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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 32 - 선택 2
S#1. 박교수 연구실
32부의 뒷부분..
박교수 : 아까 말씀하신 메조클로로플로린 말입니다.
이교수 : 네?
박교수 : 그게 없으면 기업에서 요구한 수율을 맞출 수 없는 건가요?
이교수 : 그런 셈이죠. 왜요?
박교수 : 그거 어떤 물질인지 아세요?
이교수 : 어떤 물질이라니.. 어떤 점에서요?
박교수 : 아까부터 그 이름이 낯이 익어서 잘 생각해봤는데요. 그거 저 미국 대학에 있을 때 한동안 문제가 됐던 물질이었다는 게
기억났어요.
이교수 : (보는)
박교수 : 거기에 불소 성분이 있죠?
이교수 : ...있어요.
박교수 : 오존층 파괴물질로 판명이 났었죠. 그거. 그래서 그걸 이용해서 연구하던 미국내 프로젝트 하나가 중단됐었어요.
내가 알기로 수십억불짜리 연구였는데 말이죠.
이교수 : (말없이 보다가) 그래서요?
박교수 : 그래서요..라니요?
정태와 지원. 심상치 않아서 눈치를 보고 있다.
이교수 : 내가 알기로 이 물질, 우리나라에선 아직 사용금지가 된 적이 없는데. 뭐가 문제가 되는거죠?
박교수 : (굳은 얼굴로 보다가) 방금 하신 말씀. 무슨 뜻으로 하신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S#2. 건물 입구
여늬 때와 다름없는 교정의 분위기. 학생들이 입구를 드나들고 있고..
안에서 나란히 걸어나오는 정태와 지원. 말없이 걸어오다가...
정태 : 어떻게 생각해?
지원 : 뭘 어떻게 생각해.
정태 : 이교수님, 유해물질이라는 거 알면서도 강행하시겠다는 건가.
지원 : 그렇다면 어떻게 할건데.
정태 : ..생각해보는 중이야.
지원 : (멈춰서더니 똑바로 보며) 나라면 깊이 생각하지 않겠어.
정태 : 무슨 뜻이야?
지원 : 너나 나나 졸업연구를 하려는 거야. 연구과제를 잡아서 연구를 하면 되는 거 아니니?
정태 : ...그래서 학점만 잘 나오면 된다는 얘기냐?
지원 : 고민해봤자 별 수 없는 일 때문에 시간낭비를 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야.
지원 먼저 걸어간다.
그 뒤를 보고 선 정태. 맘에 안든다.
S#3. 동아리방
야전침대에 기대앉은 경진이 들고 있는 책 너머로 말끄러미 보고 있고. 그 위로 들리는.
만수 : (E) 이거 한번 봐봐 응? 이것들이 다 점수 잘 나오고 출석 까다롭지 않은 과목들이라구. 내가 다 조사해온거야.
만수가 테이블 앞에 앉은 민재에게 프린트해온 종이들을 보여주며 얘기하는 중이다.
진수는 자기 컴퓨터 앞에서 작업하며 뒤의 말을 듣고 있고.
민재 : (하는 수 없이 종이를 들여다본다)
만수 : 아직 수강신청 변경기간 안 끝났으니까 말만 해. 그럼 내가 대신 다아 신청해놓을게. 뭐. 뭐 들을래?
민재 : 어... 형, 고마운데 난 이번 학기엔 좀 쉴려구 그래. 그래서 과목 두 몇 개 신청안했어.
만수 : 마. 니가 쉬어봤자 얼마나 쉬겠냐. 그러지 말구 이런 학석사 연계 과목들을 들어놓으란 말야. 그럼 남들보다 좀 늦게
대학원에 들어가두 미리 미리 들어 놓은 과목이 있으니까 일찍 끝낼 수 있잖아. 너같으면 일년이면 석사 딸 수도 있어.
민재 : 글세.. 난 여행도 좀 다녀보고 싶고..
만수 : 개강인데 여행은 무슨 여행. 어디 갈건데? 나두 같이 갈까?
민재 : (웃는) 형이야말로 지금 정신없지 않어? 연구비 대줄 회사도 잡았다며.
만수 : 괜찮어. 너 혼자 가기 심심하면 내가 따라갈게. 내가 하는 일이래봐야 야식 사오는 정돈데 뭐. 어디 가고 싶어? 바다? 산?
민재 : 어..허허. (난처해서 종이만 만지작거리는데)
경진 : 아이구 답답해. (침대에서 일어나 테이블로 오며) 지금 두 사람 무슨 전위예술극 하는거야? (의자 빼어 당당하게 앉으며)
만수형. 지금 민재한테 미안해서 그러는 모양인데 그럴수록 얘 더 힘들어. 이민재 그렇지?
민재 : (끼어든 경진이 더 부담스럽다)
경진 : 그리고 너도 그래. 귀찮을 땐 귀찮다구 말해. 안그래도 만수형 얼굴만 보면 놓쳐버린 면접이 자꾸 생각나잖아. 그치?
만수형. 당분간 얘 앞에 나타나지 마. 얘 만수형 보면 표정관리 하기 힘들다구우.
이거 계속 웃어야 되나. 이 정도 웃어주면 되나..
만수, 벙해서 경진을 보다가 주춤주춤 일어선다.
만수 : 그건 그래.. 그럴거야. 어.. (머뭇대다가) 참 명환 선배가 심부름 시킨 거 있었는데.. (괜히 웃으며) 이거 또 잔소리 듣겠네..
나 먼저 가볼게..
만수 나가고. 민재, 짜증나서 앉아있다가 경진을 노려보더니.
민재 : 내가 언제 너보구 내 매니저 해달라구 한 적 있냐?
경진 : 아니.. 난 그냥.. (생각해보다가 갑자기 가방을 뒤지며) 내 요번 졸업연구 말이야. 이거 니 도움이 필요한데 말이지.
민재 그냥 일어나서 나가버린다.
경진 가방을 뒤지던 손이 멈춰서 보다가 진수와 눈이 마주친다.
경진 : 내가 틀린 말 한거 있니?
진수 : 틀린 말은 없는데요. 사람이 자기 속에 있는 말을 다 하면서 살 순 없는 거 아닌가요?
경진 : 왜?
진수 : ..서로에 대한 배려도 해야 되고.. 또..
경진 : 너 세상이 왜 이렇게 복잡해진 건줄 아니? 어차피 자기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다 해도 제대로 전달이 되기 힘든 법이야.
그런데 그나마 자꾸 비비 꼬구 있잖아. 그러니 점점 더 복잡해 지는 거라구.
진수 : 선밴 언제나 속에 말 그대로 다하고 살아요?
경진 : (생각해보는) 대개는.. 근데 내 속을 내가 잘 모를 때가 더 많아.
그래놓고는 밝게 웃는다.
S#4. 도서관 내부
컴퓨터 쪽. 정태가 컴 앞에 앉아 뭔가 검색을 해보고 있다.
화면에 비치는 것은 각종 논문들의 제목..
S#5. 박교수 랩
남희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검색을 하고 있고. 박교수가 그 옆에 앉아서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박교수 : 잠깐 스톱. 그거야. 그거 내용 좀 볼까.
남희, 마우스로 클릭해 들어가고..
박교수 화면을 심각하게 들여다보고 있다가.
박교수 : 그거 프린트 해줄 수 있어?
S#6. 이교수 연구실
이교수가 전화를 하고 있다.
이교수 : 제가 원하는 건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필터로 이 물질을 정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거에요.
...다시 한번만 점검해 봐주시겠어요? 부탁합니다.
전화 끊고, 책상 위에 있던 두툼한 프린트 뭉치를 다시 뒤적여본다.
소리 : (노크소리)
이교수 : 네에.
명환 : (들어서며) 찾아왔습니다. (들고 온 프린트물을 이교수에게 건네며) 현재 메조클로로플로린을 환경파괴물질로 규정한 곳은
미국뿐입니다. 유럽 몇 개 나라에서 검토중에 있다고 하구요. 이건 미국에서 나온 유해 실험 결괍니다.
이교수 : (내키지 않아서 자료를 뒤져본다) 규정을 했다면 어느 정도야.
명환 : 미국에선 생산중지 상탭니다....출력하면서 좀 읽어봤습니다만.. (망설이는)
이교수 : (명환을 보면)
명환 : ...그거... 대단한 독성을 갖고 있든데요.
