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을 하다보면 - 남난희 著 '낮은 산이 낫다.'
인왕산 치마바위는 1980년대 클라이머의 요람.
록파티 산악회., 창립회원., 여성산악인 남난희.
그 산악회에서 발행한 옛 회보 이름이., 치마바위.
'지금도 그대로인지는 모르지만.,'
사직공원 지나 5분쯤 걸으면 보이는 황학정.
지금도 활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황학정 지나 청와대와 경복궁 지키는 호랑이 상.
오른편으로 걸으면 만수천 약수터
이곳에서 치마바위까지는 오르막길.
이 길로 가면.,한양 성벽과도 만난다.
......치마바위 전설........
중종 원비 단경왕후 신씨는
남편 중종과 사이가 좋았지만
중종을 왕위에 앉힌 반정공신들은
자신들이 살해한 신수근의 딸 단경왕후.
보복이 두려워 단경왕후를 강제 폐위.
왕후는 인왕산 아래 옛 거처로 쫓겨났다.
신씨가 입궐한 후, 7일이 되었던 날이었다.
진성대군의 조강지처였던 신씨는
중종반정으로 남편이 보위에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왕비가 되지만 동시에 벌어진
가문의 몰락으로 쫓겨난 비운의 여인이었다.
단경왕후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인왕산 바위에 붉은 치마를 걸어두겠다는
약속을 남편게 남겼고, 죽을 때까지 지켰다.
아침이면 인왕산 바위에 치마를 널어놓고
저녁이면 걷는 일을 51년 동안 계속하였다.
중종 또한 부인을 잊지 못해 경회루에 올라
부인이 있는 인왕산을 바라 보았다고 전한다.
..........................................................
중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인종은
승정원에 명하여 폐비 신씨의 거처를
폐비궁으로 부르고 모든 일을 후궁 거처인
자수궁의 예(例)와 같이 행(行)하라 전교(傳敎).
수성동계곡
자수궁.
자수궁터.
.........자수궁(慈壽宮)..........
한성부 북부 순화방에 있던 궁
태조와 계비 신덕왕후 사이 아들
무안대군 방번이 살던 곳이 자수궁.
그후 세종의 후궁들이 모여 살며
전왕 사후 후궁들을 거처가 되었다.
후궁들이 비구니가 되어
한때 여승방이 되기도 했고
명나라 여인 굴씨부인의 거처.
.......................................
인종은 8개월 재위
그가 왕비 중에 7일이라는
가장 짧은 기록을 가진 폐비
신씨를 살뜰하게 배려했던 것.
그후 사가에서 홀로 살던 신씨.
1557년(명종 12) 12. 7(향년 71세)
부음을 들은 명종은 신료들에게 명하여
왕후의 예로 장사지냈고 자식 없는 그녀의
사정을 고려하여 친정조카인 신사원에게
상주(喪主)가 되어 제사를 받들게 했다.
그처럼 인종과 명종은
신씨가 중종의 원비로서
나름대로의 예를 다했다.
1739년(영조 15년)에 이르러서야
신씨의 복위는 비로소 이루어졌다.
그녀의 신주를 대궐 안에 옮겨 모셨다.
이어서 대신들과 논의 끝에
시호를 단경(端敬)으로 하고
능호를 온릉(溫陵)으로 올렸다.
그렇게 해서 폐비 신씨는
궁궐에서 쫓겨난지 232년 만에
단경왕후(端敬王后) 칭호를 얻었다.
온릉 단경왕후 제향
...................단경왕후...................
조선의 왕비는 외면적으로는 국모로서
왕과 동등한 대접을 받았지만 내면적으로는
양반가 처럼 남편에게 순종과 존경을 강요당했다.
아울러 왕자를 생산하고 양육,
사직을 보전해야 할 책무와 함께
친정 가문의 번영이라는 무거운 짐.
그러므로 그 지위를 함부로
버리거나 빼앗길 수 없는 처지.
건국 초기 태종의 정비 원경왕후 민씨나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 심씨는 태종의 외척
경계심 때문에 멸문지화를 당하면서도
중전의 자리를 굳세게 지켜냈다.
그러나 성종의 정비 윤씨는 투기를 빌미로 폐출
연산군 대의 비극을 낳았고, 숙종의 정비 인현왕후
민씨는 남편의 변덕 때문에 폐위와 복위를 넘나들었다.
단경왕후 신씨는 왕비 노릇도 못해본 채
7일 만에 폐비 신세가 된 특이한 경우였다.
진성대군의 조강지처였던 신씨는
중종반정으로 남편이 보위에 오르면서
왕비가 되었지만 동시에 가문의 몰락으로
입궐한 지 이레(7일) 만에 쫓겨난 비운의 여인.
훗날 중종 계비 장경왕후가
원자를 출산하고 숨진 뒤에야
신씨의 복위 문제가 제기되지만
장차 국본의 지위가 흔들릴 가능성과
사림에 대한 견제 등 다양한 문제가 제기
억울하게 빼앗긴 자신의 자리를 되찾지 못했다.
단경왕후 신씨는 생전에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지는 않았지만 당대에도
중종의 정비로 인식되었고, 야사에 치마바위
전설까지 더해지면서 비련의 주인공으로 굳어졌다.
....................................................................
서촌, 수성동계곡
특히, '옥류동천' 길은
옛 서울 ‘시간의 한 단면’.
옥류동천은 수성동계곡에서 내려와
조선시대 인공 개천이었던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던 청계천 원류 자연 하천이었다.
,
북악산 백운동천,
사직동천과 더불어
청계천으로 흘러가는
중요한 지류 중 하나였다.
수성동계곡 위로 계속 올라가면
인왕산 치마바위로 가는., 지름길.
요즘, 치마바위는 인왕산악회 암장.
인왕산악회는 1962년 인왕산을
모산으로 결성한 순수 산악 CLUB
2018년 현재 55주년 역사를 품고있다.
1983년 치마바위에 록파티 A코스 B코스 개척.
1989년부터 5년 동안 울산바위 리지 코스 개척.
1993년, 94년 설악산 만물상 칠형제봉 코스 개척.
록파티 산악회는 대한산악연맹
서울시연맹에 가입되어 있으며
1982년 5월 23일 북한산 상장봉에서
12명 창립회원으로 출발한 명문산악회.
록파티산악회
남난희 회원은
암벽등반 500회
구곡폭 빙벽 200회
84년 남난희 회원이 태백산맥 단독 종주등반
<하얀 능선에 서면> 수문출판사 출간 책으로
펴내 많은 산악인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으며
89년 강가푸르나봉을 여성 세계 최초로 등정했다.
강가푸르나는 1965년 5월 6일
독일산악회 권터 하슬러 대장이
이끈 원정대의 대원과 셰르파 전원이
두 차례에 걸쳐 남면에서 동릉을 거치는
루트로 초등과 재등한 강가푸르나는 이후
1971년 일본대가 서릉을 거쳐 3등을 했으며
남벽은 1981년 봄 캐나다 존 라슐란과
제임스 블렌츠가 초등했다.
