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실 조씨(趙氏) -삼불차의 조지훈 생가-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 경북 봉화에서 청량산을 끼고 20여분 들어감)
재물과 사람과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는 삼불차(三不借)원칙을 370년간 지키면서 박사만 14명을 배출한 가문으로 세간에서 마지막 선비로 부르는 조지훈(1920~1968)선생은 지조론으로도 유명하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중략)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리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에 함정에 빠트리고 달아나는 지조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이기 때문에, 배신하는 변절자를 개탄하고 연민하며 그와 같은 변절이 위기 직전에 있는 인사들에게 경성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중략)
지조는 선비인 것이요 교양인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젹으로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식견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마을은 60여가구에 200명이 거주하는데 조지훈 생가 문옆에는 호은종택(壺隱宗宅)의 비석이 있다
호은은 1629(인조7)년 주실에 처음 들어와 이 동네를 일군 주실 한양 조씨들의 시조의 호이며, 종가는 객지에서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한 조동길씨가 관리하고 있다
이댁의 현재까지 지켜오는 가훈은
첫째는 재불차(財不借 ; 재물을 빌리지 않음)
둘째는 인불차(人不借 ;양자를 들이지 않음 않음)
셋째가 문불차(文不借; 문장을 빌리지 않음)로
종손의 말씀은 "조씨들이 공직에 많이 있는데 성질이 꼿꼿한 편이라 머리를 숙이지 않으니 손해도 많이 보지만 뇌물 먹고 교도소에 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손해를 보았으면 보았지 비굴하게 살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뒤집어 보면 빌리지 않아도 될만큰 세가지 요소를 갖추었다는 말이 성립하는데 종택앞의 문전옥답 1만평은 호은공 때 부터 누구하나 손댄 사람없이 현재까지 전해왔다니 놀라운 일이다.
전북 임실군 삼계면에서 40명의 박사가 나온 기록이 있지만 이 집안은 조그만 마을에서 박사를 14명 배출했다니 신기하기만 한데 서울대 국문학과 조동일교수(한국문학통사저자), 국민대 대학원장 조동걸교수(한국근세사의 석학). 성균관대 부총장 조동원(한국금석문학대계)씨는 인문학의 대가들인데 조지훈이 동탁이니 같은 동자 항렬들이다.
영자 항렬중에도 조근영(국립도서관장) 조헌영(한학자, 조지훈 부친), 조준영(초대민선대구시장) 조애영((여류시조시인)등이 있고 지훈의 조부인 조인석씨로 호은종택에 영진의숙을 설치하고 초경독본이란 청소년 교육용 책자를 만든 게몽자인데 3남 준영(경북도경국장)을 찾아내라는 좌익청년들의 모욕에 투신 자살을 하셨는데 자존심과 목숨 중 자존심을 택한 것이다.
또한 조인석의 부친은 조승기(의병대장)였으니 책상물림의 선비들이 아닌 행동하는 선비들이었음을 알게된다. 또한 노개 조후용(1833~1906)의 고택에서는 두석,봉석(독립유공자 건국훈장), 운해(의학박사, 한솔그룹) 조동일씨등의 생가인데 이웃한 만곡정사는 만곡 조술도(1729~1803)에게 학문을 배운 문하생들이 창건한 정자이다.
옥천종택은 호은공의 증손자인 옥천 조덕린의 종택으로 옥천공은 승문원 우부승지로 있었는데 시폐를 비판한 십조소로 유명하며 희당, 운도, 진도, 술도, 거신, 만기, 대봉,등의 명사가 태어났다
▣ 경주최씨(慶州崔氏) 경주시 교동( 본채 외에는 요석궁 음식점으로 변함)
9대 진사를 하고 12대 만석을 한 집안은 조선에는 최부자 뿐일 것이고 그 가훈과 원칙은
1. 과거를 보되 진사(벼슬이라고 하기보다 양반신분의 최소한이 자격임)이상은 하지 말라
2. 재산은 만석 이상은 모으지 말라(그 이상은 소작료를 낮추어 소작인과 공생함)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수입의 1/3은 접대용으로 100명이 넘으면 양식을 주어 소작인이 접대함)
4. 흉년에는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어려울 때 헐값에 사는 것은 양반의 처신이 아니며 원망의 대상이다)
5. 시집온 며느리는 3년간은 무명옷을 입어라(보릿고개에는 쌀밥을 금하는 등 절약과 검소를 익함)
6.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소작수입의 1/3은 빈민구제 용으로 사용함)
육연(六然 : 수신의 가훈)은 온갖 다양성을 넉넉하게 수용하는 관용과 용인의 수신인 바 종손은 매일
아침 문안시에 육연을 붓글씨로 육연을 적었다고 하는데 내용은
①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②대인애연(對人靄然 :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여)
③무사징연(無事澄然 : 일이 없을 때는 맑게 지나며)
④유사감연(有事敢然 :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하고)
⑤득의담연(得意淡然 : 뜻을 얻었을 때에는 담담하게 행동하며)
⑥실의태연(失意泰然 : 실의에 빠졌을 때에는 태연하게 행동하라)이다
최부자집이 경주시 내남면 게무덤에서 200여년을 살다가 요석궁 터에 들어다 집을 짓은 시기는 최염씨의 7대조인 최언경(1743~1804)로 약 200년 전인데 부지 2,000평에 99칸에 노비가 100여명이었으나 1961년에는 47칸으로 줄어있었고 1970년의 화재로 사랑채도 불타 주춧돌만 남고 안채와 문간채 창고만 남아있는데 사랑채의 화강암 주줏돌은 전성기의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출입한 인물로는 신돌석(의병장) 장군이 피신하여 있었고 현재의 요석궁 한식집이 된 대들보를 혼자 들어서 설치했다고 전하며 면암 최익현(1833~1906)이 의병을 일으킬 때 수백명의 수행원과 묵고 가면서 상당한 거사자금을 받아서 갔고 스웨덴의 구스타프 국왕(신혼여행 차 일본에 왔다가 서봉총瑞鳳塚 발굴에 참여함)도 왕세자 자격으로 머문 적이 있다.
손병희 최남선 안희제 여운형 김성수 장덕수 송진우 조병옥이 다녀가고 의천왕 이강공이 묵고 가면서 문파(文坡)라는 호를 지어 주었고 육당 최남선과 위당 정인보는 1년이상 머물면서 동경지를 편찬하였으며 천도교 손병희도 자주 묵었기에 손병희와 최준은 보성학원 이사로 동아일보 발기인으로 참여 했으며 고려대를 세운 인촌의 영향을 받아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와 계림학숙을 세웠다.
▣ 만석꾼에서 빚쟁이로 변한 마지막 부자 최준
백산 안희제(1885~1943)와 백산상회를 설립해 상해로 군자금을 보내다 부도가 나고 최준은 거금 103만원(벼 3만석)의 빚을 지게 되어 전 재산을 압류당하고 만석꾼에서 빚쟁이가 되었으나 뜻밖에도 식산은행 총재 아라가는 거액의 빚을 탕감해 주어 재산의 절반 정도를 찾았는데 탕감 이유로는
1.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과 아라키이 개인적인 호감이 작용하였다는 것과
2. 보증을 서게하고 빚을 지게 하여 이를 탕감해 주는 대신 총독부에 협조하게 회유 하려 했다.
(동의대 최해진교수)
3. 최부자의 고가를 환수하여 신라 박물관으로 만드려 했고 최준은 사후에 제공하기로 했으나
해방이 되어 면하였다.
해방 후 백범이 최준을 만나자 치하하면서 자금 명부를 보여 주였는데 2년전에 작고한 안희제를 통해 보낸 돈을 안희제가 최소한의 활동비 조차 쓰지 않고 모두 보냈음을 알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최준의 유산은 후손에게 전해지지 않았는데 대학을 설립할때 수백 정보의 부동산과 집의 장서 8,000여권을 희사했고 6.25 후에도 경주 집을 포함한 나머지 재산을 털어 경주의 계림학숙을 설립하였기 때문이다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학을 이병철씨에게 넘길 때 최준의 유언으로 한푼 받지 않았는데 대구대학은 한비의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박대통령에게 넘어가 영남대학이 생겼다고 한다
▣ 행주기씨(幸州奇氏) -기대승 후손 기세훈씨 고택- 전남 광주시 광산구 광곡마을(너부실)
기,고, 박이란 말은 광주일대에서는 알아주는 성씨를 말한다
집안이 명문이 되려면 학문이 높고, 의리를 지키며 인품이 훌륭한 인물이 있어야 하는데 기씨 집안은 고봉 기대승(1527-1592), 고씨 집안은 임란때 금산전투에서 3부자가 전사한 의병장 재봉 고경명(1533-1592) 후손은 고재욱(동아일보사장) 고재호(대법관) 고재청((국회부의장) 고재필(국회의원) 등의 인물이 배출되었고, 박씨 집안에서는 눌재 박상(1474-1530)과 동생인 육봉 박우(1476-1547) 사암 박순(1523-1589 영의정)과 박종태(국회의원) 박하욱(전남대총장)등이 배출되었다.
