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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항일운동 발상지 제주 서귀포 한라산 법정사 戊午抗日運動 發祥地 濟州 西歸浦 漢拏山 法井寺
12월 11일 오전 11시, 존자암 주차장에서 유서 깊은 무오항일운동 발상지라는 법정사를 궁금한 가운데 찾게 되었습니다. 법정사는 존자암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서귀포쪽으로 가 는 길에 있었습니다. 배고픔은 잊은지 오래입니다. 차안에서 도로 좌우에 펼쳐진 억새 풀을 보면서 환호성을 올리며 달렸습니다.
내려서 볼 수는 없고 차 안에서 찰칵했습니다.
제주는 어디를 가나 절경입니다.
이렇게 25분쯤 달려 법정사(法井寺) 지경에 도착했습니다.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기념 안내판
이곳은 제주도지정문화재 기념물 제61-1호(지정 2003년 11월 12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미년(1919년) 3.1운동보다 1년 앞서 일어난 항일운동의 발상지입니다.
안내판과 조감도
이 건물은 관리소와 화장실
이곳을 다 보려면 시간이 문제여서 핵심인 법정사만 참배하기로 하고 법정사를 찾았습니 다. 법정사는 바로 인근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법정사 전경
한눈에 봐도 절이라기보다는 시골집 풍경이었습니다. 어디선가 목탁소리가 들려옵니다.
『법정사(法井寺)는 서귀포시 중문동 1686번지에 자리한 한국불교태고종 사찰이다. 제주 도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한라산 백록담의 하늘빛 물줄기가 영실의 숲으로 흘러 존자암을 한 바퀴 휘감아 내린 후, 법정악의 법정사에 들러 참배하고 이어 법화사의 구품연지에 와 서 연꽃을 피워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오늘날 ‘무오 법정사 항일 운동’의 근거지로 더욱 주목받고 있는 법정사는 존자암과 법화 사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사찰이다. 본래 이곳은 고려시대 거찰이었던 법화사의 산내 암 자였다. 서귀포시 하원동의 해발 760m 되는 법정악 깊은 계곡에 안겨 있는데, 예전에는 이 법정악 계곡 곳곳에 스님들이 수도 정진하던 수행굴이 다수 자리하고 있어 스님들은 계절에 따라 한라산 존자암에서 법정사, 법화사로 옮겨 다니며 수행에 매진하였다.
근대에 들어 법정사가 다시 일어서게 된 것은 1911년 9월의 일이다. 1909년 관음사를 창 건한 안봉려관(安蓬廬觀) 스님과 김석윤(金錫允) 스님이 한라산 남쪽을 대표할 사찰의 필 요성을 느끼고 주변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관음사 다음으로 일으켜 세운 사찰이다.
이 두 스님은 근대 제주불교의 기틀을 마련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한 인물들로서 제주 각 지에 수십 군데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특히 김석윤 스님은 1909년 항일의병운동의 핵심 인물로, 해방 전까지 여러 차례 투옥됨을 불사하며 항일운동을 펼친 승려이자 독립 운동 가였다.』 -전통사찰총서에서 옮김-
소박한 종각입니다.
제한쪽 양지바른 곳에 핀 제비꽃.
목탁소리 나는 곳으로... 여기가 산신각입니다.
목탁소리가 나기에 대웅전인가 했더니 산신각이네요. 안에서 노스님께서 기도를 하고 계 시기에 한 옆에서 삼배를 들리고 물러났는데 누추하기 이를데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곳 을 찾은 노보살님의 말씀에 의하면 기도 가피가 많다고 합니다.
산신각에서 대웅전으로 가는 길에 있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석상입니다.
주변 모습
법정사와 무오 항일운동
『창건 이후 법정사는 김석윤 스님의 사형인 강창규(姜昌奎) 스님의 주선으로 1914년에 경주 기림사(祇林寺) 출신의 김연일(金蓮日) 스님을 주지로 맞이하였다. 김연일 스님은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분으로 제주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항일 저항세력과 지속적인 교류 를 이어왔었다.
