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수안보 부근전투
1. 전투일시 : 1950.7.7 - 7.9
2. 전투부대
- 아군 : 국군 6사단 ( 대령 김종오 ), 2연대 ( 대령 함병선 )
- 배속 : 19연대 2대대, 16포병 1포대, 충주 경찰서
- 적군 : 북한군 1사단, 12사단
3. 전투전 상황
- 개 요
- 6사단 : 7.3일 충주 집결
- 한강선을 돌파한 적은 수원 - 오산 축선에 압력, 춘천 - 홍천선 남하한 적은 일부를 서남진 시켜 여주 평야로 진출
- 육본에서는 6사단에서 2개 연대를 뽑아 여주 - 이천 - 안성 지역으로 급파하여 군 주력의 철수 엄호
- 차령산맥 회랑으로 물러서서 분산된 병력을 수습하고 부대의 재편과 진지 편성에 주력
- 미군이 참전하여 경부 국도를 연한 서부지역 담당하게 되자 국군은 수도사단 - 진천지역, 1사단 - 음성정면, 6사단 - 충주지역, 8사단 - 제천지역을 담당토록 조치
- 6사단은 2개 연대, 즉 7연대와 19연대를 이미 음성, 진천북쪽으로 진출시켜 엄호부대로 활용하고 있던중 충주 지역은 2연대가 19연대 2대대와 16포병 1포대 지원아래 북한군 1, 12사단과 대결 하게 됨
- 적상황
- 북한군은 중부전선의 요지인 충주를 공략하기위해 군단 규모의 병력과 장비 투입
- 북괴 1, 12사단, 2개 포병연대, 1개 전차연대, 1개 장갑대대, 1개 기병대대, 사이드카 중대등을 투입
- 원주로 집결한 12사단을 서남진시켜 충주북쪽으로 공격 수원부근으로 남하한 1사단을 이천 - 여주 방면으로 동남진시켜 서측에서 협공
- 북한군 12사단, 춘천과 홍천 동북지구에 투입되었던 7사단 (전우)을 12사단 (최충국)으로 개칭하여 첫 임무를 충주를 탈취 하라고 부여
- 병력 : 북한군 12사단 - 9,000명, 북한군 1사단 - 12,000명
- 아군상황
- 충주지역 : 2연대가 단독으로 담당, 16포병 대대로 3개 포대를 각 연대에 배속 시킴으로 1포대만 2연대를 지원하게 됨 ( 105밀리 3문 )
- 7.5일 이천방면으로 출동한 19연대가 곤지암리에서 사단규모의 적과 격돌하게 되자 2연대 2대대를 투입하게 되자 충주 지역에는 2연대 1, 3대대와 16포병의 1포대만이 남음
- 병력의 부족으로 충주 경찰서 소속의 경찰관 187명을 통합 지휘하여 일선에 배치
4. 작전계획
- 북한군 : 국군의 집결을 방해하고 유엔군이 참전하기 전까지의 결정적인 타격을 기도
- 육군본부 : 6사단의 7.19연대로 군 주력의 철수를 엄호한 후 전선이 정비되면 양개 연대를 충주로 반전시켜 중부전선을 장악토록 조치할 예정
- 양개 연대가 진천북쪽, 음성지역에서 접적 한채로 현지로 급진된 수도, 1사단과 협동하게 되자 육본에서는 2연대로 하여금 충주지역을 점령 확보토록 명령
- 2연대가 진지편성 하기도 전에 1개 대대를 추출하여 19연대 지역으로 급파하라고 함으로서 2연대는 2개 대대로 21Km의 광정면을 담당하게 됨
- 연대장 복안 : 남한강과 달천강을 장벽으로 삼아 강남쪽에 진지편성, 적의 침공이 예상되는 19번도로 ( 원주 - 충주간 )와 3번도로 ( 이천 - 충주간 ) 축선에 연한 도하지점 부근에 수색중대로 하여금 기동경계 (차장)토록 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중대규모의 기동 타격대를 보유
- 작전 명령
- 1 대대 : 차동리 - 금룡동간의 좌일선 진지 점령, 달천강으로 침공하는 적 격멸
- 3 대대 : 금릉동 - 계명산간의 강반진지를 점령하여 침공하는 적 격멸
- 수색중대 : 상촌 - 목벌리 - 한천리간 동측방 경계