원래 나주, 광주, 장성, 창평 이었던 말이 광나장창으로 변한 것은 광주에서 기대승이 태어났기 때문에 광주와 나주의 서열이 바뀌었다고 기씨들의 후손들은 주장한다.
기씨의 집성촌인 광곡마을(너부실)의 50가구 중 몇집만 빼고 기씨들인데 가장 유명한 집이 고봉의 13대 후손인 기세훈(1914~)박사 고택인 애일당이다 고봉의 6대손 기언복이 중종때 터를 잡은 이래로 300년을 이어온 집으로 현재 고봉학술원이 들어서 있고, 집앞에는 고봉의 아들이 3년시묘를 한 칠송정이 있고 칠송정뒤로 10분정도 올라가면 고봉의 묘지이며 조금더 올라가면 고봉이 공부한 암자인 귀전암 터가 남아있다
너부실 중앙에는 고봉을 추모하는 서원인 월봉서원이 있고 월봉서원 오른쪽으로 가면 구한말 기씨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세운 서당인 귀후제(歸厚齊)가 있다.
애일당은 대지 3,500평중 사랑채 뒤쪽으로 700평 넓이의 대숲이 조성되어 댓잎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새들의 보금자리로 한낮에는 꿩들이 울어대고 해가 넘어갈무렵은 까지들의 시간이며 초저녁엑 소쩍새, 새벽에는 뻐꾸기가 지저귀고 새벽에는 참새떼가 합창을 한다
또한 대나무 숲을 호랑이가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도 있으나 죽세공의 재료로 돈이 되기 때문이기도 한데 반음반양의 대숲에서 자란 차는 죽로차라고 하는데 차잎은 식중독으로 배가 아플 때 먹는 가정상비약으로도 사용되었다.
고봉학술원은 기세훈씨의 사재로 꾸려가는데 영남학파에서 퇴계에 가려 남명에 대한 조명이 소홀했듯이 기호학파 쪽에서는 율곡에 가려 고봉에 대한 조명이 소홀했다. 올해로 15호를 발간한 학술지는 창간호 부터 현재까지 표지 그림은 소쇄원 전경을 사용하있는데 소쇄원의 상징인 호남의 계산 풍류를 오늘날에 계승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또한 제목이 "전통과 현실"로 현재적 의미를 놓치고 과거 조상의 업적에만 집착하면 문중학으로 머물거나 시대 착오란 비판을 받을 수 있으니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에서 찾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고봉 기대승의 사상은 퇴계와 벌인 사단(仁의 측은지심, 義의 수오지심, 禮의 사양지심, 智의 시비지심) 칠정(희,노,애,락,애,오,욕의 인간의 본능적 감정) 논쟁으로 유명하다
퇴계는 사단이 이(理)에서 발생하고 칠정은 기(氣)에서 발생해 이와 기는 서로 혼합시킬 수 없고 분리하여 보았는데, 고봉은 양자를 떼어 놓고 볼 수 없다고 반론하고 사단과 칠정의 분리는 너무 인위적이라고 지적하고 이성과 감정이 자를 수 없듯이 사단과 칠정 역시 동전의 양면처럼 둘이면서도 하나라고 주장했는데, 이을호(다산학의 권위자)선생은 이 주장을 9년 후배인 율곡이 잇고 윤휴<백호>(남인이 거두)에 이어지고 다산을 거쳐 이제마까지 관통하는 사상적 흐름이라고 주장했다.
고봉과 퇴계의 인간적 관계는 사칠논변이 일어날 당시 퇴계는 58세로 성균관 대사성이고 고봉은 32세로 대과에 급제한 신예였는데 퇴계는 고봉의 주장을 경청하고 토론 상대로 인정했으며 무려 8년간 논쟁을 계속했으니 두 사람의 만남은 인품과 지성이 상보적 만남이었다. 퇴계가 서울을 떠나 안동으로 돌아갈 때 고봉은 한강가에서 유숙하다 봉은사까지 배웅하고 석별의 정을 시로 남기기도 했고 후에도 조정의 흐름에 대한 편지를 계속 전했으며 퇴계는 부친의 묘갈명(무덤앞에 세우는 묘표에 새기는 글)을 고봉에게 부탁하고 퇴계의 별세후 고봉이 바친 묘갈명이 오늘도 퇴계의 묘비로 남아있다.
영남에서 서원이 먼저 시작되고 호남은 16세기 후반으로 다소 늦은 대신 누각과 정자는 40~50년 앞서 세워졌으니 호남의 고급문화는 서원보다 누정에서 출발했는데 호남에는 70여개의 누정이 창평과 담양일대에 현재까지 존재하지만 당시는 150여개의 누정이 있었다고 하니 밑바탕은 창평들판의 경제력임이 분명한데 19세기 통계에 창평일대에 천석꾼이 600가구나 있었다고 하며 대나무 또한 한몫을 했다고 한다.
16세기 호남지방 계산풍류의 중심이 소쇄원이었고 좌장인 송순의 회갑때 면양정을 증축하고 많은 제자들중 겨우 26세인 고봉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고택 종손인 기세훈씨는 올해 88세로 사법고시에 합격하였어도 창씨개명을 거부해 판사로 임명되지 않았는데 판사를 못해도 기고봉의 후손으로 창씨개명을 할 수 없다고 했다. 1969년 서울고법원장을 거쳐 초대 사법연수원장으로 재직중 사법 파동으로 옷을 벗고 변호사 생활을 하다 현재는 행주기씨 대종회장을 맡고 있다. 전통과 현실은 발간비가 3,000만원 정도인데 앞으로도 아들이 계승할 것이라고 답하는데 장남 기춘석씨(한양대 의대 내과과장으로 간분야의 전문가)는 집안의 전통이며 계산풍류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의학쪽 논문이지만 창간호부터 논문을 게제하고 있다고 한다.
이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이 집 뒤켠의 "바르게 사신 어른들의 유택"이라고 각인된 납골당인데 기세훈씨부터 화장하여 납골당에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 초계정씨 동계 고택; 경남 함양군 강동마을(거창에서 수승대 쪽으로 15분 진행하다 좌측으로 들어감)
경남의 손꼽을 수 있는 집안이 선조, 광해 인조 세 대왕을 걸쳐 활동한 동계 정온(1569~1641)으로 경상도는 퇴계학풍을 계승하고 전라도는 남명학풍을 계승하였지만 경상도이면서도 남명의 학풍은 이어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동계고택은 강동마을 정면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 초계정씨인 정전(동계의 6대조)이 고려우왕3년(1377)에 시행한 국자감시에 101명의 합격자를 기록한 방목에 장원으로 기록된 예조의 문서가 보관되어있고 강동에 들어와 살 게 된 것은 동계의 조부 승지공(1501~1563)으로 500년의 고택이 된다.
정온은 46세때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강화로 귀양보냈다가 죽이고 친형 임해군과 외조부 김제남을 역적으로 죽였으며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를 폐출하려 하자 죽음을 각오하고 올린 직언상소(갑인봉사)를 임금이 수라상을 받았을 때 승지가 읽었는데 임금은 패륜을 저지르고 있으니 죽어서 선왕들을 어찌 만나시겠느냐는 대목에서 밥상을 걷어차 시녀와 승지의 머리가 터질 지경에 이르고 승지들의 책임을 물어 즉석에세 파직하고 동계는 제주 대정현에 10년동안 위리안치 형을 받았는데 유생은 물론이요 부녀자들도 언문으로 갑인봉사를 번역하여 읽게 되어 명문으로 부상하였고 후에 추사 김정희가 동계의 귀양처에서 귀양을 하면서 동계의 생활을 전해 듣고 감동하여 동계고택을 방문하여 제주도민의 칭송을 전하고 충신당이란 현판을 적고 갔다고 한다.
1636년 동계는 화의를 반대했으나 삼전도의 항복이 있자 임금을 욕보인 신하는 죽어야 한다면서 할복을 하였으나 죽지 않자 덕유산 자락의 모라리에 은거하면서 백이 숙제처럼 죽을 때까지 미나리와 고사리를 먹고 살았던 은거지는 채미헌으로 전해지며 동계의 제사에는 반드시 고사리와 미나리를 올린다고 한다.
