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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방에서 토론하다 정리해서 따로 한편으로 올려 놓는게 좋을 것 같아 올립니다.
우선 아시는 분들은 다들 아시겠지만 성곽이란 군사적, 행정적인 측면에서 지어진 보호, 방어를 위한 개념의 건축물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곽은 머무는 사람이나 목적, 지형, 입지와 축성재료, 평면의 형상 등에 의해 다양하게 분류되며 여기서 축성재료에 유념해서 보면 정치체가 커지고 문명수준이 올라가면서 나타나는 토성이나 돌로 쌓은 석성, 흙과 돌을 이용한 토석혼축성, 벽돌을 주재료로 한 전축성뿐 아니라 <초기에는 나무를 재료한 목책도 성곽의 개념이(목책성) 됩니다.대평리 유적에서는 2·3중으로 중복된 환호와 목책이 실제 발굴>이건 초기부터 삼국시대 그리고 조선시대에 와서도 임진등 긴급하거나 단기 시기로 사용된 형태입니다. 환호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도랑이죠.이런 형태는 후대 고조선 문명권 이전 시기인 요하 일대의 흥륭와 취락 유적에도(기원전 6천년경) 보이듯 방어적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으며-혹은 해자의 개념으로도 설명한다. 특별히 틀린 말은 아님. 세계에 널리 나타나는 현상으로 농경 사회의 정주취락과 관계하며 기원전 6천년경에 이런 해자형태는 당시 시대상에서는 상당히 혁신적 개념이라고 할수 있슴- 하여튼 그기에 목책(성)이 함께 병행되어 발전합니다.. 즉 성곽의 개념인 목책성에 환호도 사용되는 것이지요. 추가로 평면의 형상에서 평지성, 산성, 평산성(구릉지 일대의 성)로 분류할수 있고 현재 평양의 토성동 토성(낙랑토성으로 추정)인 이 성을 마치 평지성에 장방형이라는 한나라식 토성으로 말하는데 실제 구릉지의 평산성에 장방형의 모양이 아닙니다.
<해자라는 것은 성곽의 규모가 커지고 정치력이 강해지면 풍납토성에서도 보이듯 기타 환호의 형태가 좀 더 규모화 커진 연장성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 우리나라 도성의 특징은 평지성인 왕성에서 일상적 행정과 거주를 하고 전쟁시를 대비한 군사목적의 배후 산성을 쌓는 형태입니다.
국내성은 환도산성, 안학궁은 대성산성을 신라는 월성이라는 도성을 중심으로 명활산성과
남산산성을 그리고 백제의 경우도 평지성이라는 풍납토성을 중심으로 배후에 몽촌산성과 이성, 남한산성을 두고 있습니다. 후기 웅신성과 사비성 공주의 경우는 공산산성을 부여는 부소산성을 왕성을 중심으로 두는 공통분모형의 배치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풍납토성의 수난사를 잠시 언급하면
풍납토성 자체가 이병도에 의해 사성으로 터부시되어 오다 이후 김원룡교수도 사성개념으로 말하면서 방치되었고 다시 설상가상으로 몽촌산성의 발굴로 마치 이곳이 백제의 왕궁이라는 개념이 펴짐으로 풍납토성은 이후 더욱 세간의 뇌리에 사라지고 엄청난 파괴의 몸살을 앓게 되는 수난사를 경험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단순히 이전 일제 이후 삼국초기의 백제사의 정치력에 대한 불신으로 지배되며 지지했던 보수 지지자 대다수 중 실제 독특한 백제정복국가설을 내세우는 이도학 교수가 풍납토성 축조시기를 4세기 중,후반 근초고왕대로 보면서 이 일대에서 발굴 확인된 그 이전 시기 건물터는 선사시대'??것이라고 단정한 우스운 소리나 또 박순발 교수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성벽 발굴 현장설명회 자리에서 '풍납토성은 그 축조시기가 빨라야 3세기 초,중반을 넘지 않는다'고 공개표명한 적이 있는 게 고작인 반응수준 정도 였습니다.