이교수 : (표정없이 보고있는)
명환 : (좀 주눅이 들면서도) 시뮬레이션 할 때는 전혀 생각못했던 거라서.. 그래서.. 좀.. (눈치보며 입을 닫는다)
S#7. 민재/ 정태의 방
민재 방으로 들어서다 보면 정태가 자기 컴퓨터 앞에 앉아서 뭔가 검색을 해보고 있다.
(현재 메조..에 대한 자료가 있는 미국 내의 사이트를 열어보고 있는 중이다)
민재 : 어이 열심인데..
말붙여보지만 정태는 화면에 완전히 빠져있다.
민재, 어색해서 보다가 들고온 여행가이드 책을 펼치며 테이블 앞에 앉는다. 뒤적거리는데..
정태 : 정말 대단하군.
민재 : (보면)
정태 : (여전히 화면을 보는 채로) 부식성, 발암성 물질이고. 해독제가 없으면 열분해되면서 염화물과 불소화물의 유독성,
부식성 개스를 발생시킨다.
민재 : 뭐가.
정태 : 20퍼센트 이상의 농도에 30분에서 4시간 정도 노출되면 중추신경계 마비 또는 사망의 가능성이 있다. (민재를 향해
돌아앉는다) 그보다 더 심각한 건 환경파괴야. 이런 개스가 공기중에 퍼져나오면 지구는 그만큼 썩어간다는 얘기지.
민재 : 계속 혼자 떠들거야. 아님 내가 알아듣게 설명을 해줄 생각이 있는거야.
정태 : 이교수님 이번에 새로 회사 잡은 거 알지.
민재 : 어.
정태 : 그 회사에서 몇가지 조건을 내걸었어.
민재 : 그런데.
정태 : 그 조건에 맞출려면 이런 위험물질을 써야 된대.
민재 : (그저 보는)
정태 : 할말 없어?
민재 : 방법이 있겠지.
정태 : 무슨 방법.
민재 : 그걸 알아내는 게 연구하는 사람들 자세 아니야?
정태 : ... 그래.. 그렇겠지. (스스로를 다독거리는 기분)
민재 : (보던 책에 다시 시선을 돌려서) 삼박사일동안 제주도에 다녀온 다면 아무래도 무리겠지?
정태 : 갑자기 무슨 제주도야.
민재 : 그냥 지리산에나 다녀올까. 나 지리산은 한번도 못 가봤거든.
정태 일어나 옆으로 오더니 민재가 보던 여행가이드 책을 뺏어 본다.
정태 : 여행갈려구?
민재 : 니 배낭 좀 빌려줘라. 이왕이면 텐트도 빌려줘.
정태 : 언제 갈건데.
민재 : 내일도 좋고..(정태가 들고 있는 책을 뺏어 다시 뒤적이는) 내일 늦잠을 자면 모레도 좋고..
정태 : 수업은 어뜩하고.
민재 : 뭐 어떻게 되겠지.
정태 : ... 너 그런거냐? 겉으루 멀쩡한 얼굴하고, 속으론 아직 정리가 안된거야?
민재 : (피식 웃더니) 여행 한 번 다녀오겠다는데 무슨 심리분석까지 하구 그러냐.
정태 : 니가 수업 빠지구 여행이나 다닐 놈이 아니잖아.
민재 : 흐응 그런 말은 함부로 할 게 아니드라구. 나도 내가 어떤 놈인 지 잘 몰랐는데. 가만 들여다보니까 내 안에 내가 열두놈쯤
득시글대고 있더란 말이지. 그래서 가끔은 이 놈들을 정리해줄 필요가 있겠어.
...근데.. 지리산에 갈려면 교통편이 어떻게 되는지 아냐? (책을 뒤지는)
정태 말없이 민재를 보고 있다.
S#8. 휴게실
자현은 자동차 설계도 정도를 앞에 펼쳐놓고 들여다보고 있고,
양 옆에 붙어 앉은 대욱은 옆에서 영화잡지를 뒤지고 있고,
지민은 학교소개 팜플렛 정도를 뒤적거리며..
대욱 : (잡지의 한 면을 자현에게 보여주며) 이 여자 어때.
자현 : (심각하게 봐주더니) 너 이런 여자 좋아하냐?
대욱 : 이런 여자라니.. 이 여자가 이래뵈도 세계적인 배운데. 이름도 봐. 멋지잖아. 기네스 펠트..로..우.
자현 : 그래? 가져라 가져. (다시 설계도 보는)
지민 : 전자과는 너무 어렵겠지?
자현 : (설계도를 봐가며) 너 생명공학 하구 싶댔잖아. 복제인간 만든대매.
지민 : 그건 지난달까지의 희망이구.
자현 : 무슨 장래희망이 매달 바뀌냐. 그러지 말구 기계과 들어와. 내가 델구 다니면서 이뻐해줄게.
대욱 : (다른 사진 보여주며) 역시 동양여자가 낫지? 이 여자 봐봐.
자현 : (봐주며) 우리나라 배우야?
대욱 : 아니 홍콩배우. 귀엽지? 나하구 어울리지?
자현 : 어. 어울리는데 가져. (설계도 보는)
지민 : 기계과 들어가면 노동일을 많이 해야되잖아.
대욱 : 여기 팬클럽 전화번호두 있다. 여기 가입할까?
지민 : 나 수학이 그래도 좀 나은데 그냥 수학과 갈까? 근데 계산 좀 잘한다구 수학을 해도 되는걸까?
자현 : (드디어 못 참고 부르르) 아이구 이 자식들아. 난 오늘 중으로 이 차의 배기문제를 해결봐야 된단 말이다.
니들 옆에서 계속 재재거릴래?
대욱 : 이것두 중요하지. 한 학기 내내 내 컴퓨터의 배경화면이 될 여잔데 아무렇게나 정할 순 없잖아.
지민 : 언니. 내 장래가 걸린 문제야. 좀 심각하게 생각해줘봐.
자현 : 니가 하구 싶은 게 있을 거 아냐. 정말 하구 싶은 거. 밤에 잘려구 누웠는데두 계속 생각나는 거.
세상에 뭘 봐두 그걸루 보이는 거. 그런 거 없어?
지민 : 세상 사람이 다 언니같은 줄 알어? 언닌 지나가는 개를 봐두 자동차로 보이지?
자현 : 어... 가끔 사람이 차로 보일 땐 있어. 민재같은 앤 8기통짜리 무스땅같은 데가 있구.. 정태는 잘 빠진 랜드로바같구..
대욱 : 난.
자현 : 넌 난지도에 들락거리는 덤프트럭이지. 뭐.
대욱 : 어허 좀 친해졌다구 이 여자가 말을 막 하네.
자현 : 덤프트럭이면 너한테 과찬이지 임마. (때릴 자세)
대욱 : 어쭈. (방어자세를 취하느라 팔을 휘두르는 바람에 앞의 캔을 치고, 설계도에 남은 음료수가 쏟아진다)
자현 : 어어어.
대욱 : (벌써 일어나 도망갈 자리를 보며) 선배가 먼저 시비걸었잖아.
자현 : (후다닥 설계도를 팔소매로 닦으며) 너 고기 가만 서있어.
대욱 : 내가 바보냐.
대욱 의자를 넘어 도망가고. 자현 설계도를 집어던지고 역시 의자를 넘어 쫓아가고..
남은 지민, 자기에게 씌워진 설계도를 걷어내며..
지민 : 나는 도대체 뭐가 하구 싶은거지?
S#9. 박교수 연구실
지원이 자기 책상을 정리하는데 옆으로 온 남희가 지원을 슬쩍 치며 한곳을 고개짓으로 가르킨다.
지원이 보면..거기 박교수가 울안에 갇힌 맹수처럼 오락가락 하고 있다.
지원 남희에게 손목시계를 들어보여준다. 남희 목청을 가다듬고.
남희 : 교수님.
박교수 : (계속 서성이며) 어.
남희 : 오늘 연구계획 짜기로 하셨는데요.
박교수 : (건성으로) 어.
남희 : (지원을 찌른다)
지원 : 뭐부터 시작할까요. 분담을 해주시면 좋겠는데요.
박교수 : 그래. (여전히 생각에 잠겨있다)
남희 한숨을 쉬는데.
소리 : (전화벨)
남희 : (얼른 받아서) 네 퍼지랩입니다. 아 이교수님.
박교수 : (후딱 돌아본다)
남희 : 네 지금 계세요. 바꿔 드릴까요.
박교수 : (얼른 이쪽으로 오는데)
남희 : 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끊는)
박교수 : 이희정교수님?
남희 : 네 지금 302호 강의실에 계시다고 와주셨으면 하시는데요.
박교수 : 그래? 가야지.