동계의 현손 정희량은 영조4년에 발생한 무신란의 주동자로 무신란은 상층 엘리트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경종의 독살설과 영조의 친자가 아니라는 주장과 노론이 정권을 잡자 소외된 남인과 소론의 불만과 흉년으로 많은 민란이 발생할때 이인좌와 정희량이 주도하여 실패하자 역적의 집안으로 전락하여 강동마을의 30여명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고 20여년 동안 뿔뿔이 숨어 살아야 했기에 정희량에 대한 기록은 가문에서 철저하게 삭제 되었다고 하고 충청도 이인좌, 경상도 정희량, 전라도 나숭대의 집안도 마찬가지였는데 나주나씨들은 새로 금성나씨를 창시할 정도였는데 서로 혼맥이 닿아 있음도 흥미로운 일이다.
반란의 주모자의 집안을 복구하게된 것은 동계같은 충신의 제사가 끊겨서는 안 된다는 사대부층의 여론 때문에 영조 당대에 제사가 허가되었고 집안을 다시 일으킨 것은 야옹 정기필(1800~1860; 영양현감을 지냄)로 강동마을을 거의 복구했고 현재 강동마을 정씨들은 대부분 정기필의 후손들이다.
현재 동계고택은 15대 종손인 정완수(60세)씨와 종부 유성규(55세 안동의 전주유씨 후손)인데 직장이 영주에 있어 종택에 거주하지 못하나 정리되면 종가로 돌아올 계획인데 500평 대지에 70칸의 건물의 청소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며 봉제사 접빈객 등으로 월 유지비가 500만원 정도가 있어야 기본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동계고택에서는 종손의 어머니 최희(75세 경주 죄부자 종손 최염씨의 누나/하회 서애종부 언니)씨는 한국 상류층의 요리에 능하여 요리잡지나 여성지에서 자주 취재를 온다.
이집의 사랑채에는 모와(某窩)란 편액은 종손이었던 정태균(구한말 승지)과 친했던 의친왕 이강공이 40여일 사랑채에 머물면서 남긴 친필인데 임금을 알현하려고 방문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고 몇 년전에는 이강공의 아들이 사랑채를 방문하여 방바닥에 절을 하면서 감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동계고택에서 수승대까지는 1km 정도로 아침의 산책길로도 적당하다.
▣ 윤보선씨 고택; 서울 종로구 안국동 8번지
서울의 명가는 정치인 이종찬씨 집안은 백사 이항복의 직계 후손으로 8대를 내리 판서를 배출하여 삼한갑족이란 칭호를 들었고 임시정부의 이시영, 독립운동가인 이회영 등의 인물을 배출했으나 고택이 남아있지 않고 방문한 곳은 한국 인명사전에 50여명이 들어가 있는 윤보선 전대통령 집안인데 현재 안채에 생활을 하고 있어 언론매체서도 주인의 촬영허가를 받지 못하여 접근하지 못한 곳이다.
130년전 민부처란 별명을 가진 대감이 99칸이 넘는 집을 짓는다는 소문에 고종이 대궐만큼 큰집을 짓는 것은 반역의 의사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하문한 즉 이 집은 부처가 살 집이라고 답하여 고종도 파안대소하고 넘어 갔기에 100칸이 넘는 집이 완성되었다고 전하는데 일본망명후 박영효가 귀국하였을 때 거처가 없다 하여 고종이 민부처에게 말하여 일시 거주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옆집이던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의 집은 백송만 남았고 경성제1고녀(경기여고 전신)-창덕여고-헌법 재판소로 바뀌었으며, 1910년에 윤씨집에서 구입하여 현재는 문간채 산정채 큰사랑채 뜰아랫채 곳간 등으로 대지 1,400평에 건평 250평이다.
입구에는 하마석이 남아있고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3개의 소문이 있는데 산정채로 가는 문과 안채로 가는 문 및 사랑채로 가는 문이다. 서양에서 높이를 통해 성서러움을 추구하고 동양에서는 구중궁궐이란 문을 통하여 성스러움을 확보하여 한 것 같다. 산정채에는 태평만세라고 적은 박쥐모양의 편액이 특이한데 서양에서는 박쥐가 악마의 상징이나 동양에서는 오복의 상징이기 때문인 것 같다
윤보선대통령이 청와대를 장면총리에게 넘겨주고 안채에서는 일시 집무를 하기도 하였는데 안채마당의 흰모래가 정갈한 느낌을 주는 데 반사광을 이용하기 위한 장치 이기도 한데 정갈함과 고요함이 보인다.
조남준씨가 95년 일간지에 연재한 신명가의 내용을 요약하면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오음 윤두수(1533~1601)는 윤보선씨의 10대조이며, 조부인 윤영렬(안성군수, 육군참장)때 크게 번성하여 치오(대한제국 학무국장, 중앙중 교장) 치소(윤보선의 부친, 충주원 의관) 치성 치명 치영(초대내무장관, 서울시장) 활란, 노덕의 8남매를 두었고 치오의 장남 일선(서울대 총장, 원자력원원장, 과학기술재단 이사장)외에 큰아버지 윤웅열(대신을 역임)은 치호(17세에 신사유람단원이며 애국가 작사자), 치황, 치창 등의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 죽산박씨의 몽심제(夢心齊); 전남 남원시 수지면 호음실
조선 후기 지리산 로드의 베이스캠프인 몽심제는 연당 박동식(1763~1830)씨 고택으로 과객 대접이 후하기로 유명했다. 몽심제는 연당의 14대조 송암 박문수(두문동 72현의 영수)가 지은 시 "마을을 등지고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을 꿈꾸는 듯하고, 산에 오르니 고사리는 백이숙제의 마음을 토하는 것 같구나" 하는 시의 끝줄의 한자씩을 딴 것이다.
조선시대의 숙식은 객사(특급호텔이며 관료들이 이용;읍치 중심에 있음) 원(시설좋은 장급여관)으로 불교에서 유래하여 큰절은 사(寺), 작은 절은 원이라고 했는데 사원이란 이를 합한말로 승려와 신도 및 행상에게도 숙식을 제공하며 의술을 익힌 승려가 치료도 겸한 빈민구제 사업도 하였고, 원주는 상인들과 접촉하여 생필품을 구입하고 절의 생산물을 팔기도 하면서 정보 창구 노릇을 하다 불교가 쇠퇴한 후 숙박기능만 남았으며 주막(여관 및 식당을 겸함)과 사찰에서도 높은 관리들이 임시로 머물기도 했으며 양반 사랑채를 이용하기도 했는데 구례, 순천 함양 등에서 과거를 보러 갈 때 단골로 이용하던 곳이 남원의 몽심제이다.
이 곳에는 문간채옆에 요요정이 있는데 노비와 종들의 정자로 한국 유일의 것으로 짐작된다.
박씨들이 호음실에 정착한 것은 박문수의 손자인 박자량(한성판윤) 때로 숙부가 2차 왕자의 난때 이방원에게 대항하다 참수되었고 박지량도 촤천되어 전라관찰사로 내려왔다가 명륜과 화락이란 서당을 짓고 눌러 앉았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전기 때(1650년 전에는 남녀균분상속) 처가 동네에 정착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여자도 유산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박지량의 후손 박계성은 임란때 의병을 일으켜 권율을 도왔으며 권율의 추천으로 한성판관에 제수 되었고 정유재란때도 왜군들과 싸우다 남원부사의 원군요청으로 율치전투에서 전사하고 남편의 전사소식을 들은 부인은 자결하였고, 계성의 친동생 승성과 종제 언정도 진주싸움에서 순절하여 후대에 최익현은 일가 삼충렬로 칭했다.
종가 대문에 삼강문(三綱門)의 현판은 충신, 효자, 열녀가 배출된 집안임을 자랑하고 종가 오른쪽에는 중시조인 박문수의 불천위(국가 유공자로 사당에 영구히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의 사당 주련에는 몽심제의 유래인 박문수의 시가 있다.
몽심제 3대주인 박해창(1876~1933 홍문관 시강) 때 남원의 3대 만석꾼에 들어갔고 1923년 남원에서 8번째의 초등학교를 설립하여 한때 학생수가 500명까지 되었으나 현재는 50여명이 다니고 있다
박해창의 장남은 동경대학을 나왔고, 차남인 상산 박장식(1911~원불교 원로)은 경성법전을 나온후 31세에 원불교에 출가하여 남원의 話題가 되고 교헌을 제정하였는데 성산은 자기집을 원불교 교당으로 개조하고 이에 영향을 받아 90여 가구중 원불교에 출가한 교무가 남자 10명에 여자 30여명으로 이곳에서는 사위 구경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여기서 배출된 서타원 박청수(1937~)교무는 한국의 마더 데레사로 20여년을 국경, 인종, 이념, 종교를 초월하여 세계 50개국 사람들의 무지와 빈곤 및 질병 퇴치에 힘쓰면서 천주교 나환자 복지시설인 성라자로 마을을 25년 간이나 돕기도 했다.
