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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은 “다윗의 시”라는 표제어를 가진 본 시가 “다윗이 사울의 죽음 직후에 왕국의 일부(헤브론)에 대한 통치권을 얻었을 때, 왕국 전체가 다윗의 통치하에 통일되었을 때, 오벧에돔의 집에 안치되어 있던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왔을 때” 중 어느 한 시점에 지어졌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언제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시101:2b)라는 말씀에 비추어볼 때, 본 시는 하나님의 궤가 옮겨지는 것과 상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그 어느 때보다 거룩함에 대한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던 다윗은 아비나답(Abinadab)의 집에 안치되어 있던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옮기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궤를 옮기던 웃사가 그만 죽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아비나답의 손자인 그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궤를 지키는 일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지니 죽을까 하노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민4:15), “그 채를 궤 양편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출25:14),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 것은 죽을까 함이니라”(민4:20)는 말씀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하나님의 궤를 운반할 때에는 그것을 완전히 싸서, 채(pole)를 궤의 고리에 꿰어 운반하라고 명령합니다.
또 하나님의 궤는 거룩한 것이니 누구도 들여다보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칠십 인을 죽이셨다”(삼상6:19a)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궤를 들여다본 많은 사람들을 실제로 치셨다고 증거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사는 블레셋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궤를 거룩한 레위인이 아닌 수레로 옮겼습니다. 중간에 소들이 발작하여 뛰자 하나님의 궤를 손으로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무의식적인 행동은, 그가 평소 하나님의 명령을 얼마나 소홀히 여겼으며, 또 하나님을 얼마나 가벼이 여기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지극히 만홀(漫忽 : 되는대로 내버려두고 등한히 하며, 소홀히 여기다.)히 여긴 그는 죽어 마땅한 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왜 일어났는지 미처 깨닫지 못한 다윗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을 즉시 중단했습니다. 당황한 그는 원인이 무엇인지 규명하려고 하지도 않은 채 하나님의 궤를 황급히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버렸습니다. 거룩함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정작 거룩하신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는 원리를 등한히 했던 다윗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또 다시 경솔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삼 개월 정도 흘렀을 때,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깨끗이 풀렸을 것이라고 판단한 다윗은 다시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당시의 상황을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왔다”(삼하6:13-15)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 하나님의 궤를 옮기던 때와는 달리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따랐습니다. 레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궤를 메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무사히 여섯 걸음을 옮기자 하나님께 감사 제사를 드렸습니다.
각종 악기를 연주하고, 힘을 다해 춤을 추었습니다. 이는 종교적인 열정과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큰 기쁨을 표현하는 행동으로, 다윗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모시게 되었다는 사실을 온 몸과 마음으로 기뻐했음을 의미합니다. 이후 그는 본시를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뜻대로 섬기겠다는 다짐을 노래했습니다. 한편, 본 시는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과 왕자들이 거울로 삼았다는 면에서 “왕들의 거울, 왕자들의 시, 군주들을 위해 쓴 다윗의 시”라 불려집니다. 또 시인이 하나님께 충성을 다짐하고 최선을 다해 인자와 공의를 베풀 것을 다짐하고 있다는 면에서 “다윗의 통치 헌장”이라 불려집니다.
가장들이 본 시에 제시된 원리들로 자신의 가정을 꾸려 나간다면, 단지 가정의 행복과 안녕(安寧)뿐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의 의무 이행에 있어서도 큰 진전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면에서 “가장의 시편”이라고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또 행정관들이 자신의 모든 직무를 경건하게 수행함에 있어 본 시의 원리들을 따른다면, 만국이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고 모든 도시가 “여호와의 성”이 될 시점이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라는 면에서 “행정관들을 위한 거울”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본 시는 우리가 속한 사회 전반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데 꼭 필요한 삶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를 찬송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1-2절입니다.
“내가 인자(仁慈)와 공의(公義)를 찬송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송하리이다 내가 완전한 길에 주의하오리니 주께서 언제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안에서 행하리이다”
시90편 이후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 주제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입니다. 그리고 “인자와 공의”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통치수단입니다. 여기서 “인자”(헤쎄드 : kheh'sed)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 자비, 연민, 친절, 충성”등의 뜻으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변함없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또 “공의”(미쉬파트 : mishpawt')는 “법률적으로 선언된 판결, 언도나 공식적 선고, 습관, 계획”등의 뜻으로, 세상에 바른 질서를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의미합니다. 인자와 공의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유지하는 고귀한 하나님의 속성인 것입니다.