- 1 포대 : 연대 일반지원, 화력 우선권 3대대 정면
- 공병중대 : 달천교, 철교경비, 별명에 따라 지역내 교량 폭파 준비
5. 작전경과
- 7월7일
- 연대장은 적정이 없는 가운데 적정 파악을 위해 3, 19번 도로에 경계 중점을두고 충주북쪽에 위력수색을 실시하면서 방어진을 편성하기 위한 정찰실시
- 전날 충주 북쪽 8Km부근에서 중대 규모의 적과 접촉 한 후 10Km내외의 인접한 지역에서 적을 확인 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07:00시에 방어진지 점령
- 충주 지역으로 진출하고 있는 적은 북한군 12사단으로 그 선봉부대가 목계를 지나 태고산 부근으로 집결중에 있었고, 또 다른 일군은 여주에서 용포리 - 가금쪽으로 남진중
- 3대대
- 충주로 이동후 3일동안 계속 남한강 북쪽 3-6Km의 대전리 - 사암리 - 영덕리 일대에서 적정을 탐색하던중 전날 14:00시에 송강리 부근에서 중대규모의 적과 한차례 교전, 그 남쪽 영덕리 부근에서 정찰대로 추단되는 미상의 적과 한차례 조우전을 벌이는 등 접적사례가 잦아지자 대대의 전 병력을 집결시켜 19번도로 축선상의 요역인 사암리 일대에 주력을 매복시켜 적의 선봉을 포착 섬멸키로 함
- 이때 연대로부터 남한강변에 진지를 편성하기로 하고 즉시 목행동으로 집결 하라는 명령에 따라 이날 아침에 진지 점령
- 3개 중대를 일선에 배치, 5Km 정면
- 강폭은 200-250m 수심이 깊어 도섭 불가능
- 연대에서 1개 수색중대로 계명산 동측방을 차장토록 하였으나 8Km 정면에 대한 경계대책 미흡
- 적은 우측 9중대 정면의 조돈진 일대로 도하 하고자 오전과 오후에 정찰 실시 아군과 사격전
- 3대대는 적정을 상세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 현진지 보강에 주력, 야간 경계태세
- 1대대
- 좌인접 7연대가 음성 지역을 장악하고 있어 이곳에는 적수가 미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창동리 - 요두동 - 칠금동의 진지를 점령하고 좌인접 연대와의 지경선 부근의 공백지는 증강된 1개 소대로 기동적으로 위력수색 실시토록 함
- 3중대를 탄금대 - 금릉동간의 3Km 강변진지 점령, 배속된 경찰병력으로 탄금대 일대 배치, 2중대를 달천강 서측의 277고지 일대 점령, 1중대를 달천교 동쪽의 신촌에 집결시켜 대대 예비로 공치 예비에서 1개 소대를 추출하여 3번 도로 일대 위력 수색 실시
- 2대대 : 진천에 위치, 연대와 60Km 이상 원거리 위치
- 연대 : 남한강과 달천강을 장벽으로 삼아 서북향 진지를 편성하였으나 조우 양측방 경계 대책이 문제로 대두 특히, 우인접 8사단은 단양일대에서 교전중으로 항강리 - 진본리 - 내리 등 양부대간의 간격부위에 대한 적정 미파악 상태, 대책무 그래서 연대 수색 중대로 하여금 강안을 따라 기동식으로 경계토록 조치
- 수색중대 : 동측방 경계, 위력수색을 실시하는 동안 아무런 적정을 수집하지 못하고 계명산 북쪽의 3대대와도 연락을 취하지 못하였는데 이날 오후에 적은 관모봉 일대에 집결중. 연대는 수색중대의 보고에 따라 적정이 없는 것으로 오판하게 됨
- 7월8일
- 충주 탈취를 노린 북한군 12사단은 01:00시를 전후하여 04:30시 까지 3시간 여를 요란사격으로 진지 전역을 위협 하다가 7.8 05:00시를 기해 일제공격 개시
- 연대의 우일선인 3대대 진지와 1대대의 3중대 진지인 칠금동 부근으로 주 화력을 집중
- 2개 대대규모 이상의 적 포병 화력이 3대대 진지 일대에 집중