한국은 1984년 겨울 이석우(한국산악회)씨
단독 북벽 시도후 1986년 김기철 대장이 이끈
원정대가 초등루트인 동릉을 통해 엄개성, 정영희,
남난희, 석채언 대원이 2차례 한국 최초로 등정 성공.
.
2016.10.24 강가푸르나
8,000m급 13좌 무산소 등반에 빛나는,
김창호 산악인 ‘황금피켈상 아시아’ 수상.
.
네팔 강가푸르나(7455m) 남벽에 코리안 신루트 탄생.
김창호 대장과 최석문 박정용 대원 3인조 고도차 2900m
남벽을 6박7일간 알파인스타일로 등반 후, 3일동안 하산.
지난 9월 12일 출국했으며
22일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
..............강가푸르나.................
'히말라야 중부 '안나푸르나'의 연봉.
안나푸르나는 길이가 55km에 달하고,
최고봉 안나푸르나 제1봉은 높이 8,091m
8,000m이상 고봉을 의미하는 14좌의 하나.
서쪽에서부터 최고봉 안나푸르나 제1봉,
제3봉(7,555 m), 제4봉(7,525 m), 제2봉(7,937 m),
강가푸르나(7,455 m)가 있고, 안나푸르나 제3봉의
남쪽에서 갈라져 나온 끝에 '마차푸차레'봉이 있다.
안나푸르나는
산스크리트어로
'수확의 여신' 뜻.
강가푸르나는 1965년 독일원정대 초등
2016년까지 24팀이 시도, 8팀 만 성공한
히말라야에서도 난이도 높은 험준한 고봉.
........................................................
여성 산악인 남난희(1957년생)은
허영호 산악인(1954년생)보다 후배.
엄홍길과 지현옥보다는 선배 산악인.
1957년 경상북도 울진에서 태어난
우리나라 제1세대 대표 여성 산악인.
1981년 한국등산학교를 수료
1984년 1월 1일부터 76일 동안
백두대간 단독종주에 성공하였다.
1986년에는 여성으로서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7455m)봉에 등정.
1989년에는 남자도 어렵다는 설악산 토왕성
빙벽 폭포를 두 차례나 등반하는 등 왕성한 활동.
.
토왕빙폭
설악산.,토왕빙폭
2008년 남난희 여성산악인.
1980년대 남난희
그녀는 여성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이나
등반활동을 펼쳐나갔다.
1980년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성산악인들 중에서도.,유망주.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훈련대장.
1991년 청맥산악회 이현옥 씨와 함께
'금남의 벽' 설악산 토왕폭 빙벽을 등반.
여성들로 만 이뤄진 팀으로는.,국내 최초.
우리나라 여성산악인 1호.,남난희.
국내 여성산악인 1세대.,선두주자.
1991년 도시 생활을 접은 후
지리산 청학동으로 삶터 이전.
3년후 강원도 정선에서
일반인을 위한 자연생태학습장
'정선자연학교'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2018년 현재 지리산 화개골에서 살며
자연을 담은 차와 발효 식품을 만들며
소박하게 사는.,촌부 남난희(1957년생).
1980년대 ‘죽음과의 도박’을 즐기듯
치열하게 산을 오르던 여자가 불현듯
등반을 멈추고 지리산 청학동에 처음
둥지튼 시기는 나이 30대 중반 쯤이다.
그당시 뱃속에 품고 왔던 생명은
2009년 15살 사춘기 소년으로 성장,
누구보다 등산화가 잘 어울렸던 여자는
고무신을 신은.,용강마을 50대 촌부(村婦).
“산 정상이 아닌 산 아래에서
비로소 산을 알고 행복을 찾았다”
한때 세상의 높은 산을 죄다 오르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여성 산악인
그녀가 이곳에서 찾은 행복은 과연 뭘까?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 앞 용강마을.
.
그녀 집은 백두대간 끝자락 영신봉과
형제봉을 이어 뻗어내린 황장산 배경으로
앞으로는 쌍계사를 품고 있는 6개의 능선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호젓한 곳에 자리 잡았다.
짧은 커트 머리에 천연염색한 옷차림.
뜰에 가지런히 정렬한 20여 개의 장독.
2004년 그녀가 펴낸 .,<낮은 산이 낫다>
.
...............낮은 산이 낫다..........................
책 소개 - 낮아서 높아지는 삶, 가진 것 없어도
풍요로워지는 삶에 관한 '행복한 역설'의 이야기.
한 때 독보적인 산악인이었던 중년여성이 시골 삶의
텃밭에서 일군 다정한 이야기를 담은 '산문집' 책이다.
자연과 이웃, 아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살가운 일상의 모습을 통해, 더 가지려는
욕망때문에 놓쳐온 삶의 의미를 일깨워 준다.
몸을 낮게 하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에 관한 소박한 이야기가
고요한 울림을., 던져주고 있다.
목차 - - 입산(入山)
1. 소박한 삶의 아름다움
따고 덖고 비비고 말리고
고무신으로 길어 올린 추억
지붕에 올라간 호랑이 한 마리
시흥 아줌마 김순덕
아이들은 믿는 만큼 해낸다
한증막 혹은 빨래 건조실
물고기도 강물을 뜨는구나
숙이 웃을 소리
2. 세 남자 이야기
이제 준비가 되었다
남편이란 이름으로 잠시 머문 인연
산을 돌아서 내게로 온 생명
자연이 공짜로 키워 준 아이
애인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인
일주일간 함께 지낼 남자
3. 자연에서 깨우친 인생
아이고 선생님! 모두가 선생님!
머리카락마저 벗어 버리고
너무 많이 받고 살았다
거부하기 힘든 침묵의 유혹
세상의 시계가 사라보다 많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나무처럼 늙고 싶다
무덤 주인이 부러운 이유
4. 허술해서 식구가 많은 우리집
허술해서 식구가 많은 우리집
다음 생에는 좋은 몸 받아라
열 남자 안 부러운 수탉 새벽이
어찌 총 든 사람 편을 들까
노란 꽃 타고 느리게 오는 봄
생명을 살리는 땅 힘의 놀라움
세상에, 지붕이 날아가다니
그 많은 물은 다 어디서 왔을까
미물도 제 갈 길을 재촉하는데
- 하산(下山)
...................
1981년 한국등산학교 수료,
1984.1. 1~ 76일 백두대간 종주.
단독 종주기록.,하얀 능선에 서면'
이 책은 산악도서로는 드물게
3만권 이상이 팔린.,베스트 셀러.
요즘 산을 다닌다 하는 사람 누구나
한 번쯤 도전을 꿈꾸는 백두대간 종주.
'백두대간' 최초 종주자는.,여성 산악인.
...........백두대간(白頭大幹).............
'백두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에서 가장 크고 긴 산줄기 옛 이름.
2005.1. 1시행되고 2009년 3월 5일자로 개정된
「백두대간 보호에 관한 법률」에서 “백두대간"은
"백두~금강~·설악~ 태백산~소백산~지리산' 산줄기.
