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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한반도 정책과 국민의 정부"햇볕 정책"
한국경제는 1980년이후 18년 만에 마이너스 성장의 고통을 경험했다.
외체만기 협상과 고금리정책을 통해 외화위기의 급한 불을 끄고 실물경제를 위축시켜 경기침체와 기업들의 구조조정 여파는
실업대란을 몰고와 작년 65만명이던 실업자 수는 1998년도 초에 157만 명으로 늘어난 금융대란의 여파로 기업과 개인가계의
파산이 줄을 이었고 퇴출되는 동료들을 눈물로 배웅하는'눈물의 비디오'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금"모으기 운동이 벌어
젔고 아이들의 금반지까지 내 놓으면서 IMF의 고금리(18%-20%)지원금을 3년 앞 당겨 상환시키는 한국인의 저력을 보이자
세계언론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1997년 12월18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국민회의 김대중후보 40.3%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38.9% 국민신당 이인제19.2%로
김대중 후보가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 1998년 2월25일 취임식을 갖고 민주주의와 경제를 동시에 발전시키려는 정부가 탄생한
역사적인 날이며 새로운 혁명의 시작한 날로 6.25이후 최대의 국난 외환위기로 나라가 파산 상태을 맞이해 올 한해는 물가가
오르고 실업자가 늘어나 소득은 떨어지고 기업의 도산도 늘어날 것이며 정치,경제,금융을 이끌어 온 지도자들의 정경유착과
감회금융에 물들지 않았던 들 그리고 대기업들이 문어발식 기업을 거느리지 않았으면 이런 불행한 사태는 일어 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는 IMF충격속에서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금'모으기 행사로 이미 20억달러의 금을 모았고 이 운동에 330만
이 동참해 주셨다고 밝히고 나라가 벼랑 끝에 서있는 금년 1년만 이라도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과 나라를 위해 정부를 도와
달라고 하고 총체적인 개혁으로 어떤 정치보복도 없으며 차별과 특혜도 용납하지 않고 지역정권 이니 무슨 도 차별이니 하는
말이 없도록 하갰다고 다짐 한다고 선언하면서 취임사를 끝냈다.
국민들의 반응은 믿을수 없다는 듯이 지금까지 정치인들이 지역감정을 유발시킨 원조론이 일부 국민들의 입을 통해 확산되
퍼져나가자 정치에 관심 없다는 듯 등돌린 국민들의 모습속에 험난한 정치 예고편을 본 느낌이었다.
이어진 국민의 정부는 벤처기업을 육성해 실업문제를 해결하고 통일,안보문제는 자주적 안보로 단결과 강군을 토대로 자주적
안보 태세를 강화하고 동시에 한미 안보체제를 더욱 굳건히 다지는 등 집단 안보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겠으며 한반도에 평화
구축을 위해 4자회담을 반드시 성공시키는데 노력하며 남북 관계를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 정착에 토대를 두고 발전 시키겠
다는 실천 의지를 담은 국민의 정부"햇볕정책"을 밝히기도 했다.
국민의 정부 출범과 동시에 시작된 사정개혁은 경재위기를 극복하는 노력과 더불어 국정 각 분야에 걸친 개혁은 기업회생을
위해 5개 은행이 사라지고 8개 업종 빅딜(사업교환)로 재벌기업의 사정대상 확대로 개혁이 진행됐다.
4개 은행의 합병이 이루지면서 금융기관은 망하지 얺는다는 신화가 깨지면서 증권·보험·투신·종금·니스·상호신용금고 등 부실
금융 기관이 퇴출되자 기업과 개인가계의 파산이 줄을 이어 동료사원을 배웅하는 "눈물의 비디오가"국민들의 심금을 자극하자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우리국민들은 아이들"돐"반지까지 내놓으며 IMF의 고금리(연18%-20%)지원금을 3년 앞당겨 상환하자
세계가 놀래면서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인의 저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국인 대단했다.장하다.그런데 너무 다혈질이며 이기적인 욕심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망칠수있다.
1998년 대선당시 논란이 됐던 3풍(북풍·세풍·총풍)사건이 또 다시 불거져 정국을 소용돌이 치면서 드러난 북풍사건은 수지김
(옥분)의 남편 윤씨(사업)가 여간첩인 처를 살해했다는 거짓말을 믿은 안기부와 언론의 맞장구가 빗어낸 북풍사건으로 판명
되면서 사람의 운명을 바꿀수 있는 유언비어의 무서움을 알게 한 흑색 선전이 문제로 지적됐다.
