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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스(Ephesus)
v 현지명 - 셀축(SELCUK), 성서명 - 에베소 v 관련성경 - 행 18:19
그 비문에 Apasas라고 불렸던 도시이다. 그러나 역사에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리디아(Lydia) 왕국의 크로수스(Croesus)왕이 이 도시를 기원전 560년 에 처음으로 침략하면서이다.
그 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페르시아와 그리스사이의 각축장으로 변해 때로는 파괴되고, 때로는 융성하면서 영고성쇠를 거듭했다. 즉,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유명한 델로스(Delos)동맹이나, 그리이스의 도시국가와 페르시아 간의 펠레폰네소스(Peloponnesos) 전쟁도 이 시기에 에페스가 위치한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용돌이 속의 에페스도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평온을 되찾고 융성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에는 그의 장군 중에 한 사람이었던 리시마쿠스(Lysimachus)가 이곳을 지배하면서 피온산 기슭에 새로운 도시의 건설을 명하여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은 바로 이 시대 때부터의 유적이다.
그 후 로마가 지배하면서 아시아의 수도를 페르가뭄(Pergamum)에서 이 에페스로 옮기고 도시를 아름답게 꾸며 나갔다. 안토니우스가 그의 정적 옥타비아누스(후에 아우구스트스 황제)와 대치하던 중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기원 후 1세기에 에페스는 그리스도인 들에게 중요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7-8세기 들어와 다른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아랍인들의 침략을 감수해야 했으며, 결국 1304년 오스만 투르크의 수중으로 떨어져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동안 잦은 지진과 이 지역을 흐르는 멘델레스 강의 범람으로 지각 변동에 의해 오늘날 바다는 이곳에서 5Km떨어진 쿠샤다스 지역까지 밀려나가 오늘날은 내륙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v 사도요한의 교회 37-42년 사이에 그리스도교 전도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 받고 성모마리아와 함께 에페스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냈다. 또한 사도 바울도 그의 2,3차 전도 여행에 에페스를 방문하여 선교를 하면서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64년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밖에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 에페스 교인들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도미티안 황제 때에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지중해 연안의 파트모스(성서에 밧모섬)섬 으로 유배되어 이곳에서 대리석을 채취하는 중노동을 하면서 "계시록"을 쓰게 된다.
그 후 도미티안 황제가 피살되자 유배에서 풀려나 에페스로 돌아와 "요한복음"을 썼다. 비잔틴제국 시에 그의 무덤이 있는 자리에 사도 요한의교회(The Church of St. John)가 세워졌다.
v 셀축 성 사도요한의 교회 북쪽으로 언덕 위에 높이 솟아있는 이 성은 원래 비잔틴 시대에 지어졌으나 후에 터키인들이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해 요새화 하였다.
v 이사베이(Isa bey)모스크 사도요한 교회의 서쪽 끝에서 내려다 보이는 이사베이 모스크는 1375년 셀축 투르크의 술탄인 이사베이에 의해 세워졌다. 많은 부분이 지진으로 손상되었지만 그 당시의 건축양식을 엿 볼 수 있는 좋은 본보기이다.
v 아르테미스 신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 그리스 신화의 아르테미스(Artemis-성서의 아데미))신은 원래 달의 여신으로 로마 신화의 다이아나(Diana)여신에 해당된다. 그러나 아나톨리아의 지중해 도시국가에서는 아르테미스가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이 되었다.
이 여신의 가슴에 있는 모습은 처음에는 유방의 모습으로 생각되었으나 후에 이것이 황소의 고환임이 판명이 되었다. 이것은 아르테미 신전에 바쳐진 황소의 고환을 묘사한 것인데, 고환은 "씨앗과 풍요"를 상징하는 것 이다.