박교수 문으로 나가려다가 부지런히 돌아와서 자료들을 후다닥 모아서 나간다.
남희 나가는 박교수를 보고 있다가..
남희 : 교수님 저런 모습은 처음 보지? (어쩐지 꿈꾸는 기분으로 보는)
지원 : 말이 없으신 모습이요?
남희 : 그래 깊이 생각할 게 있을 땐 저러시거든. 마치 딴 세계에 들어 가서 혼자 헤메고 있는 모습.
뭐랄까.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어떤 문제를 향해 달려가는 거 같잖아. 그렇지?
지원, 어이없는 기분으로 남희를 보지만, 남희는 문만 바라보고 있다.
지원 : 남희언니.
남희 : 응?
지원 : 이교수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미리 알고 싶지 않아요?
남희 : 미리? 왜?
지원 : 난 이 프로젝트가 진행될 수 있는지 빨리 알아야겠어요. 안될거라면 더 쓸만한 연구를 하는 다른 랩을 찾아볼거에요.
남희 : 지원아.
지원 : 수간신청 변경이 끝나기 전에 알아야겠는데요.
S#10. 강의실
이교수가 창문을 내다보고 있다가 문소리에 돌아본다.
박교수가 들어서고 있다. 애써 평소의 유쾌함을 유지하려하면서..
박교수 : 저..왔습니다. (교실내를 둘러보며) 강의 없는 시간에 강의실은 참 묘오한 분위기가 있어요. 그쵸?
이교수 : (웃지 않고) 이리 오시라고 해서 미안해요. 애들 없는데서 몇가지 설명드릴 게 있어서요.
박교수 : 설명? 강의입니까? 아하. 그럼 제가 요기 학생자리에 앉으면 될까요? (얼른 근처의 자리에 앉으며) 난 언제나 이쪽자리에
앉는 게 좋았어요. 사이사이 딴 생각도 할 수 있고. 졸리면 살짝 졸 수도 있고. 저 앞에 있음 그게 안되잖아요.
이교수 : (가져온 프린트물 뭉치 중에 하나를 건네주며) 이번 프로젝트 처음부터 다시 체크해봤어요. 이거 먼저 봐주세요.
박교수 : (아직은 웃고 있다) 결론부터 들으면 안될까요. 전 소설책을 봐도 앤딩 먼저 읽고 그 담에 앞에서부터 읽거든요.
해피앤딩이 아닌 건 시작하기가 싫어서요.
이교수 : 과학에 해피앤딩이 있다구 생각하세요?
박교수 : ....예?
이교수 : 인간이 불을 사용하기 시작한 다음부터 우린 달리는 자전거에 올라탄 거에요. 자전거를 멈추면 쓰러지는 수밖에 없어요.
박교수 : (웃음기가 가시고 있다) 어쩐지 냉정한 말씀을 하실 거 같군요.
이교수 : 현실은 냉정한 거에요. 우선 기술적인 설명부터 하죠. (자기 페이퍼를 넘기며) 19페이지네요.
박교수 : (이교수를 보고만 있다)
이교수 : (박교수의 시선을 모른척하고) 광소자와 전자모듈간의 집적에 대한 부분이에요.
S#11. 정태/ 민재의 방
소리 : (전화벨)
정태 : (받아서) 김정탭니다. ... 명환선배? ..예..
한쪽에서 배낭과 옷가지들을 늘어놓고 짐을 싸던 민재가 돌아본다.
정태 : 지금요? 알았어요. 금방 갈게요. (전화 끊고 민재를 돌아본다) 지금 랩에서 이번 프로젝트 우리끼리 다시 검토해보자는데..
안 갈래?
민재 : 내가 왜.
정태 : 지난 반년동안 너도 껴서 하던 거잖아.
민재 : 지난 반년동안 그랬지. 지금은 아니야.
정태 : 궁금하지 않어?
민재 : 내가 궁금한 건, 너 도대체 내 양말 몇개나 가져간거야? 임마. 남몰래 갖구 갔으면 잘 챙겨서 지 자리에 놔둬야지.
엇다 감춰논거야?
정태 : (찌푸려 보다가 벌떡 일어나 문으로 가며) 침대 밑에 잘 찾어봐.
민재 : 안 빨아 놓은거야? 정말? 하나두?
민재, 정태의 침대 밑(혹은 옆 구석)을 뒤지는데 정태가 쾅 닫는 문소리.
민재 슬쩍 문을 보더니 그냥 침대 옆에 기대 앉는다. 멀쩡한 듯이 가장해오던 얼굴이 다시 우울해진다.
S#12. 강의실
이교수가 칠판 앞에서 설명중. 칠판에는 웨이프의 단면을 식각하는 그림이 그려져있다.
이교수 : 광소자는 웨이프의 단면이 이렇게 수직으로 식각되야지만 그 특성이 좋아져요. 이제까지는 C/2라는 물질로
이 작업을 해왔는데.. 이걸로는 회사에서 요구하는 수율을 맞출 수가 없어요. 이 수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난 몇단간 우리 랩 아이들하고 고생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박교수 : 그래서 찾아낸 게 메조클로로플로린인가요?
이교수 : 그래요. 광소자의 수율에 가장 큰 악요소가 바로 건식각식이라는 건데 이거에 사용되는 개스 중에 가장 안정적인게 바로
그거죠. (그림에 수직으로 직선을 굵게 그리며) 그 개스를 사용하면 이렇게 수직으로 아주 매끄럽게 식각을 해주거든요.
S#13. 이교수 랩
명환, 중희, 만수, 정태, 남희, 지원 등이 모여있다. 각자 페이퍼들을 읽으며 얘기중.
남희 : 반도체 공정 중에는 어차피 유독성 물질들을 많이 사용한다고 들었는데요.
명환 : 물론이죠. 그래서 여러가지 정화장치를 사용하구 있어요. 문제는 이 메조클로로플로린은 기존의 필터로 정화시킬 수
없다는 겁니다.
중희 : 어제 공정쪽에 있는 친구들하구 다시 실험을 해봤는데요. 이 물질 속에 있는 또 다른 물질이 필터작용을 마비시켜요.
정태 : 그럼 역시 방법이 없다는 겁니까?
명환 : 글세 방법이야 있지.
S#14. 강의실
이제는 박교수와 가까이 마주 앉은 이교수.
이교수 : 다중필터를 만드는 거죠. 처음에는 일반 필터를 마비시키는 물질 을 걸러내고. 그 다음에는 불소기를 걸러낼 수 있는
필터를 통과하게 하고..
박교수 : 그런데요?
이교수 : 그렇게 되면 그 필터를 주문제작하는 게 더 큰 비용을 차지하게 되는거죠.
박교수 :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된다.
이교수 : 그래요. 그리고 그런 필터가 가능할지는 이제부터 연구를 해봐야 되는 거구요.
박교수 : 그래도 해야죠.
이교수 : 누가요?
박교수 : 누가요...라니요? 누구든 해야되잖아요. 그런 정화장치도 없이 생산조차 금지된 물질을 사용할 수는 없잖아요.
이교수 : 아직 우리나라에선 금지되지 않았죠.
박교수 : 무슨 말씀이세요. 그럼 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진 유해물질을 우리나라 하늘에 마구 뿌려대겠단 말씀이세요?
이교수 : 내가 뿌려대는 게 아니죠. 저는 설계도를 넘겨줄 뿐이고, 생산해서 판매하는 건 기업이니까요.
박교수 : (벌떡 일어난다. 잠시 자제하더니 애써 웃으며) 이미 결정을 하신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굳이 저를 이렇게 불러서
설명해줄 필요도 없었던 거 같은데요.
이교수 : 필요가 있었어요. 저는 이렇게 판단했지만, 박교수는 다르게 판단할 수도 있으니까. 원하지 않는다면 이번 프로젝트에서
빠지셔두 되요.
박교수 : (말없이 보다가 문쪽으로 걸어간다. 가다가 돌아서서) 그 회사에서 배보다 더 큰 배꼽을 돈을 쳐들여서 설치할거라구
생각하세요? 법으로 금지도 안된 물질때문에?
이교수 : 나는 그 회사의 회장이 아니에요.
박교수 : 아. 그렇군요. 그럼. 하나 더 질문. 내가 그냥 프로젝트에서 빠지고 모른척 얌전히 있을거라구 생각하세요?
이교수 : ...