풍납토성은
Ⅰ층(서력기원 전후 : 풍납리식무문토기+중도식토기+삼중의 환호)
Ⅱ층(서기 1∼2세기 : 6각형 수혈집자리+회청색연질토기+낙랑계토기)
Ⅲ층(서기 3∼4세기 : 6각형 수혈집자리+회청색경질토기)
Ⅳ층(서기 4세기 이후∼475년 문주왕의 웅진 천도시까지 : 4각형방형 또는
장방형 수혈집자리+회청색경질토기) 등 적어도 4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슴.
기타 토기 산포지나 폐기장은 4,5세기 편년등 <삼국사기 문헌상의 한성백제의 존속시기와 대체로 일치하며 기원전후에서 5세기 까지 다양한 유적과 유물이 연계된 문화층으로 나타나고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풍납토성내의 가장 이르시기의 문화층에서 나오는 환호 유구들은 청동기문화에서 나오는 전형적 형태에 3중 환호형의 특징이 취락주변에 만들어져 있다라는 설명입니다.
1997년 발굴보고에서의
3중 환호에 대해 잠시 설명하면
1호 환호(폭 80cm 길이 20m 깊이 50cm) 가장 안쪽에 해당하며 상면 상당 유실
2호 환호(차례로 170 ,30, 70) 중간 지점으로 가장 양호( 풍납통식무문토기 계통 유물도 가장 많이 출토)
3호 환호(80,25,45) 바깥부분으로 상당부분 교란
쉽게 말해서 3중의 환호즉 3개의 도랑을 겹겹이 만들었다는 뜻이며 거의 동일 구조에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풍납토성 내에서 가장 이른 시기 취락 유적이며 가장 이른 시기의 풍납동식무문토기 유물이 대다수로 발견 -이런 환호유구는 남쪽으로도 계속 연장...
우리나라가 토기분류로 연대 측정하는 식이 다른 나라 어느 학계보다 유독 강한데 세계 학계는 제대로 과학적인 절대편년 즉 탄소연대 측정이나 토기관련해서 열형광분석의 방법은 하나의 분명한 주류이며 이들 상호는 장단점과 정확한 연대사이의 오차는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중심연대를 잡아 설명합니다.
<5-7세기의 석축 산성에서 성벽을 절개해 보면 성벽뒤를 채운 보강토나 잡석들속에 무문토기편이 나오는 예도 있습니다> 이러한 예가 있을 수 있죠. 당연히 성토과정에서 초축시기보다 선시기의 유적,유물이 있다면 들어갈 가능성은 부인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풍납토성의 경우는 성벽에서도 발굴되는 양상으로 보았을 때 이런 예로 표현하기 부적절하다고 봅니다.
먼저 풍납토성의 구조부터 잠시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초축의 정확한 설명을 위해-
잠시 인용하면-신희권, <풍납토성의 축조기법과 성격에 대하여>, 《풍납토성의 발굴과 성과》, 한밭대 향토문화연구소, 2001, 68~69쪽. 윤근일, <풍납토성 발굴과 그 의의>, 《풍납토성[백제왕성] 연구 논문집》, 동양고고학연구소, 2000, 51쪽.