이 신상의 치마부분에는 사자, 황소, 스핑크스 등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아르테미스가동물의 보호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세계 최초의 대리석 건물로서 127개의 기둥이 바치고 있는 처마도리(Architraves) 하나의 무게만도 24톤의 무게가 나가는데, 그 당시의 장비를 감안해 볼 때 어떻게 그러한 무게의 대리석을 기둥높이(17.65m) 까지 들어 올릴 수 있었을가? 이것이 아직도 불가사의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신전은 7차례나 파괴되고 재건되었으나 마지막으로 AD 125년 코트족(Goths)에 의해 파괴, 약탈된 후로 다시는 재건하지 못하고 이곳의 대리석은 사도요한의 교회와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성당을 짓는데 사용되어 오늘날 그 웅장한 자취는 찾아 볼 수 없고, 오직 한 개의 기둥만이 그 옛날의 영화를 말없이 전해 줄 뿐이다.
v 고고학 박물관 에페스 및 아르데미스 신전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모두 이 박물관에 소장되어 그 역사의 향기를 풍기고 있다. 그 중 중요한 것은 아르테미스 신상을 비롯하여 Eros의 조각, 소크라테스의 조각, 프레스코 벽화 등 이다.
v 잠자는 일곱 사람의 동굴 기독교 박해시대에 로마제국 내에서 기독교인들은 황제의 신전에 짐승을 제물로 바치고 황제의 신에게 경배하도록 강요 당하였다. 이를 거절한다면 이는 로마의 적으로 간주되어 박해를 받았다. AD 250년경 데시우스(Decius) 황제시대에 7명의 젊은 기독교 신자가 이러한 박해를 피해 이 동굴로 피신했다. 이들은 어느날 동굴에서 잠에 빠져 한동안 자다 일어나 음식을 구하기 위하여 시내에 나갔다가 자신들이 하루 밤이 아닌 200년간을 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는 이미 기독교가 공인이 되어 로마제국 어디든지 기독교가 전파되어 있을 때였다.
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이 사건을 전해 듣고, 당시 각 교회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부활의 증거로 받아 들였다. 그 일곱 사람은 나중에 죽은 후 화려한 장례식과 함께 이 동굴에 다시 묻혔다.
에페소 가는중에 일행과 점심식사중(95년)
가죽옷 가계의 폐션쇼
바실리카(Basilica)의 원주들 당시 도시의 중심이었던 '바실리카'가 있었던 자리이다. 바실리카는 당시 주식교환이나 경제활동이 이루어졌던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에페서스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쿠레테스(Curetes) 거리로서 왼편 저 멀리 보이는 에페서스의 백미인 켈수스 도서관과 더불어 트라야누스 분수와 하드리아누스 신전 그리고 길바닥에 장식된 아름다운 모자이크 등 여러 볼거리로 인하여 인파가 제일 많이 몰리는 데 입니다.
시 공회당(프리타네이온:Prytaneion) 이곳은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봉헌된 시 공회당이다. 에페스는 정치적으로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아 독자적인 행정관이 있었으며 또한 민주적으로 선출된 통치기관으로서 민회관과 순회 재판소가 있었으며 기타 민간 기구들이 많이 있어서 자치도시로서의 활발함이 넘치고 있었다.
프리타네이온은 당시 자치시의 시청사로서 모든 시정의 중심지였다. 또 이곳에는 도시의 생명을 상징하는 성화가 밝혀졌으며 시민들 중에서 선발된 사람에게 성화를 지키게 함으로써 단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도미티안 신전(Temple of Domitian) '주인이자 신(dominus et deus)'이라고 부르게 했다. 자신의 신전을 곳곳에 세우고 황제 숭배를 강요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사도 요한은 에페스 교회의 감독으로서 당연히 황제 숭배에 대하여 앞장 서서 반대하였다. 그가 황제 숭배를 거역한 결과 밧모섬으로 유배를 가서 약 18개월 동안 살다가 네르바 황제 때에 풀려나 에페스로 돌아왔다.
멤미우스 기념비( Memmius monument) 이로인해 에페스인들은 로마에 대항하여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폰토스(Potos)의 왕인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6세를 지지하였다.
미트리다테스는 하루만에 무려 이 지역의 로마시민 8만여 명을 무차별 학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 최초의 종신 독재관이며 개혁가인 술라(Sulla)가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 후 에페스인들은 미트리다테스가 자행한 대학살에 동조한 협의로 막대한 세금을 로마에 내야 했다.