▣ 해남윤씨(海南尹氏) -윤선도 고택 녹우당-
영남은 산이 많고 들판이 좁아서 3천석이 넘기 힘들고 오밀조밀한 짜임새는 있어도 호방하지 못하나 평야가 많은 호남은 짜임새는 작으나 1만석이 넘은 부자들도 많아 호쾌한 땅에 자리 잡은 집이 많다.
50만평의 장원에 1만평의 집터를 가진 윤선도 고택에서는 호방함과 소요유의 쾌감을 맛볼 수 있고 한국을 대표하는 고택이라고 생각하며 호남 예술정신의 요람이라 할만하다.
16세기 초반 어초은 윤효정(1476~1543)이 자리 잡은 것은 운둔할 생각을 가졌으나 이후 윤선도까지 5대로 내리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여 명문가로 부상하였고 은둔은 노론의 송시열에게 밀린 남인이던 윤선도 시대인데 그는 보길도에 낙서제와 동천석실 세연정을 지어놓고 신선놀음을 하는가 하면 해남의 연동에 종택을 증축하고 어부사시사를 남겼고, 증손인 공재 윤두서(1668~1715)가 이집에서 태어나 생활하면서 예술혼을 이어받아 자화상은 한국 최고의 초상화라고 한다. 윤두서의 자질은 손자인 윤용(1708~1740)으로 이어졌다
9,000평의 비자나무 숲을 지나는 바람소리가 비오는 소리같다고 이서(성호사설을 쓴 이익의 형)가 붙인 고택의 당호는 녹우당(綠雨堂) 인데 기가 막힌 이름같다. 윤선도나 윤두서의 천문학적 지식도 대단해 극소수의 천문 전문가만 아는 책이 고택에 비치되어 있고, 실학에 밝았던 것은 윤두서의 부인은 실학의 선구자인 이수광(지붕유설 저자)의 증손녀이며 다산 정약용(실학의 완성자)은 윤두서의 외종손인 것도 무관하지 않다(전시품 중에도 대동여지도 보다 앞선 지도등 많은 자료가 있었음-홈 관리자-)
여담으로 윤선도의 친척이기도한 명 풍수가 이의신이 녹우당에서 함께 거주할 때 밤이면 말을 타고 나가 새벽에 돌아오므로 술을 먹여 일찍 잠들 게 한후 이의신의 말을 앞세웠다가 멈추는 지점에서 썩은 말뚝을 혈처에 묻고 돌아와서 다음날 이의신에게 내가 평소에 봐둔 자리에 가보자고 하면서 함께 갔더니 이의신이 깜짝 놀라면서 명당에는 임자가 따라 있다고 양보 하였다는 말이 전하고 있다.
이 글을 읽고 녹우당을 방문하였을 때 종택은 수리 중이었고 다음해 보길도를 갔는데 윤선도의 유적은 거의 관리가 되지 못하여 무너졌으나 세연정의 정자는 운치가 있었으며 동천석실은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 예안이씨 종가; 충남 아산 외암마을(천안에서 온양온천을 지나 승용차로 15분 정도 들어감)
65 가구중 50여가구가 초가집인 외암리 민속마을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올라가면 예안이씨 종가이고 마을에서 참판댁을 물어도 된다. 하마석에서 차를 세우고 솟을 대문을 지나니 희성당(希聖堂-성인이 되기를 희망한다) 편액이 걸린 사랑채가 나온다.
예산이씨의 종손 이득선(61세)는 부친 이용성(1903~1970)이 돌아가시자 30세에서 32세까지 묘 옆에다 초막을 짓고 3년동안 추모의 염을 간직한 동기는
① 길러준 부모님이 길러준 은혜에 보답으로 품안에서 기른 기간이 대략 3년이기 때문이며
② 아버지가 3년 시묘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며
③ 부친에게 느낀 특별한 정(서울에서 고학하면서 여관의 변소 옆방에 살았는데 아버님이 마스크에 외투와 장갑까지 끼고 함께 주무신 후 집에 내려가서 일주일을 마루에서 주무셨다는 말씀을 전해 들음)
④ 선비집의 전통을 이어 가겠다는 자긍심인데 부친이 순종황후인 윤비의 장례위원장을 지냈으며 저희 집은 기호학파의 명맥을 잇는다는 분위기가 있다고 말하고 시묘살이를 위해 직장(건설계통)에서 사표를 내고 내려와 새벽에 짚신에 제복을 입고 굴건위에 삿갓을 쓰고 묘소를 향해 1시간 20분 정도를 걸어 묘소에 도착하면 아버지 생각을 하면서 절을 올리고 원두막 같은 초막에서 준비해간 누릉지로 점심을 먹고 해가 서산을 넘어갈 때 집으로 내려오는데 눈이 오면 부모님이 누워 계신 곳을 감히 빗자루로 쓸 수 없으니 양손으로 눈을 헤쳐 길을 내고 묘지 주변의 눈을 한쪽으로 치우는데 10여분이 지나면 얼었던 코와 귀가 터지고 나면 한층 수월했다고 하면서 낮시간에는 동양 고전을 많이 읽었으며 새들과 친해져 새들의 울음소리를 흉내내면 새들이 다가 오기도 했다고 한다.
시묘 중에는 머리나 수염을 깍지 않는데 장발에 굴건제복을 하고 예비군 훈련장에 도착해 예비군복을 갈아입었더니 중대장이 사정을 알고 훈련을 면제 받기도 했고, 굴건제복으로 군청에 갔더니 가정의례준칙이 발표된 후여서 직원들이 전화만 하면 일을 대신 처리해 준다고 제발 오시지 말라고 하여 덕을 보기도 했단다.
시묘살이를 마친후 장손이자 종손으로 집안을 맏아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눌러 앉았는데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는 시묘대신 3년 집상(집에서 추모의 예를 갖추고 잠은 마루에서 잤다고 함)을 했다는데 죽은자에 대한 가장 장중하고 충분한 송별의식이라 느껴진다.
현재는 걸어다니는 민속학 사전이라 할 만큼 전통적인 의식주에 막히는 부분이 없어 관혼상제에 자문을 구하는 사람이 되어 민속학자들이 외암마을을 방문하다보니 1978년 충남도에서 전통마을을 물색할 때 이득선씨 집의 1천여점의 민속자료로 인해 외암마을이 주목을 받게되어 1988년 국가지정 전통건조물 보존지구(2호)로 지정된후 2000년 1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로 승격되었는데 안동의 하회마을이나 낙안의 민속마을에 비해 상업화 되지 않고 한적한 분위기를 보존하고 있다.
외국인으로는 한국천주교회사에 소개되어 있어 프랑스인들이 많이 찾고 독일 이테리 일본 미국 러리사 사람들도 찾는다고 하는데 독일인은 한옥구조에 관심이 많고, 이태리인들은 돌과 나무에 대한 관심이 많아 오석을 최고로 치고 화강암이 그 다음이라 설명해 주고 일본인 중에는 관심가는 물건을 팔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 양천허씨 -운림산방(雲林山房)- 전남 진도군
1대 소치 허련(1808~1823) 2대 미산 허형(1861~1938) 3대 남농 허건(1908~1987)과 동생 임윈, 허림(1917~1942) 4대는 임전 허문(1941~) 5대는 남농의 손자 허진(1962~)으로 5대째 화가를 배출하고 집안에서 배출한 화가가 30여명에 이른다.
유배지로는 산과 바다 뿐인 척박한 완도는 무인들의 유배지로 센 힘으로 개척하도록 하고 농토가 많아 문인들의 유배지인 진도는 글씨 그림 노래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인구 5만이나 국전및 도전에 입상한 사람이 160명 정도로 이는 운림산방이 크게 직용하였는데 원말 4대화가중 한사람인 운림 예찬을 좋아하여 소치의 거처를 운림산방이라 하였는데 운림산방은 후에 목포 유달산이 남농미술관과 광주 무등산의 의재 미술관을 이루었고, "허씨들은 빗자루 몽뎅이만 들어도 명필이 나오고 문씨들은 짜구만 들어도 목수가 나온다"는 유행어를 만들어 내었다.
소치는 20대 중반 해남의 녹우당(윤선도 고택)에 출입하여 고씨화보의 남종화풍을 접하면서 그림에 본격 입문하고 27세에 초의선사(1786-1866)의 소문을 듣고 방문하여 초의선사의 가르침을 받았고 32세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를 만나게 되고 추사가 제주 귀양시 3번을 방문하여 스승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다.