세풍사건은 이희성(대선후보 이회창 동생)이 이석희 전.국세청 차장과 공모하여 국세청을 동원하여 24개업체에서 166억
7천만원의 불법 대선자금을 모금한 정치자금법 위반이고 총풍사건은 여당 후보인 이회창 측이 지지율 상승을 위해 북측
인사를 접촉해 판문점에서 총격시위를 북측에 요청했다 하여 대선 후보로 출마해 낙선한 이회창씨는 1년내내 3풍사건에
시달리면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도 욕심이 빗어낸 운이 없었다는 총풍사건은 밝혀지지 않았다.
1998년 6월 국민의 정부"햇볕정책"이 발표되자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소" 501마리를 몰고 방북하자 국민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10월에 다시"소 500마리와 함께 평양을 방문해서 김정일과 면담을 갖고 11월18일에 금강산 관광선을 출항시키고
북한 서해안 공단개발사업권을 따내 국민의 정부"햇볕정책"을 받쳐주는 가교역활을 충분히 해냈다.
1998년 6월23일 남한으로 침투 하려던 북한유고급 잠수정이 우리어민 들이
처놓은 꽁치어선 그물에 걸려 표류하다 해군함정이 예인해 보니 잠수정에
타고 있던 침투조 9명 모두자살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군당국자의 발표로
대한민국의 안보관을 재평가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받았다.
동년 7월초 강화도 앞바다에 무장간첩선 침투 경계작전 실패에 따른 지휘관들의
문책성 인사가 뒤 따르자 여수앞 바다에 출몰한 잠수정을 수장시켜 그나마 군의
체면은 살렸으나 북한의 무력침투는 멈추지 않는 근심과 걱정속에"햇볕정책"의
당위성이 이해가됐다.
우리 어부들 그물에 걸린 북한 잠수정.해군사진.
1998년 7월31일 남부지방에서 시작된 폭우가 지리산 피서객을 덮치며 20일 가까이 전국을 강타하면서 9월 태풍 애니가
아물지 않은 상처를 덮처 사망 실종자가 384명이고 이재민이 수십만 명에 재산피해 액이 1조5천8백여 억원으로 집계된
수재의연금 모금액은 665억원으로 국내경기마저 태풍이 흽쓸어 버린듯 썰렁해저 사람들의 마음도 어두웠다.
1998년 9월5일 북한최고인민회의가 국가주석직을 폐기하고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에 추대해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후 4년만에 권력세습 작업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하면서 김정일 독재
체제는 군사적 색체가 더욱 짙어진"강성대국"을 표방하고 아버지 김일성 무력통일의 과업인
선군정치를 이어받아 인민들에게 기와 집에 이밥에 고깃국을 먹인다고 호기롭게 자신 있다는
듯 말하는 모습도 김일성에게 대물림 받은듯 한 분수 넘치는 짖은 추종자들을 껴안고 인민들
에게 자신을 믿고 따르기를 강요하는 전형적인 독재자의 모습이었다.
미사일 개발을 염두에 둔 다단계 로겟발사 및 지하"핵"시설 등을 언급한 것은 한반도에 새로운
긴장조성에 따른 분쟁을 고조시켜 김일성의 과업을 완성한는 의도가 보여지는 발언에 섬득한
국방위원자에 추대된 김정일 느낌 을 같게 하였다는 평론가들의 평가에 긴장감 마저 조성됐다.
(연합뉴스 사진)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의 정부 출범 당시 국가 보안법을 폐기할 수는 없어도 남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국가정보원장
(이종찬)은 보안법을 엄격히 한다고 밝혔지만 국민의 정부 1년사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위반사범이 413명으로
전문민정부 때 보다 3배가 많은 시국사범이 구속 수감된 것도 국가 보안법을 위반했기 때문이라는 분석결과 였다.
국가 보안법에는 북한을 반국가 단체로 규정 하고 있어 북한을 이롭게 한다거나 정부의 정책을 비판 또는
외세의 간섭을 찬양·통일에 대한 요구도 이적 행위로 제안하고 있어 김대통령의 방북은 국가보안법을 스스로
지키지 않고 대한민국 정체성을 파괴했다는 야당의원들의 질타로 국회는 바람 잘날이 없었다.