백두산부터 원산, 함경도 단천의 황토령,
함흥 황초령, 설한령, 평안도 연원 낭림산,
함경도 안변 분수령, 강원도 회양 '철령 금강산,
강릉 오대산, 삼척 태백산, 충청도 보은 속리산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산경표는 설명한다.
......................................................................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신경준이 쓴 산경표(山經表)
한반도 산줄기 대간과 정간, 정맥으로 나타낸 체계.
산경표는 1913년 활자로 인쇄된 책자가 많이 남아 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인식하던 나라 땅의 산줄기
산경(山經)은 하나의 대간(大幹), 하나의 정간(正幹),
그리고 13개의 정맥(正脈)으로 이루어졌다.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여러 갈래 갈라진 산줄기는
모든 강의 유역을 경계지었다.
크게 나누어 동·서 해안으로 흘러드는
강을 양분하는 큰 산줄기를., 대간·정간
그로부터 다시 갈라져 하나하나의 강을
경계 짓는 분수산맥(分水山脈)을., 정맥.
'그녀가 76일동안 걸었던
백두대간 코스는 어디일까?'
...........남난희 백두대간............
금정산 고당봉 출발 ~ 진부령 마감.
도상거리 590㎞, 실제 거리 약 800㎞,
1000m 넘는 봉이 50개, 가없는 고개, 령,
봉, 재, 5만도폭 지형도 27개나 되는 대장정.
낙동정맥을 타고 오르다
태백산~백두대간과 합류
진부령까지 걸었던 셈이다.
'백두대간'을 몰랐던 당시로선
이 코스가 '국토의 등뼈'.,태백산맥.
요즘 백두대간 개념으로 인식되었던 것.
.........................................................
"배낭이 너무 무거워 1g이라도 줄이려고
칫솔을 반 토막냈고, 길잃고 잡목에 갇히고,
가슴까지 쌓인 눈속에 파묻혀 걸으며 울었어요.
그러면서 차츰 출발 전 자신감은 모두 사라졌어요.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어요."
"그 정도로 힘들었으면 약간 망설였을텐데
그땐 동계 종주가 얼마나 무모한지 몰랐어요"
그후 6년 뒤 1990년 출간한 '하얀 능선에 서면'
2004년 그녀는 산을 내려온 산악인
'낮은 산이 낫다'(학고재)를 출간했다.
............
............
백두대간 2천리 산길을
단독으로 개척했던.,철녀.
『하얀 능선에 서면』은
백두대간 최초 단독종주 기록.
남난희 여성 산악인의 종주 등반기.
.
책의 말미에는 등반 보고서의 형태로
식량, 운행, 대원 등에 대한 기록들이
남겨져 있으며, 본문의 내용은 76일 간
단독 종주를 이어가던 저자의 일기 형태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1984년.
처녀 혼자 단독으로 동계 종주를
이어가던 그녀가 산에서 홀로 느끼는
감정 기복은 책을 통해 그대로 전해진다.
등산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안전.
목숨을 걸고 해야 할만큼 위험하다면
그것을 하는 사람들은 산악인이 아니고
불을 향해 날아가는 불나방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등산은
최소한도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자연을 즐기는 것.
그러한 도전정신 속에서
즐거움 행복 자유를 느끼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는 것.
또한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한다는 것은
분명, 혼자 다니기 보다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의 등반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훌륭한 산악인이 되기 위해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여러 가지 경험을 쌓아나가기 위해서는 체계 있고
역량 있는 단체에서 뛰어난 선배들과 같이 활동하는
것이 더 안전하고 바람직한 등산 활동이라고 하겠다.
그녀는 록파티 산악회 창립멤버.
록파티 산악회의 지원 및 후원 아래
자의반 타의반 최초로 백두대간에 도전.
그 누구도 시도해 본 적이 없는
백두대간 최초 종주 개척 산행을
남성이 아닌, 27살 처녀가 단독 도전.
치솔도 반토막 내 쓸 만큼이나
30kg 전후 배낭 무계와의.,사투.
혹한기 굶주린 멧돼지 떼가
식량 냄새를 맡고 텐트를 포위.
밤새도록 울며 코펠을 뚜드려 방어.
그날 밤이 그녀에게는
얼마나 긴 밤이었을까?
야생동물을 포획하기 위한 밀렵꾼의
덫에 걸려 나무에 꺼꾸로 매달린 채로 사투.
그 덫이 발목이 아닌 등산화에 걸려 무사 탈출.
허리, 목까지 빠지고
끝이 없는 2천리 눈길.
중도에 하산하고 싶은 마음 억누르며 '자신과의 싸움'.
인간 인내심의 한계점에서 엄습해 온 졸음과의 사투,
중도에 하산하고 싶은 마음 억누르며 '자신과의 싸움'.
식수조차 귀한 산속에서
세수할 물이 있을리 만무.
생리기에 쉴곳 없는 산속.
혹한기 산중 생리통 몸살 감기에도
버너 연료를 아끼려고.,추위와 사투.
생리 중일때 샤워조차 할 수 없는 산속.
목욕하고 싶어
찾아간 외딴 화전민가.
"총각은 군대 갔다 왔는가?"
그렇게 목욕 후,
인간 세상이 아닌
태백산맥 산속으로
발길 돌려야 하는 심정.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울면서 산속으로 올라가야 했다.
오지마을의 화전민에게
오해받을 만큼 장정 체격.
큰 배낭을 짊어졌기 때문에
누구도 그를 여자로 볼리 만무.
유사 이래로 눈이 많이온 그해 겨울.
진로를 가로막는 전인미답 잡목숲 속.
혼자서 76일 동안을 먹고 자고 걸었다.
산속에서 외로움을 이기려고
텐트에서 나와 눈사람을 만들어
곁에 두려했지만 뭉쳐지지 않는 눈.
발끝에서 머리카락 끝까지.,외로움.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우는 것뿐.
하얀능선에 서면
............9~10 페이지..............
6년 지난 지금, 나의 심정은 다시는
그 같은 등반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단지 태백산맥 나머지 구간을 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제외된다.
그때는 이번 산행을 경험했으니까
좀더 여유있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좀더 유연하게, 어쩌면 즐기는 산행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장기 종주등반을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을
직접 체험으로 겪었으니까......
마음의 여유만 잃지 않는다면,
즐거움도 없지 않으리라.
만약 그때도
단독 등반을
해야 된다면
철저히 혼자
이고자 한다.
지원대는 내게
모든 희망이기도
했지만 부담이기도 했다.
직접하는 행위와
서포트하는 행위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리고
지원대는 아무 보상없이
계속 베풀어야만 하니까
그것도 많은 부담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다시는 혼자
길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 한다.
서로 미워하고
증오까지 하더라도
혼자보다는 둘이 낫다.
.......113~114페이지......
산짐승 소리 하나 없는 밤은
너무나 고요해서 오히려 불안했다.
혼자라는 것이
때로는 좋기도 했지만
별로 좋지 않기도 했다.