- 05:00시에 포격 연신과 더불어 3대대의 우일선 9중대 정면에 공격개시
- 9중대 : 사전에 주사격 방향을 그곳으로 지향시켜 최저표척사격이 가능토록 화망을 구성한 상태에서 동시 집중 사격으로 적을 강타하여 격퇴
- 적은 또 다시 10중대 정면으로 침공하여 교두보를 확보 하고자 하였으나 10, 11중대의 사격으로 분산
- 3대대는 적의 제 1파를 수중, 진전에서 격파 하였으나 적의 후속파가 다시 밀어 닥침
- 06:00시에 적 상황 종합
- 3대대 지역 ( 우일선 ) : 연대규모의 적이 공격
- 1대대 지역 ( 좌일선 ) : 2개중대 규모의 적이 공격
- 07:00시에 3대대 진지의 일각이 붕괴되기 시작 적은 끝내 교두보를 확보하고 진전으로 쇄도
- 시간이 경과할 수록 전황이 불리해지는데 충주의 동측방에서 또다른 일단의 적이 침공 보고
- 적 : 관모봉 - 계명산 동측으로 도강하여 아무런 저항없이 서진중, 상종당 고개를 넘어선 후 연대 수색중대와 조우
- 전방과 측방에서 사단규모의 적이 계속적으로 광풍을 일으키니 충주의 방어는 풍전등화격에 이름
- 연대장 조치 : 증평의 사단 사령부에 전황보고와 함께 병력의 증원요청, 현 전선 수습을 위한 긴급조치 강구
- 1, 3대대와 1포대를 가지고 일부의 진지를 조정함과 아울러 충주 북쪽의 금릉동부근에 새로운 진지를 급편하고자 혼신의 노력 경주
- 08:30시 사단으로 부터 철수명령 하달 “충주 남쪽에서 최대한 지연전 전개, 2대대와 19연대 1대대를 증원하겠다”
- 전세악화, 우일선의 3대대의 분산 병력이 충주 시내로, 직할대 병력도 호암동으로 분산 전진되어 체계있는 철수가 곤란한 상태에 도달
- 1대대로 하여금 단월동 - 대림산간에 엄호진지 급편토록 지시하면서 3대대를 수회리 일대로 집결토록 조치
- 1대대 : 11:00시에 엄호 진지 급편, 충주 주변에서 분산된 병력은 수회리로 집결
- 북한군 12사단 : 남한강 방어선을 돌파하여 충주 시내로 돌입, 동측방으로 침습한 적은 3대대 후미를 추격하여 호암동 입구로 쇄도
- 이에 대림산 일대의 1대대 1중대의 집중화력으로 선봉강타, 적은 분산되고 철수 함으로 접적이 단절되고 전선은 소강상태가 됨
- 연대장 : 수안보에 지휘소 개설, 접적이 단절되자 적의 재 공격에 대비 현 진지의 재조정이 시급하다고 판단
- 326고지 - 적포산간 주력으로 저지진지 편성하기로 결심하고 1, 3대대를 신진지 점령
- 18:00시에 2대대가 19연대의 배속 해제로 도착 19-2대대가 도착
- 사단 : 진천의 19연대를 수안보로 이동 시킨다는 내용전달, 연대장은 현진지 고수에만 만족할 수 없어 4개 대대로 탈환전 결심
- 3대대 : 현 진지 확보, 다른 3개 대대로 반격
- 19-2대대 : 동북쪽으로 우회시켜 적의 동측배 강습
- 1, 2대대 : 정면으로 돌파하여 동시에 협공
- 명일 05:00시에 공격개시시간으로 예정하고 공격준비, 특히 우회 공격부대는 야간 기동으로 목벌리 까지 이동토록 명령
- 19연대 2대대 : 철야 강행군하여 02:30시에 신당 - 목벌리를 목표로 계속 전진, 연대는 적정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방적인 공격준비에 치중, 7, 9일 새벽에 목벌리 동남쪽 1.5Km까지 진출
- 적 : 충주에 집결한 적은 작전의 큰 전환기로 북한군 12사단을 동남쪽으로 전진시켜 아 8사단 정면의 단양지역을 도모케하고, 후속한 1사단으로 하여금 수안보로 진격케 할 방침아래 적 부대들을 목벌리 쪽으로 지향하고 진출중, 충주를 점령한 후 북한군 105전차 사단의 109전차연대의 전차 30여대가 역전 광장에 집결중에 있었고 북한군 1사단은 충주 점령의 공을 놓치고 발악적인 광기에 서려 수안보 까지 급속히 침공 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