그렇다면 북한 위정자들의 도발행위를 언제까지 묵과하고 경계하는 국가보안법은 북한위정자들을 경계하기
위한 법으로 폐기를 주장 할 것이 아니라 더 보강하고 엄해져야 한다는 여론이 설득력 있고 역대정부의 위반
사범까지 집계하면 늘어난 종북주의자 마음도 이해는 되지만 통일의 그날까지는 폐기할수는 없는 한시적인 법이
분명해진 것이다.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로 마음을 되돌린 사례도 있지만 투쟁을 업으로 삼는 골수 종북주의가 국위를 해치며
북한을 이롭게 하는 행동과 언행은 이 곳에서 살아가는 후대들에게 북한의 일인 치하의 독재자 핍박을 묵과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의 보완개정에 정치권이 나서서 해법을 찾아 머리를 맞대고 이에 대한 보완내지 개선
책을 찾는것이 국회의원의 할일로 국민들을 위하는 것이지 국민들의 혈세를 축내며 특권을 이용한 "편"가르기는
후대들의 평가 또한 사사로운 감정때문에 나라에 해를 입힌 매국노 소리를 듣게 된다는 사실 또한 우리 선조들이
살아온 일제감정기 시대에 나타난 매국노 들이 나라를 이꼴로 만들어 조국을 팔아 먹었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1999년 6월15일 북한 경비정이 NLL(북방한계선)침범으로 서해 대청도 앞바다에서 남·북 해군함 간의 교전이 일어났다.
오전 7시55분 450톤 급 북한 경비정 2척이 어뢰정 3척의 호위을 받으며 영해를
침범하자 우리해군의 76m 함포사격에 북한 어뢰정 1척이 침몰했고 나머지 북한
경비정과 어뢰정이 크게 파손됐으며 우리 해군함정은 단 한 군데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발표하자 모처럼 속이 후련했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북한 김정일의 선군정치의 첫 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보복심리로 인민군
작전 실폐를 문책하는 총살행으로 군기를 잡는 김정일의 통치방식은 인민
군대의 충성과 복종심을 강제하고 인민들에게도 재갈을 물리는 일인 지배
체제의 왕국건설을 위한 남쪽 해상 도발행위는 인민들에게 공포심도 심어
서해상 남북함정 교전.(해군 사진) 주고 북한 인민들의 사상교육 미끼이며 북한해군력의 실험장이 됐다.
1999년 8월26일 한국경재계 2위인 대우그룹이 구조조정 결과 해체하기로 결정된 대우의 몰락은 김우중신화도 깨졌다.
대우그룹 몰락은 즉흥적이고 무모한 사업확장과 일인지배 체제에서 오는 안정성과 IMF의 구조조정으로 금융권의 합병과
도산으로 인한 때을 놓쳐 금융권의 환경 변화를 적응하지 못한 것이 큰 해체 이유라는 정부관계자의 설명과 대우그룹의
몰락이 몰고온 여파는 전금융권과 중소기업은 물론 개인 가계의 파산으로 이어진 한국경제의 대란이었다.
1999년 10월25일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조세포탈 협의로 구속되자 언론계와 정치권이 언론탄압 이라며 쟁점화 시켜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 대정부 질문에서 현 정권의 언론장악 시나리오 라며 언론대책 문건을 폭로한 요지는 권력이
언론을 장악해야 한다는 문건 작성자은 중앙일보 문기자였고 정의원에게 전달한 사람은 평화방송 정치부 차장으로
밝혀졌지만 여야는 민생 예산 심의를 뒤로 미루고 탄압정쟁 논란 속에 대전지검 검사들이 변호사들의 떡값과 향응을
받았다는 이유로 사표를 종용받자 검찰총장 등 수뇌부 퇴진을 요구한 총장의 옷로비 의혹제기와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
폭로로 항명하는 일이 벌어져 국민들의 원성은 오히려 검찰이 비리의 온상이라고 비난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제기된 문제는 국회청문회로 이어져 특별검사 수사로 밝혀진 것은 어론장악 문건 해프닝 이었고 검찰총장 부인
옷 로비사건은 신동아 그룹회장(외화밀반출협의)의 부인이 남편의 구명운동을 벌인 로비사건으로 전직 총장이 조사받는
일도 벌어졌고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도 밝히지 못해 1999년은 검찰 역사상 최악의 불신만 심어준 해가 됐다.