한편, “찬송하겠나이다 또는 찬송하리이다”는 “기도하겠나이다 또는 묵상하겠나이다”로 바꿔도 무난합니다. 실제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가 자신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구했습니다. 어렵고 힘든 순간 탁월한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에 대한 확신이 마음 가득 채워질 때까지 깊이 묵상했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를 찬양했습니다. 삶의 원리로 삼았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다스리는 통치 원리로 삼았습니다. 또 인자와 공의를 베푸시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함”을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흠 없음, 진실, 성실한, 순결한, 올바른”등의 뜻인 “완전함”(타밈 : tawmeem')의 신약적 의미는 “온전함, 성숙함”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마5:48)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선지자 미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통해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는”(미6:8a) 예배 곧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나라와 민족과 이웃과 가족)적인 책임을 다하고, 끝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을 받기 원하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자와 공의를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임하실 때까지 하나님께 흠(欠)없고 합당한 삶, 여호와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의로운 삶 곧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은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추구해야할 삶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추구해야할 통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대한 민국 사회에서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를 찾기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명박씨가 그렇게 주장하던 법치(法治)도, 원칙(原則)도 없습니다. 오직 힘있는 자들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정글의 법칙만 존재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원하시는 “함께, 더불어”라는 말은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의 반목과 분열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자와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선악간에 갚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와 함께 온전하심을 추구해야할 이유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완전함을 추구하기 위해 비루(鄙陋)한 삶을 버렸습니다. 3-8절입니다.
“나는 비루(鄙陋)한 것을 내 눈앞에서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도자(背道者)들의 행위를 미워하니 이것이 내게 붙접지 아니하리이다 사특(邪慝)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隨從)하리로다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안에 거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죄악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
시인은 가정과 나라와 민족을 통치함에 있어 허무한 우상을 쫓거나 윤리적으로 해가 되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왜곡된 마음을 품지 않았고 악한 성품을 가진 자들을 고용하지도 않았습니다. 만일 자신의 궁정에서 그런 자들을 발견하면 가차없이 내쫓아 버렸습니다. 악한 자들과 친분을 맺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의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자들을 멀리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신실하게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해 백성들을 통치하는 왕으로서 선을 추구하고 악을 멀리했습니다. 충신들을 모함하는 간신들을 과감하게 끊어버려 국정을 바로 세웠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관직을 남용하는 자들을 용납치 않았습니다.
충성되고 신실한 인재들을 발굴해 자기 곁에 두었습니다. 흠 없고 깨끗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자신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거짓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사람들은 용납하지도 등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악인들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다 끊어질 때까지 이 모든 일들을 계속 추진하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인자와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이르기 위해 어떤 희생과 고통을 감수하고 있습니까? 자신과 가정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공동체를 섬기는 원리는 무엇입니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요 설교가인 아이언사이드(H. A. Ironside)가 교회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청년이 손을 들더니 법대로 하자고 크게 소리쳤습니다. 그때 아이언사이드는 “여보게 젊은이, 법대로 자네를 다루었다면 자네는 어떻게 되었을 것 같은가? 벌써 지옥에 가 있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 곧 인자의 원리에 의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의의 원리를 떠나서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는 우리의 삶의 원리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를 자신의 삶 구석구석에 적용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그저 무턱대고 믿기만 하면 된다는 소위 “묻지마 신앙”이 편만해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배경에는 믿음을 강조하려는 좋은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굳이 말꼬리를 잡자면 무식한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모르는 것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무조건 믿으라는 것은 강압과 세뇌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작은 환난과 시험만 만나도 넘어질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모든 시대와 상황과 문화 속에 적용할 수 있는 성경적 삶의 원리들을 배우고 익혀야합니다.
누군가 “부드러운 미소(happy look), 따뜻한 대화(happy talk), 명랑한 언어(happy call), 성실한 일(happy work), 즐거운 노래(happy song), 멋진 기록(happy note), 만족하는 마음(happy mind)”이 곧 행복한 삶의 원리라고 말했습니다. 영향력은 목소리를 낮추고 삶의 원리에 충실한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또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12:1b)고 권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 곧 영적 예배의 실행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기본적인 원리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기뻐하시는 삶의 원리에 충실한 다윗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원리를 배우고 익히고 삶에 실천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 만물을 당신의 인자와 공의로 통치하십니다.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과 관계된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에 맡겼습니다. 자신이 정한 삶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에 입각한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을 비롯해서 나라와 민족을 다스리는 통치 원리로 삼았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를 통해서 가장 아름다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지 빌리어즈(George Villiers)는 자신을 신임해 수상으로 임명한 제임스(James) 왕을 향해 “전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전하의 손에 입맞출 뿐만 아니라 그 내면이 정직하고 신실한 종들을 잘 택하셔야 합니다. 다윗 왕은 시101:6-7절에서 자신의 신하를 택하는 원리를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지혜롭고 선한 왕이었습니다. 지혜롭고 선한 왕은 그와 같이 훌륭한 본보기를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왕이 신하의 결함을 즉시 발견하기는 힘들겠지만 만일 그것을 간파했다면 전하는 다윗 왕처럼 확고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라고 권했습니다.
신하를 등용하거나 승진시킬 때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를 외치는 시101편을 원리로 삼으라고 권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의 원리는 무엇입니까? 성경을 가까이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원리 특히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가 무엇인지 배우고 익히십시오. 모든 경우에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를 적용하십시오. 죄악과 어두움과 불의는 조금도 자신을 틈타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추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누구보다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