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녹색의 편안함으로
벼르고 벼르던 나들이였다. 어려운 나들이 길을 축복이라도 하듯 하늘의 도움이 절묘했다. 밤새 내리던 비가 아침엔 자취도 없이 그치더니 공중엔 엷은 구름을 깔아 한여름 폭양을 적절히도 가려 주었다.
방학식을 마치고 아이들을 집으로 보낸 뒤 학교를 나선 것은 정오가 되어 갈 무렵이었다. 직원친목 여행 겸 워크숍을 떠나는 길이다. 결의를 다지기 위한 플래카드도 준비했다. "명품교육 실현을 위한 2009 인동고등학교 교직원 워크숍"이라 적고 좌우 가장자리에 '열', '정' 두 글자를 원형으로 새겨 넣었다.
학교를 출발한 차는 고속도로를 시원스레 달려 나갔다. 창 밖으로 펼쳐지던 회색빛 도회지 풍경이 어느 새 온통 녹색으로만 덮여 있는 산야의 풍경으로 바뀌었다. 녹색이 주는 안락한 느낌이 여정을 더욱 편안하게 했다. 차는 함양 나들목을 통과하는가 싶더니 한가로워 보이는 시가지 한 쪽에 위치한 어느 식당 앞에 멈춰 섰다. 잡곡밥으로 유명한 곳이란다. 이십여 가지의 반찬과 함께 조, 기장, 찰수수, 찹쌀로 지은 밥들을 한지를 받친 채반에 얹어 내 놓았다. 함께 섞어 작은 그릇에 담아 먹는 맛이 이색적이었지만, 수많은 반찬보다 밥을 더 맛나게 한 것은 때를 훨씬 넘긴 시장 끼였다.
ㅇ 천년의 숲을 거닐며
점심 먹을 식당을 이곳으로 정한 것은 까닭이 있었다. 함양의 그 유명한 상림 숲을 거닐기 위해서다. 이번 여행 최초의 목적지인 식당 인근의 상림숲으로 간다. 신라 진성여왕 때 당시 함양 태수로 있던 최치원(857∼?)이 조성한 호안림으로 천 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선 지금까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우리나라 최고의 인공림이라는 이 숲은 1백20여 종 2만여 그루의 나무가 1.6Km에 걸쳐 길게 어우러져 짙은 그늘을 이루고 있다.
천년의 숲, 그 오솔길을 걷는다. 푸르게 우거진 숲이 내어 뿜는 청량감이 온몸을 적신다.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다. 최치원 선생 신도비와 함께 석불상이며 누각이 숲의 정취를 더해 준다. 역사인물공원이라는 곳에는 최치원을 위시하여 근대 인물에 이르기까지 함양을 빛낸 위인들의 흉상과 공적을 새겨 숲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고 있다. '열녀함양박씨전'을 펴낸 실학자 박지원의 모습도 보인다. 서로 뿌리가 다른 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가 몸을 합친 연리목이 서 있다. 희귀한 일이다. 이 나무 앞에서 맹세하고 다짐하면 사랑이 잘 이루어진다는 나무, 얼마나 많은 연인들이 이 앞에 섰을까. 상쾌함과 신비감에 젖다가 숲을 나서니 광활하게 펼쳐지는 연못, 희고 붉은 갖가지 모양의 연꽃들이 널따란 잎새에 얹혀 우아한 자태로 피어있다. 그냥 연만 있게 아니라 물 위에 떠 있는 수련을 비롯하여 가시연, 어리연, 왜개연이란 것도 있다. 아무렇거나 연꽃의 자태란 면상희이(面相喜怡), 둥글고 원만하여 마음 절로 즐겁고 온화해지는 모습들이다.
숲 앞 너른 잔디 광장에 모두들 모였다. '명품교육'을 위한다는 플래카드를 두르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다. 언제나 숲의 청량감으로, 연꽃의 온화를 닮아 아이들을 싱그럽게, 따뜻하게 가르치리라는 다짐으로 모습을 가다듬는다.
ㅇ 실상사와 장 선생
차를 달려 나간다. 한적한 길이 참 여유롭다고 느끼는 순간 차가 멈춰 선 곳은 실상사 앞 주차장이다. 석장승이 서 있는 해탈교를 지나니 다시 하얀 연꽃 탐스럽게 핀 연지가 펼쳐지고 그 너머로 절로 드는 문이 서 있다. 들길 같은 진입로를 따라 천왕문으로 간다. 이 절에 대한 해설은 역사를 전공한 장 선생이 맡았다. 장 선생은 문 앞에서부터 이 절이 통일신라 흥덕왕(828) 때 증각대사가 창건한 호국 사찰로 신라 구산선문 중에 최초의 개창된 선종 사찰이라는 역사에서부터 오늘날에까지 견디고 이어져 온 과정이며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의 유래를 자세하게 일러준다.