2000년 새해부터 대형 금융비리 사건이 터져 국민들에게 허탈감을 안겨준 한빛은행 불법대출은 아크월드 대표 박해룡
형제가 466억원의 대출보증 외압설은 정부가 강조하며 육성시킨다던 젊은 밴처사업(정현준.진승현)의 신용 금고 불법
대출에 시달린 국민의 정부 실세였던 박지원 장관이 사퇴하는 등 엄청난 파장을 일으켜 장래가 촉망 된다던 밴처열풍도
사라져 못살겠다는 하소연 소리로 국내경기 마저 얼어 붙게 만들어 어려워진 개인가계도 위험수준을 넘나들자 원망의
소리는 정치권의 권력싸움 때문이라 했다.
2000년 4월13일 제16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 한나라 당이 133석을 차지했고 집권당인 새천년 민주당은 115석으로
원내교섭 단체구성에 실패해 불안한 정국구도가 험난할 것으로 예상된 가운데 민심도 여·야로 편이 갈린 말 싸움은
이편저편으로 나누어 지더니 좌파 우파의 명패를 달고 거리로 뛰쳐나가 우리사회 질서도 무너지는 무법천지가 됐다.
업힌대 덮친다 던히 AP통신이 1950년 6.25전쟁 당시 충북 영동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은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상부지시에
따른 주한 미·대사의 서한을 입수해 공개했고 미군 병사가 한국여종업을 살해하고 도주한 사건과 4월에 터진 매향리 전투기
실전용 폭탄 투하(7월)사건과 9월에 터진 미8군 독극물 한강방류 사건이 밝혀지면서 한·미SOFA(한미행정협정)개정여론이
일자 미군의 존재를 거론하는 다양한 의견충돌로 보수단체와 반감 시민단체의 격한 충돌이 일어난 한·미 시각차는 대한민국
건국과정서부터 6.25전쟁 당시 미군의 역활론과 시대가 변했다는 현실론에 제동을 건 남북정상회담 성사 여부가 관심대상
이되 SOFA 개정론도 수면으로 자자들고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 김정일을 만나는 방북길에 오르면서 국가보안법이 거론됐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께졌지만 남북이 무한정 대결국면으로 치닫는 형세에 대화의 물고를 터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해져
충돌 양상을 보였던 대결국면이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갔다.
2000년 6월13일부터 15일까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분단 이후 첫 회담에서 자주적·통일추진·이산가족만남·장기수해결·교류활성화
당국자 간 대화 등 5개항의 6.15 공동선언문을 남북이 동시에 발표했고 이후 두
차례의 이산가족 교환방문·국방장관 회담 등으로 이어진 교류행사 끝에우리내부
의 서로 다른 집단의 이해 관계가 부딛치며 불화를 일으킨 화근의 원흉인 북한
위정자을 믿을수 없지만 우리국민들의 골깊은 감정을 가감없이 드러낸 평화공존
을 위해 손잡은 남북한 사람들의"삶'을 위한 지도자들의 만남에 환영과 반대의
감정은 확연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평양회담
연합뉴스사진.
남북 두정상의 5개항의 합의선언문.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 해결을 한다.
2. 남과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체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 안이 공통점을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북은 올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간다.
4. 남과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시켜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해 빠른 시일 안에 당국 간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자 김정일위원장도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한다고 약속 했다는 6.15 공동선언문을 남북이 같이 발표했다.
2000년 7월1일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라는 의약 업제도가 시행 되 자 의료계가 5차례나 집단파업에 돌입 하여
사상초유의 진료공백 태로 국민들은 처방전을 들고 약을 살수 없어 애을 태우며 준비 없는 정부를 원망하는 탄식소리가
들리면서 정부의 의약법 개정을 약속해 파업이 풀렸으나 국민들만 고통스럽게 만든 집단의 밥그릇 싸움은 추해 보였다.
2000년 12월10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돼 상과 상금으로 12억을 받았다.
수상사유로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노력을 공로로 밝히자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 김정일에게 감사 한다는 말에
국민들은 안보와 교환한 가신들의 로비설을 제기하면서 노벨상을 국가에 헌납하라는 감정섞인 돌직구가 날아다녔다.