소치의 헌종의 각별한 배려를 받아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받고 왕궁에 출입하고 4권의 책을 하사하면서 헌종이 직접 시법입문이라고 쓴 오동나무 상자는 허씨문중의 가보로 전해지고 있으며 대원군과 민영익 신관호 등의 후원과 곳곳에서 환대를 받은 화려한 여행을 했다
북종화는 무인적이고 직석적이며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소치의 화풍은 남종화인데 소우주인 인간가 대우주인 자연의 합일로 문인적인 화풍으로 부드럽고 추상적이며 산수화가 주종을 이루게 되므로 남종화가에게 아름다운 산수를 갖춘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운림산방은 남종화적인 마음가짐으로 지었기에 실용적인 쓰임새는 주안점을 두지 않았으나 인공으로 조성한 운림지(연못)의 인공섬에 소치가 백일홍을 심은 것은 화무 십일홍이 아닌 100일동안 피는 지조있는 꽃이기 때문이며 점철산(산방 뒷산)은 100만그루의동백 밀식지이며 많은 꽃나무들을 안배하여 사철 꽃을 보게 배려하였다.
3대 남농은 운림산방에서 태어나 유달산 밑의 죽동에서 정착하다 말년에는 남농기념관에서 지냈는데 37세때 (1944) 선전최고상을 수상했으나 곱슬병으로 왼쪽 무릎 아래를 절단해야 했고 남에게 베풀 수 있는 한 베풀려고 노력한 것이 말년에는 다작을 했다는 비판도 들었으나, 말년에는 자신이 평생 수집한 수석 2,000여점을 향도문화회관에 기증하고 자신의 그림은 남농미술문화재단에 기증하고 쇠락한 운림산방을 복원하여 진도군에 기증했다. 남농의 막내동생인 임인 허림은 조선인 화가로서는 김은호와 함께 일본문전에 연속 입선하였으나 25세에 요절하였고 임인의 아들 임전 허문은 7세부터 남농 슬하에서 가문에서 내려오는 갈필법에다 운무산수화란 독자적 화풍을 정립하여 구름과 안개의 작가로 불리면서 운림산방의 4대가 되었고 5대는 전남대 미대 교수인 허진씨로 미술전문지에서 선정하는 주목받고 있다.
의제 허백련은 소치의 방손으로 소치와 미산이 운림산방에서 학문과 그림을 계승한 법손이다. 일본에서 고무로씨의 화숙에서 남화를 연마하고 귀국하여 무등산에 춘설헌을 짓고 시,서,화 삼절에 모두 능한 전통적 문사의 삶을 살면서 농업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차를 널리 보급하여 무등산 춘설차가 나왔으며, 단군의 홍익인간 사상으로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갈라진 남북이 화합해서 민족 통일을 이우러야 한다고 역설했다. 춘설헌에는 육당 최남선 효당 최범술 노산 이은상 미당 서정주등이 단골이었고 함석헌씨도 자주 방문하였으며 특별히 친했던 사람은 지운 김철수(고려공산당 초대 당수를 지낸 좌익의 거물)로 전북 부안에 은거하면서 유일하게 의제와 흉금을 터놓았다고 한다
▣ 의성김씨 내앞(川前) 청계-약봉파 종택 -학봉(김성일) 부친 생가-
경북 안동(안동 시내에서 동쪽으로 반변천을 따라 30리를 올라가면 국도 좌측에 있음)
문중 제사에는 전국의 후손들이 참례하고, 외부손님이 오면 바쁜일이 있어도 내색 않고 정성을 다해 맞이하는 고풍을 간직하고 있으며, 종손의 자녀들이 등록금을 내지 못하면 자손들이 돈을 갹출하고 종가 건물을 보수하고 선조들의 문집을 번역출판 하는 보종사업에도 아주 열심이어서 전국에서 문집간행이 가장 활발한 곳이 안동지역이다.
다른 지역의 종택들이 6.25와 기독교문명과의 충돌 및 산업화 이후 주거는 아파트로 축소되어 주택에서만 느낄 수 있는 쾌감을 상실하고 돌아갈 고향 마저도 사라지고 있으나, 안동 봉화 영양 일대에는 의성김씨, 진성이씨, 안동권씨, 고성이씨, 하회 풍산류씨, 전주류씨 재령이씨 광산김씨 영천이씨 봉화금씨 풍산김씨 예안이씨 안동김씨 안동장씨 원주변씨 등의 종택 수십곳이 집중되어 있다.
미국의 동양학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시아 유교권 국가들 중 유교문화의 요소를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고 다음은 일본 그 다음이 중국이라고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유교문화를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지방은 영남지방이고 지역은 안동지역인데 이유는 퇴계의 양대 제자가 학봉과 서애 류성룡인 것과 관계가 깊다.
유학이 추구하는 양대 날개 중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경세는 서애가, 원칙과 자손심을 지키는 의리는 학봉이 대표한 셈인데 고택은 학봉부친인 청계공이 살았던 내앞종택과 학봉이 살았던 학봉종택이 안동에서 가장 유명하고, 서애의 아버지가 살았던 하회마을의 양진당과 서애가 살았던 충효당은 영국 에리자베스 여왕의 방문으로 전국의 인지도는 높다.
경북 안동은 인구비율로 보아 전국에서 가장 많은 애국지사가 배출되었는데 학봉의 후손인 김흥락의 영향이 컸으며 학봉집안에서는 퇴계학통의 정맥을 두 번이나 받았는데 학봉→ 장흥효→ 이시명-이현일--이재→ 이상정→ 남한조→ 유치명→학봉의 후손 11대 종손인 서산 김홍락(1827~1899)이다. 정맥을 잇는 제자는 불교에서의 의발을 전하고 도가에서는 보검을 전수하고 유가에서는 책이나 서첩을 전했는데 더욱 중요한 것은 구전심수(말로 전하고 마음으로 가르침)라고 한다.
500년의 역사를 지닌 고풍어린 기와집들이 즐비한 곳이 의성김씨 집성촌 중 청계 김진(1500~1580)을 중시조로 모시는 내앞파 종택은 선비의 강력한 정신이 어려있다.
권력의 부조리를 정면에서 고발하는 기백과 목숨을 건 의리로 인해 조선시대 금부도사가 세 번이나 체포영장을 들고오는 시련을 겪었는데 안동에서 회자되는 "유가에는 3년마다 금부도사가 드나들어야 되고 갯밭에는 3년마다 강물이 드나들어야 한다" 말에는 자신의 신념과 명분을 지키려면 금부도사의 체포영장을 영광으로 알았던 선비의 정신을 잘 나타난 말이다.
의성 김씨 중시조인 청계는 5세때 부터 다섯아들을 퇴계에게 보내 공부시켰는데,
악봉 김극일(1522~1585) 귀봉 김수일(1528~1583) 운암 김명일(1534~1570) 학봉 김성일(1538~1593) 남악 김복일(1541~1591) 의 오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오자(五子) 등과댁으로 불리는데. 국가에서는 부모에게 쌀을 내리고 죽으면 벼슬을 추증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한 예전의 조항까지 있을 정도로 힘든 일이었기에 명문으로 소문이 나게 되었으며, 장남은 대종택에서 살고 나머지 네아들은 안동 인근으로 분가하여 각각 소종택을 형성하여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다섯 아들을 과거에 급제시킨 교육에 대해 학봉이 적은 아버지 행장에는 "큰형이 과거에 급제하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니 어버지께서 하지 않은 일이 없었는데 한밤중 양쪽에 아이들을 안고 자면 어린아이가 젖을 찾는데 자신의 젖을 물려 울음을 그치게 했다는 말씀을 듣고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적고있다.
학봉의 강직과 의리를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이 인정하여 아들 종후, 인후와 전쟁터로 나가면서 막내 고용후는 대를 잇기 위해 안동의 학봉집안으로 피난 가도록 하여 가솔 50명과 학봉집안을 찾았을때 학봉집안도 피난중이라 산나물로 연명하면서도 학봉의 장남 애경당 김집은 동고동락을 하던중 고경명과 700의사가 금산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예법에 맞게 장례를 치르게 했고 학봉의 손자와 김시권과 함께 공부하면서 3~4년을 머물었는데 1605년 과거에서 만나 고용후는 생원의 장원으로 김시권은 동방으로 진사급제를 하여 해후 하였고, 10년후 고용후가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학봉의 노부인과 김집을 초대하여 큰절을 올리고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의성김씨는 조선시대 대소과 합격자가 100여명이고 90여명이 문집을 남길 정도로에 이를 정도로 문명이 높지만 벼슬은 높지 않았는데 "벼슬은 정2품이상 하지 말고 재산은 300석 이상 하지 말라" 는 청계의 유훈이 있었기에 벼슬에 집착하지 않고 향리의 서당에서 자족하는 삶을 살았지만 불의앞에는 단호했다.