박교수 : 아참. 이것도 모르시겠지. 이교수께선 내가 아니니까. 에.. 난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 척 하더니) 내 스타일이라면
나를 프로젝트에서 빼내도. 끝까지.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막고 싶을텐데요. 예를 들면 그 실험실의 컴퓨터에
바이러스를 다 심어놓는대거나, 학회에 보고를 한다거나. 또 무슨 방법이 있을까요.
이교수 : 신문기자들을 불러서 얘길 해주는 것도 좋죠. 요즘 환경문제라면 좋은 기사거리가 될테니까요.
그런 기사가 난다면 하루만에 프로젝트를 중단시킬 수도 있어요.
박교수 말이 막혀 이교수를 본다.
이교수는 차분하게 늘어놓은 자료들을 챙기고 있다.
S#15. 이교수 랩
정태, 신경이 곤두서서 둘러본다.
명환이나 중희나 남희나 모두 말이 없이 서로 시선을 피하고 있다.
정태 : (어이없다는 듯) 대체 뭐가 문제에요. 정화장치도 없이 이딴 걸 만들면 안되는 거잖아요. 뭐 고민할 것두 없잖습니까.
명환 : 그래 고민할 건 없어. 우린 교수님을 따라가면 되는거니까.
정태 : 만약 교수님이 그대로 제작하시겠다면요.
명환 : (시선 피하는)
중희 : (시계 보며) 저녁 시간 다 됐네. 오늘은 밖에서 먹을까요?
명환 : 그럴까. 된장찌게 같은 게 먹구 싶은데. (일어나 챙기는)
정태 : 만수형.
만수 : 어? 나..나두 된장찌게 좋지. (명환에게) 부대찌게는 어때요?
명환 : (남희에게) 남희씨두 같이 가시죠.
남희 : (일어서며) 전 우리 교수님께 가봐야겠어요. 지금쯤 얘기가 끝났을 거 같은데. 지원아 가자.
남희 일어서 문으로 가고.
지원도 일어서다가 자기를 똑바로 보는 정태와 시선이 마주친다.
정태 : 나 혼자 너무 순진하게 구는 거라고 생각하는거냐?
지원 : 순진한 이기주의자일수도 있다고 생각해.
다른 이들.. 돌아보는데.
정태, 지원 다른 사람들 상관없이.
지원 : 느네 교수님 이번에 기기 들여오면서 학교에 빚 진거 있다며.
정태 : 이억오천. 그 돈 땜에 학자의 양심을 팔라는 얘기야? 나 같으면 차라리 교수 관둬.
명환 : 야 임마. (끼어들려는데)
지원 : 명환 선배는 이번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 쓰신다구 들었어. (명환에게) 그런가요?
명환 : 뭐.. 그야 내가 죽 해오던게..
지원 : (정태에게) 이번 프로젝트 무산되면, 선배는 첨부터 다시 해야돼. 선배더러두 박사 관두라고 말할래?
만수 : 저어.. 니들 고만 밥먹구 계속하는 게 어떨까? 응?
정태 : (여전히 지원에게) 니가 판단하는 기준이란 건 그런거냐? 교수직. 박사학위. 그런 게 니 판단기준의 전부야?
지원 : 어차피 이교수님이 안하셔두 누군가 할 거야. 그 회사의 프로젝트를 따내느라구 여기저기서 줄 섰다구 들었어.
그럼 넌 대한민국의 연구소마다 찾아다니면서 못하게 할거니? 아니면 니가 들어간 랩에서만 안 만들면 된다는 거야?
니 양심만 편하면 되니까?
정태 : 그건 마치 핵폭탄을 만들면서. 어차피 독일에서 만들거니까 내가 먼저 만든다는 것과 같은 논리군.
아주 대단한 논리구 몇십년 동안 사람들을 속여온 논리지.
지원과 정태 마주 노려보고 있는데. 만수가 슬며시 끼어들며.
만수 : 핵폭탄만 있는 건 아니잖아. 핵발전소도 있고. 또.. (명환 등을 보며) 또 뭐가 있죠. 갑자기 생각이 안나네.
정태, 만수를 지나쳐서 나가버린다. 남은 사람들 다 어색하다.
S#16 복도
정태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다. 마악 계단 쪽으로 들어서려다 다시 돌아와 본다.
복도 저 앞에 이교수가 자료들을 안고 걸어오고 있다.
정태 잠시 망설이다가 그 앞으로 나서 따라붙으며.
정태 : 여쭤볼 게 하나 있는데요.
이교수 : 여기서?
정태 : 이번 프로젝트 계속하실겁니까?
이교수 : (멈춰 보는)
정태 : 방금 랩에서 자료 봤습니다. 이런 식으로 DSP칩을 제작하는 거 그대로 하실건가요?
이교수 : 질문이 정확하지 않군. 이런 식이라니 정확하게 어떤 식을 말하는거야?
정태 : ...메조클로로플로린을 사용해서, 정화장치도 없이, 유해물질이 배출될 것을 뻔히 알면서, 회사에서 요구하는 칩을
계속 만드실 거냐고 물었습니다.
이교수 : (잠시 보다가) 현재로선 그래.
정태 : 그렇다구요?
이교수 : 현재 연구된 과정은 거기까지야. 그리고 회사에서 요구하는 칩은 아직 못 만들었어. 지금 만들고 있는 중이지.
질문 또 있니?
정태 : ...없습니다.
이교수 가던 길을 계속 간다.
정태, 막막해서 이교수를 보고 있다.
또박또박 걸어가는 이교수의 뒷모습이 복도 저 끝으로 멀어진다.
S#17. 복도 로비 쪽
지원이 걸어오고 있다. 마악 유리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문득 보면, 유리문 밖의 계단에 앉아 있는 정태의 뒷모습이 보인다.
지원,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열고 나간다. 정태의 옆으로 걸어내려간다.
정태, 지원을 돌아본다. 둘의 시선이 잠시 마주치지만, 지원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서 가버린다.
S#18. 이교수 랩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교수. 안에는 아무도 없고, 여학생 혼자 마악 가방을 챙겨들다가 이교수를 보고 인사를 한다.
이교수 : 다들 어디갔어?
여학생 : 식사하러 갔는데요.
이교수 : 그래? (자기 시계보는)
여학생 : 부를까요?
이교수 : 아냐. 너두 저녁 전이지? 어서 가봐. 식당 끝나기 전에.
여학생 : 예.
고개 숙여보이고 나간다.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다.
이교수 혼자 가운데 서 있다가 옆에 앉는다. 내부를 주욱 둘러본다. 자세를 고쳐서 앉아본다. 어떻게 앉아도 불편하다.
S#19. 인공위성센터 전경
안테나가 돌아가고..
S#20. 센터 내부
위성에서 찍을 사진을 들여다보던 서교수가 돌아본다.
저만치에 박교수가 앉아서 하드를 빨아먹고 있다.
서교수 : 할 일 없어? 언제까지 거기 그러구 앉아 있을거야?
박교수 : 생각 좀 하게 그냥 좀 냅둬줘.
서교수 : 무슨 생각을 꼭 여기까지 와서 해야되냐?
박교수 : (대꾸없이 하드의 마지막을 빨아먹고 막대기를 빠는)
서교수 : (옆으로 와 앉으며) 무슨 일인데 그래. 갑자기 조용하니까 이상하다야.
박교수, 막대기를 잘 겨냥해서 쓰레기통에 던진다. 멋지게 들어가는 막대기.
서교수 : 무슨 일인지 얘기하고 싶지 않어?
박교수 책상 위의 종이를 돌돌 뭉치고 있다.
서교수 : 우리별이 이번에 찍어 보낸 사진 있는데 볼래?
박교수, 돌돌 만 종이뭉치를 쓰레기통을 겨냥해서 던진다. 이번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벌떡 일어나 가더니 주워서 다시 뒤로 온다.
서교수 : 계속 그렇게 심술난 곰처럼 있을거야?
박교수 다시 슛을 한다. 이번엔 겨우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종이뭉치.
박교수 두리번거리다가 다른 종이를 발견한다.
박교수가 그 종이를 집기 전에 서교수가 재빨리 가로채고는.
서교수 : 술 마시구 싶어? 사줘?
박교수 : 싫어.
서교수 : 어이구 웬일이야. 술도 싫다니.
박교수 : 맑은 정신으로 생각해볼거야. 나 갈게.
그러더니 휘적휘적 나간다.
S#21. 캠퍼스 / 밤
학생 두명이 뭔가 열심히 토론을 하며 지나간다.
그들을 따라가는 기분으로 보면 거기 불켜진 도서관.
창문으로 공부하거나 오가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S#22. 기숙사 전경 / 밤
소리 : (전화벨소리)
S#23. 지원/경진의 방
벽에는 온갖 별들의 포스터가 붙여져있다. 경진의 침대쪽으로만.
