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나마 전혜린은 여러 사람들에게 회자가 되니 다행인지도 모른다. 나는 얼마전에 화가 이인성이란 사람을 알게 됐다. 아직 그에 대해서 자세힌 모르지만 전혜린 만큼이나 매력있는 인물인 것 같다. 그에 대해서 궁금하다면 주소창에서 이인성을 적고서 클릭해보라. 여기에 그의 그림 <해당화>를 올린다.
그지요?? 이인성이란 인물 매력이 있는 것 같죠??
저도 지난 학기에 '미술의 이해'라는 수업 들으면서 자료들 찾닥 알게 되었는데.. 그림이 참 좋죠...
뭐 그림에 대해선 하나도 모르지만 그냥 좋더라구요...
대구 사람이고 뭐... 천재 화가고 최근 들어서 조명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느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봤는데.......
아, 찾았다. 호암미술관 홈페이지구나....^^
이인성은 누구인가?
‘조선의 천재’, ‘조선의 지보(至寶)’,‘양화계의 거벽(巨擘)’
일제시대인 1930년대 약관의 나이로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조선미전)에 혜성처럼 나타나 명성을 날렸던 이인성(李仁星)을 수식하는 당시 신문기사의 표제들이다. 1912년에 태어나 조선미전이나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문부성미술전람회와 같은 관전(官展)과 더불어 대구의 향토회전·남조선미술전람회, 일본의 광풍회전·전일본수채화회전 등 서울·대구·도쿄의 화단을 무대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던 그의 화력은 1929년(8회) 조선미전 입선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1944년(23회)까지 이어졌던 조선미전에 단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출품하여 줄곧 입선과 특선을 하였음은 물론 6회 연속 특선(1931-1936)과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여 불과 26세인 제16회전(1937년)에서는 동양화부의 김은호(1892-1979)와 함께 서양화부의 ‘추천작가’가 되는 영예를 얻고 조선미전을 대표하는 화가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한국근대미술사에서 1910-20년대가 유화나 수채화와 같은 새로운 서양화가 도입되는 기간이라면 1930년대는 그러한 새로운 화풍이 나름대로의 정착과 발전적 모색을 이루어가는 토착화의 시기이다. 이러한 새로운 화풍의 도입과 정착이 이루어지는 때에 평양과 더불어 근대기 지방 화단의 양대 축이었던 대구에서 나고 자란 아소(我笑) 이인성은 보통학교 졸업 후 당시 대구 미술계의 선구자였던 서동진(1900-1970)으로부터 수채화를 지도 받는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화가의 길로 나선 그는 조선미전이라는 당시 최고권위의 화가 등용문을 통해 스승을 능가하는 재주를 발휘하였고, 그를 아끼는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는 1931년부터 도쿄의 오오사마상회(王樣商會) 미술부에서 사환으로 일하면서 이듬해부터 태평양미술학교 야간부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유화와 수채화 등의 재료에 대한 관심과 실험을 심화하고 서구에서 유입된 인상주의나 후기 인상주의 경향의 화풍을 왕성하게 섭렵하였으며 당시 유행하던 ‘조선 향토색풍’의 작품을 여러 공모전에 출품하여 최고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1935년 일본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이미 유명한 화가가 돼 있었으며 대구 남산병원장의 딸과 결혼하고, 1936년 장인이 마련해준 현대식 아틀리에에 대구 최초의 사설미술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는 ‘이인성 양화연구소’를 개설하여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해방이 된 해인 1945년 서울로 이주한 그는 작고할 때까지 이화여중(현재 이화여자고등학교)의 미술교사를 지냈으며 1948년부터는 이화여자대학 서양화부에도 출강하였다. 1949년에는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으로 활약하여 미술계 중진의 자리에 위치하였다. 조선미전에서 몇 안 되는 한국인 추천작가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김인승(1911-), 심형구(1908-1962) 등이 동경미술학교 출신의 엘리트 화가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정식교육이라고는 보통학교만 마치고 일본에서의 유학도 거의 고학과 독학으로 완성하다시피한 그의 성공의 이면에는 철저히 천부적인 재능과 조형감각이 자리하고 있다.
자그마한 키에 유달리 하얀 피부, 오똑하고 날카로운 콧날, 예리한 눈초리, 내성적인 성격에 섬세하면서도 멋 부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조숙한 성공의 결과로 예술활동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자신만만한 행동양식을 보였다. 그러나 첫 부인과의 사별 이후 그의 가정사는 순탄치 않았으며 1950년 6·25동란의 와중 돌발적인 사고로 인해 서른 아홉이라는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박본수(삼성미술관 전임연구원)
전 '어느 가을날'이란 그림이 참 좋던데...
그림 올리는 방법을 몰라서.. ^^
첫댓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