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웅변정신을 실천한 현대 웅변가 10인
김대중, 김상현, 이석점, 신순범, 주준수, 이종래, 정진기, 김기태, 편부범, 심긍보
그들의 삶과 웅변 정신이 역사가 되다.
▰ 김대중
인류의 평화에 기여한 행동하는 웅변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긴 정치지도자이다. 그리고 그는 뛰어난 인품과 설득력으로 국민의 마음을 움직였던 대표적인 웅변가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탁월한 말솜씨와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으로 주목을 받아왔으며, 평생을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평화와 국민통합을 위해 헌신해온 지도자이다.
그는 목포상업고등학교 시절부터 웅변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역량은 훗날 정치지도자로 성장하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특히, 그는 1957년 대한웅변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웅변운동과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그 당시 웅변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민족정신을 계승하고, 국민 계몽과 민주시민 의식을 일깨우는 사회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 시기, 김대중은 웅변을 통하여 국민과 소통하고, 시대정신을 전하는 일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였으며, 이러한 경험은 그의 정치 철학과 대중연설의 기반이 되었다.
그는 이후 동양웅변전문학원을 설립하여 수많은 인재와 지도자들을 양성하였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훗날 정치권으로 진출하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고, 또 다른 인재들은 웅변단체를 통한 웅변운동에 힘쓰거나 전국 각지에서 국민 계몽 강사로 활동하였다. 특히, 김상현을 비롯한 인물들은 웅변을 통해 정치적 기반을 다졌으며, 이는 웅변교육이 정치적 리더십 형성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김대중의 웅변 활동은 그의 정치적 성장과도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그는 웅변을 통해 국민과 소통하는 방법을 터득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무대에서 강력한 설득력을 발휘하였다. 그의 연설은 가는 곳마다 군중을 들끓게 하였고, 그를 대한민국의 정치지도자로 우뚝 서게 하였다.
또한 그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것도 그가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을 이끌며 여러 차례 투옥과 가택 연금을 당했으며, 망명 생활을 겪으면서도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시아 지역의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였으며,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힘썼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남북 화해와 한반도 평화증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른바, 그가 추진했던 햇볕정책은 북한과 대화와 교류를 확대하였고, 2000년도에는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화해 분위기 조성에 기여하였으며, 이러한 공적이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그는 신념에 따라 시대를 바꾸고자 했던 민주주의의 웅변가였으며, 그의 연설은 국민의 가슴에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심어주었고, 그는 대결의 시대에서 화해와 평화의 시대로 만들고자 끊임없이 설득한 ‘행동하는 양심’이요, 평화의 웅변가였다.
▰ 김상현
민주주의의 횃불을 밝힌 웅변운동가
김상현은 1965년 웅변인 주준수, 서호석 등과 함께 대한웅변인협회 이사로 참여하여 활동한 웅변인 출신 정치지도자이다.
김상현은 1956년 동양웅변전문학원에서 수강생으로 김대중과 처음 만나 지도를 받았으며, 그는 웅변술뿐 아니라, 웅변을 통해 사회와 국가를 생각하는 민주 시민의식을 배웠으며, 정의를 향한 용기와 실천이 웅변 정신이라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었다.
김상현은 20대 젊은 나이에 1960년 4,19혁명을 맞았으며, 웅변계 동지였던 주준수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김상현이 방송국으로 달려가 직접 혁명 소식을 알렸다고 한다.
그는 훗날 자유당 독재 청산과 민주주의의 회복, 그리고 혁명 동지들의 거룩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4,19혁명동지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그 뜻을 국민의식으로 승화하기 위한 4,19정신 전국웅변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으며, 1984년에는 김영삼과 함께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목표로 조직된 민주화추진협의회의 공동의장 권한 대행을 맡아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김대중을 따라 민주당에 입당하여 정당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6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6선 의원으로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며 정치지도자로 우뚝 서게 되었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정치 여정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으며, 1972년 10월 유신 이후 군부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징역을 사는 것을 시작으로 김영삼, 이기택과 함께 3선 개헌 반대 투쟁 등 군사정권 당시 대립각을 세운 정치인 중 한 명이었다.
