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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취한 진천의 밤
질펀하도록 녹아내리고 있으나 음지는 여전히 긴장을 풀 수 없게
하는 안성~진천간 313번 지방도를 조심스럽게 달리는 이 중년도
아침의 젊은 이처럼 이해되지 않는 노인으로 치부하는가.
고등학교 교사라는 그는 집에서 걱정할 가족도 고려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충고(?)까지 곁들였으니까.
분기점인 34번 국도상에서 마중나온 김영식의 차로 바꿔 탔다.
그의 첫 마디도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무모란다.
이 날의 나는 정녕 모두에게 그렇게 비췰 수 밖에 없었나 보다.
어찌 됐건 오랫만에 진천땅에서 그와 술잔을 나누게 된 것은 눈
덮힌 금북정맥 덕인 것만은 틀림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날 진천지역을 훨씬 벗어났을 것이니까.
닷새만인 3월 12일(금요일) 석양에 다시 진천행 버스에 올랐다.
격일로 서울에 출근(무역회사CEO)하는 김영식의 퇴근길에 함께.
전번엔 귀경차편 때문에 미진했던 주석이었다.
그래서 진천을 들머리로 하는 마지막 기회에 다시 갖고 싶었던
데다 생소한 땅에 뿌리내리는데 지극 정성으로 챙겨주고 있다는,
전일에 잠시 자리를 함께 했던 젊은 이만성의 초청이 있었기에
하루 앞당겨 진천에 도착한 것이다.
진천인들은 자기 고장 자랑에 생거진천(生居鎭川)을 슬로우건
(slogan)으로 내세우고 있는 듯 하나 전국 방방곡곡을 누벼온
내게 이런 표어는 별무관심이다.
오직 금북정맥에 들기 위해 진천을 경유하는 것이며 김영식이
여기에 거주하니까 이 밤 나도 이 곳에 있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전번에 미진했던 술판이 유감 없이 벌어졌다.
거나해진 우리는 뷰힐(View hill)로 옮겨 취하도록 마셨다.
뷰힐은 대학(고대) 동창커플인 김영식의 부인이 심심 파적으로
꾸린 운치있는 카페다.
대취한 진천의 밤이 이슥해서야 나의 단골 집 찜질방으로 갔다.
군청 소재지라 하나 소도시일 뿐인데 서울을 비웃고 있다 할까.
하긴 전국화 해가는 찔질방도 청출어남 현상이겠지.
나중 난 뿔이 우뚝하다잖은가.
신비스런 자연의 힘에 경탄할 수 밖에
김영식과 이만성이 새벽길을 달렸다.
내세운 이유는 백곡저수지로 낚시간다는 것이었지만 나의 정맥
길을 돕기 위해 서둘은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작취미성 상태로 오른 배티고개에서 우리는 아쉬운 작별을 했다.
배티고개의 '배티'는 이치(梨峙)의 훈독(訓讀)이란다.
고개 일대에 배나무가 많았던가 본데 충북지방에서는 '치(峙)'를
'티'로 풀어 쓰고 읽는 것을 한남금북정맥 종주때 충북지역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다.
그러고 보니 아하~, 진천은 충북이렸다.
두 진영이 이 고개에서 싸웠는데 패한 쪽이 패티(敗峙)라 부른
것이 고개 이름이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조금 아래에 '이티'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배티 유래쪽에 무게가 간다.
배티고개의 김영식(상)과 이만성(하)
서운산에 오르는 동안 남쪽 아래의 천주교 배티성지(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와 순교자 무덤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이는 첩첩 산골로 숨어들어 초근 목피로 연명하면서라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려 했던 신도들을 끝내 찾아내어 박해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우리나라 천주교에 대한 4대 박해중 하나로 병인양요의 도화선이
된 병인(1866년) 박해 말이다.
그러니까 진천은 전설처럼 살기 좋은 고장은 아니었지 않은가.
서운산 정상
이런 저런 생각하며 547m 서운산에 올랐다.
재마루가 이미 330m 높이라 서 ~ 남 ~ 서의 오름이 유순하다.
서운면(안성시)과 서운산 이름은 어느 쪽이 먼저였을까.
충북 진천과 공유하고 있으나 안성의 진산이라고 주장할 만큼
안성에 기울어 있는 산이다.
안성쪽으로 나있는 등산로들이 이를 입증한다 하겠다.
정상 서편의 543m 서봉에서 이어지는 서운산성은 백제가 축성
하여 고려와 이조 임진왜란때까지 활용됐다는 성이다.
특히 홍계남의 의병이 이 산성에서 왜병을 격퇴시킴으로서 호국
성지가 되었단다.
그런데 마이웨이 산악회가 엄두를 내지 못했던, 불과 6일 전의
어마어마했던 백설은 다 어데로 사라진 것일까.
자연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
그리도 많이 쌓아 놓았다가 단지 며칠 내에 이처럼 말끔히 치워
버린 신비스런 자연의 힘에 경탄할 수 밖에.
그리고 백설로 순수를 가르치더니 진한 봄 기운으로 몸을 싱싱
하게 해서 축지법을 실행하게 한다 할까.
