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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大, 만학도들의 스승사랑-손 편지로 보내와
위로, 감사, 눈물, 감동으로 이어져
최고다 선생님 편지공모전에 응모한 손 편지들를 테이블에 펼쳐 놨다.
“많이 배우고 더 똑똑해서 여러분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배웠기에 나중에 배우는 사람을 정성으로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하신 안영철 선생님. 선생님께서 ‘출석수업 강의 후 백발 학생들의 열정에 감동해 스터디에서 2년 넘게 무보수로 계속 강의 중’이라는 말씀에 감동을 넘어 충격을 받았다며 감사의 편지글을 쓴 방송대 일본학과 4학년 서원오(48, 부산) 씨. 서 씨의 손 글씨 편지는 정갈한 필체만으로도 감동이었다.
공모전 실시 75통의 편지 보내와
국립 한국방송통신대학교(총장 조남철)는 스승의 날을 맞이해 학생과 동문들을 대상으로 편지공모전 ‘최고다 선생님’을 펼쳤다. 4월 25일부터 9일까지 약 2주간의 짧은 공모 기간이었지만 75통의 손 글씨 편지와 이메일이 도착했다.
방송대에는 전국 49개 지역에 캠퍼스가 있다. 재학생만 20만 명이 넘는 메가 유니버시티(거대 규모 대학, Mega University)다. 이런 이유로 강의와 학생지도를 맞고 있는 전임교수 외에 출석수업만 위한 강사, 학생들의 담임선생님 역할을 하며 학사일정 관리 및 개인상담을 하는 튜터,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학습 방법 등을 알려주는 멘토 등 선생님의 역할을 하는 다양한 스승이 있다. 또한 다양한 선생님만큼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이 있다.
손 글씨에 담긴 진실한 마음
한 글자, 한 글자 정성들인 편지, 떠오르는 감사함을 급하게 적어 옮기느라 이면지와 연습장에 적은 편지 등 손 글씨 편지가 귀한 요즘 글자 하나하나에 감성이 담겨져 있었다.
초등학생 글씨체로 편지를 보내온 가정학과 1학년 K(58) 씨는 “IMF때 중기사업을 하던 남편은 가출해서 돌아오지 않았고 저는 큰 딸 고1, 둘째 딸 중2, 막내 딸 5살 세 딸을 데리고 여성가장으로 살았습니다. 집이 가난해 초등학교 졸업이 저를 주눅 들게 했습니다. 공부에 대한 열망이 늘 가슴 속에 있었어요. 큰 딸, 둘째 딸이 대학 줄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저는 검정고시를 봐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학원을 찾았는데(중략) 방송대에 합격 문자를 받고는 눈물이 났어요. 58살의 여성가장으로서 몸도 건강하지 못하고 컴퓨터도 없고 할 수 도 없었는데, 이영숙 튜터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다시 해보세요. 잘할 수 있어요’하시며 30분을 넘게 너무 친절하게 알려주셨어요. 이후에도 딸이 아파 돌보느라 포기하고 싶었는데 또 다시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어려운 중에서도 학우님이 포기만 않으시면 공부할 수 있어요’라고 해주셔서 용기가 되었습니다. 조금이나마 귀찮아 하셨다면 아마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나 싶어요”라며 진심을 담은 편지를 보내왔다.
젊은이를 뛰어 넘는 만학도의 스승사랑
만학도들의 선생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은 젊은이들을 훨씬 뛰어넘기도 했다. PC에 익숙하지 않은 노년의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과목 중 하나가 교양과목인 ‘컴퓨터의 이해’다.
유아교육과 2학년 온경숙(43 서울 강서구) 씨는 은인기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사람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어찌 컴퓨터를 감히(?) 이해하냐”며 “은 선생님의 이틀 간 특강으로 하나 하나 밝은 빛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감사하는 것은 이후에도 온라인 카페를 만들어 2012년 5월에 개설해 현재까지 1천명이 넘는 학우들이 가입해 공부의 끈을 이어가도록 했다.”
국어국문과 1학년 이순금(60, 안양) 씨는 어린이가 된 것만 같다며 행복한 마음을 옮겼다. “선생님을 뵌 것은 생활한문 시간이었지요. 제가 육십대 초반으로 방송대에 입학하고 처음 맞는 출석수업 교실이었어요. 선생님은 앳된 노처녀 같아보였고, 우리를 어린이 대하듯 유아스런 화법에 웃음이 나왔지요. 어느듯 교실 안에는 나이를 잊고, 오직 선생님과 어린아이들만이 존재했습니다.”