특히, 그는 1979년 YMCA 위장 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함석헌 등과 함께 국군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는가 하면,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상현은 유신 독재의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념을 지키며 6선 국회의원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런가 하면, 김상현은 웅변가의 열정과 민주투사의 신념을 함께 지녔던 정치인이었으며, 웅변의 힘으로 국민과 소통하며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대표적인 웅변인 출신 정치지도자였다.
▰ 이석점
웅변문화 발전에 헌신한 웅변지도자
이석점 선생은 대한민국 웅변운동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오랜 세월 헌신하며 대한웅변인협회의 역사와 함께해온 대표적인 웅변운동가이자 웅변계 지도자였다.
함경도 출신인 그는 어린 시절 북한 지역에서 웅변을 배우며 웅변술을 익혔고, 해방 이후 혼란과 격변의 시대 속에서도 웅변단체 활동을 통한국민 의식 개혁에 힘써왔다.
그는 1949년 청년웅변협회 활동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웅변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평생을 웅변인협회와 함께하였다. 특히,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적 비극 속에서도 웅변운동에 대한 그의 열정은 대단하였으며, 6,25 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면서도 협회의 목 간판을 가슴에 품고 피난길에 올랐다는 일화는 그가 협회를 단순한 단체가 아닌 자신의 삶과 사명으로 여겼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석점 선생은 1952년도 한국웅변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전쟁 이후 혼란한 사회 속에서 웅변계 재건에 힘썼고, 웅변을 국민정신 함양과 민주시민 교육의 중요한 수단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1971년 대한웅변인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도 단체 명칭 변경과 조직 재편이라는 중요한 전환기에도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웅변교육을 통해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웅변대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도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웅변 연사로서 갖추어야 할 올바른 국가관과 도덕성, 그리고 사회적 책임감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선생은 평생을 협회와 함께하면서 웅변인의 권익과 후진 양성, 그리고 웅변문화의 확산을 위해 묵묵히 봉사하였다. 특히, 전쟁과 혼란 속에서도 웅변운동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그의 삶은 한국웅변사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석점 선생과 함께해 왔던 웅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선생은 1949년 청년웅변협회 창립과정에서부터 1952년 재건과정에서도 실질적으로 협회의 제반 업무를 담당했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노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 전까지도 그는 웅변인협회와 인연을 이어가며 후배들에게 웅변인의 사명과 정신을 일깨워주었다. 이석점 선생의 삶은 곧 대한웅변인협회와 함께한 세월이었으며, 한국 웅변계 발전과 국민정신 계몽에 헌신한 대표적 웅변운동가의 길이었다.
▰ 신순범
민주발전에 기여한 신념의 웅변운동가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에서 태어난 신순범은 학창시절부터 웅변술 연마에 매진하였으며, 코리아헤럴드 주최 영어웅변대회 대통령상을 비롯하여 전국웅변대회 2회 대통령상 수상이라는 빛나는 성취로 웅변계에서 주목받는 연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웅변은 단순한 재능의 산물이 아니라, 고향의 바닷가 야산에 올라가 홀로 호흡과 발성 훈련을 하고, 수없이 반복되는 연습을 통해 자신만의 울림이 있는 웅변술을 완성해나간 노력의 결정체였으며, 그의 이러한 자기 수렴의 정신은 이후 정치지도자로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웅변운동으로 이어졌다.
1965년 대한웅변인협회 이사로 활동하며 조직 운영을 책임졌고,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서 웅변학원을 설립 운영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정치에 입문한 이후에도 그의 웅변역량은 더욱 빛을 발했다. 그는 고향 지역구에서 신뢰를 얻어 4선 국회의원으로 당선이 되었고, 제1야당 최고위원으로서 당을 이끄는 한편 국회 농림수산위원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책 활동을 펼쳤다. 그의 연설은 서민적이면서도 진정성 있는 호소력으로 일반 국민과 정치권을 움직였다.
또한 그는 인재육성을 위한 장학사업을 위해 사재를 아끼지 않았고, 민주화운동 단체를 이끌며 한국사회의 민주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이것은 바로 웅변이 개인의 성공을 넘어 공동체로 이어져야 한다는 그의 철학을 모여주는 것이다.
