두 아이를 데리고 용당의 여러 곳을 방문했다고 씌어있다. 이렇게 해서 이근오는 집을 지척에 두고도 용당에서 내리 3일(28일~30일)을 머물렀다. 죽오가 용당을 자주 방문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것, 둘째는 혼인으로 인한 인맥이 형성 되었다는 것, 셋째는 학문적 교류를 위해서였다.
3.『죽오일기』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양산의 풍경
2)죽오와 황산역
『죽오일기』를 읽다 보면 황산역이 자주 나온다. 이근오는 밀양에 가야할 일이 많았다. 황산역은 밀양으로 가는 길목이다. 학성이씨 족보를 보면 밀양에 사는 사람들과도 혼사가 많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근오의 5대조 할머니도 밀양의 일직 손씨이다. 그렇지만 이런 이유 말고도 밀양은 이근오에게 각별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큰아들 종기種驥의 아내가 밀양 내진마을에서 시집을 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밀양 내진마을 벽진 이씨 성산군 이식의 후손이었다.
큰며느리가 산통이 있었다.(1808년/순조8, 1월 3일)
닭이 세 번 울 시간에 며느리가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의 골격이 비범했고, 출산 뒤에 산모도 무사했기에 기쁨을 말로 할 수 없다. 황산黃山에서 온 인편에 사돈가로 편지를 부쳤다.(1808년/순조 8년, 1월 4일)
밀양 내진來進 마을에서 시집 온 큰 며느리는 설이 끝나고 이틀 만에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근오는 손자의 아명을 특쾌로 지었다. 이 날 태어난 분이 이장찬이다. 자라면서 문장이 탁월하고 덕망이 높아 세인들에게 칭송이 자자하였다. 철종 때인 1852년에 생원과에 급제하고 고종 때인 1866년에 의금부도사에 제수 되었다. 황산에서 인편이 왔다고 되어 있다. 물론 산달이 다 되어가니 밀양 사돈가에서 사람을 넣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죽오일기』 전문을 읽어보면 황산을 통해서 사돈가와 평소에도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다.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찰방察訪: 조선시대에 역무를 총괄하던 종6품의 관원)의 편지가 도착했는데 비로소 지난 날 귀양 갔던 사람이라는 소식을 들었다.(1805년/순조 5, 4월 30일)
권안여權安汝가 머무르면서 다정하게 담소를 나누었다. 밤에는 조금 추웠다. 황산黃山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다.(1808년/순조 8, 1월 6일)
아침에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이 보낸 편지와 내진來進 사돈가의 답장을 받았다. (1808년/순조 8, 1월 16일)
1월 6일에 서신을 받는가 하면, 불과 열흘 사이인 1월 16일에 다시 서신을 받는다. 당시의 교통상의 어려움을 생각하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는 동안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과의 관계가 친형제만큼 돈독하여졌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며느리가 오후에 귀녕(歸寧: 시집간 며느리가 친정에 가는 것)을 떠나는데 내가 데리고 갔다. 황교점黃橋店에 묵었다. 영아英娥가 특쾌를 보호하려고 부府에서 고마雇馬를 세貰내고 가마를 빌렸다.(1808년/순조 8, 8월 16일)
새벽에 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길가에서 잠시 쉬었으며 말에게 여물을 먹이고 곧바로 출발했다. 황산黃山을 지나면서 찰방察訪에게 소식을 전했다. 찰방이 사람을 보내 답장하기를, 나에게 관소로 들어오기를 간청했다. 나는 사양했다. 정오 무렵 물금점勿禁店에서 쉬었다.(1808년/순조 8, 8월 17일)
전재동은 이근오의 가족사랑이 특별했음을 이야기 했는데 바로 위의 글에서 그 실질적인 사례를 찾는다. 며느리의 친정 나들이인 귀녕에 시아버지가 동행을 자처했다. 그리고 먼 길을 힘들어 할 며느리와 손자를 위해서 가마 세를 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8월 16일에 출발하여 8월 18일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은 다음과 같다. 황교점黃橋店-황산黃山-물금점勿禁店-(잔도)-신정新亭-인전점印轉店-내진來進마을. 그리고 돌아올 때는 곧장 오지 않고 짐짓 유람도 하고 여러 지인들을 만나 관계를 다진다. 갈 때는 2박 3일이었는데 올 때는 무려 6박 7일이 걸린다. 다음은 돌아올 때의 여정이다. 영남루-인점印店-삼랑서원-오우정-신정-황산-쌍벽루-통도사-극락암-교동(언양)-명촌鳴頓-강정-구정-곡강曲江-월성-본가.
출처 : 양산신문(http://www.yangsa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