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말하는 緣起法은
梵語 'Pratitya-Samutpa-da’로 서로 관련되어 함께 일어난다는 뜻인데 한역으로는 因緣生起를 줄인 말로 원인(因)이 조건(緣)에 따라 일어 나는 것을 말한다. 緣起하는 모든 사물은 一體가 無自性이기 때문에 空하다고 말한다. 緣起法은 일반적인 우주 법칙 으로서의 인과율 법칙과는 다르다. 고전과학의 인과율은 대상을 실체로 보는데 비해 연기법의 대상은 無自性한 空으로 보는 점이 다르기 때문에
연기법을 인과율로 생각해
일반 사물로 까지 확장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불교의 緣起法은 인간을 괴롭게 하는 苦의 발생 원인(因)과 조건(緣) 그리고 苦의 소멸 원인과 조건을 드러내기 위해 특화 된 불교 고유의 俗諦 世間의 법칙이다. 언설 넘어에 있는 眞諦에서는 諸法空相이기 때문에 緣起도 부정된다. 이러한 교학체계가 이해 되어야 業報는 있으나 作者는 없다는 말이나 眞空妙有, 함이 없는 함을 요달할 수 있다. 교화함이 없이 교화하라니 어쩌란 말인가? 여래가 항하사 수 만큼 많은 중생을 제도하고서 수보리에게 중생을 제도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어떤 연유인가? 중생이 空相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누구든 중생이란 생각으로 중생이라 말하면 천길 낭떨어지로 떨어지는 것이다. 말하는 순간 衆生相에 사로잡혀 떨어지는 것이다.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 다만 俗諦에서 통용 되는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실체가 空하기에 실체가 아닌 이름을 교화 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여래가 말하는 범부는 실체로서의 범부가 空함으로 실체가 아니라 俗諦에서 통용 되는 언설로 된 이름이 범부일 뿐이라는 뜻이다. 무슨 일을 하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이 하는 '함이 없는 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무엇을 하던 相에 취착하여 分別心1으로 하면 渴愛가 발현되어 탐진치의 삼독에 물들기 때문이다. 섬돌을 대나무 그림자가 쓸어도 먼지 하나 일지 않듯 모든 상을 여의고 대상에 취착 갈애함이 없이 행하라는 것이다. 佛法을 볼 때 어떠한 명제든 緣起• 無自性•空•假•中 이라는 틀로 구조화 하고 卽非是名의 공식에 대입하면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금강경에서는 住•修•斷이 반복 됨으로 각장의 說이 어디에 속하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께서도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마태복음 6:3)"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단순히 남을 의식하는
외식을 하지 말라거나 겸손하라는 정도가 아니다. 어찌 한 몸에 붙어 있어 연결된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겠는가? 우선 내 공로를 앞세울 수 있는 나를 비우라는 것이다. 내가 없는데 어찌 오른 손 왼 손이 있겠는가? 기부천사처럼 이름 없이 하라는 것인가? 그래도 구제하는 나는 아는데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그래서 보통 내가 이런 저런 구제를 했다는 것을 내세워 떠벌리지 않는 수준에서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했다고 여긴다. 我相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我相을 버리고 예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보시하고 구제해서 苦를 일으키는 취착 갈애로 인한 삼독으로 부터 보호해 惑•業•苦의 流轉緣起 고리를 원천적으로 滅하려는 것이다. 단순한 눈가림이 아니다. 불가에는 苦의 해결을 애매하게 말하지 않고 住•修•斷의 차제를 확대하여 구차제정(九次第定), 보리등론 등의 수행체계를 발전시켜 왔다. 따라서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는 방법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으로 출발한다면 불교의 次第를 원용하는 것이 필요 하다고 본다. 멀쩡한 나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자기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마련된 고도의 의식훈련과 마음공부 차제 또한 아버지의 품 안에 있는 것이기에 기독교 영성체계에 맞춰 원용하는 것이 하나의 지혜라고 본다. 농가에서 일을 할 때 농기구가 부족하면 옆집 농기구를 빌려 쓰는 것을 탓하지 않는다. 명상이라는 말만 꺼내도 기겁하는 교회 현실에서 심히 어려운 일이지만 최소한 찾아갈 수 있는 지도는 그려 주어 그리스도 안에서 보혜사 성령의 도움으로 相을 버리고 함이 없이 하나님나라 일을 할 수 있도록 스스로 한발 씩 내 디디게 함이 어떤가?
첫댓글 "교화하되 교화하는 바가 없다." 붓다가 너에게 들어오면 붓다를 죽이고 조사가 너를 장악하게 되면 조사를 죽이라! 이 기막힌 가르침을 여기서 만나게 됩니다. 그 누구에게도 억매이지 않는 가르침이 진정한 가르침이니 그 가르침을 받들어 얽매임과 옭아맴을 벗어나 나를 찾아봅니다. 주신 해석이 獨座大熊峰 독좌대웅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