2001년에 김대중 대통령은 연두회견에서 언론개혁의 필요성을 제시한 후 국세청은 국내23개 언론사에 1천명이 넘는
조사요원을 투입해 132일간 고강도 세무조사를 실시해 총 5천56억이라는 세금을 추징하기로 결정하자 검찰이 나서서
조선·동아 대주주를 구속시켜 세무조사를 가장한 비판 언론 죽이기기는 세계언론인 협회(IPI)로부터 한국은 언론자유가
없는 국가로 분류되 언론인들의 거센 저항이 예고된 회견은 민주투사에서 대통령의 현모습을 비판한 사설 또한 보수지
와 좌파지로 확연한 색갈을 들어내 독자들도 이에 편승한 우파·좌파로 갈린 색갈론의 쟁점화는국민들을 분열
시키기에 충분한 원인 제공자였다는 지적에 대해 언론들은 입을 닫았다.
봄에 답방하겠다던 약속이 깨지자 김대중대통령은 구체적 답방 일정을 밝히라고 요구하는 등 답방약속을 믿는
기대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언론들의 보도로 국민들의 반응 또한 빠른 포기는 국위를 위해 도움이 되며
김정일은 지은죄가 많고 겁쟁이라 정상간의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우물안 개구리일 뿐이며 북한 지역의 포도
대장인 두목역활이 제격인 김정일과의 약속에 속은 김대중 대통령이나 우리국민들을 얕잡아 보고 조롱하고
있다는 여론이우세했다.
그래도 소식이 없자 김대중 대통령은 답방에 대해 단언 할수 없다는 기대감이 있었으나 이재 기대를 접는다며
실망감을 숨기지 않고 나타냈다는기자들의 전언이 있자, 대다수 우리국민들도 공산주의자 거짓말 실체는 함께
한다는 느낌만 줄뿐 실천할 의지 없는"속빈동뚝"(북한어:연결 이음에 공간을 두자는 말)같이 김정일은 기분에
따라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감흥이나 기분에 따라 말과 행동을 하지만 시간이 가면 태도가 돌변한다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속고 온 나라의 국민들도 속았다며 이런 집단이 북한의 참모습이며 막가파식 김정일 개인의
독재집단이지 공산주의 국가가 아님을 깨닫고 예의도 모르는 김정일 집단과는 단절하고 대한민국 정통성을
회복시켜 북한은 적국임이 분명하다고 알려 희생당한 분들과 유가족들의 한을 달래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인
안보를 강화시키는 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장하고 후대를 위하는 길이란 설득력이 있게 들리기도 했다.
북한 김정일이 마음을 고처먹고 약속을 지키는 지도자의 통큰 정치적 화해의 기대감은"짝사랑"일 뿐이었다.
2001년 6월28일 굶주림에 지처 북한을 탈출해 중국 베이징 유엔난민사무실에 진입해 중국정부의 추방 형태로 한국에
입국한 장길수군의 가족 7명의 탈북사건은 국민들의 관심을 촉발시켜 배곯아 탈북한 참담하고 슬픈 사연은 김정일의
기와집에 이밥에 고깃국은 어디로 가고 오죽하면 고향을 등지고 먹거리을 찾아 한국대사관의 도움을 받게 된 사유는
북한 김정일이 체제유지를 지속시키려고 군비확장에 쏟아부은 재정파탄이 인민들의 민생고을 가중 시켰다는 것이다.
지난 5월에 북한을 탈출한 김순희 씨가 미국 이민국(INS)에 망명을 신청해 북한 인권유린사실을 폭로했고 1994년4월부터
1999년 1월까지 5년간 북한요덕수용소(15호 관리소)에 수용됐던 인민군 중위 김정일의 근접 친위대 이백룡(42)씨가 수용소
의 실체를 소상히 증언함으로써 북한당국이 극구 부인했던 정치범 수용소 존재 사실을 일본 공중파 방송이 북한에 잠입해
철조망 밖에서 촬영한 수용자들의 실생활상이 사실로 확인되어 세상에 알려지자 유엔과 인권단체들이 인권유린 강권정치를
비판받은 북한은 인간의 자유를 극도로 억압한 사상이나 행동을 제안하는 얼어붙은 동토란 비난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 씨의 증언은 북한이 94년 식량난이 악화되자 1인당 배급량이 하루 80그램으로 줄었고
그나마 옥수수는 쭉정이로 영양실조에 몸이 마르고 부어올라 죽으면 시체 치우는 일이
하루 일과였으며 혁명화 구역에서만 2천여명 가운데 4백여명이 96년1년 사이에 사망했고
밀려드는 사람들의 수용자수는 3만5천여 명에서 4만여 명으로 늘어났다고 증언하고 공개
처형도 갈수록 잔인해저 수용소에서 도주 하다가 붙잡힌 어떤 청년은 다리를 묶인체 공개
처형 당하고 경비병은 수용소 사람들에게 그의 피를 손에 묻히며 너희도 잘못하면 이렇게
된다고 한 잔인성에 소름이 끼첬고 공개처형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한다고 햇다.