청계공 탄생 500주년(2001년 2월) 기념 학술 논문집에 수록된 조동걸 교수의 논문인 안동 천전문중의 독립운동의 내용에는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한후 엄동설한인 12월24일 백하 김대락(1845~1914)은 66세의 노구에도 증손들이 식민지에서 태어나 일본신민이 되는 치욕을 줄 수 없다며 서간도로 망명하는데 만삭인 손부와 손녀가 따라 나서 것을 보고 내앞 사람 22가구 50여명이 함께 만주로 가면서 엄동설한의 여로에서 해산을 하는 어려움을 감수하였고,
일송 김동성(~1937)은 1923 상해에서 독립운동자 총회인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될 때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석해 의장을 맏았고(부회장은 안창호 윤해)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여 만해 한용운이 삼우장에서 화장한후 소원대로 한강에 뿌렸다.
김대락의 아들 월송 김형식(1877~1950)은 사람천석, 글천석, 밥천석을 하던 도사댁에서 태어나 협동학교 교사를 하다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 1948년 김구와 김일성이 만나는 남북연석회에서 사회를 보았고 노년에 금강산에서 휴양중 미군에게 수모를 당하느니 깨끗하게 생을 마친다며 절명시를 남기고 구룡폭포에서 투신 자살했다. 라고 적고있다
▣ 의성김씨 학봉 김성일종택 -자존심이 곧 목숨이거늘- 안동 금계마을
선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운장각에는 종 15,000점이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후손 중 교장만 30여명으로 선비집안의 후손이 진출할 가장 원만한 직업을 선생으로 보았다.
학봉 김성일 "차라리 부숴지는 옥이 될지언정 구차하게 기왓장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건 인물이었는데 조선왕조실록에 1573년 사간원 정언일 때 선조가 경연장에서 "나는 전대의 어느 임금에게 비할 수 있느냐"고 하문하니 학봉은 "요순도 될 수 있고 걸주도 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전하는 타고난 자품이 고명하니 요순같은 성군이 되는 것이 어렵지 않으나, 스스로 성인인체 하고 간언을 거절하니 걸주가 망한 까닭이다" 라고 답하여 임금의 안색이 변하했는데 서애가 " 요순은 임금을 인도하는 말이고 걸주는 경계하는 말이니 모두 임금을 사랑하는 말이"라고 하여 화를 풀고 술을 내어 경연을 마쳤다고 적고있다.
임란전 일본에 통신사로 갔을 때 일본인들에게 보여준 조선 선비로서의 자존심과 격조있는 태도는 오늘날 까지 영남과 안동에 전해오고 있으며 "풍신수길은 그 눈이 쥐와 같으니 염려할 바 없다고" 하여 상황을 오판하게 했다고 체포하러 내려오는 금부도사를 기다릴 것 없다며 서울로 가던 도중에 충청도 직산에서 경상도초유사를 임명받아 영남에서 왜군들과 싸우다 진주대첩을 이끌고 진주공관에서 과로로 별세했다.
1930년 중앙선 설계시 학봉 묘소가 있는 안동시 와룡면 이화동 가수천을 관통하게 되어 있어 묘소의 내룡(來龍)이 끊어지게 되어 엄청난 불경이라고 제자들과 후손을 포함한 유림 수백명이 총독부에 진정서를 내자 터널을 다섯 개나 뚫어 묘소를 우회하도록 설계를 변경하할 정도로 학봉집안의 권위과 명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학봉은 호남지역과 인연이 많은데 광주 고경명 집안이 전쟁에 나가면서 마지막 남길 핏줄을 의탁한 곳이 학봉 집안이었고 나주목사 재임시(1584) 나주 선비들과 나주나씨인 나사침의 적극적 협조로 나주 최초의 서원인 대곡서원(후일 경현서원으로 개명)을 세워 영남의 퇴계의 철학이 전라도에 전해져 호남의 가사문학과 만나는 계기가 된다.
11대 종손 서산 김흥락의 치욕이 독립운동의 불씨
학봉(김성일)의 11대 종손 김홍락의 제자들이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해 정부에서 훈장을 받은 사람이 60여명이요 안동 일대에 거주하는 의성김씨 내앞(川前)문중에서 훈장을 받은 사람 27명중 학봉의 후손만 11명이다.
김홍락의 권위는 대단하여 1890년 민란의 무마를 의뢰받아 향청에 좌정하여 "무릇 민정은 순하면 따르고 역하면 뿌리치는 법이다 모든 폐정을 고치게 할 터이니 그대들은 물러가서 기다리라"는 말에 나으리가 우리를 속이겠느냐면 해산할 정도였는데, 또한 김홍락의 사촌인 의병포대장이 안동시 북후면 옹천에서 일본군에게 패한후 김홍락의 안방 다락에 숨어있다 1896년 7월22일 왜경에게 발각되자 왜경들은 김홍락과 동생 김승락 김진의 김익모 등 의병할동을 했던 집안어른 10여명을 포박하여 꿇어 앉히고 쓸 만한 불건은 가져가고 나머지를 부수는 등으로 수라장을 만들후 김희락과 김진을 압송되었는데 김희락은 외경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지켜보던 가족들에게 내가 죽거든 자식들에게 원수를 갚도록 가르치라고 항거하다 총격에 숨졌는데 김흥락의 무릎을 꿇었던 일은 유림전체의 치욕이요 가문의 치욕이 되어 유림과 후손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계기가 된 것이다.
김용환의 파락호 인생
김흥락의 손자 김용환(학봉의 13대 종손)은 하늘 같은 할아버지가 치욕을 당하는 것을 목격한 것은 10세때였는데 노름으로 종가의 전재산인 전답 700두락(18만평)은 물론 종가까지 팔아 넘겨 후손들이 추렴하여 다시 사 주어도 팔아먹기를 3회나 하였으며, 무남독녀 외동딸인 김후웅이 청송 마평서씨 가문에 출가 할 때 농값으로 보낸 돈까지 탕진하여 흥선대원군, 형평사운동의 투사였던 외내 김남수 와 함께 한국의 3대 파락호로 손꼽히다가 1946에 타계 하였다.
그후 그의 독립운동을 증거하는 자료들이 발견되어 195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고 이때 아버지에 대한 감회를 "우리아배 참봉 나으리" 라는 서간문에
"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서씨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날 받았어도 갈 수 없은 딱한 사정 신행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돈 그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서 쓰셨는지? 우리바래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농 신행발에 싣고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던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아배 원망하며 별난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리고 적었는데 죽으면서도 가족들까지 속이면서 철저한 위장으로 재산을 독립자금에 바친 것이다.
양자로 종손잇기 작전
학봉집안이 손이 귀하여 김용환도 양자로 들어왔는데 아들이 없어 1945년 문중 회의에서 100여리 떨어진 지례의 김시인이 자질을 갖추었다고 판단하는데에 김용환이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으나,
김시인의 생가에서는 위장이긴 하지만 노름으로 전재산이 거들난 상태에서 종손의 무거운 책무을 맏길 수 없다고 완강하게 청을 거절하니 이를 설득하기 위하여 문중 사람들이 100여리 떨어진 지례에다 집을 한채 얻어놓고 10여명이 조를 짜서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설득과 간청을 반복하는 일을 기를 보종을 위하여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로 여겼다.
7개월만인 1945년 10월 다 김시인은 29살의 나이에 처와 아들 둘과 함께 양자로 왔고(이른바 둥우리 양자) 2001년 현재 85세이며 김시인의 처는 영양 주실마을의 한양조씨 집안에서 출가한 조필남으로 14대 종부인데 사돈지를 써 달라는 부탁이 줄을 이을 정도로 문장도 대단했지만 없는 살림에도 종가를 찾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하려고 애쓰고 ,호박 한덩이라도 들려서 빈손으로 보내는 법이 없었기에 종부를 만나본 지손들이 인간미에 감동하여 종가를 보종하는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1993년에 대구시내 꽃가게의 꽃들이 바닥 났기에 모 신문기자가 조사해 보니 조씨 할머니가 작고하여 문상조화 때문이었다는 기사를 보고 대구 매일신문에서 종부시리즈를 기획 연재 했다고 한다
문중원의 종부에게 올리는 신년세배
정월 초하루 학봉의 후손 중 연장자 100여명이 종가사당에서 차례를 지낸후 종가 대청에서 종부 한사람만을 상대로 큰절을 하는 풍습이 내려오며 문중의 대소사의 결정에도 문회에서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간다는 소식을 종부에게 전하면 종부가 몇몇 사람을 불러 의견을 개진하고 이 말을 전하면 종부의 의견대로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종손 김시인씨와 종부 조필남씨는 슬하에 3남3녀를 두었는데 차종손인 장남 김종길(60세 삼보컴퓨터 사장및 나래이동통신 두루넷사장 역임후 현재 삼보컴퓨터 부회장) 차남 김종필(58) 감사원 부이사관
3남 김종성 LG전자 상무 큰딸은 대구 장씨 집안으로 둘째딸은 원주변씨 종가로 출가하여 교편을 잡고 있고 셋째딸은 영양남씨 집안으로 출가했다.