이 멤미우스 비는 이 때 대학살 당한 로마인들의 넋을 달래주기 위해 BC 86년에 술라의 사위 가이우스 멤미우스에 의해 세워졌다. 이 기념비에는 장인인 술라를 칭송하는 말들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이 멤미우스 비는 에페스에서의 로마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한 술라를 칭송하는 기념비임과 동시에 이곳에서 죽임을 당한 로마인들을 위한 추모비이다
헤르메스와 카두세우스(의학의 상징으로 뱀들이 서로 꼬여있는 지팡이)의 부조
니케 여신(승리의 신, Nike)의 부조 이 부조판은 본래 헤라클레스 문의 아치로 장식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나이키가 여기 니케여신의 조각상 치마자락에서 상표를 도안 했다고 하지요.
v 헤라클레스(Heracles) 문
구레테스 도로가 끝나는 부분에 위치한 이 기념 문은 2층의 구조로 되어있었다. 여기에 있는 두개의 기둥에는 Nemea,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Heracles의 모습이 부조 되어 있어서 이 문을 헤라클레스의 문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네미아 골짜기에 사는 사자를 죽였다고 하는데 이 사자를 죽이는 일은 이 세상에서 12가지 어려운 일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이 문은 귀족과 평민의 경계선이 되었다.
v 대리석 도로 대극장과 셀수스 도서관을 잇는 이 도로는 크고 고른 대리석이 깔려 있어서 대리석 도로라 불리 운다. 네로 황제 시대에 2m 높이 둑을 쌓아 회랑을 만들었다. 원래 이 회랑의 벽에 이용되던 벽돌은 철이나 아연으로 된 꺽쇠를 박아 연결시켰는데 비잔틴 제국시대에 에페스가 경제적으로 허약해 졌을 때 이 꺽쇠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모두 제거되어 지금도 그 파인 구멍이 흉하게 남아있다.
에페소스의 쿠레테스 거리에 트라야누스 분수대와 하드리아누스 신전이 사이좋게 나란히 있습니다. 트리야누스의 분수대는 원래 지어진 것보다 훨씬 축소된 모습으로 복원 되었으며, 분수대를 장식했던 조각품들을 모두 에페소스 박물관에 가져다 놓은데다가 분수대의 자리엔 잘막한 두개의 코린트식 기둥 위에 박공지붕만 올려 놓아 분수대의 원래 모습은 상상해 볼수 없었습니다.
하드리아누스 신전의 정면 아치에는 여신 티케(Tyche)의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뒤족의 아치 한가운데는 꼬불꼬불한 긴 머리카락에 양팔을 벌리고 있는 나신의 여인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흔히들 메두사의 모습이라 하지만, 또다른 설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사랑에 빠졌던 미소년 안토니우스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집트를 방문한 하드리아누스(Hadrian) 황제와 동행했던 안토니우스가 나일강에 자살하자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한 하드리아누스는 그가 빠져 죽은 곳에 안토니우스의 이름을 딴 안티노폴리스란 새로운 도시를 세웠을 뿐 아니라 그의 조각상을 곳곳에 세우도록 명할 정도 였으니 그도 그럴수 있을것 같지만 이 부조를 자세히 보면은 미소년 모습이라기 보다는 젖가슴이 봉긋한 여인의 모습으로 보인다.
v 스콜라티스티카(Skolatistika) 목욕탕
3층으로 되어있는 이 구조물은 에페스 도시에서도 큰 건물 중에 하나이다. 1세기에 지어져 4세기 말까지 계속 수리되면서 변형되어온 이 건물은 400년에 이 목욕탕의 수리를 담당한 기독교인 스콜라티스티카(Skolatistika)의 이름을 따다가 명명했다.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 할 것 없이 모두 이 목욕을 즐겼으며, 목욕탕은 로마제국 시대에 있어서는 문화생활의 중심지였다.