정계를 떠난 후에도 그는 삶의 열정을 잃지 않았다. 아코디언 연주와 판소리, 그리고 뛰어난 암기력을 바탕으로 거리에서 시민들과 호흡하며 자유로운 예술가적 삶을 살아갔다. 이는 그가 권위나 직위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 본연의 소통을 추구하는 그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웅변가 신순범은 웅변을 통해 자신을 단련하고, 사회에 봉사하며, 정치와 문화의 영역을 넘나든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생애는 웅변이 개인의 성공을 넘어 국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로 대한웅변사에도 길이 남을 본보기이다.
▰ 주준수
웅변 정신으로 살아온 애국주의적 웅변운동가
한국 웅변계의 원로인 주준수 선생은 평생을 웅변운동에 몸 바쳐오신 후세에 귀감이 되는 웅변가이다. 그리고 그는 웅변을 통하여 국민정신 계몽과 사회의식개혁에 힘써온 실천적이고 애국적인 웅변운동가이다.
193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언변과 지도력을 보였으며, 고등학생 시절부터 웅변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웅변은 사람의 정신과 사상을 바로 세우는 힘으로 인식하며 일찍부터 웅변인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1965년 대한웅변인협회의 총무부장과 이사로 참여하여 김상현, 서호석, 이석점 선생 등과 함께 협회의 운영 효율화와 조직 기반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시, 한국 웅변운동이 사회계몽과 국민정신 함양 운동으로 자리 잡아 가던 시기에 그는 협회의 핵심 웅변가로 활동하며 조직의 발전과 웅변문화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1997년도에는 자문위원으로 협회의 저변확대와 웅변계의 발전 방안을 제시하며 자문에 힘썼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김대중이 설립한 동양웅변전문학원에서 강사로 활동하며 웅변교육자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이후, 광화문 인근에 대한웅변학원을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후진 양성과 웅변교육에 헌신하였다. 그는 웅변교육 지침서인 ‘비결웅변술’을 직접 저술 출간하여 체계적인 웅변교육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수많은 연사와 지도자를 배출하였다.
그리고 그는 한국홍보문제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정부의 시책에 따른 강연 활동에 주력하였다. 그에 이러한 강연 활동은 일제강점기 구국주의적 웅변이 우리나라의 국권을 되찾아 광복을 맞이했듯이 현대사회에서의 웅변은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하여야 한다는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통일부의 교육위원으로 통일 안보강연을 하였으며, 서울시 민방위정신교육 강사로 위촉되어 시민 정신과 안보의식 함양을 위한 강연 활동을 펼쳤다. 그런가 하면, 매 정권마다 새로운 국가 시책이 발표되면 정부로부터 전문강사로 위촉을 받아 강연 활동을 하며 애국주의적 웅변운동을 펼쳐왔다. 그리고 그의 강연은 언제나 민족혼이 담겨있었으며, 논리적 설득과 시대의식을 겸비한 강의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특히, 웅변가로서 동아일보 문화센터에서 운영한 그의 강좌는 큰 인기를 끌었다. 그는 성인을 대상으로 화술과 웅변강좌를 개설하여 강의를 하였으며, 매 회차마다 조기에 마감될 정도로 많은 수강생들이 몰렸으며, 그 강좌는 무려 30여 년 간이나 지속되었다. 이것은 그가 시대와 사회를 읽어내는 교육자이자 정신적 지도자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주준수 선생은 대한웅변인협회의 창립이념에 따라 평생을 웅변인으로 살아오면서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해왔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웅변인의 사명과 책임을 실천해 왔으며, 후세 웅변인들이게 귀감이 되는 애국적 웅변운동가요, 현대 웅변계의 대표적 지도자로 존경받고 있다.
▰ 이종래
- 민족정신을 계승한 웅변계의 지도자
이종래 선생은 대통령상 수상 웅변가로서 평생을 웅변운동과 민족정신의 계승에 바쳐온 한국 현대웅변사의 원로 지도자이다.
충청남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애국선열들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성장하였다. 충청남도는 3,1운동과 항일 무장 투쟁의 전통이 강한 고장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지역이다. 이러한 역사적 문화는 그의 웅변 정신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웅변에는 언제나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강한 신념과 정의감이 담겨있었다. 그이 음성에는 선열들의 민족혼이 서려 있었고, 그이 연설은 청중들에게 애국심을 일깨우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젋은 시절인 20대 후반에 대한웅변인협회 간부로 참여하여 본격적인 웅변인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김상현, 주준수, 서호석, 이석점 신순범, 정진기 선생 등과 함게 한국 웅변운동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며 새대를 대표하는 웅변인의 길을 걸어왔다. 또한 그는 전국웅변대회에서 강렬한 신념과 호소력 있는 열변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한 웅변가로 줄곧 웅변인협회와 함께하며, 조직의 발전과 웅변 정신의 계승에 힘써왔다.