기업 사장 중 최고의 사장으로 뽑힌 김종길(15대 종손이 됨)
성공시대 TV프로에 출연한 적도 있고 동탑산업훈장과 올해의 정보통신인상을 수상하는 등으로 많은 신문과 잡지에 소개된 유명인사인데 종손이 될 사람으로 첨단사업을 하게되니 갓을 쓴 인터넷 사업가라고 표현 하더라고 하면서 종손으로 성장하다보니 항상 사람들과 함께 하는 훈련을 받았기에 직원들과 무난한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었는데 종손으로 한편으로는 우대를 받았으나 한편으로는 학봉집안이란느 공동체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을 의식하면서 살다보니 리더십을 발휘하는 훈련이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학봉 후손들의 종가 돌보기
종길씨가 대학 입학당시 등록금 내기가 어려웠을 때 후손들이 종손을 도와야 한다면서 300~400가구에서 조금씩 돈을 거두는 것이 보종계입니다. 또한 보종의식이 강해서 종갓집 농사도 대신 지어주고 겨울의 땔감을 해주며 명절과 제사 때에는 종갓집 잔디로 베어주고 김장 때문 채소까지 주는 등 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아무리 바빠도 직접 커피를 타서 대접한다고 하며 부인인 이점숙 여사는 집안 어른들의 결정으로 얼굴도 보지 못하고 결혼한 퇴계 종가의 종녀로 우리가 생활은 서울에서 하지만 한달중 절반은 안동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일일 평균 50여명의 손님을 직접 접대 한다고 한다.
종길씨는 딸만 넷이어서 양자를 들였는데 차남의 아들이 오는 것이 순서이고 둘째는 삼남이 아들을 양자 들여야 하는데 삼남의 아들을 양자로 맞은 것은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장남과 차남은 태어난후 양자로 왔으나 삼남은 검재의 종가에서 났으니 의미가 있다는 문중어른들의 판단이라고 한다.
손님의 규모에 대한 질문에 영남 일대 종가에서 우리집이 손님이 가장 많을 것이라고 하며 100년전 11대 서산선생 장례식의 조문객이 4,000여명이었고, 후손집에 분산해 숙식을 제공했다고 하고 1987년
운장각 준공식때와 1955년 서산선생과 조부의 독립훈장 추서를 사당에 고유할 때 약 1천명씩의 손님이 모였으며 문중행사시도 1,000여명은 모이며 6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사랑채에 과객들이 평균 10~15명이 머물고 있었는데 70년대에 도로가 뚫리면서 과객들이 줄었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 고택;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추사의 고조부인 김흥경(1677~1750)은 영의정이고 증조부 김한식(1720~1758)은 영조의 장녀인 화순옹주와 결혼해 월성위가 되어 영조의 각별한 배려와 화순옹주의 물려받은 개인재산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어 육해로의 교통의 요지인 용궁리에 터를 잡고 집을 지을 때 충청도 53군현에서 한칸씩 부조하여 53칸 집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화재로 인하여 추사의 필적과 유물및 건물이 불타고 1968년 다른 사람에게 팔린 것을 1976년 충청남도에서 매수하여 새로 지은 건물인데 인간문화재 이광규옹이 부분적으로 재현하여 지방문화재 43호로 지정된 것이나 주련이 대문에서 현관 기둥과 담벼락을 감싸 추사고택은 주련의 집이 되었다.
사랑채 댓돌에는 높이 1m정도의 돌에 추사 선생이 직접 만들었다는 해시계는 석년이라고 새긴 추사의 글씨가 있고 고택좌우에 묘지들이 자리 잡았는데 김흥경, 김한신과 화순옹주합묘, 추사의 묘가 그것인데 집과 묘가 나란히 있다는 것은 산자와 죽은자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음을 말한다 또한 묘앞에는 잎은 푸르고 몸체에 약간 흰색을 띤 소나무가 있는데 추사가 청나라에 갔다 돌아올 때 가지고 와서 고조부 묘앞에 심었다고 하는데 수령 200년 높이 10m인 백송은 예산백송이라 부른다.
학문을 논할 때 정다산을 비켜갈 수 없듯 예술을 논할 때 추사 김정희(1786~1856)를 비켜갈 수 없다.
추사의 서예관은 가슴속에 청고 고아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의 향기와 서권의 기에 무르녹아야 손꽃에 피어나야 한다고 했는데 글씨의 반복에 앞서 독서와 사색을 통한 학문적 교양을 함축한 말이고 추사체는 서권의 기라고 하는 사고의 깊이와 문자의 향이라고 하는 감성의 향기를 아울러 갖추었기 때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유학자이면서도 해동의 유마거사 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불교에 조예가 깊어 구암사 백파선사와 삼종선(三種禪)논쟁을 벌려 조사선에 비판을 가할 정도로 선의 세계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금강경을 호신용 부적처럼 항상 휴대하고 다닐 정도였고 조선의 승려는 천민으로 취급 하였음에도 초의선사와는 차와 불교를 통해 특별한 우정을 맺은 계기는 월성위 때 세운 집안사찰인 화암사를 출입하면서 불교에 접하였고 추사는 따르는 3000여명의 제자 중 상당수가 역관과 의관 등 돈과 실력을 갖춘 중인층으로, 역관 이상적(1804~1865)이 귀한 책을 구하여 귀양지인 제주까지 스승을 찾고 추사는 세한도를 보답으로 그려 주었는데 이상적의 제자이며 불교신자이던 역관 오경석(1831~1879)은 추사의 금석과안록을 계승 발전하여 삼한금석록을 남기고 백의정승이란 유대치에게 불교가 전해지고 개화파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으로 전해진 불교사상의 진원지도 추사였던 것이다.
▣ 진천송씨; 전북 익산시 왕궁면 장암리
객사중에 가장 오래된 전주객사(읍치 중심에 있음; 고급 호텔급)는 조선시대에 건축하고 1471년 중건한 것인데 정문에 가로 466cm 세로179cm의 풍패지관(豊沛之官) 이란 현판은 중국인 사신 주지번이 쓴 글씨인데 이에 얽힌 사연으로 송씨 집안이 호남의 명문으로 알려졌다.
표옹 송영구의 문집에 따르면 표옹은 38세때인 1593년 송강 정철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는데 불목하니가 남화경을 읆고 있는 것이 신기하여 내력을 알아보니 이름은 주지번이요 과거에 수차 낙방하여 노자가 떨어져 고용인 생활을 한다 하여 표옹이 중요한 서적 몇권을 필사해주고 답안작성 방법과 학자금 까지 주었는데 주지번은 2년후(1595년)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표옹을 일생의 은인이자 스승으로 여기던 중 1606년 사신으로 조선에 와서 개인자격으로 송영구를 방문 가면서 전주 객사의 글을 적게 되었고 13년만에 표옹을 만나 희귀한 책 80여권을 드렸는데 후에 규장각에 보관되었다고 . 주지번이 표용의 집을 다녀간 흔적은 망모당(望慕堂)의 편액과 표옹의 묘자리를 잡아준 것이라고 한다.
장암에 있던 표옹의 저택 본채와 사랑채는 사라지고 현재는 표옹의 선친이 선영을 망모하기 위하여 1607년에 지은 별채이자 공부방이던 망모당만 남아있는데 정면세칸 측면 세칸의 팔작집이다.
표옹은 52세때 성주목사를 지냈고 56세때 경상감사를 지냈는데 임기동안 강직하고 청렴한 생활을 했다고 하며 경상감사를 마치고 낙동강을 건너기위해 나루에 나왔는데 나루까지 전송한 이방이 " 어르신이 경상도에 계시다가 가져 가는 것은 손부채 하나 뿐이라"고 했더니 부채 마저도 낙동강에 던져 낙동강을 투선강이라고 하였고 부채를 던진 나루가 투선진이라고 불린다는 말이 송씨 문중에 전해 내려와 송씨들의 정신이 되어 표옹의 손자 송창(공조판서)은 유언에서 세가지를 금했는데 만장을 쓰지 말고 비문을 다른사람에게 부탁하지 말고 신도비를 세우지 말하고 했다.
