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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의 모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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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포럼,No.534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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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 ‘명태’ 60년
가곡 ‘명태’와 나는 동갑입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바리톤 오현명(1924~2009)에 의해 초연된 ‘명태’는 시인 양명문(1913~1985)의 가사에 변훈 (1926~2000)이 곡을 붙인 노래입니
다. 초연 당시 이 파격적인 노래에 객석은 곧 술렁이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와 감상이 어려울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다음 날 신문에는 “이것도 노래냐”는 혹평이 실렸습니다. 작곡자 변훈은 비난과 악담에 기가 죽었지만 오현명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노래를 불렀고, ‘명태’는 드디어 “비로소 한국가곡이라 부를 수 있는 곡이 탄생했다”는 극찬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변훈은 함흥에서 태어나 연희전문 정외과를 졸업한 뒤 외교관으로 활동한 분입니다. 그는 미8군 통역관 시절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감상실인 대구의 녹향(1947년 개업)에서 만난 양명문과 의기투합해‘명태’를 작곡했습니다. 정규 음악교육을 받지 않고도 대학생일 때 이미 작곡을 시작했는데, 전업작곡가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81년 외교관으로 은퇴할 때까지 ‘명태’외에 ‘금잔디’등 많은 노래를 남겼습니다.‘하나님 어쩌자고 이런 것도 만드셨지요’로 시작되는 ‘쥐’는 해학적인 면에서‘명태’와 비슷합니다.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발표 때부터 호평을 받은 그의 작품은 아마도 ‘떠나가는 배’ (1953년)일 것입니다.
내가 ‘명태’라는 노래가 있다는 걸 처음 안 것은 1970년 대학 입학 직후 이맘때의 봄이었습니다. 아직 서로 서먹서먹했던 신입생들이 학교 앞 막걸리집에서 술을 마실 때 고금석이라는 녀석이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뭐 저런 노래가 다 있나’ 했지만, 듣다보니 이내 좋아져서 단 둘이 술을 마실 때 한사코 노래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노래를 바꾸자고 윽박질러 내가 잘 부르던 남일해의 ‘메리케인 부두’를 떠넘기고 ‘명태’를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내가 있는 자리에서는 절대로 ‘명태’를 부르지 않는다는 약속도 받아냈습니다.
그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노래를 자랑스럽게 불렀습니다. 누구나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했습니다. 해학적인 가사도 인상적이지만, 끝 부분의 ‘아~하하하하’하고 웃는 대목을 다들 좋아했습니다. 하도 이 노래를 자주 불러 내가 가입했던 이념서클 민족이념 연구회의 후배들은 나를 ‘명태형’이라고 불렀습니다. 비쩍 마르고 시커매서 명태의 이미지와 닮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금석이는 내가 준 ‘메리케인 부두’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잘 부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치사하게도 그가 없는 자리에서는 ‘메리케인 부두’도 곧잘 불렀습니다. 결국 나는 그에게서 노래를 빼앗은 꼴이 돼버렸습니다.
2학년 때의 어느 봄날, 그와 나는 남산 독일문화원(괴테 인스티투트)에 찾아가 독문과 대학생들의 연극단체 프라이에 뷔네(Freie Bhneㆍ당시 명칭은 아마도 슈트로휘테)에 가입했습니다. 연극을 하면서 독일어 회화도 저절로 하게 되는 좋은 단체라고 생각한 거지요. 마침 독일 극작가 게오르크 뷔히너(1813~1837)의 <당통의 죽음(Dantons Tod)> 공연(연출 이재진)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의 배역이 무엇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내가 맡은 배역은 혁명재판소 판사인 에르만이었습니다. 그나 나나 단역을 맡은 것은 신참이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대사도 몇 마디 되지 않는 데다가 악역이어서(나는 초등학교 학예회 때 연극 <개미와 베짱이>의 주인공이었는데 어따 대고!) 한두 번 갔다가 말도 없이 발길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금석이는 그때부터 연극에 빠져 외교관이 되려는 꿈을 접었고, 학교 성적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 나빠졌습니다. 대학은 거의 10년 만에 졸업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연극인들은 춥고 배고픕니다. 그는 배우로, 명연출가로 연극판에서 이름을 날렸지만 무대 밖의 삶은 고달프기만 했습니다. 그는 교열기자로 몸담았던 신문사를 연극을 계속하려고 뛰쳐나간 일도 있습니다. 이런 남다른 열정은 남다른 가난과 고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립극단 단원, 극단 우리극장 창단, 전주시립극단 상임연출 등으로 경력을 쌓으면서 생활을 위해 카페를 경영하기도 했지만, 연극 외의 일에는 별로 소질이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그가 연극에 미쳐 있는 동안 나는 신문기자로 일에 빠져 있었고, 그래서 자주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지금부터 두 달 전인 1월 중순, 그의 아내가 숨졌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병원에 가 보니 너무 일찍 가서 그런지 빈소에는 영정도 꽃도 없었고, 그는 추리닝(트레이닝복이 맞는 표기이겠지만) 차림으로 참 어색하게 나를 맞았습니다. 나와 같은 회사에서 근무한 적도 있는 그의 아내는 가슴샘암이라는 희귀 암을 9년이나 앓다가 끝내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가 투병을 하는 동안 그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위로를 한답시고 그의 어깨와 등을 두드리다 보니 뼈만 앙상한 것 같았습니다.
