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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열린마음으로열린세상을 원문보기 글쓴이: 가을스타
불멸의 이순신
勿令妄動 靜重如山 (물령망동 정중여산)--
1592년 5월7일 첫 출전 옥포 해전을 앞두고 군병에게 한말....가벼이 움직이지 말라..신중하게 태산 같이 무겁게 행동하라... 戰方急 愼勿言我死 (전방급 신물언아사) --1598년 11월19일 마지막 유언,,,,, 전투가 바야흐로 급박하다..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해군 본부 제작 동영상
위 동영상에서 조금 미비한건 3차 출전 안골포 해전이 빠져 잇고여
5차 출전은 웅포 해전을 이야기 해야 하는데 명량해전을 이야기 하고 있읍니다
또한 장문포등 많은 해전이 빠져 있읍니다..
또한 마지막에 넬슨과 충무공을 비유한다는건 어불성설 입니다..
넬슨 따위는 충무공의 발끝에도 못 미칩니다..
이건 전세계 (영국만 빼고) 해군 사관학교와 역사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제독으로 충무공을 평가 하고 있읍니다..
우리가 충무공을 이야기 할때 가장 궁금하고 경의롭게 생각하는게 바로 23전 23승 이라는 불패의 신화 입니다.. 불패라 하여도 우리측의 피해가 많으면 그 또한 의의가 줄지요.. 하지만 한번 볼까요?? 390여척의 왜군 전함 손실대 조선 수군 손실 0 약 4만여명의 왜수군 사앙대 약 400여명 조선 수군 사상(이 자료는 어떠한 기준의로 평가 했는가에 따라 연구하신 논문의 내용들이 조금씩 틀립니다.. 위 수치는 그중 가장 조선 수군의 피해가 적은 연구 논문이고여.. 어떠한 논문에서는 왜선 700여척대 조선수군 36척 피해도 잇고여.. 7만 8천여명 왜 수군 사상대 1600여명 사상이라는 연구 자료도 있습니다..) 이순신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 이순신 장군 영정 사진.
[분석] ‘이순신 리더십’ 경영적 관점에서 다시 관심
“장군님의 카리스마, 불굴의 의지, 군사와 백성을 사랑하는 따뜻한 인간미…장군님 때문에 매일 밤잠을 설친답니다.”(이승엽)
“리더십을 어떻게 발휘해야 하는지에 대해 (장군님에게서) 큰 가르침을 얻고 있습니다.”(이철희)
“나라 살림을 하는 분들이 이순신 장군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으면 합니다.”(박미야)
<한국방송> ‘불멸의 이순신’ 홈페이지에는 이순신 장군에게 ‘반한’ 시청자들의 ‘연애편지’가 넘쳐난다.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에 감탄하며 존경심을 드러낸다. 그러다, 믿고 따를 만한 지도자가 거의 없는 현실을 떠올리며 절망하기도 한다. 이순신이 최근 뜨거운 ‘열쇳말’로 뜬 데는 때를 잘 만난 탓도 있다. 올해가 이순신 탄생 460돌인 데다가,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역사교과서 왜곡을 일삼고 있다. 또 이순신의 고뇌를 다룬 책 <칼의 노래>(김훈)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의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괜찮은 드라마도 곁에 있다. 이서행(59)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행정철학)는 “사람들은 정신적인 사표를 구하고 싶어하는데 실제 그런 인물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며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그런 인물을 찾다가 ‘이순신’이라는 괜찮은 인물을 만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지난 1991년 ‘청백리 정신과 공직자 윤리’라는 제목의 논문을 내는 등 나라를 다스리는 이의 덕목에 대해 연구해 왔으며, 최근 ‘임진왜란을 극복한 충무공의 리더십’을 주제로 글을 썼다. 그는 이순신의 리더십을 여섯가지로 나눠 설명한다. △엄격함과 인자함을 겸비한 지휘관의 리더십 △불의의 관행을 용납하지 않는 공직관의 리더십 △효과 극대화의 행정력과 전술을 이용한 리더십 △선견지명있는 상황판단과 솔선수범의 리더십 △엄격한 신상필벌로 부하들의 사기와 복지문제를 해결하는 리더십 △‘백의종군’이라는 사형선고를 극복한 절대충신의 리더십 등이 그것이다. 이서행 교수는 “국정을 책임지는 이들의 무책임한 발언과 행동 때문에 사회분열이 심각한 오늘날이야말로, 백의종군을 하면서도 꺾이지 않은 나라 사랑의 마음을 보여준 이순신의 리더십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지고지순한 영웅 이순신’ 인터넷에서도 안티 없어
△ <한국방송> ‘불멸의 이순신’ 한 장면.