표옹의 12대손 송병순(72세)씨는 재무부관세국장, 국민은행장, 은행감독원장을 거쳐 지금은 대만과 합작회사의 회장으로 있는데 2000년 12월에 발간한 회고록 첫머리에 표선진의 일화를 소개하고 은행감독원장으로 재직당시 프로판가스가 터져 부인이 중화상을 입었는데 치료비가 없어 은행융자를 신청했다는 소식을 들은 문중에서 돈을 모아 보태고 사돈집의 도움으로 아파트로 이사 갔다고 한다.
호남고속도록 익산인터체인지 부근의 진천송씨의 선산은 400년된 소나무들로 덮여있게된 유래는 삭녕최씨 최항(용비어천가를 주해함)의 후손을 며느리로 맞을 때 친정아버지 최상중이 시집갈 때 무엇을 준비해 줄까하고 딸에게 물었더니 변산솔씨(궁궐용 목재의 씨앗) 서말을 달라고 하여 심었다고 하며 이 며느리가 시집와서 백자(百子)판이란 떡을 만들어 전통으로 전해오는데 흰떡 수십개를 부챗살처럼 동그랗게 모아놓고 계속 7층 정도로 쌓아 행사가 끝나면 하나씩 먹으면서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데 지금도 문중 시제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라고 한다.
표옹이 망모당을 지을 때 인근 50리 내 관아에서 기둥과 서까래 등을 기부한데 대한 보답의 행사로 시작된 소쇄일 행사는 음력7월16일(백중 다음날) 망모당에서 집안이 모여 청소후 함께 식사도 하고 인근 선비들을 초청해 백일장도 열린다고 한다.
▣ 전주이씨 완풍종가인 강릉 선교장
민간주택으로 처음 국가지정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된 고택으로 대지가 30,000평에 건물은 열화당(큰사랑채) 작은사랑, 행랑채(23칸), 연지당 동별당 안채 안사랑채 활래정 서별당까지 10여동에 120여 칸에 달해 99칸을 초월한 장원을 표방하고 있으며 명실상부한 장인데 고급 사랑채는 열화당이고 중급은 중사랑 하급사랑채는 행랑채 이다.
9대 240년간 유지된 고택이며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전통가옥이다.
선교장이 대문은 두 개인데 하나는 남자들과 손님들이 출입하는 문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들과 가족들이 출입하는 문이다.
선교장 솟을 대문의 선교유거((仙嶠幽居: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의 현판은 조선말기 서예가인 소남 이희수의 글씨인데 경포호가 메워지기건에는 배를 타고 건너던 선교(船橋)의 발음을 넣은 작품으로,
강릉에서 배출한 조선의 인물은 김시습과 이율곡 허균인데 자유롭고 파격적으로 살다간 허균과 김시습은 모두 선가에 깊이 천착한 인연이 있으며 김시습은 정통의 도맥을 전수 받은 영향을 받아 오랫동안 축척된 선가적 풍류를 계승하고 있는 증거이다.
터는 무경 이내번(1703~1781)이 잡았고 손자인 오은 이후 때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즐겁게 이야기 하는집)과 연못을 파고 네 개의 돌기둥을 박아 활래정(活來亭)을 만들었는데 열화당이란 도연명의 귀거래사 열친척지정화(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고)에서 유래 했다고 한다
이후의 증손자인 경농 이근우(1877~1938) 때 23칸의 행랑채가 증축되었다.
열화당이 발행한 강릉선교장에서 "선교장의 사계는 그 어느 계절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강을을 가르켜 사계의 고을이라 한다면 선교장은 사계의 장원이다. 활래정의 앞 논에 해빙의 물이 넘펴 출렁이고 그 물위를 봄바람이 파문을 일으키며 이곳의 봄은 시작된다. 안채뒤 대밭에 죽순이 움트고 매화가 그 짙은 자태를 드러낸다. 못에는 연잎이 솟으며 활래정 뒷산에 오죽순이 얼굴을 내민다. 그러면 이곳 골짜기는 한 겨울의 동명으로부터 서서히 깨기 시작한다. 앞냇가 아지랑이가 움트는 버들까지와 더불어 이곳의 봄은 생동하는 아름다움으로 술렁인다. 여름은 뒤 솔밭으로부터 온다 짙은 녹음을 이루는 고송, 고목 속에 깃을 친 옷갖 새들의 울음소리 매미 쓰르라미 소리로 한여름은 짙어간다. 이때 제철을 맞는 것이 활래정이다.
연꽃봉우리가 솟고 꽃봉오리가 터지면 누마루에 올라 술자리를 벌인다 그땐 으레 시서화가 곁들이게 된다. 비오는 날 연잎에 듣는 빗소리 역시 문객의 시정을 일 게 한다 이런 사시사철의 아름다움으로 또 역대 주인들의 후덕함으로 선교장은 수많은 문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적고있다.
시서화를 남긴 문인 묵객중에는 조선헌종때 영의정 운석 조인영과 대원군의 총애를 받던 소남 이희수,
구한말 소론의 8천재 중의 한사람으로 소설 단의 모델인 우학도인 권태훈 집안과 인연이 깊었던 무정 정만조, 근대의 서예가 성당 김돈희, 소남에게 글을 배워 전국유명 사찰 현판에 글을 남긴 해강 김규진, 백련 지운영 중국 원세개의 옥쇄를 새겼고 그의 서예고문을 지낸 성재 김태석, 독립운동가 성재 이시영, 백범김구는 글씨도 많이 남아있으며 몽양 여운형도 단골이었는데 선교장터에다 이집안에서 세운 강원도 최초의 사립학교인 동진학교에서 1년간 영어교사를 하기도 했다.
선교장을 지켜온 14대 종부 성기희(82)여사
1974년부터 강릉에 내려와 관동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외로이 선교장을 지켜오면서 정년후에도 열화당을 찾아오는 수많은 손님들을 접대하면서 종부의 역할을 다한 여걸로 세명의 아들을 두었다.
선교장 장손 이강룡씨는 6.25 직전까지 서울 재동 110번지에 60칸 집이 있었으며 자가용 번호가 110번이었으며 강릉선교장까지 가려면 이틀이 걸렸다고 하는데 남의 땅을 밟지 않고 간다는 말이 있다고 할 정도로 북으로는 양양 남으로 삼척 서쪽은 대관령너머까지 동쪽을 바다까지 추수를 했기에 호남의 새쫓는 노래에 배다리 통천댁으로 가라는 대목이 있다고 하는데 통천댁이란 표현은 고조부가 통천군수를 지낼 때 극심한 흉년이 들자 집의 창고에서 쌀 수천석을 풀어 군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준 적선으로 인해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소작인에게 후한 인심을 베풀었기에 소작인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옥양목으로 만든 우산에 만명의 소작인이 서명을 한 것이기에 만인솔이라고 부른다고 했고 토지는 토지개혁때 거의 해체되었으나 중간사랑에 전시된 돈꿰는 높이 1.5M 넓이 3~4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돈꿰로 선교장의 부를 상징하는 유물이라고 한다.
손님이 밥상을 차릴 때 간장놓는 자리 초장 놓는 자리 깍두기 등의 자리가 정해져 있는데 자리를 바꾸어서 상을 차려내면 그만 떠나라는 의미로 과객이 다음날 짐을 꾸려 떠났다고 한다.
공무원생활도 하고 개인사업도 하다 집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선교장을 지키는 차남 이강백씨는 2002년이면 집역사로 300주년이고 공개한 것으로는 20주년이 되는데 목조건물은 사람이 거주해야 생기를 유지하는데 건물들이 급속히 낡아 가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하며 선교장 보다 애착을 느끼는 것은 수령이 300년~600년된 금강송 20여주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5대 소나무에 들어 간다고 한다.
법에 따르면 선교장도 여러 자식들에게 분배되어야 하는데 그러면 집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 하여 저와 동생들이 자발적으로 상속을 포기하였는데 다음 대에서는 어떨지 모르겠다고 한다.
▣ 500면 명문가의 자녀교육 10계명 ▣
1. 평생 책 읽는 아이로 만들어라-서애 류성룡 종가
2. 자긍심 있는 아이로 키워라-석주 이상룡 종가
3. 때로는 손해 볼 줄 아는 아이로 키워라-운악 이함 종가
4. 스스로 재능을 발휘하도록 기회를 제공하라-소치 허련 가문
5. 공부에 뜻이 있는 아이끼리 네크워크를 만들어라-퇴계 이황 종가
6. 세심하게 점검하여 질책하고 조언하라-고산 윤선도 종가
7. 아버지가 자녀교육의 매니저로 직접 나서라-다산 정약용가
8. 최상의 교육기회를 제공하라-호은 종가
9. 아이들의 멘토가 되어라-명재 윤증 종가
10. 원칙을 정하고 끝까지 실천하라-경주 최 부잣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