항상 긴장해야만 하고,
그 대상이 무엇이든 항상 불안하고,
무엇이든 혼자 결정해야만 하고, 혼자 걷고,
혼자 생활하고, 나름대로 익숙해지는 일도 있고,
나름대로 잊혀져가는 일도 있었다.
편한 대로 간단히 해결하는
자질구레한 일도 있었고, 세수나
양치질 같은 것은 생략해도 탓할 사람없는
산생활은 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 혼자의 담은 높아만 갔다.
나름대로 꼭 해야 할 일, 지켜야 될
것들은 철저히 지키고자 했다.
혼자의 담은
세상의 어떤 남보다
더 견고할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견고한 담,
그 담이 무너지지 않게 난 또
아집을 부릴 수밖에 없다.
나는 내 자신에게 너무 인색했다.
자신에게 항상 긴장해 있을 것을 요구하며
완벽하고자 하며 남에게 뒤지기 싫어하며
무엇보다도 자신을 너무 학대하는 버릇이 있다.
산행도 은밀히 따지고 보면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다.
어쩌다가 즐기는 산이 아닌,
이미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따르자면 무리가 있기 마련인데
그 무리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산을 다닐 것인가?
어쩌면 나의 이번 등반이 끝나면
산을 그만 다니게 될지도 모르겠다.
............200 페이지
누구에게라도 시비를 걸고 싶어졌다.
누구라도 좋았다. 싸우고 싶었다. 흠씬
두들겨 맞았으면 차라리 좋겠다.
무엇이라도 원망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 시작한 일이니
누구를 두고 원망한단 말인가? 다시는 이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겠다며 다시 일어 섰다.
하루 종일 눈에서 허우적대기만 했더니
지친 것은 고사하고 까진 발이 몹시 쓰려왔다.
눈은 많이도 오지 않았고 사각사각 내 옷깃만
스칠 뿐이었다. 경쾌한 리듬이었다.
눈이 무슨 얘긴가를 열심히 하는 듯했다.
이런 날은 따뜻한 아랫목에서 낮잠을 자면
얼마나 달콤할까? 온 산에 핀 설화가 아름답게
보이는 여유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감탄사를 모르는 사람처럼,
감격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모든 감정은 얼어붙고 메말라가고,
영혼이 달아난 사람처럼 무감각
상태인 자신이 불쌍했다.
오직 걷는 노예가 되어, 짐의 노예가 되어,
산의 노예가 되어 걷기만 할 뿐이었다. 전에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했는지
까마득했고 그 흔한 유행가 한 구절
못 주절대며 오늘도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237 페이지.
바람이 불었다. 첩첩산중에서 혼자 기진한 채
배낭도 내리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산은 무엇인가? 산은 내게 무엇인가?
등산이 건강에 좋다고 했는가.
마음이 넓어진다고, 순수한 스포츠라고,
누가 그렇게 호화로운 수식어를 썼는가?
정신, 육체, 고통, 비교? 어림없는 소리,
너무 편해서 하는 소리, 이것은 그 자체가
고통이다. 고문이다. 지옥이다. 죽음이다.
나는 차라리 전쟁터에 나가겠다. 지옥에 가겠다.
"아아, 하느님, 부처님, 산신령님, 나 좀 도와주십시오.
내게 힘을...... 차라리 울 수 잇는 용기를 주십시오."
나는 왜 헤어나지 못하는가?
왜 이런 고통을 혼자서 고스란히
감당해야만 하는가? 난 힘이 없다.
꼼짝할 수 없었다.
산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꼼짝없이 산의 노예가 되었다.
내 의지대로는 한 발걸음도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나를 용서해 주세요.
겸손할께요.'
날이 저물었다. 또 집을 지었다.
나는 쓰러지듯이 텐트 안으로 넘어졌다.
비로소 운다. 뜨겁게 뜨겁게 ---또 눈이 온다.
걱정할 기력도 없다.
.............. 242 페이지.....................
점봉산에서 바라본 설악은 정말 좋았다.
생각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산, 설악은
많은 것을 안고 있다. 공룡능선을, 가야동계곡을,
용아장성을, 옥녀봉을, 천화대를, 범봉을,
잦은바윗골을, 칠형제능선을, 석주길을,
설악골을, 울산암을, 나한봉을, 12선녀탕을,
귀때기청봉을, 에델바이스를, 오세암 전설을,
백담사를, 백운동계곡을, 선녀봉을, 화채릉을,
대청봉을, 토왕폭을, 눈을, 바람을, 구름을, 아아,
젊은 산쟁이의 한을...... 눈을 감으면
손에 잡힐 듯한 설악의 모든 것이다.
<하얀능선에 서면>
출판 : 수문출판사
- 2001.01.05 -
2015.02.22
그녀는 여자이면서도
여자 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던 사실이 늘 서러웠다.
그러한 그녀의 마음을
첫만남에서 사로잡은 남자.
지리산에서 상경한 청학동 총각.
첫만남에서 밤새도록 술한잔.
새벽녁에 연약한 여자를 홀로
보낼 수 없다며 바래다 준 총각.
그녀는 밤새도록 함께 술을 마셔도
대작할 남자가 한번도 없었던 철녀.
그녀를 난생처음 연약한 여자로 여긴
청학동 총각의 청혼에 결혼을 결심했다.
그녀를 여자로 대한 남자는 그가 처음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청학동에
둥지를 튼 운명적인 인연.
.
30대 후반, 사진찍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 후, 아들 기범을 낳았다.
.
도시를 견디지 못하는 그를 따라
시골로 내려왔지만, 남자는 결국
스님이 되고 가족은 둘로 줄었다.
아이가 세 살때 남편이 집을 떠났고
그녀는 청학동에서 백두대간 찻집 운영.
강원도 정선으로 옮겼다가 2002년 태풍 루사.
정선 삶터가 폐허가 되자, 다시 화개로 들어왔다.
사실 그녀가 혼자 몸으로
아들을 키우며 먹고 살 수
있었던 건, 화개 땅과 바람 덕.
몇 봉지 되지 않는 야생녹차와
집 뒤편 40~50평 야산에서 수확한 차,
야생녹차 찾는 이가 많지만 더는 안 한다.
하동문화인들이 만든 '지리산학교'에서
숲길 걷기 강사료가 한 달에 15만원 정도.
주소득원은 콩 10가마 분량 된장 판매 수입.
그녀는 생활에 꼭 필요한
만큼 만 돈을 벌어서 쓴다.
.
2008.01.16
중3 아들 기범이와 둘이
57일간 백두대간 종주 후.,
<사랑해서 함께 한.,백두대간>
"이렇게 뚜벅뚜벅 걸으니
네가 목표한 곳에 다다르게 되지 않니.
힘들면 조금 쉬었다가 가더라도 결코 포기하지는 말자.
아들아 너는 앞으로 세상의 무슨 일이든 자신을 갖고 도전할 수 있겠지."
.
"엄마가 왜 산을 타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그리고 앞으로 정말 두려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엄마가 정말로 자랑스럽고, 고맙고…."
사춘기 아들과
갱년기 엄마의
좌충우돌 산행기.