< 발굴지역은 대상구역 중 동 - 서 폭이 가장 넓고 보존 상태가 양호한 지점으로, 성 내부와의 연결 층위를 조사하기 위하여 지난 1997년 발굴조사 한 현대아파트의 동북쪽의 위 지점을 A지점, 아래 지점의 것을 B지점으로 정하고, 동 - 서로 성벽을 절개하여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확인된 성벽의 축조 방법은 하단에 뻘을 깔아 기초를 다지고 하부 폭 7m, 높이 5m 정도의 사다리꼴 모양 중심토루를 쌓았다. 다음으로 안쪽에 사질토(Ⅱ 토루)와 모래(Ⅲ 토루), 점토다짐흙(Ⅳ 토루)과 뻘흙(Ⅴ 토루)을 위주로 한 판축(版築) 토루를 비스듬하게 덧붙여 쌓았다. 마지막 토루 상면에는 강자갈돌(姜石)을 한 겹씩 깔아 3단으로 만들고, 그 안쪽으로는 할석을 1.5m 이상 쌓아 마무리하였다. 이러한 석렬 및 석축은 토사의 흘러내림과 안쪽으로 밀리는 것을 방지하고 배수의 기능도 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A지점의 경우에는 뻘흙으로 이루어진 Ⅴ토루에 나뭇잎이나 나뭇가지 등의 식물 유기체를 얇게 깐 것이 10여 겹 이상이 확인되는데, 뻘흙을 10㎝ 정도 두께로 가져다 부은 후 식물 유기체를 얇게 깔고, 다시 뻘흙을 까는 과정을 10여 차례 이상 반복하여 토루를 쌓아 올렸다.
또한 식물 유기체 4~5겹에 한번씩 3단에 걸쳐 성벽의 횡 방향으로 각 <재목>을 놓고 <수직목>을 결구시켜 지탱한 구조물도 확인되었다
B지점은 Ⅴ토루 하단부 4단 째의 석축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성벽 종 방향을 따라 80㎝ 간격의 수직목이 확인되었는데, 구획선으로 추정한다.
중심토루 외벽으로는 경사지게 떨어지는 자연층 위에 판축벽으로 토루를 쌓고 내벽과 마찬가지로 상부에 할석 또는 강자갈돌을 깔아 마무리하였다. 내벽과 외벽의 석렬은 중심토루로부터 거의 동일한 거리에 축조되어 있다. 이상 확인된 규모로 보아 성벽의 폭이 약 40m, 높이가 9m가 넘는 규모이고, 조사 구간이 협소하여 내외부로 확장하여 조사하지 못한 것을 감안한다면 하부는 그 규모가 더 커질 것이다.>
기저부-기초 바닥- 정지 작업 후 뻘 흙으로 기초 다지고 중심부를 흙으로 쌓은 후 내벽과 외벽에 3-5차례 정도의 사질도-점성 성분이 있는 모래-와 모래, 점토로 다짐을 하고 흙으로 구성된 판축토루(흙 기둥)를 덧붙이고 마지막에는 성벽 양측의 기저부에 여러 단의 석력과 석축으로 마감한 형태입니다.
처음 접하여 글로 읽은 분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내부 구조형태인데 풍납토성을 댐공법으로 비유하는 것도 오늘날 우리가 보는 흔한 돌이나 벽돌형의 성곽처럼 아래에서 위로 쌓아올린 형태가 아니라 기저부의 뻘 흙으로 지진이나 충격 흡수의 기초를 만들고 기본 중심 토루의 지지목 형태로 쌓고 이후 쉽게 설명하며 이런 벽에다 비스듬하게 나무를 기대어 나무위에 하나씩 다른 나무가 비스듬하게 쌓여 있는 형태로 구조가 사다리 꼴 모양으로 위층보다 아래층이 상당히 넓은 형태가 됩니다. 이런 이유로 풍납토성의 경우 폭의 넓이가 최대 70여미터에 이르는 구조가 된 것입니다.이런 형태는 댐에서도 보이듯 엄청난 충격흡수에 상당한 지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첨단 공법입니다.이와 같은 축조방법은 김제 벽골제와 부여 나성, 일본의 수성(水城)과 제방 유적에도 확인됩니다.
그럼 여기서 정확히 <초축구조>로 보는 형태는 어디까지인가?
<내벽 Ⅲ토루(모래) 하단에서 마지막 토루와 동일 성격의 석렬이 확인되어 이 구간까지도 초축으로 포함합니다>
이러한 성벽구조 확인은 2차례에 걸쳐 이루어 졌습니다.
