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고씨 또는 장택고씨는 제주고씨 장흥백파의 다른 이름입니다
중시조인 고말로 탐라성주의 세왕자가 고려조에 입조함으로 제주고씨는 장흥백파.문충공파.
상당군파 등 9개의 파로 나누어졌답니다
당시 고려의 수도는 서경(西京)이였읍니다
제주도에서 서경(개성)까지 가는 길은 탐진(강진)이 가장 빠른 길이였습니다
탐진이란 명칭은 탐라(耽羅)의 사자가 신라에 조공할 때 배가 이 강 하구의 구십포(九十浦)에
머물렀다고 해서 탐라국의 탐(耽)자와 강진의 진(津)자를 따서 탐진이라 한 데서 유래되었답니다
탐진강의 어원을 탐라국의 세 왕자가 와서 놀던 강에서 찾는 분도 있습니다
억불산의 큰 소나무도 탐라인들이 장흥에 심어논 소나무였다고 하더군요
장흥고씨(長興高氏 혹은 장택고씨(長澤高氏))는 중시조 고말로의 10세손 고중연을 파조로 모시고 있답니다.
고중연은 일명 복림(福林)으로 자는 수일(壽一)이고 시호는 량헌(良獻)으로 충숙왕 17년(1330년)에
문과에 입격하여 관직이 검교태위(檢校太尉), 군기감사(軍器監事),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습니다
남쪽으로는 왜구가 출몰하고 북쪽으로는 홍건적이 침입해 오는 고려 말 그는 공민왕 10년(1361년)에
홍건적이 압록강을 넘어 2차 침입함으로써 개경이 함락되는 지경에 이르자 왕을 모시고 복주(福州:지금의 안동)로
피난을 갔고 서경(西京) 수복소식을 듣게된 지역이 문경(聞京)으로 지금까지 문경(聞京)으로 불리우고 있답니다
호종공신(扈從功臣)으로 공민왕을 수행했던 고중연은 장흥백(長興伯)에 봉하여졌고 본관으로 장흥을 얻게 됩니다
장흥고씨들이 장흥땅에 살게 된 정확한 경로는 아직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목은 이색의 "중령산황 보성기"에 따르면 중령산(장흥 건산 향양일대) 축성에 관한 토성인물에 고중연의
이름이 등장함을 보면 당시 장택현에 장흥고씨들이 세거하였슴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고경명은 고중연의 9세손이며 저는 고경명의 15세손입니다
본관은 신분의 표시이기 때문에 장흥고씨를 장흥인으로도 표기하였습니다
평화리(상선약수마을)가 장흥고씨의 세거지가 된 것은 고경명의 5세손 고응수가 창평에서 장흥으로 이거한 후
그의 손자 高碩嗛(진해공*鎭海公)이 영조 때의 국지사 이계현(李啓鉉)의 권유로 1770년 평화리에 터를 잡은 후
부터 입니다. 제봉 고경명은 문인으로 60노구를 이끌고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서 말위에서 썻다는 마상격문은
제갈공명의 출사표에 버금가는 명문으로 당시 사대부와 국민들의 마음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약무호남(若無湖南)이면 시무조선(是無朝鮮)이요
약무제봉(若無霽峰)이면 시무호남(是無湖南)이라고 칭송을 하였던 것이죠
호남이 없었으면 조선이 없었고 제봉(霽峰.고경명)이 없었으면 호남도 없었다 가슴뛰는 말 아닌가요
그것 때문에 고경명의 3부자는 3부자 불천위(不遷位)라는 전무 후무한 명예를 국가로부터 얻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