- 연대는 이러한 적정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반격을 기도
- 19연대 2대대 : 04:00시에 목벌리에 도착 공격개시 1시간 전으로 여기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전열을 정비 한 후 예정시간에 LD를 통과하여 중간목표인 계명산으로 진격하려고 하고 중대별로 소개하여 식사 하도록 지시 , 이때 적의 불의의 기습으로 일순간에 수라장이 됨. 대대는 각개로 분산하여 신당에 집결토록 하였으나 50명 정도만 집결, 09:00시에 연대장으로 부터 수안보로 철수명령 하달, 수안보에 도착해보니 대대의 대부분의 병력이 집결하고 있었음
- 2연대 주력 : 05:00시에 LD넘어 충주 방향으로 진격 공격개시 3시간 만에 적의 역습으로 공방 역전
【보충1】출처 :국방군사연구소,『한국전쟁(상)』,1995년, pp.224~227
평택-충주-울진의 한미연합전선이 형성될 무렵 충주에는 국군 제6사단 제2연대(-)가 단독으로 방어준비를 하고 있었다. 홍천에서 철수한 제6사단을 7. 3일 충주에 집결하였으나 제1군단의 이동에 앞서 제19연대(+)와 제7연대가 이천-여주 방면으로 전개, 엄호작전에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충주는 충북 북부지방의 교통의 중심지로서 북쪽에 남한강과 서쪽에 달천강이 흐르고 있었다. 남한강의 수폭은 200∼250m이며 수심은 도섭이 불가능하고 동쪽의 계명산은 충주를 감제함은 물론 남한강을 감제관측하는 매우 중요한 지형지물이었다. 도로망 중 충주-수안보 도로는 중동부전선에서 가장 양호한 적의 예상접근로였으며, 충주-장호원, 충주-단양 도로는 횡적 부대이동에 중요하다.
제2연대는 원주-충주 접근로 방어에 중점을 두고 남한강 차안에 제1대대를 서, 제3대대를 동으로 배치하고 수색중대를 계명산 동측에 경계부대로 운용하는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그러나 연대의 방어 정면이 약 21km로소 예비대 없는 일선 배치이었으며, 병력은 자체병력 1.800명, 포병 89명, 경찰 187명 등 총 2,076명이었다. 부대간격이 넓고 좌우 인접부대와 연결되지 않아 방어상 많은 취약점이 있었으나 춘천-홍천에서의 선전으로 장병들의 사기는 대단히 높았다.
반면에 충주로 남하하고 있는 인민군 제12사단(최충국 소장)은 제30, 31, 32연대로 구성되었으며, 그간의 전투손실로 병력은 약 9,000명이었다. 제2연대가 방어진지를 구축할 무렵 제30연대가 제3대대 정면으로 도하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그 뒤에서 1개연대가 후속태세를 갖추고있었다. 또 다른 1개연대가 남한강 북안에서 연대의 동측방으로 우회하고 있었다. 한편, 적 제1사단도 이천-여주를 거쳐 충주로 향하고 있었으며, 전차 1개연대, 기병 1개대대, 오토바이중대도 충주공격에 투입되었다.
국군 제2연대는 정찰활동을 전개하던 중 7. 7일부터 적 12사단 정찰대 및 선두부대와 접촉을 이루게 되자 준비된 진지를 점령하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적은 자정부터 요란사격을 시작하더니 갑자기 강도 높은 공격준비사격으로 전환하여 주로 제3대대 진지를 강타하였다.
