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이다”라는 수식어는 무척 불편한 말이다. 눈에 보이는데 그것을 환상이라고 하면 난감해진다. 실제로 존재하든 말든 극중 스토리에 빠져 즐겨도 될 법한데 꼭 현실감을 따져본다. 잡지사를 주요 모티프로 한 드라마 ‘스타일’을 보면서 내심 잡지사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엉성한 스토리 라인에 적지 않은 실소 내지는 야유를 보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심 부러웠던 것은 단 하나, 바로 그들의 공간이다. 뭐 사진가 민준(이용우)이 박기자(김혜수)의 다리를 주물러주는 장면에서도 정작 눈에 보이는 것은 푹신해 보이는 가죽 소파였단 말이다. 그래! 두 눈을 찌푸리며 그렇게 보려고 해도 절대 볼 수 없는 이른바 ‘환상적인’ 빛으로 아른아른하던 그녀의 집도 무척 탐스럽다. 둥근 테이블로 조합된 독특한 구조를 이룬 ‘스타일’ 잡지사의 사무실을 바랄 순 없어도 각각의 싱글 캐릭터가 사는 공간은 유난히 집착하게 되더라. 그 매력은 역시 개인의 내밀한 ‘방’이기 때문이다.
“일단 ‘스타일’에서 보여주는 공간 세트는 현실적인 세트가 아니죠.” ‘스타일’의 미술을 책임지는 SBS 아트텍 이용탁 무대 디자이너, 전병찬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입을 모아 강조한다. 그들은 현실보다 과장된, 그래서 캐릭터별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화려하고 감각적인 연출이 가능한 세트를 논의했다. 그들이 첫 번째 회의에서 함께 본 것은 바로 미국 드라마 ‘CSI’ 시즌 6. 잡지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세트를 만드는 데 어떻게 과학 수사대 드라마를 참고할까 싶다. 드라마를 보았다면 잡지사 사무실과 박기자의 집 등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영상 기법을 눈치 챘을 것이다. 빛이 화려하게 분사되는 영상 효과는 바로 그 드라마 영상의 프리즘 효과에서 착안된 것. ‘CSI’ 시즌 6에서처럼 다채로운 색상을 분사하는 프리즘 효과 대신 카메라 앞에 투명한 유리 막대 벽을 세우고 촬영해, 현실보다 과장되게 빛을 분사시켜 공간을 표현한 것이다.
드라마에서 세트가 아닌 로케이션을 선정하는 이유는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서다. 빛으로 환상적인 연출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현실감이 아예 없다면 공감대 형성이 어렵다. ‘스타일’ 팀은 극중 민준과 서정이 사는 집을 가변 세트로 제작한 반면, 우진(류시원)과 박기자의 집은 로케이션으로 설정했다. 기가 세고 자기 중심적인 싱글 박기자의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아트팀이 내세운 컨셉트는 ‘럭셔리 로맨틱’이다. 화이트, 페일 파스텔이 골드와 조화를 이룬 컬러 배합을 기본으로 벨벳, 새틴, 실크 등의 드레시한 패브릭, 골드 터치가 가미된 가구와 소품, 투명하고 맑은 크리스털 조명 등을 사용했다. 선정된 주택에 시공한 오스트레일리아산 적벽돌 또한 흐릿한 색감에 고전적인 느낌이 든다. 그러한 주택에 소품으로 쓰이는 작은 커피 찻잔 하나도 클래식한 디자인을 선택해 넣었다. 나선형, 솟은 이미지, 앤티크하고 고전적인 패턴 등이 박기자의 캐릭터를 대변한다. 한편 아트팀이 설정한 주조색 외에도 포인트 컬러로 선택한 레드는 드라마 곳곳에서 강하고 똑부러지는 그녀의 캐릭터를 드러낸다. ‘스타일’ 사무실, 편집장방, 침실에서 가구, 패브릭, 화병 등의 레드 아이템을 볼 수 있다.
2연필로 스케치한 듯한 목가적인 풍경, 페일 옐로, 테두리 문양이 매우 클래식한 커피잔. 빌레로이앤보흐 02-565-8866
3박기자 스타일로 아트팀과 협력해 제작한 쿠션. 침구와 같은 모티프로 제작되었다. 10만원 디자인 틴탑 02-3431-8910 www.designtintop.com
4작은 나뭇잎 모양 패브릭을 하나하나 연결해서 바느질한 쿠션 ‘이니헤르’. 7만원 디자인 틴탑 02-3431-8910 www.designtintop.com
뉴욕의 소호 로프트 같은 인상을 주는 김민준의 방. 세피아 또는 카키 등의 그레이시한 컬러를 주조색으로 하고 블루 그레이, 바이올렛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포토그래퍼로 설정된 그의 방에서 가장 특이할 만한 것은 바로 붙박이장이다. 자료들을 보관할 일이 많은 사진가의 실질적인 상황도 있지만, 무엇보다 붙박이장이 주는 시각 효과가 개성 있다. 카펫에도 이 큐브 형태가 응용되어 그레이시한 컬러 톤과 함께 통일감을 이룬다. 여기에 밝고 세련된 음악과 함께 악기, 오디오 장비를 세팅하고, 미국 유학 시절을 암시하는 개인적인 사진과 직접 촬영한 사진들을 디테일한 소품으로 설정했다. 사진가로서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은 따로 있다. 모던한 스틸, 고급스러운 가죽을 메인으로 사용했다.
- 작업실 겸 사무 공간으로 쓰는 다용도 공간이 거실 한편에 마련되어 있다.