특히, 그는 1980년 제30대 회장에 취임한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회장으로 협회를 이끌며 오랜 세월 한국 웅변의 중심축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선배 웅변인들이 지켜온 정신과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시대 변화에 맞는 새로운 웅변문화의 방향을 모색하며 협회의 안정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하여 웅변의 이론과 실천 경험을 후대에 남기고자 노력하였다. ‘연설과 축사’, ‘웅변가이드’, ‘성공하는 리더의 식사축사’, ‘모범웅변원고선집’(이상 일신서적 출판)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하여 웅변교육의 길잡이 역할을 하였으며, 후배 웅변인 양성에 힘썼다.
그는 정당 활동과 사회교육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쳐다. 민주자유당 중앙정치교육원 교수로 활동하며 당원교육과 정치의식 함양에 기여하였고, 서울시 민방위 정신교육과 안보강연 등을 통하여 자유민주주의와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국민정신 함양에 중점을 둔 계몽운동을 하였다.
아울러 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효창원 8위선열기념사업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선열 정신 계승 운동에 앞장서 왔다. 그리고 효창원의 애국선열들을 기리는 각종 추모사업과 정신선양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의 역사와 민족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처럼 웅변가 이종래 선생이 걸어온 삶의 발자취를 볼 때, 그는 강한 민족정신과 투철한 신념을 바탕으로 오랜 기간 대한웅변인협회를 이끌어왔으며, 웅변을 통해 후진 양성과 정신계몽은 물론, 선열 정신 계승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헌신해온 현대 웅변운동가요, 원로 웅변지도자였다.
▰ 정진기
- 신념과 철학으로 웅변인의 길을 밝힌 선각자
웅변가 정진기 선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웅변의 대가이며, 지성과 인품을 겸비한 존경받는 웅변계 지도자이다.
1960년대 중학생 시절 웅변 연사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으며, 성동공업고등학교 변론부장과 동국대학교 변론부장으로 학생 웅변운동을 이끌었다. 그리고 군 복무 시절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상 3회를 비롯하여 3부요인상과 장관상, 군 참모총장상 등 무려 60여 회에 이르는 수상 경력을 쌓았고, 각종 웅변대회를 석권하며 당대 최다 입상기록을 세운 웅변가이다.
특히, 그는 1962년 국산품장려 전국웅변대회에서 윤보선 대통령의 친필 상장을 받았으며, 다음 해인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대통령상 수상에 이어 64년도에도 기미독립운동 43주년 기념 전국웅변대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3년 연속 대통령상 수상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정진기 선생이 웅변을 할 때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가슴으로 말하는 사상과 철학이 뚜렸한 신념의 웅변가였다. 실제로, 선생을 잘 아는 웅변인들의 전언에 따르면 선생의 웅변에는 사람의 신체에 피가 흐르듯 언제나 강한 웅변 정신이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선생은 웅변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생 시절부터 웅변운동가였다. 1961년 동국대학교 변론부 주최 전국웅변대회는 그가 집행위원장을 맡아 치러냈으며, 연 이틀간이나 진행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리고 60년대 초, 서울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거행된 대한민주청년회 주최 용공세력 규탄 시민궐기대회의 5천여 군중 앞에서 연설을 하는 등 반공 운동에도 앞장선 대학생 웅변운동가였다. 이는 곧 선생이 웅변운동을 활성화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정진기 선생은 1971년 4월 27일에 치러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찬조연설자로 탁월한 웅변 실력을 인정받아 정부의 특채로 성업공사에 입사하여 과장에게 주어진 자산의 관리업무를 수행하며 책임을 다해 왔다.
