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선생 문순공 이황에 의해 설립된 역동서원과 현존 단양우씨 최초 족보 예안보
오선경이 완성한 해주오씨족도(1401년)의 오선경이 쓴 발문에 의하면 "시조 오인유 이전의 세계가 담긴 속적(屬籍)이 우현보의 집안에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 것과 해주오씨족도에 우현보의 장남 우홍수가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단양우씨는 고려 때부터 속적(족보)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우탁 집안의 족보를 필사한 조목에게 퇴계선생이 1557년에 감사의 뜻을 전한 답신 속에 족보가 있었다는 단서가 있지만, 그러나 아쉽게도 퇴계 이황의 手自譜(1570년) “禹先生世系之圖”가 있기 전까지는 단양우씨 문중 어디에도 속적(족보)이 있었다는 흔적이 없다.
퇴계 이황은 우탁의 가르침을 萬代에 전하기 위해 역동서원을 세우고 尙賢詞에 우탁 神位 奉安과 함께 奉呈할 역동선생 世系圖를 직접 쓰셨다. 우탁 집안의 족보를 필사해온 제자 조목에게 丁巳(1557)년 4월에 보낸 퇴계의 답서에 의하면 퇴계선생은 역동서원을 설립(1570년)하기 13년 전부터 우씨문중의 족보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직접 쓰셔서 상현사에 봉정한(1568년) 手自譜 “禹先生世系之圖”가 단양우씨 족보의 始原이다.
현존 예안보(1600년) 이래 우중대을 중시조로하고 우중대의 다섯 아들들을 근간으로 한 단양우씨의 족보의 뼈대를 만드신 분이 退溪先生이다. 모든 문중의 족보는 그 문중에 속한 사람들이 최초 편찬하였지만, 단양우씨 족보만 유일하게 타성씨인 퇴계선생이 족보의 근간을 만드셨고, 그의 제자들의 조언과 자료제공 및 판각수와 판각재 등의 지원으로 간행하였다.
퇴계 이황 사망(1570년)이후 30년이 지난, 1600년에 간행한 예안보는 단양우씨가 주도하여 편찬하지 못하고 퇴계선생 사후에 퇴계선생문집 발간사업을 마치면서 역동서원에 봉안중에 임진왜란시 유실된 퇴계선생의 수자보 “禹先生世系之圖”를 복원하여 퇴계선생의 도(道)를 계승하여 역동서원에 봉안하기위해 퇴계선생의 제자인 타 성씨들인 조목과 영춘현감 금응훈, 도산서원 산장 김기 등의 조언과 자료지원 및 각수와 판각재 지원 등의 도움을 받아 편찬하였으므로 예안보에 등재된 659명중 우탁의 존비속 167명 등 192명은 퇴계의 "우선생세계지도"와 같으며, 여자와 묘의 위치등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예안보에 등재된 단양우씨 조상들을 살펴보면, 우탁의 후손들은 退溪의 易東先生 手自譜에 올라있는 167명에서 단 1명도 추가되지 않고 오히려 1명이 누락되어 166명이며, 192명보다 늘어난 467명(72.4%)은 모두 우천석 후손이다.
예안보에 등재된 단양우씨 조상들을 살펴보면, 우탁의 후손들은 退溪의 易東先生 手自譜에 올라있는 167명에서 단 1명도 추가되지 않고 오히려 1명이 누락되어 166명이며, 192명보다 늘어난 467명(72.4%)은 모두 우천석 후손이다.
예안보에 등재된 조상 : 天錫 후손 489명(74.2%) ☞ 偁 후손 209(42.7%), 伻 후손 280(57.3%).
우탁 후손 166명(25.25%).