연대는 적이 도하할 때 일제사격을 가하기로 하였으나, 적의 포격으로 피해가 속출하였고 짙게 깔린 안개 때문에 경계가 어려웠다. 이윽고 적이 소대-중대 규모로 제3대대 각 중대 전면에 안개를 뚫고 갑자기 나타났다. 적은 전날 미리 준비해 놓은 강가 도선장의 배로써 안개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 기습적으로 공격해 온 것이다.(참고 : 기상이 작전에 미치는 영향 사례)
연대는 즉각 계획된 화력을 집중해 가며 적의 공격을 몇 차례 격퇴하였다. 그러나 제2제파, 제3제파의 적이 도강하여 제3대대와 원주-충주도로 서측의 제1대대에 압력을 가함으로써 아침 무렵 제3대대의 좌일선 일각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동측방으로 우회하던 일부의 적은 관모봉에서 강을 건너 계명산을 우회하여 측후방으로 침투 중이었는데 때마침 강안경계를 위해 진출하던 수색중대가 상종-마지막재에서 가까스로 이를 저지하였다. 이는 적이 제2연대 후방을 차단하여 충주에서 포위격멸하려고 기도하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연대장은 증평의 사단장에게 병력증원을 요청하는 한편, 제3대대를 포대의 지원하에 2km 남쪽 저지진지로 물리고, 제1대대로 하여금 서측방 접근로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도록 하여 또다시 충주 북방에서 적을 저지할 결의를 다지고 진지조정에 들어갔다.
이러한 경황 중 연대장은 사단장으로부터 연대를 충주 남쪽으로 철수시켜 적을 저지하라는 구두명령과 더불어 12시간 내에 제19연대를 증원 중인 제2연대 제2대대를 원복시킴과 동시에 제19연대의 1개대대도 추가 지원할 것이라고 통보를 받았다.
이때 이미 충주 북쪽의 제3대대는 적의 공격으로 분산된 채 충주 쪽으로 밀려들고, 동측방 마지막재에서의 수색중대와 직할대도 충주 쪽으로 밀리고 있었다. 연대장은 지체 없이 접촉이 경미했던 제1대대로 하여금 충주 남쪽 단월동-대림산에 엄호진지를 편성하게 하고 나머지 병력은 모두 그 후방 수회리로 집결하도록 명령하였다.
연대장은 충주-수안보 축선상에 보다 유리한 지형인 수회리 바로 뒤 326-적포산에 저지진지를 편성하고 이를 발판으로 증원부대가 도착하면 충주로 반격할 복안을 세웠다. 때마침 저녁 무렵 제2대대와 제19연대 제2대대가 도착하자 연대장은 9일 05:00를 기해 제1, 2대대는 북으로 정면공격하고, 제19연대 제2대대는 목벌리로 우회하여 충주를 탈환하는 반격작전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적측에서는 부대교대가 이루어져 충주를 점령한 제12사단은 작전지역을 서울-충주로 남동진한 제1사단에 인계하고 단양을 목표로 마지막재를 넘어 목벌리 쪽으로 향하였고, 충주에 이날 늦게 도착하여 전선을 인수한 제1사단은 제109전차연대의 지원하에 남진하였다.
이러한 적정을 모른 채 제2연대는 제1대대가 서에서 두륭산 방향으로, 제2대대가 동에서 대림산을 목표로 병행공격하고, 동측방으로 우회한 제19연대 제2대대는 공격개시 1시간 전에 목벌리에 도착하였다.
북쪽으로 공격한 2개대대는 두륭산과 대림산을 점령하고 계속 진출하던 중 남진하던 적과 조우하여 교전에 들어갔으나 장갑차를 동반한 적이 양개 대대 사이의 도로를 돌파함으로써 퇴로가 차단되는 상황에 접하게 되었다. 연대장은 적의 진출에 앞서 철수한 제1대대로 하여금 제3대대와 함께 수안보 방어를 강화하게 하고, 퇴로를 차단당한 제2대대는 최선책을 택해 수안보로 철수하도록 명령하였다.
한편, 제19연대 제2대대도 적정을 모르고 목벌리에서 식사를 하던 중 마침 단양을 목표로 그곳을 지나던 제12사단 제32연대의 기습공격을 받아 대혼란에 빠졌다. 이리하여 대대는 부득불 남한강으로 뛰어들어 강을 역류해 위기를 모면하고서 각개별로 수안보로 복귀하였다.
연대가 다시 수안보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을 무렵, 다행히 이곳에 도착한 제19연대에 방어진지를 인계하고 수안보로 집결하여 재편성에 들어갔으며, 이때 마침 유엔공군 1개편대가 1시간 간격으로 두 차례 출격하여 적 집결지를 강타 하였다. 적도 이날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서인지 접촉을 단절함으로써 전투는 중단되었고 쌍방간에 대치된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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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6사단 청성 전우회 휴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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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원주(84.07.11~86.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