이어 한국토지개발공사로 자리를 옮겨 감사와 홍보실장, 그리고 재개발사업처장 등의 임원으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남부권 택지처장과 부산지사장을 비롯하여 인천과 대구지사장을 두루 역임하며 한국 토지 자원의 효율적 활용을 위한 조직의 운영과 지역개발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국토지공사 감리공단 감사를 끝으로 건설부 산하 공기업에서 웅변가적 사명감을 바탕으로 28년 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명예롭게 정년 퇴임을 맞이하였다.
한편, 선생은 대학생 시절이던 1965년 대한웅변인협회 학생부장으로 참여하여 김대중, 김상현, 신순범, 이석점 등과 함께 협회의 기틀을 다지고, 1997년도에는 협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협회 조직 강화와 웅변문화 창달을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런가 하면, 정부 기관에 봉직하면서도 웅변에 대한 애정과 협회에 대한 소속감은 변함이 없었으며, 퇴직 후 협회의 제47대 총재로 추대되어 전국적 웅변운동 확산에 앞장섰고, 협회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그뿐 아니라, 선생은 아흔을 바라보는 9순의 연세에도 상임고문의 위치에서 변함없이 협회를 이끌며 웅변운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웅변가 정진기 선생의 일생을 볼 때, 젊은 시절 그의 웅변대회 입상 전적은 단순히 상을 받은 기록이 아니라, 웅변을 할 때마다 민족혼을 담아 가슴으로 외친 값진 웅변의 훈장이었다. 그리고 그 웅변 정신이 연설 현장에서 빛났으며, 정부 공기업의 중요한 국정과제를 수행하며 인생을 보람있게 살아온 또 다른 웅변운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대 웅변가 정진기 선생의 웅변 정신은 시대가 변해도 영원할 것이며, 그의 삶과 업적은 대한웅변사와 함께 후세 웅변인들의 등불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 김기태
- 민족정신을 불태운 웅변계의 등불
정의와 애국의 웅변 정신을 실천한 웅변가 김기태 선생은 전라남도 장흥군 출신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웅변 실력을 인정받아 전국 규모의 각종 웅변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특히, 한국반공연맹이 주최한 전국웅변대회에서 최고의 영예인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대한민국 정상급 웅변가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공수특전여단에서 병장으로 군 복무를 마쳤으며, 국가유공자로 대한상이군경회 이사를 역임하며 12만 보훈 회원의 권익 향상과 복지증진을 위해 노력하였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국가유공자들의 명예와 권익을 지키는 일에도 앞장서왔다. 또한 한국내외문제연구소 이사를 역임하였으며, 사단법인 통일미래연구원 부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국가 안보와 통일정책 연구에 기여하였다. 국가보훈처와 육군 문무대 강사로도 활동하였으며, 공무원 연수원을 비롯한 전국의 대학과 각종 기관에서 안보 강연을 실시하여 국민의 국가관과 안보의식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학술 분야에서도 그의 활동은 돋보인다. 그는 한국웅변학술연구원을 설립하여 웅변을 학문적 대상으로 발전시키고, 체계적인 연구와 교육을 통해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오랜 기간 대한웅변인협회 이사와 부이사장, 그리고 감사와 부회장, 수석 부총재 등을 역임하며 협회의 발전과 웅변문화의 저변확대에 크게 기여하였고, 현재는 고문으로 협회의 버팀목 역할을 하며 대한민국 웅변운동의 발전과 웅변문화 창달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정치 분야에서도 그는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1991년 고향인 장흥군에서 제4대 전라남도 도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이 되었다. 당시, 전남지역은 민주당의 정치적 기반이 매우 강해서 전체 당선자 74명 가운데 73명이 민주당 공천 후보였으며, 그는 유일한 무소속 당선자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는 그의 높은 인품과 봉사 정신은 물론, 후보자 합동연설회에서 보여준 뛰어난 웅변 실력이 지역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인 결과였다.