자식뻘 선생님 건강 걱정하는 어르신 학생
수업을 들을 때면 내내 강의내용을 한 마디라도 놓칠까봐 눈을 초롱초롱 뜨며 맨 앞자리에 앉는 만학도들. 수업이 끝나면 이내 부모마음이 돼 어린 선생님들을 챙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48년 만에 대학에 입학했다는 문화교양학과 1학년 김재인(67, 서울 강북구) 씨는 “지금 이 편지를 쓰느라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데도 허리가 아픕니다. 선생님도 강의에 너무 혼신을 다하지 마시고 건강을 챙기시기 바랍니다. 강의 때 제가 드린 주스도 마실 시간이 없이 열강하시는 것을 보고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르실 겁니다”라며 한참이나 젊은 선생님을 걱정했다.
“50년 만에 강의를 들으니 잔뜩 긴장이 되었지요. 교수님을 보니 예쁘고 호리호리 하셔서 꼭 우리 딸을 보는 것 같았어요. 이윽고 수업이 끝났고 창 밖은 어느새 어두워졌어요. 갑자기 교수님 주무실 장소가 걱정이 되어서 나도 모르게 ”교수님 어디서 주무세요?“라고 물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기는 질문이지만 그 때는 어린 교수님이 걱정이 되어서 그런 말이 나왔어요”라며 국문과 2학년 김복희(71, 원주) 씨가 글로 썼다.
선생님의 한 마디가 인생의 전환점 만들어
학창시절 선생님의 관심이 학생의 인생을 바꾸는 경우가 있듯이 나이 든 중년 학생들에게도 큰 힘이라고 했다.
국문과 1학년 R(53, 부산) 씨는 “박태상 교수님, 지금까지 저의 삶은 외부로부터, 타인으로 부터 행복을 얻고자 했던 것이라면, (그 결과는 언제나 불만과 불평, 그리고 공허함 뿐이었지만요) 요즘 저의 삶은 저의 내부로부터 우러나오는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교수님의 말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좋은 글을 쓰려면 많이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해야 한다며 '집에 있지말고 무조건 싸돌아 다녀라!'였지요. 그 말씀은 수십 년 껍질을 깨지 못한 채 알 속에 갇혀 있던 저를 구해주셨습니다”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중문과 4학년 조명찬(45, 부산) 씨는 구경숙 교수님께 전하는 편지에서 교수님의 칭찬으로 포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조금만 더 열심히 공부하면 분명히 잘 할 수 있느니, 열심히 노력하세요, 가능성이 있어요’라며 격려해 주시는 교수님이 어찌나 고마운지, 정말 이때 사기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후에 학업에 많은 진보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비를 잘 넘을 수가 있었습니다. 2개월 후 말레이시아에서, 거래처와 최종구매처에서 손님이 오셨는데, 나이 드신 사장님과 그 따님으로 화교 분이었습니다. 저는 동원 가능한 모든 중국어로 정성껏 모셨습니다. 상담중 몇 번씩 빙그레 웃으시는게, 분명 저희쪽에 승산이 있어보였습니다. 저희는 이 회사로부터 적지 않은 수주를 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국문과 2학년 장병연(43, 부천) 씨는 “박계형 교수님, 출석시험지에 남겨놓은 제 질문에, 메일로 답신을 보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하찮은 한 학도의 어설픈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정성스럽게 답변을 해 주시다니요. 국어 국문학과를 졸업 할 수 있다면, 영어영문학과에 도전해보리라 결심한 것도 그때였습니다. 나와는 전혀 인연이 없을 것 같던 영어과목이 교수님 덕분에 인연의 끈으로 묶어 두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었던지...”라며 선생님의 관심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선생님과의 인연을 ‘축복’이라며 ‘눈물의 감동’을 느꼈다는 교육학과 1학년 박기선(53, 부산)씨는 “좋은 스승님을 만났으니 축복의 사람인 것 맞죠?’”라며 “컴퓨터에 지식이 없던 터라 마음만 급해 대한민국 아무머니의 기실을 살려 무조건 들이 대다가 실수를 해놓고도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뭔가 잘못됐구나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학교는 나와 인연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저 자신이 창피하고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진양해 선생님이 약속한 날에 전화를 주시며 차근차근히 설명해주시니 너무 기뻐서 회사 화장실에 가서 울었습니다(사실 제가 좀 울보라서요). 선생님 덕분에 새로운 희망으로 하루하루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꼭 졸업해야 되요’라는 선생님의 엄포가 행복한 노래소리로 들리니 어쩌죠?!”라고 글을 썼다.
시도 때도 없는 연락에도 격려해 준 선생님
학생들의 고민과 문제들에 대해 실시간으로 답변하며 학생들에게 감동을 줬다는 사연들도 눈에 띄었다.