절로 들어서자 시간의 더께가 곱게 내려앉은 삼층쌍탑 등 여러 개의 탑이며 탑비가 절집의 숙연미와 정밀감을 더해 준다. 여래불이 모셔진 보광전, 지장보살이 모셔진 명부전, 아미타불이 모셔진 극락전에서 장 선생의 해박한 해설은 계속된다. 언제 그렇게 깊은 공부를 쌓았을까. 부처와 보살의 유래며 의의를 막힘 없이 풀어나가는 장 선생의 이야기는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니었다. 몸 속 깊숙이 스며 있는 불도를 향한 신심과 머리와 가슴속에서 농익을 대로 익은 지식이 한데 어우러져 누에가 실을 풀어내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듣는 이들은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때로는 탄성을 내기도 하며 장 선생의 이야기에 숨을 죽였다.
장 선생의 해설과 함께 절의 공간 배치와 절집의 모양을 보니 찬연한 고색은 더욱 창연지고, 유정한 모습들은 더욱 깊은 뜻과 정을 뿜고 있는 듯했다. 장 선생의 해설 하나 만으로도 오늘의 워크숍은 만점이라며 다시 '열정'을 뚜렷한 글자로 새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기념 촬영을 하였다.
ㅇ 노고단의 만세
차는 산골짝 깊숙이로 달려 들어간다. 뱀사골을 지나는 길이라 했다. 골은 깊어지고 계곡에서는 청청한 숲의 형상을 훤히 비치고 있는 맑디맑은 물이 쏟아지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음을 비추면 선악의 모든 형상들이 두루 다 비칠 것 같다. 지리산은 깊고도 높다. 차가 숨을 헉헉거리듯 굽이를 돌고 돌면서 반시간 정도를 올라 당도한 곳은 지리산 국립공원 노고단 등산로 입구다.
차를 내려 등산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문득 '시인마을'이라는 안내소가 인사를 하듯 길옆에 서있다. 지리산은 시인이 사는 마을이란 말인가, 지리산에 오면 모두들 시인이 된다는 말인가. 아무튼 정겨운 말이라 생각하며 오름길을 잡는다. 길을 너무 잘 닦아 놓았다.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한가로운 산책로를 걷는 것 같았다. 계단길을 오르고 돌길을 올라 노고단대피소에 이른 것은 한 시간 남짓 걸은 뒤였다. 돌아보니 벌써 장엄한 산 세상 정경들이 펼쳐지고 있다.
정상에 오르면 얼마나 더 장엄할 것인가. 대피소 옆 돌길로 정상을 향해 오른다. 잠시 오르니 천왕봉, 반야봉이 건너다 보이고, 돌탑이 우뚝 서있는 능선이 나타났다. 화랑의 연무도장이요, 제단을 모아 신령을 모신 영봉 노고단 능선이다. 정상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탓일까. 누구보다 제일 먼저 올랐다. 과연 산 세상은 너그럽고도 장엄했다.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능선이며 산세가 이웃 사람 같은 너그러움을 간직하고 있는가 하면, 속 깊은 위엄을 지닌 군자의 듬직한 풍모를 보여주고 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관용과 위엄을 아울러 지닌 사람이 되라는 듯했다.
노고단 정상까지 오르자 하였지만 4시 이후에는 등반을 통제한다며 빗장을 쳐 놓았다. 아쉽지만 어찌하랴! 무릇 규율이며 법이란
지키라고 있는 것을. 정상을 바라보며 우리는 만세를 부르기로 했다. 그 만세로 우리의 열정을 다지기로 했다.
"대한민국 만세!"
"인동고등 만세!"
"명품교육 만세!"
만세소리는 쩌렁 쩌렁 저 멀리 천왕봉으로 울려나가고 있었다. 우리나라, 우리 학교의 명품교육이 우리의 눈앞에 발아래 다가온 듯했다. 우리에게 다가온 명품교육을 가슴에 꼭꼭 새겨 두려는 듯 한 덩어리가 되어 기념사진을 찍었다.
ㅇ VIP를 위하여
등산로를 내려와 차에 올랐을 때는 땅거미가 천지를 휘덮고 난 뒤였다. 어둠에 싸인 골짜기를 돌고 돌아 구례로 나왔다. 널따란 방이 있는 어느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 우리와 발걸음을 함께 했던 플래카드를 높이 걸었다.