입도(入島) 이후에는 강창규(姜昌奎)ㆍ방동화(房東華) 스님 등과 긴밀히 교류하면서 그들 의 항일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였다. 이후 이 세 스님은 한라산 산천단에서 의형제를 맺 고 항일 투쟁을 일으켜 민족을 구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리고 1918년 여름, 법정사를 그들의 근거지로 삼고 항일거사 성취를 위한 백일기도를 시작하면서 본격적 거사 준비에 들어갔다. 그 당시 상황을 전해들은 고(故) 혜관 스님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그분들은 제주를 배의 닻가지로 보았습니다. 닻가지가 먼저 움직여야 배가 움직이듯이 제주에서 먼저 만세운동을 벌여야 우리나라가 움직인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만세운동 을 벌인 것입니다.” 김연일ㆍ강창규ㆍ방동화 스님 등이 법정사를 근거지로 하여 일으킨 ‘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은 1910년의 한일합방 이후 전국 최초이자 단일지역 최대의 항일 운동이었다. 1919년의 3·1 독립운동보다도 1년이나 앞선다.』 -전통사찰총서에서-
내려가려다가 만난 노보살님
법정사는 무오 항일운동 직후 일본경찰에 의하여 폐사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경계가 삼 엄하여 일반인들의 접근조차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 후 해방이 되었으나 폐사된 채 복원 되지 못했지만 마을사람들의 산신 기도처로 각광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십 수 년 전 이곳에 천막을 치고 산신기도를 하던 미만화보살이 기존의 법정 사 터에서 약 500m 가량 떨어진 곳에 법당과 요사를 지어 법정사(法井寺)라 명명하고 2002년 태고종 제주교구 사찰로 등록했다고 합니다.
노보살님의 말씀에 의하면 지금의 주지 고법의 스님은 연세가 92세이신데 기도가 대단하 시다고 합니다. 그 옛날 12세에 이곳에 오셨다가 그후 4.3사태를 맞으셨는데 다행히 난 을 피하여 있었기 때문에 화를 면하셨다고 합니다. 그 후 다시 오셔서 천막을 치고 산신 기도를 해오셨는데 줄곧 이 절을 지키며 기도해 오셨다고 합니다.
법당의 모습입니다.
우보처 대세지보살 본존 아미타불 좌보처 관세음보살
지장탱화
신중탱화
칠성탱화
나반존자
산신탱화
남해용왕
감로탱화
일지향을 사르는 길상님
법당 한 켠에 걸린 달력입니다.
소박하지만 유서 깊은 사찰 법정사.
현재 서귀포시에는 항일운동 발상지인 이곳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기 위해 서귀포 70경 (景) 중의 한 곳으로 지정해 놓고 성역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90노구에도 불 구하고 기도 정진 하시는 노스님의 건강을 빌며 다음 순례지 법화사(法華寺)로 향하기 위 하여 11시 42분 물러나왔습니다.
☞ 다음은 장보고가 세운 법화사 순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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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박하다못해 누추함이 느껴지는 절입니다. 하지만 그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금빛으로 물들인 사찰보다는 훨씬 보기가 좋네요. 노스님의 기도도 영험하다 하시니 내적인 모습은 튼튼하겠네요. 요즘 날씨에 제비이 피었으니 제주도 날씨가 여기와는 연히 틀리네요. 잘 보고 갑니다. _()_
아마도 미만화보살님이 산신기도하시다가 아예 머리를 깎고 법의 스님으로 거듭나신 것 같은데 고령인지라 사세장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제주도는 조선시대 때는 유생에 의해, 일제 때는 일인에 의해, 4.3사태 때는 아군에 수난을 당해 곳곳에 한 이 많이 서려 있는 듯 합니다. 제주도에 가니 딴나라에 간듯 해서 탐라국에 왔다고 했지요. 제비 만이 아닙니다. _()_
목탁소리 따라가다가 문을여는순간 어 잘못찾았구나하고 잠시 서 있으면서 무속인 집인줄 알고 경계를 하면서 머뭇거리다가 나왔답니다 나와서 노보살님 말씀을듣고 많이 송구하였답니다 스님께 죄송합니다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치 시골집 같지요 그랬습니다. _()_
어느 산골에 가정집인양 허스름했답니다~~
이 절은 크게는 아니더라도 의미있는 곳이니만큼 불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_()_
이절은 항일은동의 요람이라 각한 관심이 집중되는 곳이라 어느 정도의 불사는 이루어지리라 봅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