v 공중변소 구멍을 낸 대리석 판으로 50명의 사람들이 줄지어 사용하던 개방적인 변소로 스콜라티스티카 목욕탕으로부터 나온 물이 씻어 내려가게 위생적으로 고안되어 있다. 좌석 정면에 있는 수로는 깨끗한 물이 흘러 용변을 본 후 이용할 수 있게 되어있다. 아마도 용변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켈수스(Celsus) 도서관이 오늘의 주제이다. 가이드북에는 켈수스의 아들이 아버지한테 지어드렸다고 적혀 있지만 그건 확실하지 않다. 켈수스 도서관은 3세기 후반에 지진으로 무너지고 그 상태로 버려져 있었는데, 1970년 페터스(H. Vetters) 교수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발굴팀이 인근에 다른 폐허더미 가운데 흩어진 의미 있는 돌덩어리 700여개를 골라냈고, 1978년 건축가 휘버(F. Hueber)와 고고학자 스트로카(V.M. Strocka)의 노력이 더해져서 우리는 오늘날 건축 정면부가 거의 완벽하게 복원된 고대 로마 최고의 도서관 건물을 갖게 되었다.
발굴팀은 또 도서관 지하에서 근사한 부조장식을 곁들인 석관과 명문을 발견한다. 거기에 켈수스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켈수스 도서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켈수스는 트라야누스 황제 재위기에 집정관, 총독, 원로원 의원 등 요직을 역임한 실력자였고, 114년경 사망할 때까지 에페소스에서 살았다고 한다. 켈수스가 도서관 건축을 시작했다면 아마 112~113년경 때 마침 소아시아에 부임해서 에페소스에 와 있던 역사학자 타키투스가 바람을 넣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대 그리스의 부유한 시민들은 집에 개인도서관을 가지곤 했다는데, 이오니아 식민시의 취향에 흠뻑 젖은 두 사람이 의기투합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켈수스가 주춧돌을 놓고 아들이 아버지 사후에 완공했다고 보면 자연스럽다. 한편, 켈수스의 아들 아퀼라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서 도서관을 건립했을 가능성도 있다.
켈수스의 석관을 도서관 지하에 안치했으니 일종의 메모리얼 라이브러리인 셈이다. 도성 안에, 그것도 도심 한복판 명당자리에 매장권리를 갖는다는 건 특별한 예외였고, 이런 특별예우는 막강한 정치권력의 배후를 짐작하게 한다. 두루마리 책 12,000여권을 소장한 도서관을 짓고도 돈이 남았던지 아퀼라는 차후의 운영비로 25,000 데나리우스를 남겼다고 한다.
그 당시 올리브기름 1리터 또는 나가요 걸 하룻밤 임대료가 1 데라니우스, 군인 1년 봉급이 200~300 데나리우스, 노예 한 명 몸값이 500~1500 데나리우스였다니까, 요즘으로 쳐서 수십억쯤으로 보면 적당할 것이다.
켈수스 도서관은 현재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 들어가 있는 밀레토스 시의 시장 입구 건축과 더불어 그레코-로만 양식 건축의 지존이다.
켈수스 도서관을 둘러보면 내부가 3층 구조이다. 벽에 벽감을 우묵하게 파고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을 보관했다고 한다. 그런데 밖으로 나와서 보면 정면부가 2층 구조이다. 안팎이 다른 것이다. 도서관 건평은 23x17m=391㎡=118.3평이다.
정면부의 전체적인 느낌은 어쩐지 좌우가 어색하다. 좌우에 원래 다른 건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는데, 다 무너진 후 도서관만 복원한 탓에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건축 정면부의 좌우를 테두리를 둘러서 정확히 마감하지 않은 건 확장성, 개방성이란 개념으로 요약하고 싶다. 도서관에서 좋은 책을 찾아 읽을 때 닫혀 있던 지식의 영역이 무한히 열리고 펼쳐지는 느낌과 비슷하다.
정면부 아래층에는 네 여인이 서 있다. 여인들의 이름은 지혜(Sophia), 미덕(Arete), 지성(Ennoia), 이성(Episteme)이다. 도서관의 주인공 켈수스가 지키려고 애썼던, 그리고 지식의 보고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우리에게도 유용한 덕목들이다.