경진, 열중해서 천체 망원경을 조립하고 있고.
책상 앞에서 가방을 챙기던 지원이 걸어가 전화를 받는다.
지원 : 여보세요. ..어. 아직 안 잤어. ...지금? (시계를 보더니) 지금은 너무 늦지 않았니?
그리구 난 지금 읽던 책을 계속 읽었으면 좋겠어.
경진 : (흥미진진해서 보는)
지원 : ....그 얘기라면 아까 다 한거 같은데. 내 생각은 아까 말한게 전부야. 그럼 그만 끊을게.
지원 전화를 끊더니 자기 책상으로 간다.
경진 : 누군데.
지원 : ...정태.
경진 : 니들.. 싸웠니?
지원 : 약간 의견 차가 있었을 뿐이야. (가방을 마저 챙긴다)
경진 :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 마이너스 10도는 되겠는데?
지원 : 원래 내 목소리가 그래. 넌 하던 일이나 마저 하지 그래.
경진 : 그리고. 넌 지금 책 읽고 있는 거 없잖아.
지원 : (할수없이 돌아보며) 넌 원래 남의 일에 그렇게 관심이 많니?
경진 : 어. 난 별들의 세계 다음으로 사람들 세계가 관심있어. 정태 지금 어디 있대?
지원 : (한심해서 보는)
S#24. 오리연못 근처/ 밤
경진이 기웃거리며 오다가 한곳을 본다.
거기 정태가 벤치에 자는 듯 드러누워있다.
경진 : 김정태 자냐?
정태 : (힐끗 보고 모른 척)
경진 : (옆으로 와서 밀치며) 비켜봐. 나두 좀 앉게.
정태 : (할수없이 일어나 앉는다)
경진 : 뭐야. 밤중에 여자를 불러냈는데, 차갑게 거절 당한 다음에 차가운 벤치에 누워서 고독해하구 있는거야?
정태 : 거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마라.
경진 : 무슨 일인데 지원이가 밥도 안먹고 넋나간 사람처럼 우울해하고 있는거야?
정태 : (보는) 지원이가?
경진 : 고봐라. 걸려들었지? 지원이가 그렇게 쉽게 넋이 나갈 애냐. 그러니까 니들 무슨 일 있는 건지 빨랑 말해.
안 그럼 계속 드라마 쓴다.
정태 : (할 수 없어서 웃고) 프로젝트땜에 그러는거야.
경진 : 무슨 프로젝트. 이교수님꺼?
정태 : 왜 그렇게 알고 싶은 게 많냐?
경진 : (두 다리를 길게 뻗으며) 심심해서 그래. 민재는 방구석에 틀어 박혀서 나오지두 않지.
지원이는 암만 말시켜두 도닦는 비구니같지. 우리 과 애들은 슬슬 날 피해다니지.
정태 : 그러게 평소에 좀 잘하지 그랬어.
경진 : 그래서 말 안하겠다는거야? 지원이하구 왜 싸웠는지?
정태 : 싸웠다구 그래? 나하구?
경진 : (가늘게 뜨고 보다가 탈탈 털고 일어선다) 관둬. 따로 정보망을 가동시켜보지 뭐.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뒤돌아 뒷걸음질하며) 김정태. 축하한다.
정태 : 뭘.
경진 : 니가 다른 사람 감정에 그렇게 관심두는 거. 처음 봐. 휴머노이드가 점점 인간에 가까워지구 있어.
정태 : 똑바로 걸어. 넘어져서 발삐지 말구.
경진 돌아서 걸어가며 어깨너머로 두 손을 흔들어 보인다.
뭔가 노래를 하며 걸어가는 경진.
정태 보다가 에라.. 다시 드러눕는다.
그 위로 석학의 집의 음악이 들리며.
S#25. 석학의 집
만수가 생맥주를 주욱 들이키고는.
만수 : 크으.. 그래서 랩식구들 죽 보는 가운데 붙어버린거야. 정태고 지원이고 둘 다 오죽 말발이 세냐.
어떻게 말려볼수가 없드라구.
그 앞에 앉은 경진.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고.
옆에 서서 듣던 미순이 아예 의자를 빼어 앉으며.
미순 : 가만 있어봐. 그럼 우리 이교수님 새로 회사를 잡은 것이 말짱 도루묵이 되는 거야? 이제 그 연구 그만두는거야?
만수 : 그게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요.
미순 : 그 연구 계속해서 그 물건을 만들어내면, 환경이 파괴가 된대매. 나도 이 학교에서 딩군지 세월이 몇년이냐.
귀동냥으로 말하자면 나도 박사급이야. 지금 그 얘길 하고 있는 거잖어.
만수 : 글세 그게 교수님께서 학교 연구비를 미리 받아 쓴 것두 있구요. 그리고.. 하여간 여러가지로 복잡해요.
미순 : 옳거니. 그래서 시방 교수님께서 갈등중이시다. 그래서 자네 생각은 어때.
만수 : 내 생각이 뭐요.
미순 : 자네두 뭐 갈등 생기고 그런 게 있을 거 아냐. 연구냐. 양심이냐! 돈이냐. 윤리도덕이냐.
만수 : 하하 전 원래 갈등같은 거 없어요. 그래서요. 갈등하는 인간들 보면 주눅들고 열등감 느끼고 그래요.
전요. 뭔가 고민을 하려고 하면 말이죠. 고민해야지.. 이러고 베게에 머리를 눕히는 순간, 자요.
이놈의 고민이란 게 5분을 못 넘겨요. (라고 말은 하는데 쓸쓸하다)
경진 : (그러는 만수를 빤히 보고 있다)
미순 : 그래가지고 무슨 연구를 해. 연구라는 게 하루 이십사시간 머리 속이 대갈대갈 굴러가야 되는 거 아냐?
만수 : 가만 생각해보니까 내가 아마 피터팬 신드롬인거 같어요.
미순 : 뭔 시디롬?
만수 : 그래서 내 옆에서 애들이 자라는 거 보면 화가 나요. 애들이 점점 자라잖아요. 나만 놔두고 지들끼리 어른이 되고,
뭔가 고민을 하고, 점점 재미없어진다구요. 자꾸 심각해져가요. 돌아가면서 한대씩 패주고 싶다구요.
미순 : (뭔소린가 해서 보는데)
경진 : (박수를 두번 치더니) 알았어.
미순 : 얘 소리가 뭔 소린지 알았다고?
경진 : 잘만 하면 스리쿠션, 아니 훠쿠션쯤 될 거 같은데요.
미순 : 뭐가.
경진 : 이게 각도를 잘 잡아서 쳐야 되는데. 그럼 일발사타. 정태 지원이 만수형에 민재까지.. 하하.
미순 : 얘들이 지금 500씨씨 한잔씩 먹구 취했나.
경진 : 이게 말이죠. 각 개인의 특성을 잘파악하고, 그 상관관계를 조직적으로 잘맞춰보면 어떤 자극을 줬을때 어떤 반응이 나올지
예측할 수가 있거든요. 아이구 난 이런 게 너무 재밌어.
미순, 수상쩍어서 쳐다보는.
S#26. 연구실 건물 / 밤
어두운 밤에 불이 켜져 있는 어느 방.
S#27. 경교수 랩
창 밖은 밤인데 애널라이저 앞에서 이교수가 혼자 뭔가를 연구하고 있다.
옆에는 먹다 남은 김밥과 종이 커피잔이 몇개 놓여있다. 연구실에는 아무도 없다.
S#28. 기숙사 앞 / 이른 아침
밤을 샜는지 거의 반쯤 잠이 든 학생 하나가 가방을 덜렁덜렁 들고 안으로 들어간다.
엇갈려서 나오는 민재, 가벼운 온동복 차림.
계단을 내려와 몸풀기를 잠시 하더니 달리기 시작한다.
S#29. 캠퍼스 일각
민재, 가볍게 달리고 있다. 마악 언덕길을 달려 올라가는데,
마주 달려오던 경진이 민재를 보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경진 : 안녕, 잘 잤어?
민재 : 안녕. (지나쳐가는데)
경진 : (방향을 돌려 민재 옆을 달리며) 얘기 들었어? 어제 밤 정태가 뭐라구 안해?
민재 : 뭘 뭐라 그래.
경진 : 걔 또 병이 도진 모양이든데. 아이구 잠깐만 서봐. (민재를 잡고 헉헉대며 선다)
민재 : (할수없이 서고)
경진 : 걔 연구구 뭐고 집어치구 또 여행갈거 같든데. 어제 밤에 만났거든.
