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천년 동안의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도전적인 모험은 페미니즘의 등장이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인류는 엄격한 가부장제 사회 아래서 존속해 왔다. 페미니즘은, 복잡하고 현란한 수사를 제외하면, 성의 차이는 인정하되 성의 차별은 두지 말자는 것이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영화 속에서, 성적 차별에 관한 격렬한 충돌이 행해지고 있는 지금 이곳의 변화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될수록 성적 충돌은 오히려 더 강렬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 사회 아래서는 여성들의 도전이 근본적으로 용납되지 않아서 충돌이 일어날 수 있는 여건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여성들의 도전은, 가령 [에이리언3]에서 머리를 밀어버린 강렬한 여전사 리플리(시고니 위버 분)가 모성적인 넉넉함으로 에이리언을 끌어안고 불의 용광로 속으로 투신하는 모습처럼 우회적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델마와 루이스]에서처럼 직접적인 피해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훗날 [글래디에이터]로 할리우드 정상의 상업적 감각을 입증한 리들리 스콧 감독은, 아내를 독립된 인격체로 보기보다는 부속품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남편의 감시에서 벗어나, 친구 루이스(수잔 새런든 분)와 함께 이틀간의 여행을 감행하는 델마(지나 데이비스 분)를 통해 가부장제 사회의 모순에 대해 심각한 화두를 던진다.
집과 남편으로부터 해방된 델마는 바에서 만난 남자와 격렬한 춤을 추며 그 기분을 만끽하지만 남자는 성추행을 시도하고, 그 광경을 목격한 루이스는 남자를 향해 총을 발사한다. 루이스는 강간당한 적이 있지만 그 강간범은 결국 무죄로 풀려나왔다. 델마와 루이스는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는 자신들의 정당방위가 입증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도주한다. 사실 그들을 쫒는 것은 잘못된 가부장제 사회의 억압적 질서였다.
수십 대의 경찰차에 포위된 그들이, 마지막 투항을 거부하고 그랜드 캐년 절벽 위로 질주하는 차 안에서 서로의 손을 꼭 잡는 모습은, 여성들간의 연대를 통해 모순에 가득찬 가부장제 사회를 벗어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네 명의 여자 죄수들이 록밴드를 결성하여 공연하다가 탈옥을 감행하고 자유를 찾아 질주하는 [밴디트]는 독일의 여성 감독 카차 폰 카르니에 작품이다. 역시 호송하는 경찰의 성추행을 피해 탈주하게 된 그들이 발매한 [밴디트] 앨범이 시민들의 커다란 지지를 획득하게 된 것은, 그들을 단순 탈주범이 아니라 기성체제의 억압에 도전하고 권위를 무너뜨리는 상징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밴디트]의 아이디어는 국내에서 제작된 신승수 감독의 [아프리카]에도 도입되었지만, [아프리카]에서는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여성들의 도전을 표피적으로 이용하여 상업적 흥행을 노리는 요소로 활용하려고 했을 뿐이다. 우리는 [아프리카]에서 가부장제적 질서에 도전하는 그 어떤 진정성도 발견할 수 없다. 대사는 직접적이고 상황은 빌려온 것이다. 관객들의 정서적 동일화를 이끌어낼 수가 없다.
[매트릭스]의 워쇼스키 형제 데뷔작인 [바운드] 역시 여성들간의 연대를 통해 남성들이 지배하는 파쇼적 질서를 파괴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이제 막 감옥에서 출소해 아파트 잡역부 일을 하고 있는 코키(지나 거슨 분)와 마피아 중간 보스의 정부로 있는 관능적인 여자 바이올렛(제니퍼 틸리 분)이라는 두 여자가 남성적 질서와 대결하는 과정을 그린 [바운드]는,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에 영화적 상상력을 제공해 준 작품이다. 물론 그들의 모험은 성공한다.
최근 제작된 한국 영화 중에서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은, [정사]와 [해피엔드]이다. 우선 이정재 이미숙 주연의 [정사]는 가정을 가진 유부녀가 동생의 약혼자와 섹스를 하고 집을 나가는 파격적 결말을 보여 줌으로써, 전통적 가치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결혼한 여성들이 더 이상 가정의 노예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렇게 웅변적으로 대변한 작품은 지금까지 없었다.
또 [해피엔드]에서는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여성가장이 등장한다. 지금까지 모든 영화에서 가장은 한치 의심도 없이 당연히 남자였다. 그러나 [해피엔드]에서 남편 최민식은 전직 은행원인 실업자이지만 부인 전도연은 학원 원장이다. 그녀는 자신의 학원 원장실에 옛 애인 주진모를 불러 들여 격렬한 정사를 갖기도 한다. 그리고 식탁에서 남편에게,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 오는 것이 내 역할이라면 저기 전자렌지의 가스불을 끄는 것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삶은 변한다. 인생에 있어서 고정불변의 절대 법칙은, 죽음 이외에는 없다. 변화하는 우리들의 삶을 영화는 이렇게 효율적으로 보여 준다. 스크린이라는 전자적 거울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며 자신의 삶을 생각한다. 이제 더 이상 여성은 꽃이나 인형이 아니다. 그것을 우리 시대의 영화는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