일본인 이즈미야마 시가꼬(48, 세종시) 씨는 박수민 튜터 선생님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제가 이 나라에 시집 왔을 때는 주변에 외국인이 별로 없었습니다. 힘들 때도 행복하게 살 거라 믿고 계신 친정 부모님께 전화도 할 수 없어 제 안에 간수해 두고 있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 학과목 SNS에 ‘내가 여기 왜 있지? 아내, 엄마, 선생님(일본어 강사)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라며 푸념하자 바로 ‘저도 그래요’라며 답변해주셨습니다. ‘많은 후회, 포기, 다짐 등 저를 스스로 힘들게 하고 땅만 보고 있는 것 같다’고 하자 ‘하늘도 한 번 보세요’라며 또 다시 바로 응답해주셨습니다.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어서 무거운 마음이 한 결 가벼워졌습니다”라고 했다.
청소년교육과 1학년 B(49) 씨는 씨는 “막내아들이 중학교 때 주의력결핍장애를 발견했습니다. 이로 인해 충격을 받아 방황하던 중 방송대를 입학해 박선희 튜터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선생님은 치료 방법을 알려주셨고, 역기능 가정(부인이 남편을 사랑을 받지 못한 가정)에서 자라 우울증이 있는 저에게도 관심을 가져주셨습니다. 어느 날 밤 고심하다가 밤 12시가 넘어 제 삶 전부를 메일로 보냈는데 바로 답장이 왔습니다. 그 이후로도 선생님은 저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주셔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선생님처럼 푸르른 기상과 용기와 기백으로 살겠습니다”라며 감사함을 글로 표현했다.
선생님과의 ‘위로’가 ‘희망’ 갖게 해
청소년교육과 2학년 L(45) 씨는 자존감에 상처를 받아오다가 선생님을 만나 치유되어 간다며 감사편지를 보냈다.
“사회생활을 하고 있던 저는 ‘자기 자식이나 제대로 키우지 뭐 하러 나대고 다니냐’는 식의 따가운 눈총으로 인해 하루하루 삶의 의욕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님 병수발과 아이들의 방황이 모두 내 잘못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던 중 송현정 선생님 수업을 듣게 되고,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말을 붙였지요. “저, 이런 거 여쭤봐도 되나요?” 어렵게 꺼낸 제 말 한 마디에 흔쾌히 마음을 열어주셨죠. 고등학교를 자퇴한 큰아이의 진로를 어찌 하면 좋을지 큰 기대 없이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건 제 성급한 착각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걱정하며 말씀해 주셨죠. “얼마나 힘드셨어요? 사실 애 때문에 견디기 힘든데 세상 사람들은 그 탓을 부모에게 모두 돌리죠. 부모도 열심히 노력을 하는데 역부족일 때가 많아요. 하지만 사람들은 결과만 보는 것 같아요” 제 마음 편에 서서 제게 위로를 해주시는 분은 처음이었습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답니다. 강사님의 위로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강의가 됐답니다".
교권이 바닥에 떨어진 현실에 문제 제기
문화교양학과 3학년 정맹자(53) 씨는 스승에 대한 감사를 느끼지 못하는 현실에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요즘 과연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되겠다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의문스럽습니다. 언론에서 교권이 침해되는 이야기를 접할 때면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까지 병들었는지 가슴한 곳이 멍합니다. 물질적으로 너무 풍족하여 어려움이 없이 자란 탓인지, 가정마다 자녀가 한두 명으로 단출해 그런 것인지 가슴이 미여질 뿐입니다”라며 스승에 대한 애절한 감정을 서두에 밝히기도 했다.
대학에 입학했다며 선생님 영전에 감사편지 올려
국문과 1학년 남길자(75, 용인시) 씨는 고교 은사에게 뒤늦은 대학생활의 기쁨을 나누고자 편지를 썼다.
“저의 대학생활의 출발은 ‘오티(O.T.)’였습니다. 용어가 생소하지요? 4학년 선배님들의 주관으로 열리는 신입생 환영잔치랍니다. 성남시청을 빌려 재학생과 신입생은 물론 동문 선배와 지역사회 인사들까지 총 동원되어 벌이는 환영식은 마치 팡파레가 울려오는 기분이었습니다(중략). 자기소개를 할 기회가 왔습니다. 친구와의 일화로 저를 소개했습니다. 친구가 ‘일흔 다섯에 뭐 하러 입학했냐’고 라고 물어 ‘아무래도 내 인생은 모두 짝퉁인 것 같아서’라고 하자 ‘그럼 명품이 되겠네’라고 했지요. 저는 ‘이 사람아 내가 어찌 명품까지야, 그저 진품이라도 되어 보려고’라고 했습니다.(중략)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스승의 날이 가까워 오면서 다하지 못한 인사를 늦게나마 올립니다. 선생님, 영원히 평안하시기 바라옵니다. 고교은사인 선완규 선생님의 영전에 바칩니다”라고 썼다.
홍보팀은 우수작을 선정해 소정을 상품을 전달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