민재 : ..뭐?
경진 : 연구하는 게 뭐 맘에 안드나 봐. 아니지 이교수님이 맘에 안 든다구 해야되나.
민재 : 무슨 얘기야.
경진 : 김정태 참... 맘에 안들면 지만 관두면 되지. 그 욱하는 성질에 또 무슨 짓을 할려구 그러는지 말야. 아주 걱정되네..
민재 : 글세 뭐가.
경진 : 아 너 운동하는 중이었지? 계속 달려. 아우.. 공기 좋다.
하더니 민재가 잡을 새도 없이 반대방향으로 달려간다.
민재 어이없어 보다가 생각해보는.
S#30. 민재/정태의 방
민재가 세수한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며 들어와 보면, 정태는 자기 침대에서 아직 자고 있다.
민재, 그런 정태를 보다가 퍽퍽 때려서.
민재 : 안 일어나? 랩에 가봐야 되는 거 아냐?
정태 : (돌아누우며) 냅둬.
민재 : 여덟시 넘었어. 아홉시에 미팅 있는 거 아냐?
정태 : 별로 가고 싶지 않어.
민재 : (보다가) 왜.
정태 : 아 자식, 니 할거나 해. (얼굴에 베게를 덮어버린다)
민재, 물끄러미 그런 정태를 본다.
S#31. 지원/경진의 방
지원 얼굴에 로션을 바르며 돌아본다. 경진이 헥헥거리며 들어온다.
경진 : 아이고 힘들어. 새벽부터 언덕길을 다 헤멨네.
지원 : 운동하고 온거야?
경진 : 내가 미쳤냐. 운동을 왜 해. 아이구 다리야. (침대에 걸터앉으며) 아참 좀 전에 민재 만났다.
걔 여전히 아침마다 뛰는 모양이지.
지원 : 여행 간다드니..
경진 : 세상이 어디 계획대로 되냐. 근데 정태 말야. (눈치보는)
지원 : (화장품을 챙기는..관심 없는 듯)
경진 : 걔 무슨 일 있냐? 어제 밤 나 만났을 때두 뭔가 심상치 않았거든.
지원 : (화장품을 제자리에 놓는)
경진 : 아까 민재 말이 정태가 어제밤에 짐을 챙기는 거 같드라는데.
지원 : (돌아보는)
경진 : 걔 작년에두 그러다가 없어졌대매. 그리고 일년만에 돌아왔대매.
지원 말없이 책들을 챙기기 시작한다.
경진, 그런 지원을 슬그머니 눈치보고는 기지개를 켠다.
경진 : 아이구 삭신이야. 아무래도 한잠 더 자야겠다.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S#32. 박교수 랩
마이클이 앉아서 타자를 치고 있는데, 한글타자를 치고 있어서 아주 서툴다.
투덕거리는데 지원이 들어온다.
마이클 : 오우 지원이누나.
지원 : 웬일이야. (좀 힘이 없다. 자기 자리로 가는)
마이클 : 이거 좀 봐줘. 나 한글로 썼어. 이거 개별연구 플랜이야. (의자를 드르륵 밀고 옆으로 오며) 나 무슨 연구 할건지 알어?
내가 가르쳐줄게. 난 초이스 프로그램을 만들거야.
지원 : (보는)
마이클 : 초이스. 사람들은 언제나 초이스를 해야돼. 그런데 그거 너무 어려워.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생각하면
점점 더 점점 더 어려워져.
지원 : (무뚝뚝하게) 난 니 말이 더 어려워.
마이클 : 오우 이거 아주 이지해. 누나 점심때 뭐 먹고 싶어. 냉면 떡볶이 라면. 칼비. 잘 몰라. 그래서 생각해. 냉면은 맛있지만
금방 배고파. 칼비는 더 맛있지만 비싸. 라면은 싸지만 몸에 안좋아. 이렇게 자꾸 생각하면 머리 속에 불 나. 연기 나.
그럴 때 컴퓨터가 대답해주는거야. 너 짜장면 먹어라. 이렇게.
지원 : (어이없어) 너 지금 개별연구 주제 잡는 거 맞어?
마이클 : (답답하다는 듯) 초이스할 때 정답이 뭔지 알어? 정답은 자기 마음이 제일 편한거. 행복한 거. 그게 정답이야.
지원 : 자기 마음에 제일 편한 게 정답이라구?
마이클 : 그래. 칼비 비싸지만 그거 먹어야 행복하면 그게 정답이야. 칼비값에 행복값도 플러스되니까 비싼 거 아니야.
프로그램에 데이타를 많이많이 넣어주면, 내가 칼비..할때 행복한지, 라면..할때 행복한지 계산할 수 있어.
지원 : 어떻게?
마이클 : 그건 지금부터 연구할거야. 그리고 이 프로그램은 한사람이 자기꺼 밖에 못 써.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 프로그램
카피도 못해. 자기꺼하고 다른 사람꺼는 달라. 그래서 난 돈 많이 많이 벌 수 있어. (행복하다)
마이클 주욱 의자를 밀고 가고, 그런 마이클을 보다가 생각을 하는 지원.
S#33. 복도
걸어오는 이교수. 어제의 옷차림 그대로에 밤을 새서 바로 나온 상황. 피곤해보인다.
S#34. 이교수 연구실
책상 위에 쌓여있는 자료들..
그 뒤에 이교수가 생각에 잠겨 앉아있다.
소리 : (노크소리)
이교수 : 네.
명환 : (들어서서) 회사에서 오신 분들이 기다리고 계신데요.
이교수 : 알았어. (그리고도 그냥 앉아있는)
명환 : (기색을 살피다가) 좀 더 기다리라고 하실까요.
이교수 : 아니 가야지. (일어서서 자료를 챙긴다. 서류 한 뭉치가 바닥에 떨어진다)
명환 : (얼른 와서 자료를 챙겨 건네주다가) 어제 밤 새셨습니까?
이교수 : 응? (하고는 자기 옷차림을 살피는)
명환 : 어제 밤에 연구실에 계셨단 말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제 랩의 애들 데리구 술 좀.. 마시느라구..
이교수 : 데이터는 다 뽑아놨니?
명환 : 아 그건 오늘 중으로..
이교수 : 오늘 중으로 나올 수 있는 거라면, 어제 밤에 술 안마셨으면 지금은 내 책상 위에 있을 수 있었단 얘기잖아.
명환 : 죄송합니다.
이교수 : 작업 스케쥴, 니가 짠거야. 지킬 수 없는 스케쥴은 왜 짜.
명환 : 그게.. (용기내서) 프로젝트는 계속하실겁니까?
이교수 : (보다가) 계속할 수 없다면 오늘 밤에두 술 마시러 갈거니?
명환 :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고.
이교수 : 데이터 자료는 오후 다섯시까지 내 책상 위에 놔줘.
명환 : 알겠습니다.
이교수 : (나가려는데)
명환 : 저기 잠시만요.
이교수 멈추면, 명환 다가오더니 이교수의 접힌 옷깃을 바로 잡아준다.
명환 : 됐습니다. (물러서는데)
이교수 : ... 고맙다.
이교수 나간다.
명환, 우두커니 서있다가 문득 시계를 보더니 어이쿠, 급히 나간다. 닫히는 문.
S#35. 복도
명환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데, 마주 오던 민재가 먼저 명환을 발견하고.
민재 : 선배님.
명환 : 어 오랜만이네.
민재 : (명환을 따라 걸으며) 대충 얘기 들었어요. 프로젝트 어떻게 되는 거에요?
명환 : 정태는 뭐하구 있어. 오후까지 데이터를 다 뽑아놔야 되는데.
민재 : 정태는 뭔가 맘에 안드는 모양이든데요.
하는데, 바로 앞에서 어떤 연구실 문이 열리며 짐을 가득 실은 밀차를 밀고 나오는 학생들 때문에 둘 다 길을 멈춰선다.
짐이 빠지기를 기다리다가..
명환 : 민재야.
민재 : 예.
명환 : 난 너를 굉장히 좋아하지만, 너한테 우리 랩의 문제, 자세히 얘기해주고 싶지 않어.
민재 : (보는)
명환 : 이런 문제는 같이 밤새며 연구하는 사람들끼리 이해할 수 있는 거야.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교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말하는 거 난 싫다.
민재 : ...예.
명환 : 우리 교수님이 어떤 결정을 하든 난 따를거야. 왜. 교수님은 우리랑 같이 밤새고, 같이 고민하고 기뻐하는 분이니까.