이후 금북정맥이 일사천리였으니까.
유일한 삼도계 엽돈재
일직선을 그으며 남남동진하다가 남남서로 흔들며 내려선 곳이
천안과 진천을 잇는 34번 국도상의 엽돈재다.
북서의 경기 안성과 동의 충북 진천, 서남의 충남 천안이 삼군,
삼도계를 이룬다.
삼면봉(三面)과 삼군봉(三郡)은 대간뿐 아니라 정맥에서도 종종
있고 대간의 삼도봉(三道)이 지리와 덕유, 영동 등에 있다.
그러나 삼도계를 이루는 고개는 대간과 9정맥을 통털어 유일한
것으로 기억된다.
엽돈재
경기와 충북을 가르며 남하하던 정맥이 엽돈재에 이르러 충남을
새로 맞이한다.
그리고 신입한 충남에 의해 곧 구관(경기와 충북)이 차례로 퇴출
되고 충남이 단독으로 종착지 안흥만에 이르는 형국이다.
엽돈재는 지금은 많이 깎이어 높이 323m로 내려 앉고 잘 포장된
국도상이나 예전엔 높고 험하기 짝이 없는 산골 고개로 도적떼의
출몰이 빈번했을 터.
그래서 고개를 넘던 나그네가 돈을 강탈당하곤 하였으며 재이름
또한 이에서 비롯되었단다.
459m 봉을 넘어서면서 34번 국도가 뒤로 멀어졌고 57번 도로가
지나는 부수문이고개 이후 위례산(높이가 523m, 524m, 529.5m
등 제각각인 것이 유감이다)까지 속도감 있세 나아갔다.
위례산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의 개국 도읍지라 하나(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위례의 위치에 대해서는 사계의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분분하여 일치를 도출하지 못하는 상태다.
위례산 정상
도읍지를 물색하러 부아악(북한산)에 올랐다가(백두대간 100번
글 참조) 찾지 못해 여기까지 남하하여 도읍을 정한 것일까.
건국 초기의 국호도 위례설과 백제설로 설왕설래하고.
초기의 도읍지를 하북위례성, 하남위례성으로 거듭 천도했다는
기록들로 보아 한수 이북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직산까지 내려갔다가 곧 다시 하북(경기 광주)까지 북상했다?
천도가 개인 이사처럼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일인가?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자기 고장 띄우기 위해 유적지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할 만큼 각 자치단체가 아전 인수하는 과욕에 고소
불금일 때가 부지 기수다.
왕건과 성거산, 태조산
우물목고개 삼거리부터 성거산 정상 한하고 정맥과 시멘트 포장
임도가 거의 겹치는 것이 이 구간에서는 옥의 티다.
300m~500m대의 정맥이 크고 작은 도로로 인해 짤린 것 말고는
잘 보존되어 신명난 걸음이었는데.
579m 성거산은 태조산과 더불어 고려 왕건과 관련된 산이다.
신령이 사는(聖居) 산이라는 뜻으로 직접 명명하고 제사지내게
하였다는데 또 다른 성거의 산이 되어 있으니 신묘한 이름이다.
줄무덤이 있는 천주교 성거산 순교성지가 되었으니까.
그런데 제1, 제2로 나뉘어 들어선 이 줄무덤들이 꼭 정맥마루에
있어야만 하는 건가.
순교성지가 정맥 한 복판이 아니면 안되는 걸까.
성거산에서 태조산에 이르는 정맥을 비켜서 자리 잡은 만일사,
유황사, 각원사 등 불교 명찰들과도 대조를 이룬다.
특히 태조 왕건이 이룩한 삼국통일 위업 기념으로 창건되었다는
각원사는 최근에 동양 최대의 청동 좌불상을 모셨는데 이는 남북
통일을 기원하는 뜻이라니까.
성거산(상)과 태조산(하) 정상
정상에 공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으나 한북과 한남정맥에서 하도
많이 시달린 탓인지 이 정도는 전혀 개의되지 않았다.
오히려 밟고 지나온 금북정맥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능선이
예쁘디 예쁘기만 했다.
천안인에게 최고 최상의 웰빙 공간이며 건강 비타민의 보고임을
입증하려는 듯 이정표와 고개들이 무수하다.
이정표들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만일, 검마, 유왕골, 도라지 등
이름의 고개들을 밟고 421m 태조(太祖)산에 올랐다.
높지는 않으나 천안의 진산이란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을 도모하기 위해 이 산의 서록(西
麓)에 주둔한 이후 태조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산이다.
그러나 천안 시가지가 지척이기 때문인가.
정맥의 양 자락에는 대학을 비롯한 각종 기관 시설들이 즐비하게
들어섰고 계속해서 턱 밑까지 야금야금 기어오르고 있다.
군(軍) 아닌 민간 기업까지 철조망으로 정맥을 길게 차단했다.
도로들이 덩달아 춤을 추고 있음은 바늘과 실의 관계.
바야흐로 망그러지기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인가.
정맥의 운명에 대한 엄습해 오는 불안감을 안은 채 아홉싸리고개
지나 에코 브릿지(eco-bridge:동물이동통로)가 신설된 유량리
고개마루에 도착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