마크로비오틱이라는 요리를 요리하는 남자, 서우진의 공간은 모던하고 미나멀한 디자인을 기본으로 세련된 남성 이미지를 부여한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가변 세트가 아닌 로케이션 세트인 서우진의 방은 반포에 있는 마리나 제페에서 공간을 연출했다. 선상에 있는 그곳에서 연출된 그의 방은 아픔을 가슴에 묻고 사는 차분하고 이지적인 그의 캐릭터를 나타내는 데 일조했다. 전체적으로 스톤 베이지, 커피 브라운, 카키, 시멘트 베이지 컬러에 블랙과 실버를 포인트로 삼았다. 화이트 바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남자의 시크한 이미지를 투영하여, 더 매력적인 공간으로 완성시켰다.
- 마리나 제페에 세팅된 서우진의 방. 마리나 제페는 파워보트를 중심으로 한 수상 레저의 집결지다. 마리나 제페, 클럽 제페, 마린 제페 세 가지로 구성, 각종 문화 행사와 콘서트, 수상 스포츠 등을 즐길 수 있다. 다른 한강변의 수상 문화 공간과 차별화되는 점은 전체적으로 비즈니스 공간으로 특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www.marinajefe.co.kr
국내 최고의 스포츠 에이전시 소속 톱 에이전트 남제일의 방. “멋진 펜트하우스, 동시에 일상을 살아가는 느낌이 나지 않는 황량함이 필요했어요.” 모노 톤으로 무게감을 주고 카펫, 벽지, 패브릭 소품에는 기하학 패턴을 사용해 상징적인 느낌을 표현했다. 더럽힌 마음을 씻어내며 스스로 위로하는 장면을 위해 거실 뒤편에 샤워 부스를 설치하고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게 설계한 레인 샤워기, 제일의 삶을 비춰주는 흑경이 놓인 거실은 특별히 고심한 부분이다. 실제 흑경은 TV라고. 또 유일하게 색감을 준 원형 가지 형태의 천장 조명은 인생의 공허함과 잃어버린 것에 대한 회한을 표현한 것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주방에서 커피를 마신 뒤, 드레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외출하는 동선을 고려해 공간 위치를 설정, 머리부터 발끝까지 변신해나가는 과정을 연출할 수 있게 했다.
recommendation 개성을 살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패브릭이죠. 무엇보다 바꾸기 쉽다는 장점이 있어요.캐릭터에 맞는 패턴과 색감 등은 가장 고심하는 부분이기도 해요. SBS 아트텍 인테리어 디자이너 김민정
- 흑경같은 TV가 설치된 거실. 거실 뒤 중앙에는 샤워 부스가 있다. 아트월 TV 미러비전 UDIF(02-3445-1110), 바르셀로나 소파 스타일K(02-543-8157), 조명 원광라이팅(02-543-8263) 드레스룸 스페이스맥스(031-719-2701)
40대의 독신남 조재희. 건축가로서 사회적으로 상당히 성공했지만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인물과 혼자만의 즐거움을 즐기는 성격을 공간에 표현하고자 했다. 손님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을 완전히 배제, 순수하게 자신의 관심사에 해당하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컨대 남자라면 한번쯤 꿈꾸는 공간인 최상의 영상 시설과 음향 기기를 갖춘 홈시어터, 그에게 맞춰진 취미 공간을 들 수 있다. “결혼한 남자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죠. 다른 가족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재희는 가족이 없고 만들 생각 또한 없기 때문에 자신의 취향대로 서재나 주방을 구성했습니다.” KBS 아트비전 박용석은 남자의 공간을 자유롭게 창조했다. 건축가의 직업적 특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목재의 질감을 최대한 살린 공간, 그곳에 혼자 즐길 수 있는 고급 1인용 소파와 건축가 본인이 디자인했을 것 같은 독특한 테이블을 제작해 배치했다.
recommendation 맞춤 테이블을 추천합니다. 현대인은 책상에서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단조로운 사각 테이블에서 벗어나 용도와 스타일에 맞게 테이블을 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KBS 아트비전 미술감독 박용석
‘더 많이’ 넣자고 해서 공수하는 데 애를 먹었단다. 문학에 원대한 포부를 가진 애자. 그녀의 방을 한 가득 메운 책. 드라마 속 화려한 인물과 달리 영화 속 애자의 방은 싱글과 가장 친한 빌라의 원룸 구조로 현실감이 배어 있는 방이다. 현실 속 공간, 과하지 않은 미술. 그것이 컨셉트였다. 김효신 미술감독도 처음엔 애자의 서울 집을 캐릭터를 부각시키면서 만들어진 느낌을 최소화시키는 것에 대해 많은 스케치를 했으나 다시 원점. 평범한 원룸에 평범한 소품으로 쌓은 책들의 속성은 작가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청소도 꾸미는 것도 게으른 그녀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장치다. “책을 인테리어 목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작업하는 데 필요한 책들을 책상 반경 안에 손만 펼치면 바로 찾을 수 있도록 배치해서 작업의 용이성을 표현했죠. 하지만 별로 부각되지 않았어요. 최종적으로 포스트잇을 붙일 수 있는 아이디어 판으로 이용, 본래 용도를 떠나 주인공이 생활하기 편한 설정입니다.”
recommendation 현실 속 실제 우리의 공간은 애자 방처럼 일이나 취미에 꼭 필요한 것 외에 편리 위주의 공간 배치가 좋습니다. 거기에 스탠드나 집게 등을 잘 이용하면 평범한 공간도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 효과를 노릴 수 있습니다. 영화미술감독 김효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