1) 1999.(동벽)
700여M 구간에 300미터가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400여미터에서 조사가 실시.
앞쪽으로 2차 개천을 복개한 왕복도로가 있는데 이것이 해자로 추정됩니다.
북쪽 A지점과 남쪽 B지점을 동서로 관통 시켜 성벽 절개를 통해 내부 구조 확인에 들어감
확인 결과 폭 40미터 높이 9미터 넘는 규모
성벽 하단에서 고식의 심발형토기 출토, 판축토 내부는 풍납동식 무문토기(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 회색무문토기, 그리고 토루 상당부와 퇴적층 경계사이에 장단형 토기, 동이편 유물이 출토
2)2003 서벽
중심부 하단의 개흙층과 점질토, 사질토 교대 성토층 및 외벽 점토 다짐층 등에서 <다량의 풍납동식 무문토기가 출토와 소량의 연질 타날문 토기 출토>
풍납토성 1기(기원전 2세기 전후)에 속할 가능성이 높으나 풍납토성 성벽 외부의 가장 깊은 곳에서 풍납동식 무문토기인 경질 무문토기가 출토.
<초축시기는 기원 전후>
여기서 성벽연대를 위해서는 출토된 풍납동식 무문토기및 타날 토기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것입니다.
앞서도 풍납토성이 4개의 문화층으로 이루어져 단계별 발전 양상의 특징을 보인바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것을 다시 토기류로 부가 설명하면
1층> 풍납동식 무문토기 유형이 <다수>, 연질 타날문토기, 연질 무문토기는 <소수>에 불과
- 기원전 2세기 전후 시기
2층> 풍납동식 무문토기 거의 소멸, 연질 타날문토기, 연질 무문토기 대부분 차지. 회색 경질토기로 소량 출토
=> 풍납동식 무문토기에서 타날문 토기로 바뀌는 양상이 다른 지역과는 달리 두층 사이에 시간적 공백이나 새로운 토기문화의 혁신적 가능성을 상정해야 할 만큼 본격적 연질 타날문 토기가 출토되는 시기에 풍납동식 무문토기는 급격히 소멸하는 것이 풍납토성에서의 매우 큰특징이며 성벽 축조에서도 주목해서 봐야 할 핵심부분이다.
3층>2층 단계의 토기문화와 연속성을 보임.기존 연질 타날문 토기와 연질 무문 토기중 일부가 경질화 도질화, 특히 고배 삼족배, 삼족반, 광구, 장경호, 장단형웅등 연질 무문, 회색 경질 토기, 회청색 도질 토기 유형의 새로운 기종이 출현
4층> 3층 시기에 바탕하여 다양한 형태의 기종 등장하나 이전 시기에 비해 큰 변화는 없는 양상
여기서 초축의 연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풍납동식 무문토기와 연질 타날문 토기에 대한
간략한 지식이 필요 할 것입니다.
<점토대토기 조각들>
경질 무문토기는 처음 김원룡 교수가 풍납토성 내에서 발굴하면서 <풍납동 무문토기>로 불리다 토기가 한강유역 뿐만 아니라 남부지역에서도 발견되어지자 이들을 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라 명명하게 되었습니다.즉 표면이 단단하며 무늬가 없는 토기의 의미로 불립니다. 이 경질 무문토기는 제작 온도가 거의 900도에 달하는 것으로 이전의 400-800도 시의 초보적 철기보다 높은 내구성의 철 제작을 가능하게 하는 측면에서 철기시대와 관계하는 토기입니다. 이와 함께 초기 철기의 제작 연대와 관계한 것이 타날문 토기입니다. 풍납동식 무문토기에는 제작기술상 기원전 5-3세기에 출현하는 <점토대토기> -토기 구연부에 점토띠 덧붙인 무문토기로 그릇의 기벽이 두꺼움. 이 토기의 의의는 비파형 동검에서 세형동검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나타나며 지석묘(고인돌)의 소멸과 함께 목곽묘 등장에서 함께 사용됩니다. 이른 철기사용시기와 맞물리며 단면 형태에 따라 크게 원형점토대토기와 삼각형점토대토기로 구분합니다. 한반도에서는 대략 기원전 3세기경에 들어와서 남부에서는 금강유역에서 처음 발견되고 영남권에서 다수가 발견- 에서 보이는 점토띠 쌓은 흔적이나 점토테 연결 흔적등이 관찰됩니다. 아직 녹로성형 단계로 보이지는 않으며 이전 무문토기보다 세련된 형태에 마연에 가까운 깎기수법을 채용하여 정면이 세련된 효과로 그냥 무문토기보다 좀 더 향상된 측면이 확인됩니다.