북한 수용소 수감자 인분나르는 모습.
1996년에는 국제인권 단체가 수용소 방문을 염려해 막사를 모두 부숴 버리고 산속
으로 대피시켜 15일간이나 산속에서 보내면서 진짜로 외국단체가 관리소를 방문해
기관총으로 다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고 지금도 수용소생활은 머릿속을
맴돌고 있고 인민을 위한 북한 김정일의 정치는 측근들의 낙원이지 지옥이라 했다.
꼬리 없는 짐승들의 탈북저자(이순옥씨)의 증언 또한 중국 출장길에 김정일의 옷과
같은 옷감을 구입한 것이 문제가 돼 요덕수용소에 끌려간 스토리도 맥락이 같았다.
수감자가족 산속 피신.(일본방송 켑처)
91년도에 귀순한 가수 김용씨도 개천교화소의 실태에 대해 폭로한 수용소 생활상이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한것이 없다고
증언했으며 요덕수용소의 실태는 92년 탈북한 조선일보 강철환 기자와 수용소 동료 안혁씨가 이미 증언한 사실을 입증
시킨 탈북자들의 증언은 국가가 않인 독재자 왕을 위해 북한인민들의 골수를 착취하여 추종세력의 낙원을 만들고 있다는
증언이었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어느 정도 출소의 희망이 있는 혁명화 구역과 평생 나올수 없는 완전 통제구역으로 나누어지며
현제10여 곳에 20여만 명이 수용되어 있는 곳으로 추정하고 완전통제구역이 더욱늘어나고 있다고 탈출한 사람들의 한결
같은 증언은 북한 위정자들의 낙원일 뿐이며 북한은 사람들을 가축화 시켜 충성심이 보이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곳
으로 알려졌다.
이 낙원을 유지하려고 대한민국을 활용하고 위장한 통일론은 북한인민들의"삶을 황폐화 시키는 독재자의 통치
무기로 활용되고 있는 김정일의 만행을 대한민국 국민들은 북한이 떠들어 대는"우리끼리 우리민족의" 동질감을
갖게하는그럴듯한 선동에 속지말고 이승만 대통령의"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를 알아야 하겠다.
독제를 위한 수용소 실태폭로 사태는 독제를 위한 인권이 억압수단으로 이용되는 북한 사람들의"삶"은 식물인간이었다.
이런 독재 체제는 개인의 주체성이나 자주성이나 자존심 등을 억압하는데 권력기득권 층을 활용한 독재정치는 하사품의
위력 앞에 굴종시키며 이들을 도구로 활용한 북한의 공짜분배는 인민들까지 복종하게 만들면서 기득권 층이 앞장선 감시
감독으로 이어진 삶의질이 억망인 이런체제의 저항은 탈출이 유일한 수단이며 살아보려는 인간의 행동양식이기 때문이다.
2001년 9월3일 한나라당이 제출한 임동원 통일부 장관의 해임 건의안에 자민련이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3년10개월 만에
붕괴된 원인은 DJP(김대중·김종필)공조가 깨진 이유도 포함되지만 우리사회에 떠돌던 정통성 시비가 큰 영향을 끼첬다.
이로써 국민의 정부는 여·소·야·대라는 어려운 정치환경을 자초해 작년수사 때 은패했다는 이용호·진승현·윤태식 비리의혹
사건이 특별검사 수사로 불거져 청와대 민정수석(신광옥)국정원 2차장(김은성)연루된 로비를 밝혀내기도 전에 민심은 이미
국민의 정부를 불신하는 민심·민란은 서민들의 밥상이 초라해 지면서 재보궐 선거가 국민들 관심선상으로 그 어느때 보다
선거 참여도가 높은 이유도 북한 김정일의 대를 이은 도발행위를 걱정한 적과의 동침을 거부한 민심이반 현상때문이다.
2001년 10월25일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가 치러진 서울동대문 을구와 구로을 및 강릉을 포함한 3곳의 재보궐선거에서 새천년
민주당이 참패당하고 한나라당이 3대0 완승을 거두면서 1석부족한 거대 야당의 한나라당이 국회를 장악해 역풍이 불었다.