"……우리 학교는 VIP학교입니다, 아니면 VIP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VIP란 '귀빈'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상을 뜻하는 말입니다. 학교에는 Vision(전망)이 있고, 학부모·학생에게는 Impression(감동)이 있고, 교사에게는 Passion(열정)이 있을 때, 비로소 명품교육이 실현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워크숍의 주제를 '열정'으로 삼아……"
우리들의 열정은 부딪치는 잔 속으로, 때로는 왁자하게 때로는 조근조근 나누는 담소 속으로 능금 알처럼 발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밤은 우리 삶의 한 역사를 이루는 시간의 더께가 되어 새록새록 깊어 갔다.
밤새 비가 내렸다. 비는 아침까지 세상 만 가지를 다 씻어낼 듯 굵은 줄기로 내렸다. 남은 여로를 어찌해야 좋을까, 우려스런 마음으로 차를 탔다. 차가 달렸다. 이게 웬일인가! 비는 슬슬 잦아드는가 싶더니 길은 언제 비가 내렸던가 싶게 말끔히 닦여갔다. 남원 나들목을 통과하여 고추장으로 유명하다는 순창 마을에 이르렀을 때는 마치 창세기의 햇살처럼 하늘은 구름 사이로나마 빛 내리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고추장 명장 집의 고추장 빛깔이 한층 붉게 빛났다.
대나무의 고장 담양을 들어선다. 화석이 되어 지구상에 다시 태어난 나무 메타세콰이어 푸른 숲길이 펼쳐진다. 비에 씻긴 푸른 나무들이 더욱 싱그러워 보인다. 차를 내려 숲 속 길을 걷는다.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싱그러운 미소로 손을 서로 잡으며 함께 걷기도 하고, 푸른 잎의 넘쳐나는 싱싱한 기운을 받아 비상이라도 할 듯 하늘 향해 뛰어 오르기도 한다.
ㅇ 대나무 숲의 잉걸불 열정
소쇄원에 닿는다. 자욱이 하늘을 가린 대나무 숲 속에 여울을 사이에 두고 창연한 누각들이 서 있는 소쇄원의 풍경이 참으로 소쇄(瀟灑)하다. 지난 밤 비에 말끔히 씻긴 탓일까. 해설사에 의하면 본시 소쇄한 곳에 자리 잡았기로 소쇄원이라 일렀다고 한다. 조성 중종 때 양산보(1503∼1557)가 풍파 심한 세상을 보고 출세에 뜻을 접으면서 자연과 사람의 힘을 합쳐 조성한 정원이요 원림이라 한다. 문주식 해설사는 흙과 돌로 쌓은 고색스런 담벽에 새겨진 '오곡문, 애양단, 소쇄처사양고지려'라는 말의 의미와 유래를 설명하는데 여울을 흐르는 물소리가 말소리를 끌고 가려 한다. 해설사는 여울로 드는 말소리를 잡아내어 더욱 소리를 높인다. 봉황을 기다리는 곳이라는 대봉대며 여울 위에 얹혀있는 광풍각을 거쳐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을 지닌 제월당 마루에 앉았다.
소쇄원 맑고 깨끗한 모습이 한 눈에 든다. 해설사는 집 주인 양산보의 일대기며, 양산보가 살았던 시대와 역사 그리고 소쇄원의 조성 경위를 유창하게 풀어낸다. 한 가지 사실이라도 더 일러주고자 말소리는 점점 빨라진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해설을 들으면서 보노라니 원림 풍경이 더욱 그윽이 다가오는 것 같다. 오늘 우리의 '열정'은 소쇄원처럼 맑고 깨끗한 기운 속에서 잉걸불 피어나듯 솟아나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죽향 담양에서는 모두가 대나무다. 대나무박물관 앞의 '박물관앞' 식당에서 대나무 통속에 안친 대통밥으로 점심을 먹고 죽순주 잔을 나누면서 여정을 마무리한다. 하늘 향해 거침없이 뻗은 대나무의 기개처럼, 언제나 푸른 마음을 잃지 않는 대나무의 의지처럼 아이들을 향한 우리의 열정도 그렇게 피어나기를 기원하며 귀로에 선다.
"……이번 워크숍 여행, 참 즐겁고도 뜻이 깊었습니다. 하늘도 우리를 많이 도와 주셨고요,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도 많이 날렸고,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열정도 뜨겁게 다졌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격려하고 의지를 더욱 굳게 하는 박수를!-"
모두 박수를 친다. 차는 박수소리를 동력 삼아 곧게 뻗은 고속도로를 힘차게 달려 나간다.
구름 날아간 자리에 푸른 하늘이 살짝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2009.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