정면부의 1층과 2층을 비교하면 2층의 원기둥들이 조금 가늘어보인다. 의도적인 비례 왜곡을 통해서 건축물의 규모가 더 웅장해보이게 하는 건축가의 눈속임 기법이다. 가령 몸체에 비해서 머리가 작은 사람은 키가 더 커 보이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또 중앙 입구 양쪽의 주간거리(원기둥 중심축 사이의 거리)가 다른 주간거리보다 약간 더 벌어져 있는 것도 눈에 띈다.
무엇보다 켈수스 도서관의 조형적 아름다움은 조화로운 운율과 리듬감 넘치는 규칙성에서 비롯한다.
가령 밀레토스 시장 입구 건축에서처럼 켈수스 도서관도 1층과 2층 사이의 층간 수평구획을 사이사이 트는 방식으로 상층부의 원기둥과 하층부의 원기둥의 연속성을 부여한다. 건축의 수평적 안정성을 희생한 대가로 수직적 역동성을 챙긴 것이다.
놀라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고고학자 스트로카의 발굴보고서를 보면 켈수스 도서관은 정면부 바닥과 들보가 중심부가 불룩하게 솟았고, 아래층 여덟 개 원기둥 받침부들의 높이도 93cm~111cm로 일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기둥머리들도 높이가 15% 가량 편차를 보였다고 한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켈수스 도서관 건축가는 돌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대담하기 짝이 없는 시도를 감행했던 것 같다.
에페서스에 있는 반원형 극장은 2만 4천명을 수용할수 있는 크기로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로마시대의 극장 중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합니다. 산 비탈을 깍아 만든 큼극장의 모습은 멀리서 바라보면 정말로 장엄합니다. 이 극장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보면 극장 오른편에 직선으로 시원스럽게 뻗은 대로가 하나 보이는데, 이 거리를 복원한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이름을 따서 아르카디안 거리라고 하고 그리스 로마시대엔 항구로 바로 연결되는 거리라 하여 항구거라라 부릅니다.
이 거리의 꽅에 있는 항구를 통해 상인들이 드나 들었지만 밀려온 토사가 점점 쌓여 바다가 메워져 에페서스는 결국 항구 도시로서의 기능이 약화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시장쪽 도로변의 바닥에는 한 여인의 얼굴 모습과 왼발(이 크기보다 작은 미성년자는 사절) 그리고 하트 모양의 그림과 아코로디아(나를 따라오세요)라는 문자와 화살표가 그려져 있고 구멍(돈을 가져오세요)을 뚫어 놓았다. 이것은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 창녀 촌을 광고하는 모습이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제단 근처에서 발굴되었다는 대리석으로 만든 아르테미스 상() 전하는 신화에 다르면 기원전 10세기경 아테네왕자 안드로클로스와 그리스의 이 주민들이 아니톨리아에 정착하여 아마조네스를 몰아 내고 에페서스를 건설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아마조네스들이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 숭배했던 아니톨리아의 모신() 키멜라를 대신하여 아르테미스 여신을 숭배하였는데 그래선지 아르테미스 상의 몸에는 좀 징그러워 보이는 무수한 유방이 달려 있습니다. 또한 목걸이와 유방 사이엔 12별자리의 Zodiac Sign을 새겨 놓았고 유방 밑으로는 사자,황소. 그리핀(griffin 독수리 머리와 알개를 가지고 사자의 몸통을 가진 상상의 동물), 레퍼드(Leopard) 그리고 염소들을 줄줄이 새겨 놓았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프로디테와 디오니서스 사이에서 태어난 다산과 남성 성기의 신으로 알려진 프리아푸스(Priapus)의 조각상 들입니다. 프리아푸스는 언제나 발기된 모습의 거대한 남성 심볼을 가지고 있어 의학용어Priapism(지속발기증)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로마시대엔 프리아푸스의 이미지를 흉안()을 물리치는데 사용했다 하며,또한 뱃사공들의 수호신 역활을 하여 거센 풍랑을 피하기 위해 프리아푸스 조각상을 뱃머리에 달아 놓았다.
이 사진은 프리아푸스 모양의 제품들이며.몇개 사가지고 올걸 그랬나 봅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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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9박11일 여행동안 많은 역사 이야기에 많은 곳 눈으로 보시니 이제 우리 에미네와 급이 달라지셔서 혹 대화가 안되면 어쩌지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