민심 이반이 뚜렷하게 감지된 민주당은 김대중 대통령 측근들의 비리의혹에 대한 인적쇄신을 요구하는 등 내분사태에 휘말여
김대중 대통령은 아들들의 비리의혹에 사과하고 민주당과의 결별을 선언하며 국민 앞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철저하게 관리한
다는 약속이 있자 측근들로 인한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종료를 앞둔 대통령의 고뇌가 엿 보이는 측근비리로 실망감만 보탰다.
2001년 11월8일 김대중대통령이 새천년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하자 측근들의 만류를 또 거절하는 모습에 측근들의
비리가 대통령의 힘까지 무기력하게 만든 측근들의 실정을 꼬집는 야당의 폭로는 점입가경으로 치닫는 모습이다.
2002년 2월2일 김대중 대통령은 처조카인 이형택(예금보험공사전무)이 이용호 의혹 사건에 연루돼 구속수감되면서 이용호는
온 국민들을 실망시킨 권력비호에 분노한 국민들은 위정자들이 나라를 망치고 민주주의 미래는 비리척결에 흥망성쇠가 걸린
열쇠로 척결 대상인 말로만 엄격한 잣대가 않인 실직적 제안법으로 정치권 진입을 막고 비리사범 면죄부가 척결 대상이라는
것이다.
2002년 5월과 6월에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과 처조카 등 친인척 비리가 드러나면서 대통령의 3남(김홍걸)은 미래도시
환경대표 최규선 게이트와 관련됐고 이 케이트는 정부의 2조5천억의 국가 체육복표사업을 수주한 배경을 최씨의 운전기사
(천호영)가 로비 의혹을 녹음테이프로 검은 거래의 실상이 폭로돼 대통령의 3남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 최규선은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자 국민들의 들끓은 분노는 전·정부와 다른 기대했던 투쟁정치인들도 똑 같다며 제식구 감싸기에 급급해
국민들의 고통은 멀리하고 국가의 정통성인 안보 문제만 회손시킨 시정배라고 비아냥 됐다.
대통령의 2남(홍업)씨는 측근인 김성환씨와 함께 기업체로부터 로비성 돈을 받은 협의로 각각구속되 김대중
대통령을 곤욕스럽게 만들었고 국민들은 전·노태우 대통령이 중국방문길에 주어서 받았다고 말 한 금전 수수
내용도 해명하고 가신들과 짜고 비리를 저지른 대통령 아들과 주변단속 질타에 대통령도 할 말이 없었다.
2002년 3월14일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 25명이 베이징 스페인대사관에 진입한 것을
시작으로 중국내 외국 공관에 진입한 뒤 한국의 망명이 줄을 있는 사례가 빈번해진
탈북자 들의 고통이베이징 주제 한국영사관과 외국대사관에 진입한 과정의 처절한
사투는 북한 위정자들의 약속과 다른 지상낙원 이라는 북한 사람들의 "삶의"모습을
대변해 주는 탈북민들의 사투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과 슬픈 마음에 북한사람들의
고달픈 "삶이" 머리속에 그려진다는 여론이었다.
대사관 진입을 시도한 탈북자 일행
(인터넷 사진 모음 펌)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이땅에서 살고있는 우리들은 배부르고 등 따스한 행복함을 알고 북한김정일 집단의 폭정을
보고 "변절자" 같은 행동은 국가와 자신과 후대를 망친다.
2002년 6월26일 경기도 의정부에서 작 전 중이던 미군 장갑차에 여중생 신효순(14)및 심미선(14)양 2명이 숨진 사건을 가해
미군병사 2명이 미군법정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반미감정은 서울광화문 등 전국에서 두 여학생을 추모하고 한·미주둔군 지휘
협정(SOFAO)개정을 촉구하는 촛불시위로 반미감정을 한층 가열시킨 찬반론란은 보수세력대 진보세력의 다툼으로 번졌다.
두 여학생의 사고를 미국측이 공정하게 처벌하려는 마음만 먹었다면 반·미 감정도 격해지지 않았고 사고을 낸 미군병사들이
"초상권침해"운운하며 조사를 기피하자 의분을 느낀 의정부 여학생들의 촛불시위가 재판권 이양 요구시위로 옮겨가 미국은
이를 거부하자 우리정부는 SOFA(주둔군 지위협정)개정문제 제기를 하면서 대규모 시위로 번지기 시작한 원인 제공자였다.