상계 조상 4명(0.6%)
족보등재 인원 | 上系 | 우탁계 | 우칭계 | 우팽계 |
659(명), 100% | 4(0.6%) | 166(25.2%) | 209(42.7%) | 280(57.3%) |
489(74.2%) |
타 성씨의 주관으로 단양우씨 최초의 족보가 간행되어 자존심이 상하지만,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훌륭한 분들이 단양우씨 족보 간행에 참여하여, 퇴계선생의 수제자 조목이 편찬과정을 감독하고 판각이 완료된후 "조목의 지원으로 도선서원에서 편찬하여 역동서원에 봉안한다"는 묵서와 「東皐/동고」낙관을 예안보 여러 곳에 찍어 신뢰성을 보증한, 타 성씨의 족보처럼 조상을 미화한 흔적이 전혀 없는 대한민국의 어느 성씨들의 족보보다 진실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객관적으로 편찬된 예안보(1600년)는 단양우씨의 자랑스런 족보다.
이후, 단양우씨들에 의해 간행된 최초 족보는 우천석-우칭-우길생으로 이어지는 자손의 우상중이 편찬한 고부보(1642년)다, 그런데 예안보 이후의 족보를 편찬하기 위해 장기간에 걸처 자료를 수집하여 깊게 연구한 사람은 우상중의 8촌동생 우정(호 갈계, 중경)이였지만, 우정은 1636년 3월(음력)에 개성에 있는 우현보의 묘에 「공휘현보 자원공 호양호당 우호독락당 단양인 고조 휘중대 문하시중생시중휘천석 시중생좌대언휘칭 대언생적성군휘길생....」라고 시작하는 묘표음기를 쓴 그해 12월에 발생한 병자호란 이듬해 1월에 청나라군에 의한 병란으로 사망하였다.
그 후 우상중이 고부군수 재직중에 우정이 쓴 족보 자료를 기초로 1642년에 고부보를 발간하면서, 시조 등 상계 조상들의 근거를 밝히지 않았으며, 시조의 명휘 우현부의 "부"자를 빠뜨렸다. 만약 우정이 사망하지 않고 고부보를 만들었다면, 단양우씨의 시조를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근거하여 우현부라고 밝히고, 우현부 이하 우중대 이전의 상계 조상들의 근거도 모두 밝혀 족보에 기재하였을 것이다. 단양우씨 족보사에서 갈계공 우정의 사망은 참 아쉬움이 많은 대목이다.
백천보(1866년) 간행시 단양우씨의 극히 일부 종인들에 의해 우현보의 3남인 안정공 우홍강의 날조된 호적(안정공장적)을 근거로 우칭의 두 아들중 장남인 길생을 우탁의 양자 및 친자라고 조상바꿔치기(환부역조)한 패륜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忠義大節의 문신이자 대 유학자인 문희공 우탁과 우탁의 4촌 동생이며 우현보의 조부인 좌대언 우칭 및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론 보다 먼저 고려말에 군사력을 키우고 훈련시키며, 군량미를 비축하고 장수를 양성하기 위해 사관학교를 설립해야한다고 주장한 위대한 선각자인 독락당 양호당 우현보를 능멸하는 행위다. 백천보 간행시의 조상바꿔치기는, 모든 자료가 공개되어 천하에 못된 패륜행위였음이 증명되었음에도, 양호당 우현보의 자손 중에 이를 바로 잡는 용기있는 자손이 없다는 현실은, 위대한 선각자이자 유학자이며 정치가인 문신 양호당 독락당 우현보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부끄럽기 그지 없다.
단양우씨 대종회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은 우길생을 우탁의 양자로 했다 친자로 했다. 하며 장난치고 있는 백천보(1866년)간행시 조상을 바꿔치기하여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환부역조 문제를 해결하고 대전보(1966년) 이후의 "세계(世系)가 올바른 단양우씨 대동보"를 편찬하여 후손들에게 남겨주는 것이다.
백천보(1866년)와 그 이후 간행된 한성보(1893년), 회인보(1917년), 대전보(1966년)와 안정공파보의 상계조상세계(世系)는 양호당 자손의 극히 일부에 의해 조상을 바꿔치기하여 간행한 패륜과 패악의 극치다. 이를 바로 잡아 올바른 족보를 간행할 때까지 단양우씨는 또라이 문중이라는 말을 피해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