그러나 한 가지 남는 의문이 있다. 이 교수의 글이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홈페이지 어디를 둘러봐도 이순신에 대한 비판적인 얘기는 거의 없다. 원래 어떤 인물이 영웅으로 뜨면 안티세력의 비판이 나오는 법인데, 이순신은 ‘지고지순한 영웅’일 뿐이다. 이순신에 대해 딴죽을 걸어보려는 사람들도 “그렇게 훌륭한 점만 갖춘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역사에선 ‘영웅’이라고 하는데 믿어도 되는건가”라든가, “군사정권이 미화시킨 인물 아닌가” 식으로 혐의점을 못잡은 채 단순비판에 머무르고 있다. 이순신에게서 ‘옥에 티’를 찾는 것도 ‘이순신 열풍’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재미는 아닐까?
다음은 이 교수가 이순신의 리더십을 분석해 놓은 글을 요약한 것.
1. 엄격함과 인자함을 겸비한 지휘관의 리더십
“경상도 동래와 양산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나 곧 패전했다. 이때 경상 좌수사인 박홍이 싸워보지도 않고 철수했으며 순천의 영군병방은 근처에 있었으면서도 출병하지 않고 패전 과정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므로 이순신은 관계자들을 무참하게 처벌했다.”
“이순신은 장수이므로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나 피난민들의 생계를 염려하여 그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방안을 다각적으로 강구했다. 왕에게 ‘피난민들이 돌산도로 들어가 살면서 농사를 짓도록 해 달라’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이 교수는 “이순신은 노여움이나 즐거움을 나타낼 때 지나침이 없었다”며 “벌과 상을 줄 때 중도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부하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했다”고 말했다.
2. 불의의 관행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공직자의 리더십
“이순신은 피난민들이 소와 재물을 도둑질하기 위해 적군이 쳐들어온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을 때 그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좌의정 김응남이 개인적인 우정에 따라 김억추를 국방책임자로 임명하자 이순신은 이를 탄식하며 울분을 참지 못했다.” 이런 사례는 사적 관계보다 공적 요소를 중시했던 이순신의 면모를 보여준다.
3. 효과 극대화의 행정력과 전술을 이용한 리더십
“효과 극대화의 리더십이란 구성원들의 각기 다른 욕구와 생각을 잘 조화시켜 조직을 성공적으로 운용하는 덕목”이라고 이 교수는 설명한다. 이순신은 군비확충과 조달, 전투준비와 장병들의 사기진작, 부족한 전투 병력의 보충 등을 위해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승려와 농민들을 접촉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총사령관격인 삼도 수군통제사로서 직접 모든 부하들을 관리하기는 힘들다고 판단해, 중간 관리자들한테 책임감을 심어주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줬다고 한다. 1598년 7월 이순신과 함께 조·명 연합함대를 지휘한 명나라 장수 진린은 이순신에 대해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공이 있는 분”이라고 극찬했다.
4. 선견지명 있는 상황판단과 철저한 준비를 통한 솔선수범의 리더십
“1578년 두만강 어귀에 있는 녹둔도의 둔전관으로 근무할 때 오랑캐의 기습공격을 받은 이순신은 적의 화살에 왼쪽 다리를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병사들이 사기를 잃을까봐 몰래 돌아서서 화살을 뽑아버리고 태연히 부대를 지휘했다.”
“일본 수군이 우리 해상을 장악했을 때 이순신은 일본 수군의 대함대가 전라도 쪽으로 몰려올 것을 예상하고 어떻게 싸울 것인지 고민했다. 얼마 뒤 조정에서 수군 전폐 지시를 내렸으나 이순신은 거절하고 명량해전에서 유례없는 대승을 거뒀다.”
이 두 사례는 각각 한 조직의 리더가 자기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것과 지휘관이 어떤 상황에서도 대처할 수 있도록 평소에 자신을 닦아놓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5. 엄격한 신상필벌로 부하들의 사기와 복지문제를 해결하는 리더십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전과를 개인적으로 명시해 수훈에서 누락되지 않도록 했고, 군령을 어긴 사람은 엄하게 처벌했다.”
“전쟁이 끝난 뒤 겨울의 농한기를 이용해 교대휴가를 보내 농사일을 준비하게 했고, 노획품 가운데 의복과 무명, 베 등을 군사들에게 나눠줬다.”
이순신은 신상필벌을 엄격히 하기 위해 부하들의 신상과 특기들을 자세히 기록했다고 한다. 그의 이런 자세 덕분에 임진란 7년 동안의 일이 고스란히 담긴 <난중일기>가 탄생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