이렇게 불붙기 시작한 재판권 이양문제가 촛불시위로 확대되 반·미감정을 확대시킨 MBC방송 영향이 기폭제가 됐다.
2002년 6월29일 서해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경비정의 기습공격으로 우리해군 고속정
1척이 침몰하고 전사자 6명 부상자 18명과 북한 경비정도 대부분 파손 됐다는 뉴스가 있었다.
이날 오전 10시25분 우리해군 장병27명이 승선한 고속정이 침롤 당했지만 북한 경비정 2척중
다른 한척이 화염에 휩쌓이자 나머지 1척이 예인해 도주했다고 발표한 군·당국에 의하면 북한
경비정 승선 인원은 50명으로 그중 10명이상 사망하고 상당수가 부상당한 것으로 발표했다.
서해교전에 불붙은 북경비정.
북한 군부의 도발행위 또한 김정일의 허락없이는 감행하기 어려운 북한 체제에서 이런 도발
행위는 국민의 정부출범 이후 군사적 도발이 11차례나 있었으며 NLL(북방한계선)침범은 6월말
이후 6차례로 2002년 집계상황은 14차례나 서북방 한계선의 도발행위로 우리장병들이 죽어는데
국민의 정부위정자들은 북한 눈치를 보는지 무관심한 태도로 일괄하자 유가족들도 침묵했다.
서해교전에서 순직한 유가족을은 남북대화에 걸림돌이 될까봐 정부의 눈치를 살폈으나 촛불
시위와 반·미 감정에 떠밀린 정부의 무관심을 원망하며 고국을 등지고 이민을 떠난 유가족이
생기자 장병들의 사기를 걱정하는 원성이 어찌된 일인지 없었던 일처럼 원성이 사라졌다.
순직한 6명의 해군장병 해군사진.
2002년 8월30일부터 시작된 폭우가 한반도를 관통하면서 사망21명 실종 32명의 인명과 재산피해 5조1천4백79억의 손실을
준 이 폭우는 하루 동안 강릉지역에서 870.5미리의 집중호우를 뿌려 일일 강우량 최고치를 강타하고 강릉·삼 척·동해 등 강원
영동 지방과 경남 김해 및 경북 김천 주민수만 명이 고립 상태에 빠져 긴급 구호정책은 정부의 탁상공론으로 인해 피해가 더
커져만 갔다.
매년 반복되는수해예방대책이 시급한 현안으로 떠오른 물난리 대책에 국민을 위한다는 위정자들을 원망했다.
2002년 10월 물가와 부동산 값이 폭등세를 보이자 정부는10여 차례에 걸쳐 집값 안정화 대책을 내놓으면서 안정세를 보이자
금융 기관들이 마구잡이식 가계대출로 가구당 빛이 2천9백만 원으로 치솟고 신용불량자가 사상 최고치인 1.257만 명을 기록
하는 한국경제에 새로운 복병으로 등장해 서민들의 고통을 가중시키자 "못 살겠다"갈아보자"는 옛구호가 등장하면서 대선을
맞이했다.
2002년 12월19일에 실시된 제16대 대통령선거에서 유효투표 2456만1916표의48.9%인 1.201만4277표를 얻은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시대가 막을 내렸고 본격화된 경기침체는 일자리가 줄어들고 가계소득이 감소한
탓에 카드 빚등을 갚지 못한 신용 불량자가 360만명을 육박하는 수준까지 급증했으며 신입사원 채용규모를 줄이거나 채용
계획을 포기하는 기업들이 속출하면서 사회 초년생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청년 실업율이 예년보다 1-2% 높은 8.0%로
치솟자 정부는 인생역전 대박을 터뜨린다는 숫자 46개 중 6개를 맞추는 로또 복권을 허가해 경기 침체로 호주머니 사정이
빈약했지만 로또 판매액은 1년간 총3조7천억으로 최고 당첨금이 407억 원에 달하면서 로또복권을 사들고 주말을 기다리는
로또 신기루 환상이 유행병처럼 번져 너도 나도 복권 열풍에 힙쌓여 사회전체를 대박 꿈속에 빠져들게 만든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꿈속의 로또열풍에 사람들이 온순해 졌다.
희망과 기대속에 출범했던 국민의 정부도 막을 내리면서 자유민주국가의 후대를 위한 참여시대정부가 들어섰다.
우리시대에 우리들 이야기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