그는 이어 5대 도의원 선거에서도 재선에 성공하여 더욱 폭넓은 의정 활동을 펼쳤다. 특히, 농어민의 삶의 질 향상과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제안하며 지역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의회 활동에서도 도정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여 당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는 도정질의를 통해 도의 행정 부재를 강도 높게 질타하며 본회의에서 장장 5시간 30분간 질의를 하는 독무대를 연출하였으며, 당시 각종 언론이 집중 보도를 하였는가 하면, 동료 의원들은 물론 도민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또한 그는 도의회 예산결산위원회에 참여하여 공정하고 적정한 예산 분배에 기여한 공로로 2회에 걸쳐 도의회 의장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역량을 인정받아 퇴임 후에도 공기업인 열병합발전소 감사로 일하면서 기업경영의 투명성과 효율성에 기여하였고, 주식회사 한국냉장의 사업본부장으로 재직하며 냉장식품의 유통구조 근대화와 저온 유통체계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김기태 선생은 정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김대중 대통령과 뜻을 함께하며 신민당에 이어 평화민주당 중앙당 대의원과 전남도지부 운영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민주연합청년동지회 교수와 대통령 선거 중앙 유세위원으로 유세 활동을 하며 정권교체와 민주주의 발전에 힘을 보탰다. 그는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김대중 새천년민주당 총재의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그는 이웃을 위한 봉사 정신도 빛났다. 서울 강남의 대단지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장으로 선출된 그는 조합에서 부당하게 집행한 수 십억 원의 예산을 환수하여 주민들에게 돌려주는 봉사 정신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처럼 웅변가 김기태 선생은 웅변가, 국가유공자, 안보 강사, 학술연구자, 지방의원, 사회봉사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해 온 실천적 웅변운동가요, 웅변인의 길을 밝힌 선각자이다.
▰ 편부범
민족정신과 웅변 정신으로 일군 한국 웅변운동의 새로운 지평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에서 태어난 웅변가 편부범은 어려서부터 지역에 깃든 선열들의 민족정신을 자연스럽게 접하며 성장하였다. 홍성군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역사가 깊은 고장으로 이러한 지역적 정신문화는 그의 삶과 웅변 정신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꾸준하게 웅변 실력을 연마하였고, 1982년 충무 정신 선양 전국웅변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민족정신과 국가관이 투철한 대한민국 정상급 웅변가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는 자신의 웅변 역량을 개인의 명예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서울 종로에 있는 YMCA의 웅변교육운동 프로그램을 운영하였고, 민방위 정신교육 강사로도 활동하면서 국민 정신교육과 사회교육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직접 웅변학원을 설립하여 후진 양성과 인재교육에 힘썼다. 특히, 언론사인 동아일보 문화센터에서 오랜 기간 일반 성인을 대상으로 화술과 지도록 훈련을 담당하면서 웅변교육의 저변을 넓혔다.
그가 본격적으로 웅변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1998년 12월 5일 대한웅변인협회 제41대 회장에 취임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취임 이후 개인의 웅변 활동을 넘어 협회 전체의 조직과 위상을 발전시키는 데 역량을 집중하였다. 먼저, 송파구 지역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조직의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하였다.
특히, 그의 지도력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협회의 대외적 위상을 높이기 위한 적극적인 인사 영입이었다. 그는 4선 국회의원과 광주광역시장을 역임한 박광태 의원을 총재로 추대하고, 이어 6선 국회의원과 여당인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한 김무성 의원을 총재로 추대하는 등 사회와 정치권의 지도자급 인사들과 협력관계를 구축하였다.
그런가 하면, 그의 가장 큰 업적 가운데 하나는 사회단체로 활동해오던 협회를 사단법인으로 전환하여 조직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이는 협회의 법적, 사회적 위상을 높이고, 조직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편부범 회장은 제41대에 이어 제43대에 이르기까지 3연임하며 웅변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재임 기간 동안 매년 백범 정신 선양 대통령상 전국웅변대회를 개최하여 민족정신과 애국정신을 웅변문화와 접목시켰으며, 바다의 날 기념 대통령상 전국웅변대회도 2년 연속 개최하는 등 전국 규모의 웅변대회를 지속적으로 확대하였다.
그의 웅변운동은 사회봉사와 나눔으로도 이어졌다.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생들과 함께 농촌 의료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등 웅변인의 사회적 역할을 웅변교육과 대회에만 한정하지 않고 실천과 봉사의 영역으로 확대하였다.