철기시대의 개시연대는 한반도 북부지역이 B.C. 4-3세기경으로, 중·남부지역은 B.C. 2-1세기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단면삼각형 점토띠토기의 발생을 B.C. 2세기로 보고 있어 경질무문토기의 출현이 B.C. 2세기경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판단되고 군곡리 조개무지의 경우에 Ⅱ기층의 상한연대가 B.C. 2세기 말-1세기 초로 비정되어 일치하고 있다. 하한은 군곡리 조개무지의 Ⅲ·Ⅳ기층에도 계속 나타나고 있어 2-3세기경까지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은 군곡리가 지리적으로 최남단에 위치하여 다른 지역보다도 늦은 시기까지 사용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욱이 제주도 곽지 조개무지의 경질무문토기는 3-4세기까지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토기문화의 파급이 빠르게 일어난 동남부지역에서는 1세기경 와질토기 및 적갈색연질토기로 대치되었을 것으로 확인
<경질무문토기>
다음으로 <연질타날문 토기>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데 이 연질은 표면이 연한 질감으로 기벽이 얉은게 특징입니다. 즉 이전의 점토대토기는 기벽이 무겁기에 실생활에서 나름의 애로 사항이 존재했을 것을 짐착합니다. 이런 불필요함을 없애기 위해 기벽의 두께를 낮추고 이런 얇아진 기벽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 토기 표면에 <두드림 기법>을 이용하여 기포를 제거함으로서 강도를 높이는 효과의 기술입니다.이런 기술을 타날기법이라 하며 표면이 부드럽다고 해서 <연질타날문토기>라고 합니다. 연질의 경우는 이런 타날기법이 사용되지만 무문토기의 경우의 두꺼운 외벽에도 보령 교성리,관창리 유적등에서도 보이듯 타날기법이 추가로 사용된 흔적이 보이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는 특징을 가집니다.
