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4일) 종로서적이 최종 부도를 맞았습니다. 100년 가까운 전통을 지닌 한국의 대표적인 대형 서점이 2800만원 어치의 어음을 결제하지 못해 최종 부도 처리되더군요. 여러 기업들의 부도 기사를 많이도 접해봤지만 상장사나 등록사도 아닌 종로서적이란 회사의 부도가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드나든 사람들의 발걸음 만큼 깊게 패인 계단 모퉁이에서 느낄 수 있듯이 종로서적의 명성은 그 세월만큼이나 닳고 닳았습니다. 또 재정적인 어려움도 한 두 해된 얘기는 아니었더군요. 경쟁자들이 많다보니 장사가 잘 안될 거란 생각은 했었지만 이 지경까지 나빠졌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러고보니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와 같이 잘 차려진 대형 서점들이 들어선 지 오래인데다 최근 온라인 서점이 붐을 이루면서 저가 할인공세로 점유율을 늘려간 걸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하다" 싶더라구요.
최근 들어 실내 개선작업을 여러 차례 하긴 했지만 여전히 낡은 시설, 좁은 복도, 오르내리기 불편한 구조, 쾌적하지 못한 냉난방 시설 등은 어느 새 종로서적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을 정도니깐요.
그러나 그런 열악한 현실과는 달리 제게 종로서적은 "주름깊게 패여 보기 흉해도 언제나 달려가 따스하게 안길 수 있는 할머니 품"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런 느낌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비단 저 하나만의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대학 입학과 함께 서울 생활을 시작한 저에게 학교 주변의 "울타리"를 벗어나 눈 감고도 다닐 수 있는 곳은 종로 부근 정도였습니다. 제가 활동하던 야학이나 연합 동아리 모임이 종로에 있기도 했지만 "열에 아홉" 이상 친구, 선배들과의 만날 약속을 했던 종로서적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다니던 학교가 종로가 가깝기도 했지만 굳이 비싼 커피값 쓰지 않고도 맘껏 책 읽으면서 친구를 기다릴 수 있는 종로서적은 그만큼 편한 공간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지하철역 출구와 맞닿아 사람들로 붐비는 입구에 서있던 기억, 부대끼며 올라가던 그 계단도 항상 친구들과 함께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뿐인가요? 학술관련 동아리나 과내 소모임이 비교적 활발했던 시기였으니 노트 한 권에 볼펜 한 자루 들고가서는 눈치 안보고 이 책 저 책 들춰가며 필요한 부분만 베껴쓰는 특혜도 누릴 수 있었죠. 철퍼덕 앉아 책장을 넘기던 차가운 시멘트 바닥도 그런 "친근함"의 일부분이었죠.
나중에 보니 최종 부도가 나던 날 종로서적은 그 문을 꼭꼭 걸어 잠구고 있더군요. 오랫동안 잊혀졌던 종로서적에 대한 기억이 불현듯 오버랩되는 순간이더군요. 이날 낮부터 폐쇄됐고 문 밖엔 돈은 고사하고 책이라도 건져보려는 출판사 영업담당자들만 무리지어 모여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항상 시대 조류에 좇아가지 못해 낙오하는 자들은 생기게 마련이죠. 경쟁자들의 전략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그 배후에는 노사간의 갈등은 물론 창업자 후계를 둘러싼 내부 갈등까지 있었다니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종로서적의 몰락은 어쩐지 씁쓸한 뒷맛을 남깁니다. 1년이 지나도록 변변히 책 한 권 읽지 못하는 제 자신의 모습이 수많은 추억을 줬던 종로서적의 부도에 일조한 것 같다는 자책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어찌됐건 종로서적의 상징성 때문인가요? 아마존 등 온라인 서점이 크게 번성했고 "반즈 앤 노블" 같은 체인형태의 대형 서점이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뉴욕 맨하탄의 한 가운데에서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을 품어주고 있는 오래된 서점들을 이젠 부러워해야만 하나 걱정이 앞섭니다.
그리고 또 하나, 30대인 저에겐 "이제 종로에서 친구를 만난다면 약속 장소를 어디로 잡아야 하나" 이런 터무니없는 걱정도 뒤따라 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