어느새 아들은 키가 180㎝ 훌쩍 넘을
정도로 커버렸지만 마음은 아직 애다.
1인당 25㎏ 짐을 짊어지고 이어가는 산행.
물 2ℓ로 둘이 하루를 지내는 경우도 많았다.
처음에는 엄마가 모든 것을 이끌어갔다.
하지만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면서
아들의 모습이 점차 바뀌어갔다.
"엄마 힘들지요.
엄마는 천천히 저녁준비 해요.
텐트는 내가 칠테니까…."
사실 1986년 여성으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봉(7455m)을
오른 엄마로서는 크게
어려운 산행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들의 눈에는
쉰 넘은 엄마가 걱정
된다는 눈치였다.
출발때 입이 부어오른 표정은
어느새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아들은 어느 순간부터 산행을 주도.
지리산 자락의 자연을 무대로 마음껏
뛰놀며 자라난 환경이 힘의 근원인 것.
"52일간 참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아들을 키우면서 이렇게 진솔하게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요.
아들이 옛날 초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겪었던 시시콜콜한 얘기부터,
앞으로 먹고사는 이야기까지 모자 간에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얘기를 나눴으니까요."
.
청학동 '백두대간 찻집' 간판을
화개골 집안에 걸어놓은., 그 녀.
20여년 전 산에 미친 한 처자가 있었다.
경북 울진이 고향인 처자는 고교 졸업 후
상경, 직장을 다니다 '필'이 산에 꽂혔다.
외로움에 지친 그녀에게
산이 종교처럼 다가온 것.
산을 향한 짝사랑이 넘치면서
난생 처음 산악회에 들어갔고
1981년 25세 한국등산학교 입학,
산악인으로서의 기초를 다졌다.
2년뒤 금정산~진부령
'태백산맥 단독 종주등반'.
그것도 처자가, 겨울에, 홀로.
유난히 폭설이 잦았던 1984년
1월 1일부터 76일간의 혹한기
천신만고 끝에 종주등반을 성공하자
국내 산악계는 '산악인' 칭호를 부여.
2년뒤 처자는 히말라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7455m) 등정.
산에 대한 열정은 빙벽으로 이어졌다.
1989년 겨울 '금녀의 벽'으로 불리우던
설악산 토왕성 폭포 빙벽마저 올라갔고
그 이듬해 또 다시 백두대간 종주도 해냈다.
'산악인의 꿈' 에베레스트도 넘봤다.
고 지현옥과 곽명옥 등 당대의 최고
여성 산악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대장을
맡은 그녀는 1991년 현지 적응훈련 및 정찰
겸해 히말라야로 날아가 임자체(6189m)에 올랐다.
하지만 정작 1993년 에베레스트
여성원정대가 꾸려질 땐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 탓에 해외 원정대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물러났다.
1993년 에베레스트에 도전하려고
팀을 꾸려 후배들을 훈련 시켰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
여성산악인은 지현옥으로 올라 있다.
'그당시 어떤 일이 있었던걸까?'
당시 전국 여성산악인 50여명 중
14인을 선발해 4개월간 합숙훈련.
14명 중에는 대산련 곽명옥 전 이사
오은선 여성산악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자들끼리 무엇을
하겠느냐?"
원정대장은 남자가
맡아야 한다"는 등
온갖 우려와 요구가
줄기차게 이어졌기에
애를 많이 먹기도 했다.
결국, 원정대장을 맡은
지현옥은 199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산악인.
지현옥 최오순 김순주
3인이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에 성공해 목표 달성.
지현옥 여성산악인
.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는 1999년 4월 29일
여성 산악인 지현옥(1961년생)이 숨진., 곳,
엄홍길(1960년 생)의 뒤를 이어.,정상 정복.
“홍길이 형, 어디가 정상이야?”
당시 40세 미혼 여성이었던 그녀.
엄홍길 등반대장을 형이라 불렀다.
엄홍길은 뒤처지는 지현옥에 앞서 나가
5번 도전 끝에 안나푸르나 정상 등정 성공.
엄 대장은 감격의 눈물을 쏟아낸 후.,하산길.
.
정상을 가리키며 휴대 무전기를
건네주는 엄 대장을 향해 지현옥은
걱정 말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오후 2시, 정상정복 성공"
그 이후 통신마저 두절됐다.
안나푸르나 정상.,지현옥
셰르파와 로프를 묶고
눈비탈길을 내려오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두 사람은
안나푸르나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췄다.
.......故 지현옥 여성산악인.........
1961년 1월 20일 ~1999년 4월 29일.
1979년 청주사범대학교(현 서원대학교)
미술교육과에 입학하면서부터 산과 인연
1981년에는 청주사범대학교 산악부 부장.
.
1993년 한국 첫 여성에베레스트 원정대를 이끌고
정산에 올랐으며 1998년 가셔브룸 2봉(8,035m)을
세계 여성 산악인 중에서 최초 무산소로 단독 등정.
1993년 35 나이에 대한산악연맹 원정대 대장
13명 대원을 이끌고 에베레스트산을 5월 10일
10시 45분(한국시간 오후 2시)에 최오순, 김순주
대원과 함께 한국여성 최초로 도전하여 성공하였다.
한국 8,000m 여성 단독등반 시대 개막.
지현옥의 8,000m급 무산소 등반 기록은
세계 여성 산악인으로는 4번째 기록이다.
1993년 이전까지 남성 전유물 히말라야
한국 여성으로서 성공한 것은 한국여성도
할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1993년 체육훈장 기린장.
2000년 백마장 각각 서훈.
..................................
2012.04.26 서원대 캠퍼스 내.,13주기 추모제.
국내 여성 산악인 중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고(故)
지현옥씨를 기리는 추모제가
지현옥 흉상 앞에서 열렸다.
이날 열린 13주기 추모제는
대한산악연맹 이인정 회장과
산악인 등 100여 명이 참석.
2017.12.2 안나푸르나 '故 지현옥 추모비'
2017.04.28 18주기 추모제
2017.08.23 안나푸르나., 故 '지현옥 이정표' 설치.
고 지현옥 여성산악인은
1993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산악인들로만 구성 된.,
에베레스트 해외원정대 대장.
그로부터 6년이 지난후
전설적인 족적을 남기고
향년 39세로., 생을 마감.
'1961.1. 20 ~1999. 4. 29.'
"옛날엔 스폰서가 없어서
어디서 돈을 구해야 했는데
내가 그것을 못했어요. 결국
내가 빠졌습니다. 그런 일을
하기에는 제가 부족했어요."
그녀가 빠진 원정대는 보란듯이
에베레스트 등정을 이루어냈고
그녀는 심한 상실감에 빠졌다.
.............
.............
당시 37세.,그녀.
산은 이제 더 이상
미래 진행형이 아닌
과거형.,운명이었다.
자괴감에 빠져 있던 그녀에게
청학동 댕기머리 총각이 나타났다.
그와 결혼을 하고 이듬해 아들을 가지며
18년 서울 생활을 접고 지리산 청학동에 정착.