타날문 토기에 대해서는 기본 몇 개의 설이 있지만 확인된 바로는 요령성 ‘상보유적’에서 세형동검 검파 점토대토기와 함께 ‘승석타날문 토기’가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후로 중서부와 김해지역 구산동 유적에서도 원형점토대토기에 타날 흔적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춘천 중도 집자리에서는 경질무문토기와 함께 타날문토기가 등장하며 그 연대를 2세기로 보고 있으나, 중부지역의 다른 유적에서는 기원전후로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남부지역의 김해 지내동 독널무덤에서는 경질무문토기와 함께 타날문의 적갈색연질독이 발견되어 적어도 1세기경의 것으로 비정되고 있다. 고식 와질토기로 분류되는 것 중에도 이미 타날문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타날문이 등장하는 것도 1세기경으로 볼 수 있겠다. 따라서 타날문토기는 한반도 중·남부지역에서 기원전후에는 등장하였을 것으로 봄
< 타날문 토기>
=> 그럼 다시 정리하면
1.풍납동식 무문토기와 연질타날문토기는 초기 철기시기와 관계하지만 시기적으로 타날문토기가 좀 더 후대의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2.특히 풍납토성의 경우에는 연질타날문토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시기에는 풍납동식무문토기는 급격히 소멸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3. 풍납동식 무문토기는(기원전 2세기 전후) 기본 선주세력의 토기양식의 특징이며 최소한 기원전까지 사용되다 기원후로 급격한 타날문토기 양식에 소멸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4.초기 다수의 풍납동식 무문토기에 소수의 타날문토기는 선주세력과 이주세력의 혼합된 양상을 보이고 있음을 뜻하고 이후 풍납토성에서의 본격적 타날문토기가 사용되는 시기에 맞물려 풍납동식 무문토기가 빠르게 사라진 특징은 이 신진세력에 의해 선진 기술의 빠른 습득과 자기방식화로 진행되어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이며 <초축의 하한시기도 짐작게 합니다.>
5. 앞서도 언급했지만 성벽 중심부 하단의 개흙층과 점질토, 사질토 교대 성토층 및 외벽 점토 다짐층 등에서 <다량의 풍납동식 무문토기 출토와 소량의 연질 타날문 토기 출토>
풍납토성 1기(기원전 2세기 전후)에 속할 가능성이 높으나 풍납토성 성벽 외부의 가장 깊은 곳에서 풍납통식 무문토기인 경질 무문토기가 출토.
<초축시기는 기원 전후 시기로 볼수 있을 것입니다>- 이형구<백제도성>
6. 판축내에는 지지 목재로 사용된 부재가 있는데 이 탄소연대측정의 절대 연대의 측정결과 거의 기원후1-2세기에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기타 풍납토성에는 토기 관련 절대연대를 위한 열형광분석도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7. 일련의 풍납동의 유적 유물의 발굴과 시기는 삼국사기의 백제 초기의 내용가 거의 일치합니다.
온조왕 즉위년(BC 18) 하남 위례성 위치 정하는 복택기사( 온조 ‘십제’)
온조왕 13년(BC 6) 천도왕궁 축조 기사, 5월 한강 남안에수도 9월에 성궐세움
14년(BC 5) 서북에 성을 쌓고 한성 백성으로 나누어 살게 함
- 하남 위례성을 한성으로 불린 것으로 추측 천도하고
15년(BC 4) 새로이 궁궐 축조
온조왕 41년(23년) 위례성 수리 (15세 이상에서 뽑음)
책계왕 (286) 장정징발 위례성 고침
이 사이 여러 차례의 수축 추정될 수 있음.
삼국사기
<BC2세기경 위만 조선시 십제 형성 ->BC2말에서 1세기초 소국병합한 백제는 BC 1전반 경기도 일원 소국 병합한 왕국으로 성장>
삼국지 한전은 소국의 난립, 삼한론은 남부일대를 소국 난립의 연맹왕국 수준의 미숙한 정치 발달사로 묘사. 문제점 많음.