민재 : ...
명환 : 연구실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절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게 있는 거야.
명환, 먼저 가버린다. 민재 남아있다.
S#36. 세미나실
이교수가 자료를 앞의 간부 1,2에게 나눠준다. 안에는 세명뿐.
이교수 : 이건 우리 프로젝트하고는 별개의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상되는 연구 기간과 연구비에 대한 것도
이 안에 있습니다.
간부1 : 그럼 지금 교수님께서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계신 겁니까?
이교수 : 네. 중요한 프로젝트라고 생각되서요. 다른 회사보다 더 관심이 있으실거라구 생각해서 먼저 말씀드리는 겁니다.
S#37. 캠퍼스 / 낮
박교수 털레털레 걸어가다가 문득 돌아보면, 저만치 잔디밭에서 처장이 허리를 굽혀 뭔가를 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처장은 잔디밭에 학생들이 버려놓은 빈깡통과 꽁초를 줍고 있는 중이다.
S#38. 캠퍼스 다른 곳.
쓰레기통에 깡통을 버리는 처장. 그 옆의 박교수.
처장 : 학부때 이희정 교수가 어땠냐구요?
박교수 : 예. 그러니까 이교수께서 학부때 수학과였고. 당시 처장님께서 지도교수셨으니까
뭔가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고 계시지 않을까,, 해서요. 하하.
처장 : 정확하게 어떤 점을 알고 싶은 거에요.
두사람 얘기 나누며 대충 근처의 벤치에 앉고..
박교수 : 정확하게...에...그러니까 이교수의 윤리의식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처장 : (돌아보는)
박교수 : (웃지 않고 있다)
처장 : (좀 웃더니) 글세요. 두분이 무슨 견해차가 있으셨던 모양인데..가만있자.. 우리 이교수야 워낙 노력파였고.. 그리고..
그렇지. 이 얘기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요. 졸업 즈음에 그런 말을 했어요. 자기는 꼭 교수가 되고 싶다구요.
박교수 : 아 그 때 벌써요.
처장 : 그래 교수가 되는 길은 멀고 험하다. 왜 꼭 교수가 될려고 그러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합디다.
자기는 신문도 잘 안보고 사회 돌아가는 것도 모른다. 할줄 아는 건 연구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제 2의 원자탄을 만들게 될지도 모르겠다.
박교수 : 교수를 하면 원자탄을 안 만드나요?
처장 : 아니죠. 이교수 생각은 누군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제자들이요. 제자들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최소한 한번 생각할 거 두번 생각하게 되지 않겠느냐..그런 말을 했던 거 같애요.
박교수 : (말이 막혀 처장을 보는)
처장 : 날씨가 좋구만요. 이제 또 새학기가 시작되었구요.
박교수, 생각에 잠겨서 처장이 보는 하늘을 본다.
S#39. 복도
경진 걸어오다가 앞을 보더니 재빨리 옆의 비상구쪽으로 몸을 숨긴다.
숨긴 채로 하나 둘 셋 넷 세다가 휙 돌아서 앞으로 나간다. 거기 오던 민재와 거의 부딪힐 뻔해서.
경진 : 여어 또 만나네. 아직 여행 안갔어?
민재 : 어. (비켜주는데)
경진 : (다시 가로막으며) 정태하구 얘기해봤어?
민재 : 자는 거 보구 나왔어.
경진 : 그럼 아직 그거 안 썼겠네.
민재 : 그거라니.
경진 : 글세. 진정서 같은 거 아닐까. 이교수님이 하려는 이런 연구는 중단시켜야 마땅하다.. 뭐 이런 식의.
민재 : 진정서를 쓰겠다구 했어? 정태가?
경진 : 아 뭐 꼭 그렇게 말한건 아니야. 그냥 내가 혼자 짐작을 하는 거지.
민재, 인사도 안하고 경진을 비켜서 빠르게 걸어간다.
경진, 가는 모습을 보다가 웃지도 않고.
경진 : 나도 따라가서 구경할 수 있음 좋을텐데. 아깝다.
S#40. 민재/ 정태의 방
민재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선다.
정태 가운데 앉아서 여행정보 책을 보고 있다가 돌아본다.
민재 옆으로 와서 정태가 보던 책을 집어들더니.
민재 : 니가 왜 여행가이드 책을 보고 있어.
정태 : (민재의 거친 말투에 의아해서) 왜. 보면 안되냐.
민재 : 느이 랩, 오늘 바쁘대. 얼른 일어나서 가봐.
정태 : 내가 필요하면 전화하겠지 뭐.
민재 : 니가 무슨 변호사냐? 전화로 호출해야 가서 일하는거야?
정태 : 너 왜 아침부터 시비조야?
민재 : 데이터 뽑는 거 정신 바짝 차리구 앉아서 해두 틀리기 쉬워. 가서 찬물에 세수하고 가. 그리구 지금은 아침이 아니고
점심 때 다 됐어.
정태 : (좀 짜증난다. 벌떡 일어나 서성대다) 내 일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넌 니 갈데루 가라 응? 배낭 다 싸놓고 뭘 미적대는거야?
민재 : 니 일, 뭘 알아서 할건데. 진정서라두 쓸거야?
정태 : 뭘 써?
민재 : 나, 너 하는 꼴 보면 정말 짜증나. 며칠 재밌다구 공부하다가 핑계 하나 생기면 금방 집어치는거야?
몇년씩 몇십년씩 연구하는 사람들 마음. 너같은 놈은 평생가두 모를거다.
정태 : 너 지금 상황을 제대로 알고 하는 소리야?
민재 : 상황같은 건 알고 싶지도 않어. 양심이니 윤리니 그 딴건 연구를 다해놓고, 그 결과물을 놓고 얘기하는거야.
너처럼 시작도 하기 전에 말로만 하는 게 아니고.
정태 : (기분이 나쁘다) 그렇게 연구에 미친 놈이 배낭 싸서 여행은 왜 가. 연구실에 박혀 살지.
민재 : 안 그래두 그럴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충고하는데 진정서 같은 거 쓸 시간 있으면 잠이나 자.
(나가려다 옆에 놓인 배낭을 보더니 집어들어 정태 앞으로 던진다) 여기 짐 다 싸져있으니까 여행가고 싶으면 들고 가라고.
민재 나간다.
정태, 어이없어 보다가.
정태 : 근데 너, 진정서는 도대체 무슨 소리야.
그러나 이미 민재는 밖으로 나가고 있다.
S#41. 이교수 연구실 앞 복도
이교수, 표정없는 얼굴로 걸어오다가 보면,
민재가 연구실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몸을 세우며 인사를 한다.
이교수 : 이민재.
민재 : 상의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S#42. 이교수 연구실
민재 앞에 서있고. 이교수 책상 뒤로 돌아가 앉으며.
이교수 : 졸업연구 취소했다고 들었는데.
민재 : 대신 개별연구를 신청하러 왔습니다. (들고온 계획서를 내민다)
이교수 : 내 과목에 개별연구는 벌써 끝냈잖아.
민재 : 학점과 관계없이 들으면 안될까요.
이교수 : (계획서 만지작거리다) 너 내년에 대학원 들어가서 시간단축하려면 석사학사 연계과정을 많이 들어놔야 되는 거 아니니?
민재 : 그럴 겁니다.
이교수 : 그런데 이거 할 시간 있어? 알겠지만 우리 랩에서는 학생들 사정 봐주는 거 없어.
민재 : 알고 있습니다.
이교수 : (잠시 민재를 보다가) 대학원 입시 사정회의때, 난 너를 불합격 시키자고 주장했어.
민재 : 그러셨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교수 :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어?
민재 : 제가 아는 교수님이라면 당연히 그러셨을 거라고.. (말하다 말고 빙긋 웃는)
이교수 : (보다가...웃지는 않고) 개별 연구 과제가 뭐야.
민재 : 지난 번에 초고속 DSP칩을 만들다 말았는데요. 그걸 광소자에 집적해서 광중계기로 사용할거란 얘길 들었습니다.
그거.. 제가 해보고 싶었던 겁니다.
이교수 : (보다가..) 가서 명환이한테 말해. 오늘 세시에 랩 아이들 모두 모이라고. 중요한 미팅이니까 한사람도 빠지지 말라고해.
너하구 김정태, 학부생들도 다.
민재 : 알겠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밝아진 민재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 나간다.
보고 있는 이교수의 입가에 어쩔 수 없이 미소가 번진다. 행복하다.
그 위로 전화벨 소리 들리고.