제목은 잊었지만 그가 대학교 1학년 때 교지에 발표한 시에는 ‘해읍스름한 어둠 속에서도 마냥 히죽거리고 있었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아마 시작 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그 시를 읽고 난 뒤부터 나는 걸핏하면 “야, 해읍스름한 어둠 속에서도 마냥 히죽거리는 고금석!”이렇게 부르곤 했습니다. 그런 멋쩍고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는 표정과 몸짓으로 그는 아내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나한테는 역시 이런 배역이 잘 안 맞아’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연극쟁이로 명성을 얻었지만 그는 원래 무척 수줍은 사람입니다. 사람들 앞에 서면 얼굴이 빨개지고 말도 잘 하지 못해 초년 시절에는 왕대포를 들이켜고 알딸딸해진 상태로 무대에 올라간 일도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연극을 빼면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그는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연극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아직도 그가 성품이나 행동에서 전혀 달라진 게 없어 보입니다. 얼굴도 그대로입니다. 해읍스름한 어둠과 마냥 히죽거리는 수줍음, 어색함이 40여년 전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그런 수줍음과 어색함은 바꿔 말하면 겸손이나 정직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속속들이 다 알지 못합니다. 40여년 동안의 삶의 무대는 서로 너무나 달랐습니다. 내가 노래를 빼앗아간 사실도 그는 아마 잊어버렸을지 모릅니다. 나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며칠 전 오현명의 그 굵고 따뜻한 목소리로‘명태’를 들을 때 이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노래를 들으면서, 이제 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 나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둘이서 이 노래를 불러 보고, 겨뤄 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명태는 이름도 참 많습니다. 생물이면 생태, 얼리면 동태, 내장을 빼면 명태, 4~5마리를 한 코에 꿰어 꾸덕꾸덕 말린 건 코다리, 오랫동안 말린 건 북어, 얼다가 녹다가 한 끝에 노랗게 마른 것은 황태라고 한답니다. 이렇게 이름이 각각이듯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는 모습과 남들이 보는 모습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태’의 가사처럼 ‘짝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가 상처(喪妻)의 아픔을 딛고 시련과 고통을 이기며 자신의 삶의 무대에서 주어진 배역을 충실히 살아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기 바랍니다.
* 이 칼럼은 원제작처인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과의 협의하에 전세계 1만 연우포럼회원 여러분들께 전재.배포하고 있습니다.(김연우 포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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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임철순: 한국일보 주필 1953년 충남 공주 출생. 대전 보문중, 서울 보성고,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언론정보 대학원(석사) 졸. 1974년 한국일보에 입사, 기획취재부장 문화부장 사회부장 논설 위원실장 편집국장 등을 거쳤다. 현재 주필. 和而不同(화이부동) 文質彬彬 (문질 빈빈) 이런 말을 좋아하며, 시와 술과 유머를 사랑한다 고 말하고 싶어 한다. 호는 淡硯(담연). 한국기자상(1981) 녹십자언론상 (1985) 참언론인대상 (2005) 장한 고대언론인상 (2006) 삼성언론상(2008) 위암 장지연상(2008) 등을 받았다. 신문윤리위원,신문방송 편집인 협회 부회장, 안익태기념 재단 이사를 거쳤으며 현재 대산문화재단 자문위원, 첨단 의료 복합단지 위원, 자유칼럼 공동 대표, 한국연우포럼 회장, 보성언론인모임 회장을 맡고 있다. /이메일: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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