8. 기원 전후로 보았을 경우 이 시기는 백제의 하남 위례성시기과 맞물리지만 다른 일각에서는 타날문의 변화 양상과 함께 위만이 준왕을 내쫓고 남부로 내려가 한왕이 된 세력의 변화 양상과 연관해서 설명하는 주장도 있습니다.-이건 풍납동식 무문토기의 상한을 기원전 3세기 중반까지로 보고 토착재지 세력의 강한 영향력하에 외래계문화의 교류로 보는 이홍종씨의 견해를 바탕으로 함-
9. 풍납토성뿐 아니라 백제가 초기부터 왕국으로 건재함의 다른 성곽유적들도 발견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정북동 토성> 정방형의 한반도에서 매우 보기 드문 방형 토성인데 후삼국시기로 보다
서문지의 바닥에서 채취한 목탄(木炭)을 미국 Geochron Laboratories에 방사선탄소연대 측정을 의뢰한 결과 B.P. 1820±90으로 나타나 백제 한성시대(漢城時代)와 연결되며 축조연대가 기원후 1-2세기경으로 추정되어 이미 백제 초기사에 대한 삼국지의 견해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외에도 외성벽 1,945m 내성 85m 234,50㎡의 <육계 토성>는 아직 정확히 말할수 있는 연구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김성태씨는 육계토성 인근의 임진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학곡리 적석총 등 일의대수로 이어진 백제적석총을 발굴한 주역. 그는 기원전후~1세기 적석총으로 보이는 학곡리 적석총에 대한 장문의 보고서를 통해 백제의 첫도읍지인 하북위례성이라고 보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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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보수 지지자들의 절대연대 측정 방법에 대한 편차 의구심에 의한 신뢰 의문에
탄소연대측정에 대해 비교적 많을 글을 발표한 바 있는 목포대 최성락 교수는 '탄소연대가 적어도 10개 이상이 어떤 연대를 중심으로 일정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면 믿고 싶지 않아도 믿을 수 밖에 없다'면서 '풍납토성의 경우 국립문화재연구소 측정결과를 신뢰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탄소연대측정치 12개의 격차에 대해서는 '같은 풍납토성이지만 각기 다른 곳에서,각기 다른 층위에서 출토된 목탄과 목재가 비슷한 연대를 보인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기원전후를 중심으로 한 탄소연대를 믿을 수 없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고 덧붙인 말을 새길 필요가 있을 것이며 보수지지자들이 몽촌산성의 축조시기도 편년을 어떻게 잡았는지도 되새겨봐야 할 부분입니다.
자금성-1420년 완공-은 현재 단일규모로 세계최대의 도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넓이 723,633평방미터,남북 961미터 ,동서 753미터
성벽의 높이 10미터, 성벽의 두께 7.5미터,둘레길이 3,428미터
해장의 폭은 52미터에 장방형이라 내부 면적은 넓게 사용
<백제의 초기 토성인 풍납토성은 길이 3.74km, 원래 높이 15m에 너비는 최대 70m입니다. 해자의 경우 최대 50~60m로 거대한 성벽을 가진 성으로 성벽의 길이나 너비는 가히 자금성 이상으로 아시아 최대의 토성이라는 수식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첫댓글 고고자료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요. 이전 글에서 수차례 말해주어도, 신희권선생의 발굴보고의 종합고찰을 그대로 가져와 풍납토성 시기구분을 하고 있는데 인용각주정도는 해야겠죠. 그리고 토기의 편년측정방법중 열형광분석의 오차울을 얼마로 보는지는 아세요. 카본데이팅의 오차율과 어느정도 차이나는지는 아십니까. 수차례말했지만 초축편년이라는 말에 대한 이해부족에다가 발굴결과를 편의대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아시아 최대토성이라, 잘 찾아 보세요 최대인지, 발굴자들이 몰라서 아시아최대토성이란 말을 쓰지 않았는지. 우리역사의 영광 영광지나치군요.
기전의 김성태선생이 발굴한것이 아니거든요. 실장으로서 왔다갔다 한정도이고 팀장관리하에 연구원이 발굴하였거든요. 정말 뭐든지 제대로 알아보고 말하세요. 대충 아는것 늘어 놓는다고 설득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3170 번 > 고조선방에서 당신이 지지한다는 박순발교수관련 내용의 오류지적을 말했는데 그기에 댓글을 달지 왜 정리되어 있는 글에 다는가요?? 초장부터 성곽의 개념정리도 되지 않고 왜 박순발교수보다 이형구 교수의 견해가 타당하지 설명한 내용을 이해되지 않으며 열심히 읽기 바람. 그리고 초축은 내부 구조까지 설명하며 정확하게 이야기하는데 뭔 초장 내내 누가 고고학 자료를 제대로 이해못하는지 ... 당신이 말하는 박순발 교수는 몽촌산성의 축조 연대를 어떻게 측정해서 나왔을까요??? 남의 글에 전후 내용 뺴버리고 절대연대 오차 범위만 강조하는... 쯧. 그런 마음가짐에 뭔 말을 해도
귀에 담을까 만은 ... 육계토성도 아직 정확하게 말할 연구수준이 아니라는 전제로 그런 주장이 있음을 말했는데 또 전후 상황 보지 않고 오버하는 댓글수준..우리 역사 영광??? 기원전후로 자금성에 버금가는 둘레의 성곽이면 영광은 아니라고 해도 어느 정도 규모인지는 비교가능하겠군요.. 남의 글에 전후 상황 글 빼버리고 늘 혼자 오버하는 글은 더 이상 사절.!