거기서 '백두대간'이라는 찻집을 운영.
하지만 2년 반만에 남편은 불가에 귀의.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이 계속되자 그녀는
6년간의 청학동 생활을 청산하고 생면부지의
강원도 정선에서 자연학교를 운영하며
민들레 홀씨처럼 뿌리를 내렸다.
아들 기범이도 잘 자랐고,
정선아라리도 배우고, 막국수와
콧등치기 국수도 먹는 호사도 누렸다.
그것도 잠깐. 호사다마라 했던가.
2002년 태풍 '루사'가 가만두지 않았다.
아들과 낡은 차만 건지고 모든 것을 잃었다.
수천 권의 책과 자료, 사진 그리고
손때 묻은 등산장비 등 개인적으로
아끼던 물건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정선과의 인연은
삼 년을 못 넘기고 끝이 났다.
이 또한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실의에 빠져 있을 무렵
쌍계사 강원에 있던 아이 아빠가
이 소식을 듣고 지리산 화개에
시골집이 하나 있다고 알려왔다.
..............쌍계사 강원.,적묵당..................
쌍계사 적묵당(雙磎寺寂默堂)은 불도를 닦는
승려들이 처음 배우는 자가 수행하던 곳으로,
통일신라 840년(문성왕 2) 진감선사가 세웠다.
현대에 들어와서 1978년 승려
고산(杲山)이 다시 고쳐 지었다.
..........................................
쌍계총림 방장., 고산스님
남향의 흙집을 본 그녀는
첫눈에 맘에 들어 살기로 결정.
2003년 2월 말 화개로 거처를 옮겼다.
매일 아침 그녀는 집 건너편에 있는
쌍계사 산내 암자인 불일암까지 마실.
왕복 3시간. '백팔배'를 하기 위해서다.
불일암 설경
불일암
불일암은 법정스님이
17년 간 머물렀던 암자로
'무소유' 사상의 산실인 곳.
...................무소유(無所有)..............
1972년 동아일보에 실린 법정스님의 수필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에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나는 가난한 탁발승으로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밥그릇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 않은
평판 밖에 없다”고 한 내용을 K.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 어록』에서 읽은 이 글의 지은이
‘나’는 너무도 부끄럽다고 반성한다.
누구나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는
빈손으로 돌아가기 마련인데, 우리들은
무엇인가에 얽매여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아간다고 나는 말한다.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난초 두 분을
정성을 다해 길렀는데 실수로 이 난초를
뜰에 내놓는 바람에 죽어버린 것이다.
나는 햇볕을 원망할 정도로 안타까웠지만
너무 난초에게 집념한 게 아닌지 곧 반성한다.
나는 난초 일로 무소유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
나는 소유 관념이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고 충고.
크게 버리는 사람이 크게 얻을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아무 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게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라고 나는 강조한다.
..........................................................
법정스님(1932∼2010)이 참 깊이 박아둔 숙제.
가질 건가 버릴 건가, 우린 늘 그게 문제인 거다.
2010년 3월 초순 입적했다. 참 대단한 무소유였다.
“장례식 하지 마라. 수의도 필요 없다.
입던 옷 그대로 평상에 올려 다비하라.
사리도 찾지 마라.” 전날 밤 유언처럼
남겼다는 그 말은 두고두고 회자됐다.
‘무소유’ ‘말과 침묵’
‘산방한담’ ‘텅민 충만’
‘산에는 꽃이 피네’
‘오두막 편지’
‘아름다운 마무리’
등. 베스트 셀러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내 이름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길 부탁한다.”
스님이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열반에 들기 직전까지 머물던 병원에
출판계 인사들이 많이 다녀간 모양이다.
법정스님 유지는 관철됐고,
저서 30여권은 모두 다 절판.
불일암.
.
쌍계사 또 다른 산내암자 국사암
주차장을 들머리로 마실은 시작된다.
일년 365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마실.
그녀는 아직도 여성산악인으로서
몸을 만들기 위해 단련하는 것일까?
'마실'이라 표현하기보다., 강도가 높다.
매일 하루에 3시간 남짓
일상 생활화 된.,심신단련.
하동 국사암
수령 1,200년 느티나무.
그녀가 매일 합장하는 곳.
....................합장........................
불교에서 행하는 두 손바닥을 합하여
마음의 한결같음을 나타내는 경례법(敬禮法).
합장은 흩어진 마음을 일심(一心)으로 모은다는 뜻
........................................................................
.
"4월 말, 이 길은 진달래 황홀경.
이 길의 종착역이자 지리 10경 중
하나인 불일폭포 우측 절벽에는
온통 진홍빛으로 불타오르지요.
화엄 세계가 따로 없어요."
.
그녀가 매일 합장하는 곳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 4개 장승.
.
그녀가 매일
합장하는 석문.
"이 석문을 통과하면
인간세상의 모든 것과
단절되는 느낌이 들어요."
조선시대 청학동
신선세계 출입문 격
관문으로 알려진.,석문.
진주 서쪽 백리 밖 석문을 지나
물속 동굴을 거쳐.,십리 떨어진 곳
신선들이 농사짓고 산다는 선계 청학동.
이인로 <파한집> - '지리산 안에 청학동이 있다.'
사람이 겨우 통행할 좁은 길을 엎드려, 몇 리 가면,
사방이 옥토라 곡식을 가꾸기 알맞고 청학이 사는 곳.
하동 불일폭포
"젊었을 땐 산을 볼 줄 몰았어요.
제가 목표로 하는 대상만 보았지
그 주변의 산은 볼 줄., 몰랐어요.
아니 보려 하지 않았어요.
제가 오르고자 하는 그게
산의 전체인 줄 알았어요.
근데 사실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것도 산의 일부일 뿐이었어요."
"그동안의 산이 '등산(登山)'
지금은 '입산(入山)'의 산이죠.
더 빨리, 더 높은 곳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오림짓의 연속. 인간이 자연에
도전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어불성설이죠.
하지만 입산은 달라요.
욕심과 욕망을 버리고
산과 모든 것을 같이 한다.
라고 생각하며 오르고 있죠.
제 아들 기범이와 산에 오르면
그 아이는 나무를 껴안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고 천방지축 날뛰어요.
저에겐 도전의 대상으로
제압해야 만 했던 그 산이
아이에겐 정겨운 친구예요.
한 세대를 건너서야
산의 소중함을 알게 됐으니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요."
.
'전설의' '국내 1세대 여성 산악인'
이라는 수식어가 떠날 줄 몰랐었다.
젊었을 땐 정통 알피니스트로,
지리산 청학동에선 차향기를 나눴고
정선에선 자연학교를 꾸렸다. 이젠 하동
화개골에서 된장을 쑤고 찻잎을 따는 아낙.
"산을 버려
산을 얻었다."
...........2004.7.2. 연합뉴스............
"산 속으로 들어서면 산을 볼 수 없다.
그동안 산에 오르긴 했으나 산을 몰랐다
산 아래에서 살다 보니 이제야 산이 보인다.