S#43. 박교수 랩
남희가 전화를 받고 있다.
남희 : 네 교수님. 오늘 세시요? 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저희 연구팀도 같이 참석할까요? 네. 네.
S#44. 강의실
이교수와 박교수의 랩 아이들 좌석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그 뒤편에 박교수가 책상에 걸터앉아 보고 있다.
이교수가 앞에 서서 얘기 중이다.
이교수 : 여러분도 알고 있는 것처럼 이번 프로젝트의 가장 큰 난점은 개발 공정에서 사용되야 하는 메조클로로플로린이었어요.
현재, 이 물질을 정화시킬 시스템은 없어요. 그래서. 오늘 오전에 회사 쪽에 프로젝트 하나를 제안했는데
바로 이 정화시스템을 개발하는 프로젝트에요.
얘기하는 사이 보이는 아이들 쪽. 만수는 민재 옆에 바싹 붙어있는데 아주 기분이 좋다.
이교수 : 물론 현재로서 회사쪽의 반응은 부정적이에요. 회사 입장에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연구비를 투자해야 되는 거니까.
상관없어요. 우린 이 연구를 동시에 시작할겁니다. 연구비를 대줄 회사는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에요. 왜냐.
(주욱 둘러보고 박교수와 눈이 마주치더니 미소가 어려서) 알다시피 이 물질은 미국에서 현재 생산이 중단된 상태에요.
그러니 우린 경쟁자 없이 이 물질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는거죠. 개발이 성공하고 특허를 신청하게 되면
아마 미국에 수출도 할 수 있을거라고 봐요.
박교수, 아이들 모르게 모양으로 박수치는 흉내를 낸다.
이교수 : 질문.
정태 : (손을 들더니) 만약 정화시스템보다 먼저 칩이 상품화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정화시스템이 개발될 때까지
그냥 놔두실 건가요?
이교수 : 그게 걱정된다면 정화시스템을 개발하는 일에 좀 더 힘을 쏟는 게 낫지 않을까? 지구의 환경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밤을 새는 일이 별로 어렵지 않을거야.
정태, 고개를 숙이는데 미소가 어린다.
이교수 : 또 질문 있어?
명환 : 작업 분담에 대해선데요. 두가지 프로젝트를 한꺼번에 진행할려면 현재 인원으로는 좀 부족할 거 같거든요.
이교수 : 그래. 그 문제를 좀 생각해봐야겠군. 현재 우리 인원이 몇명이지?
명환이 명단을 들고 나오는 사이, 이교수가 박교수를 다시 쳐다본다.
이교수를 보는 박교수, 어깨를 들썩이며 특유의 웃음을 보이고 있다.
S#45. 복도 휴게장소
경진, 지민, 대욱이 앉아있다.
대욱이 부지런히 메모를 하고 경진이 불러주고.
경진 : 왕정문의 눈에 줄리아로버츠의 입술.
대욱 : 잠깐잠깐 천천이.. 줄리아로버..츠. 그리고.
경진 : 그리고 거기에 맥라이언의 미소.
대욱 : 맥..라이언..
경진 : 그리고 몸매도 있어야 돼?
대욱 : 아니 우선 얼굴 먼저 만들어 보구요. 이렇게 섞어놓으면 금세기 최고의 미녀가 된다 이거죠.
지민 : 굉장히 이상해질 거 같은데.
경진 : 놔둬. 공학 디자인을 하는 애니까 뭐든 만들거야. 그리구 넌 전공을 정하고 싶다고?
지민 : 하구 싶은 게 너무 많어요. 그리고... 자신 있는 건 하나도 없고.
경진 : 좋은 수가 있어.
지민 : 뭐요?
경진 : 우선 니가 가장 하기 싫은 게 뭐야.
지민 : 음.. 건축이나 기계. 그런 건 한번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안해봤어요.
경진 : 그래. 그럼 그 중에 하나를 전공으로 선택해.
지민 : 언니.
경진 : 그렇게 일년만 공부하고 나면 그 나머지는 뭘 해도 재밌게 느껴질거야. 그때 전공을 바꾸면 돼. 어때.
대욱, 낄낄대고. 지민 뭐라 항의를 하려는데 경진이 재빨리 둘의 머리를 아래로 박으며.
경진 : 쉬잇.
//그들이 있는 칸막이 뒤로 막 미팅을 끝낸 이교수, 박교수 랩의 아이들이 몰려지나간다.
만수가 민재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지나가며.
만수 : 내가 니 책상에 아무도 손 못대게 해놨어. 그러니까 넌 고대로 들어와서 고 자리에 고대로 앉으면 돼. 알았지.
민재 웃고, 그들 지나가고. 그 뒤로 남희와 얘기를 나누며 오는 지원.
그 뒤에서 정태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정태 : 구지원.
지원 : (돌아보면)
정태 : 나하고 할 얘기가 남아있지 않냐.
남희 : (눈치보고) 그럼 나 먼저 갈게. (먼저 가고)
지원 : (정태를 향해) 무슨 얘기가 남았는데?
정태 : 저번에 랩에서 우리 했던 얘기 말이야.
지원 : 그건 그 때 끝났잖아. 난 너보구 순진한 이기주의자라고 했고. 넌 나한테 학벌이나 돈이 판단기준인 사람이라고 했어.
난 더 할 얘기 없는데.
지원 먼저 걸어가고. 정태. 한숨 쉬어 보다가 그 뒤를 천천이 따라간다.
//칸막이 뒤에서 대욱이 잡힌 머리통을 빼내며.
대욱 : 지금 우리 뭐하는 겁니까?
경진 : (헤에 웃더니) 도피중이야.
지민 : 도피? 도망?
경진 : 나 당분간 만나면 곤란한 애가 있거든. (불쌍한 얼굴)
S#46. 석학의 집
백곰이 녹차를 준비하는 미순의 옆에 붙어서서.
백곰 : 녹차는 그렇게 끓는 물에 우리는 게 아닙니다. 한번 팔팔 끓이고 그걸 한숨 식힌 다음에..
미순 : 부탁이니까 가서 제대로 된 녹차를 혼자 타드시는 게 어때요.
백곰 : 참 이상하군요. 저는 언제나 충심으로 조언을 하는건데 어째서 매번 그걸 삐딱하게 받아들이는 겁니까?
미순 : (대꾸하기 싫다는 듯 가고)
진영 : (옆에서 한심하게 보다가) 말로 하지 말고 그냥 행동으로 보여 보세요.
백곰 : 행동으로?
진영 : 맨날 영화가자. 데이트 가자. 그러지 마시구요. 그냥 납치를 해버리시라구요.
백곰 : 나압치?
진영 : 어머 내가 무슨 말을 하는거야. (입을 막고 가고)
그 뒤로 민재가 들어서서 두리번거리다가 한곳을 본다.
거기 경진이 책으로 얼굴을 가리고 움추려 피해보려고 하고있다.
민재 그 앞에 가 서서 가린 책을 슬쩍 빼든다. 경진이 헤에 웃는 얼굴로 민재를 본다.
민재, 엄한 얼굴로.
민재 : 민경진.
경진 : 하이 이민재.
민재 : 경고하는데. 다신 그런 장난치지 마.
경진 : 장난? 무슨 장난?
민재 : 정태가 여행을 가고 진정서를 써? 니 머리 속에는 거짓말 주머니라도 달렸냐? 어떻게 그런 말이 얼굴색도 안 변하고
줄줄 나오냐?
경진 : ..재밌잖아.
민재 : 재밌어? (한심해 보다가) 나도 절박할 때 거짓말은 해. 그렇지만 너처럼 아무 때나 아무 말이나. 그냥 재미로 거짓말하는 거
절대 이해 못하니까.. 하지 마.
경진 : 알았어.
민재 더 말하려다가 관두고 나간다.
경진 테이블 밑에서 두 손을 꺼내 드는데 두 손 다 손가락을 꼬고 있다. 혼자 웃어보지만 이내 관둔다. 우울하다.
우울한 얼굴로 보는 곳에 백곰이 미순을 따라다니며 뭔가 말하고 있다.
진영이 옆으로 와서 빈 콜라잔을 치우며.
진영 : 얼음물 갖다 드려요?
경진 : 저 두분 말이에요.
진영 : (경진을 따라 미순과 백곰을 본다) 언니하고 아저씨요?
경진 : 저 두사람 혹시 사랑의 메신저가 필요한 거 아니에요? 내가 한큐에 해결해 줄 수 있는데.
진영 뭔말인가 해서 보고.
경진, 겨우 다시 생기가 돌아서 진영을 보며 미소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