편부범의 웅변운동에는 두 가지 정신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하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의 삶에 스며든 민족정신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깨우고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웅변 정신이다. 그는 이 두 가지 정신을 결합하여 국가와 사회를 위한 교육 운동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그의 투철한 사명감과 책임감, 그리고 진정성은 주변 사람들의 신뢰를 이끌어내는 인품으로 나타났으며, 강한 추진력과 리더십으로 연결되었다. 그가 협회의 조직을 확대하고 법인화를 이루며 전국 규모의 웅변대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지도자로서의 품성과 실천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편부범 회장은 현대 웅변사에서 가장 왕성하게 웅변단체의 조직과 위상을 강화하였을 뿐 아니라, 웅변문화의 저변확대를 위하여 크게 기여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민족정신과 웅변 정신을 바탕으로 대한웅변인협회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대한민국 웅변운동의 발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지도자이다.
▰ 심긍보
- 웅변 정신으로 진실을 말해온 웅변가
웅변가 심긍보는 학창시절부터 웅변에 남다른 열정을 품고 평생을 웅변운동과 함께해 온 대표적인 웅변운동가이다. 그는 서울 한영고등학교 변론부 학생으로 활동하면서 웅변의 기초를 다졌으며, 전국적으로 웅변 열기가 뜨거웠던 1960년대 말부터 각종 웅변대회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는 타고난 설득력을 바탕으로 웅변대회에서 잇따라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특히, 그는 전국웅변대회 최고상인 전체특상으로 국회의장상을 받음으로써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웅변가로서 큰 기대를 받았다.
웅변가 심긍보는 일찍부터 웅변을 개인의 성공을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 보지 않고,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한 봉사의 길로 인식하였다. 그는 이러한 신념으로 학창시절인 1960년대 말에 대한웅변인협회에 참여하였다.
그는 어려운 시기인 1990년대에 수석 부이사장으로 활동하며 협회의 주요 정책을 수립하고 원활하게 추진될 수 있도록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협회의 주요 사업은 물론, 대회를 비롯한 각종 행사를 원활하게 추진할 수 있도록 하여 조직의 활성화와 웅변문화 창달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런가 하면, 그는 웅변이 국민을 바르게 이끌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꾸준히 활동하며 웅변운동에 헌신해 왔다.
그의 웅변은 언제나 신념과 소신이 뚜렷하였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국가를 위한 올바른 가치관을 확산시키기 위한 웅변을 하였으며, 시대가 요구하는 책임과 사명을 중시하였다. 또한 그는 웅변을 하는 동료들 간에도 언제나 품위를 잃지 않고 중심을 잡았으며, 신념을 바탕으로 진실을 말하고 바른길을 제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웅변가 심긍보의 또 다른 장점은 사람을 아끼고 조직을 하나로 묶는 공동체 정신이다. 그는 동지애가 매우 강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선후배 간의 예의와 의리를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겨왔다. 서로를 존중하고 협력하는 협회 문화를 만드는 데 앞장섰고, 회원간 화합과 결속을 위해 언제나 솔선수범하였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구성원들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수행해 왔다.
특히, 그는 대한웅변인협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협회의 위상을 높였고, 웅변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는 화려하게 앞서 나가기보다는 묵묵히 조직을 뒷받침하는 리더십을 실천하며 협회의 신뢰를 받는 지도자로 자리매김하였다.
한편, 그는 기업인으로서도 성실한 신뢰를 바탕으로 사업을 경영하며 성공적인 기업활동을 이어왔다. 그는 사람과의 약속을 소중히 여기고 정직과 책임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 기업을 운영하였으며, 이러한 경영철학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얻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사업에서도 원칙을 지키고 사람을 존중하는 자세를 실천함으로써 웅변가의 올바른 품격을 생활 속에서 보여주었다.
웅변가 심긍보는 언제나 국가와 사회를 먼저 생각하는 애국심을 바탕으로 살아왔다. 그는 웅변을 통해 올바른 국가관을 확산시키는 데 힘써왔으며, 의리와 신뢰를 바탕으로 함께 성장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해 왔다. 그의 삶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실천의 삶이었으며, 웅변가가 갖추어야 할 책임과 품격을 몸소 보여주었다.
오늘날에도 그는 변함없이 웅변에 대한 애착심과 사명감을 간직한 채 후배 웅변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아오고 있다. 그의 굳은 신념과 애국심, 그리고 의리를 중시하는 든든하고 성실한 생활 태도는 한국 웅변계의 지도자상이 되고 있으며, 그의 삶은 우리나라 웅변운동의 발전을 위해 헌신해온 대표적인 웅변운동가로 존중받고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