지난날 산이 목마른 열망이였다면,
이제 비로소 편안한 산을 만난 것이다"
..................................................
결혼과 출산, 그리고 결혼생활 정리
그녀는 인생에서 맛본 기쁨과 좌절을
자신의 글 속에 담아낸.,'낮은 산이 낫다.'
저자는 아들 기범이와 지리산 자락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얘기도 담아낸다.
"그가 있어서 외롭지 않고,
그가 있어서 끝없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가 있어서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보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가 있어서 행복하다.
"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에서도
인생을 배운다." 는 저자.
"나무처럼 품위있고
당당하게 늙어가고 싶다고,
자연을 품고 자연을 닮아가고
싶다.'고 저자는 글로 고백한다.
.
1986년 세계 여성 최초 히말라야 강가푸르나 등정,
1989년 설악산 토왕폭 등반 등 유명 산악인으로 활동.
30대 중반 결혼 후, 하동 청학동과 강원도 정선을 거쳐
지리산 화개골 정착 후 2008.4.30 '낮은 산이 낫다' 출간.
화개골
2009. 6.9 기사 - 그녀의 살림은 변변찮다.
그러나,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별로 없다.
흙집에 세탁기, 에어컨 등은 갖추지 않았고,
옷 생활용품을 사들이지 않은 지는 꽤 오래다.
연료는 이 산 저 산의 나무가지가 해결해 주고,
먹거리는 텃밭 채소와 산과 들 나물로 충분하다.
춥고 더운 것은 자연의 순리라 피할 생각도 없다.
기본 생계비는 ‘난희표 된장’과 ‘난희녹차’로 해결
그것도 1년에 콩 10가마와 녹차 50봉(올해는 67봉).
“내가 최선을 다해 만들 수 있을 만큼만 만듭니다.”
혹자는 그녀의 이런 삶을
‘자발적인 가난’이라 표현.
- 이런 삶을 도피라고 보지 않나요.
“남의 생각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에요.
여기서도 사회생활이 있고, 모든 것이 이뤄지죠.
지금의 생활에 만족해요.”
-산골 생활은 어떤가요.
“욕망을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괜찮은 삶이죠.”
-물욕 없는 삶, 이상적이지만
현실이 되면 힘들 것 같은데...
“뭔가가 꼭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욕심을 버리면 살기가 훨씬 쉬워지거든요.
예를 들어 된장찌개를 끓일 때 대부분 사람들은
꼭 두부를 넣잖아요. 두부를 넣지 않고 다른 야채를
넣어도 맛이 조금 다를 뿐 먹을 수 있을 텐데 말이죠.
내 생활을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끝없이
뭔가를 갈구하게 돼요. 그걸 버려야 하는 거죠.”
-그래도 아이의 교육에 대한
부분은 걱정이 많을 텐데요.
“어릴 때는 집에서 키웠고,
지금은 정규교육과정 대신
대안학교에 보내고 있어요.
학교 공부만 공부가 아니고,
누구나 자신만이 가진 능력이 있잖아요.
아이가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 자연과
소통하는 법을 통해 그걸 찾아냈으면 해요.
아이 교육은 언제나 제일 큰 고민이에요.
된장만 담그다가 차 농사도 짓게 된 것도
아들 교육비 때문이죠.”
나지막한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득도한 여승 그것 같다.
2006년 태풍 ‘루사’를 겪으며
정선자연학교를 떠나 '화개골'
들어와 1년 반쯤 후 펴낸 산문집
“채소는 직접 길러서 먹습니다.
가능한 적게 쓰고 작게 살고 싶어요.
"불편하면 불편한대로
사는 것도 삶의 한 방법.
편하게 사는 것을 택했다면
산골마을로 들어올 이유가 없죠."
4월 중순부터 한 달 이상은
좋은 차(茶) 만들기에 전념한다.
농약과 비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찻잎을 손으로 따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차보다 더 힘든 일은
섣달에 쑤는 메주 만들기.
화개골에서 주 수입원이다.
봄나물 장아찌들도 만들어 판다.
죽순· 엄나무·가죽나물·취나물 등.
전화주문 판매하는 ‘남난희표’ 된장.
그녀에게 산의 의미는 남다르다.
“의미 같은 건 다 까먹었다” 손사래.
하지만 산은 그녀에게 또 하나의 자아.
“산은 제 젊은 날에
하나뿐인 삶의 대상."
미친듯이 산에 빠진 게
저에겐 삶의 플러스 요인."
.
"그후, 제 삶의 기준이
되어준 것도 산입니다.
제가 산을 찾은 것이 아니라
산이 저를 선택했다고 믿어요.”
‘나 다운 나’를
만들어 준., 산.
"산 덕분에 보람된 삶을 살았고
만약에 그 길을 걷지 않았다면
현재 평화로운 삶도 없었을 것."
일련의 산악활동과 숱한 과정들이
화개골에 정착하기 위한 수순이었다.
산 덕분에 스스로 당당하게 살아온 삶.
.
“84년 1월 1일부터 76일간 했던
태백산맥 종주가 제일 힘들었어요.
그때는 백두대간 개념이 없었거든요.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그 산행으로 산악인 타이틀도 얻었고,
그 산행에서 최고의 환희와 최고의 절망을
모두 맛보았으니까요.” - 여성산악인 남난희 -
그때의 산행 경험으로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확신.
하지만, 한 아이의 엄마로,
시골의 아낙네로 평범하게
화개골에서 살아가는 그녀.
그녀가
다시 산을
오를 수 있을까?
"저는 지금도 충분히 할 수 있어요.
기회만 되면 백두대간이든 히말라야든
토왕폭이든 어디든 다 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집중해 등반에 정진했던 그 녀.
산은 그녀에게 불가능도 가능케 하는 존재.
.
정선자연학교가 침수되면서
그녀가 갖고 있던 많은 것들,
정성껏 쑨 된장과 살림살이들과
추억과 손때 묻은 장비는 모두 유실.
그녀에게 산은
더 이상 정상 등정이
목적인 높은 산이 아니다.
산은
그녀에게
오르는 산에서
안기는 산으로
이미 바뀌었다.
'낮은 산이 낫다.'
‘입산’ 고백 처럼.,
“언제부터인가 나의 삶은
아무것도 가지고 싶은 것이 없고,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고,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다.
또 어느 곳에도 가고 싶지 않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게 되었다.
물기가 다 빠진 풀처럼 가벼운 마음.
참 좋다."
................
2016.1.20
산이 아프면
나도 아픕니다.
....................
산에서 태어나 산과 함께 자랐고,
어른이 된 뒤에도 등산가로 살며
무수히 많은 날을 산에서 보냈습니다.
불혹 즈음 지리산에 들어와
산과 함께 잠들고 산과 함께
눈뜨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산과 함께 하는 생활이다 보니
내가 산 같고 산이 나인 듯도 합니다.
내가 아플 때 산에 가면
위로 받고 치유 받습니다.
하지만 산이 아플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이
산을 아프게 한 인간들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정도일 뿐, 실제
아픔에 함께 하지도 나누지도 못합니다.