분명 신희권선생의 견해를 저는 따른다고 했는데 왠 박순발선생. 그리고 신희권선생의 견해는 풍납토성의 초축년대는 2세기랍니다. 환호와 경질무문토기시기를 말하지 않고요 . 정확히 알고 나서 글을 쓰기 바랍니다.토기연대측정방법으로 제시한 열형광분석은 오차율이 너무 커서 역사고고학에서 그다지 준용되지 않고 참고하는 수준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현재로서 카본데이팅은 비교적 기원전후시기에 대한 오차율이 크지 않아 효용가지를 인정하고 사용한답니다. 저 역시 풍납토성의 카본데이팅 자료를 무시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여 신희권선생의 견해인 2세기안을 수용하죠. 누구처럼 기원전 2세기부터 쌓다가 완성된 시점이
200년이라고 오해하지는 않거든요, 다른 연구자의 견해를 이해하는데 제마음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랍니다. 아시아 최대란 말역시 그러하고요. 신희권선생의 견해에 대한 비판을 적시하였더니 그렇게 생각한다고 판단하였나 보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박순발선생의 토기편년안을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답니다. 뭘 애기하고자 한다면 의욕보다는 정확이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이 중요한거랍니다. 역사님의 오버글을 지적해주는 것도 지치는 군요, 저도 이만 사절하겠습니다.
저기 내용중에서는 절대연대나 사서 관련 기록뿐 아니라 핵심은 풍납동식무문토기가 기원전후의 연질타날문토기의 본격적 사용 시기와 맞물려 급격히 소멸하는 특징을 보인다는 점과 성벅관련 초축에서 풍납동식 무문토기가 연질타날문토기보다 대다수로 출토된다는 점에서도 박순발 교수의 견해보다는 이형구 교수의 견해가 더욱 타당하다는 입장입니다. 이만. 서로 이야기 하다보니 초장에서 님의 감정적 대응에 함께 감정이 높아진 부분이 있는것 같은데 서로 정리하고 그만 해야 겠군요. 서로 감정 풀고..저는 이만.
이형구선생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 이선생님의 학위논문이 대만에서 한국청동기기원이라는 문제에 있어 당시 회자되던 시베리아청동기문화요소가 아니라 중국 청동기문화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는 논문인데 알고 있나요. 혹 이형구선생처첨 한국청동기 비파형이나 세형동검이 중국청동기문화에 의해 영향받아 형성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물론 세형동검의 한반도 출토품 상당수는 초기철기에 해당하니 별개이겠지만 말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토론하면서 감정상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의 표현이 직선적인 부분에 감정 상하였다면 양해를 구합니다. 다만 잘못된 역사님의 견해에는 분명한 지적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이형구 교수의 일명 남산근문화는 단순히 그런식이 아닌걸로 압니다만
대만대에서 학위하고 들어오신 직후 논문을 찾아 보세요. 답이 보일것입니다.
어떤 흐름으로 한 말인지는 대강 짐작하겠습니다만 님의 구체적인 견해를 듣고 싶군요.
저의 견해요? 저는 이형구선생이 이런 논고를 발표한바 잇다고 했을뿐입니다. 이형구선생의 논고를 찾아 보면 될것을 저의 견해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