(중략)
...............
...............
1994년 봄인가?
기억이 가물가물
내 나이 40대 중반.
나는 청학동에 살고 있던
그녀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하얀 능선에 서면' 애독자로서.,
백두대간 찻집으로
차 한잔 마실 목적으로
그녀가 있다면 더욱 좋고
못만나도 좋다는 심정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지리산온천으로 가는 길에
청학동도 보여드리고픈 마음에
효도관광 차 겸사 겸사 찾아갔다.
.
서울에서
청학동까지
머나먼 길을
부모님까지
모시고 온
애독자.
그녀도 놀랐고
나 또한 놀랐다.
그녀는 먼길을 찾아온
애독자의 열정에 놀랐고
나는 그녀의 정성이 담긴
'둥굴레차' 한잔에 놀랐다.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
가장 손쉬을 것으로 여기며
둥굴레차를 마시겠다 했지만
보약 다리듯 정성을 기울인 때문.
소 한마리도 손쉽게 때려 눕힐듯
산 만한 체구와는 다르게 여성스러움.
문학소녀 처럼 여리고 여린 심성의 소유자.
자연보호에
관심 깊었다.
전혀 세속에
물들지가 않은.,
순수하고 깨끗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그것이 첫만남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후 나는 그녀를 향한
관심은 더욱 깊어졌지만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녀의 심성이
오염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
.............
내 나이 어느덧.,69.
그녀의 말이 와닿는다.
요즘 주로 낮은 산을 간다.
의상봉
불광산
수리봉 등.
낮은 암릉들.
수리봉
가족길은
내려 놓은지
이미 오래 전.
그러나, 그래도
미련이 남았는지
그 품 속을 찾는다.
오르진 못하고
지나칠 뿐이다.
바라 만 보면서.,
그래도
참 좋다.
수리봉 아빠길 5.11b
'수리봉 암장' 가는 길.
백화사 입구
의상봉 입구.,백화사
백화사계곡
백화사계곡
북한산 의상봉
평일에 이곳에 오면, 호젓해서 좋다.
의상봉은 어스렁거릴 곳이 많아 좋다.
'이 구석 저 구석' 인적 드문.,바위길들.
요즘은 북한산에서
딱 한봉우리 만 목표로
오르내리는 산행을 한다.
여러 봉우리를
미친듯 발품 팔며
마구 쏘다니기 보다
볼 것이 더 많아.,'좋다'.
비오는 날에는 의상봉 슬랩이 미끄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를 수 있다면.,고수.
슬랩에 손가락을 세워 꽂으면.,수준급 실력.
슬랩 경사 아래로
발을 쭉쪽 뻗으면서
오를 정도면.,더 수준급.
북한산.,의상봉 슬랩.
"할아버지 거기에는
길이 없어요. 위험해요"
"..........."
"할아버지 안들려요?
거기 길이 없다니까요?"
"..........."
"아이유! 할아버지~
거기 위험하다니까요?"
"아이구! 못들었어~
귀가 어두워서 미안."
일일히 대답하기 싫어
귀가 어두운척 할 때마다
그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요즘은 더욱 더
인적끊긴 곳을 찾게 된다.
불광산 서쪽 끝자락.,선녀폭
선녀폭포 가는 길 주변이 온통 송림
소나무 향기에 목욕하는 느낌이 든다.
선녀폭포 가는 길은 좌우에 온통 폭포골.
등산로 주변이 암릉 바위길이라
발걸음에 물골 패일 염려가 없어
산을 오르는 속마음도 한결 편하다.
'한걸음 딛고 옮길 때마다
가급적이면, 내가 딛고 간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리라.'
.
북한산.,불광봉 선녀폭포 가는 길
소나무숲 향기가
진하게 풍겨서.,참 좋다.
미세먼지가 비껴가는 비경지.
야영터도 많고
쉼터도 참 많다.
멋진 쉼터와 야영터들
그리고, 소나무 삼림욕.
불광산 선녀폭포 가는 길.
불광산
불광 계곡.
북한산.,흰구름길.
'북한산 둘레길 3코스' 흰구름길은
산과 도시가 어우러진 수려한 조망.
화계사를 지나 나타나는 구름전망대.
마치 구름 위에 올라 그 아래를 내려다보듯
북한산과 서울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잔다.
12m 높이에 덮게가 없어 사방이 보이는 전망대.
둘레길 중간에 구름전망대는
산 정상에서나 느낄 수 있는 경치를
감상할 수 있으며 빨래골과 화계사에
숨어 살던 궁녀이야기 등.,전설의 고향.
이곳에서 조선시대 궁녀들과
인근 주민들의 빨래터 겸 쉼터
조선시대 선비들이 한양 과거 길
우이령 넘어 이곳에서
손발을 씻고 한양으로
들어오기도 하였던 길.
수유리 4.19 국립묘지 위에서
아카데미 하우스 옆 작은 계곡은
북한산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곳.
탐방로가 잘 정비되어 위험한 곳이 없고,
산성 주능선까지 가장 빠르게 갈 수 있으며
산행 내내 이어지는 계곡 또한 멋진 곳이다.
구천계곡은 설악산 십이선녀탕 계곡 축소판.
비가 많이 내릴 때면 계곡을 가득 채운 상태로
계곡물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모습이 장관.
아카데미하우스 우측으로 작은 길
이정표에는 신익희 선생의 묘소와,
칼바위 능선으로 가는 갈림길 안내.
칼바위 능선길을 택하면
이내 구천교라는 작은 다리.
등산로 초입은 바닥의 흙이
보이지 않을 만큼 평평한 돌을
정성들여 깔아 놓았고, 우측으로
설악동의 쌍천과 같이 내의 가운데
크고 작은 둥근 바위들이 놓여 있다.
그 사이를 어디에서 발원하였는지 알 수 없는
파란 계류가 청아한 소리와 릔 포말을 일으키며
굽이쳐 흐르는 몽유도원도 그림 같은 천상의 정원.
아카데미 탐방지원센터에서 20분 걸으면 삼거리
좌측으로 들어서면 정릉 칼바위 능선으로 오르고,
우측으로 길을 잡으면 구천계곡을 끼고 오르다가
북한산성 4대문 중 하나 대동문으로 들어서게 된다.
.
북한산 '흰구름길~구천폭포' 가는 길
구천폭포는 구천은폭(九天銀瀑) 바위 음각에서 유래
9개의 폭포가 하늘을 향해 줄지어 서 있다는 뜻이리라.
서울 도심계곡에, 버스에서 내려 30분 정도의 도보거리
.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인생을 멋지게 사는 여셩같군요....
.
'天王聖母' 전설과 유사한 삶.
2년반 결혼생활 후 스님이 되어
그녀의 곁을 떠난.,남편 청학거사.
.
아들 기범이와 함께
화개골에 사는.,그녀.
아들 장래희망도 스님.
여성산악인.,남난희
발자취를 찾아서., 쓴 글.
아울러, 낮은 산 몇곳 소개.
번개모임 산행지로 딱 좋은 곳.
성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