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제왕을 보았거나 읽었거나 읽고 보신분들은 '반지원정대'에서 가장 하일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부분...그러니까 드워프의 왕국이 있었던 모리아 동굴에서 간달프와 발록이 맞장을 뜨던 부분을 기억하실 겁니다...
반지의 제왕 전체를 통털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였다가 이름값도 못하고 허무하게 사라져야했던 바로 그 궁극의 마수 발록에게 날개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미시적인 고찰을 어느 반지의 제왕 팬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
장문이지만 읽어보시면 제법 재미있는 글입니다...
< 발록의 날개: 그 존재론적 딜레마 >
It was both a shadow and a flame, strong and terrible. It was a
Balrog of Morgoth, of all elf-banes the most deadly, save the One
who sits in the Dark Tower.
가운뎃땅에 있는 많은 신비로운 것 중에서 제일 신비로운 것이 바로 발록의 날개이다. 아니, 어쩌면 가운뎃땅에 없는 많은 신비로운 것 중에서 제일 신비로운 것이 발록의 날개다,라고 말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발록이란 마이아의 일종이고, 악을 섬기는 많은 영적 존재들 가운데서도 제일 강력한 놈들 중 하나이다. 이름 자체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발-'이란 힘세다는 뜻이고, 알다의 신을 가리키는 '발라'의 맨 앞에도 등장한다. (즉, '발라'는 '힘', 또는 '권세'라는 뜻이다. 알다 위에 군림하는 공중의 권세, 이런 식의 개념이다. '발록'의 '발'과 '발라'의 '발'은 로마자로 적자면 철자가 달라지지만, 이들은 사실 같은 어근의 변형이다.)
수많은 악당 발록들이 전설을 장식하고 있지만, LotR이 이야기하는 제 삼 시대의 끝무렵, 즉 반지전쟁이 시작되고 '반지들이' 프로도의 방랑이 벌어지는 때에 LotR에 실제로 등장하는 발록은 단 하나다.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모리아에서 어떤 북치는 소년 및 기타 오크 여러분을 이끌고 홀연히 등장하여, 프로도 일행을 지휘하던 간달프를, 마치 왜군의 장수를 안고 함께 강물에 빠진 열녀 논개와 같은 포즈로, 채찍으로 다리를 휘감아 끌고 함께 모리아의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멋진 전술을 구사한다. 그 괴상한 전법에 맞서 간달프는 신나게 싸우다가 그만 죽어버리고, 에루의 개입에 의해 다시 살아나며, 덤으로 세탁기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듯이 탈색되어 백색의 간달프가 되어 버린다.
여기에서 백색의 간달프, 검은 누메놀 인, 등등의 색깔을 나타내는 형용사에 담긴 인종차별 및 파시즘에 대해 논하고 넘어가는 것도 시간을 때우기에는 나쁘지 않은 일이겠으나, 갈 길이 먼 관계로 생략하도록 한다.
하여튼 문제의 모리아의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자. 여기에서 간달프와 이 무명의 발록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면하게 되고, 또한 여기에서 발록의 날개가 처음으로 등장하거나, 아니면 등장하지 않는다.
(이 대면에 대해, '둘 다 마이아인데 전에 걔내들이 서로 만난 일이 설마
없을까? 이거 혹시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냐?'라고 묻는 사람을 뉴스그룹에서 보았는데, 웃기는 소리다. 똑같은 지구인이라고 다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듯이, 같은 마이아라고 다 알고 지내야 한다는 이유가 없다. 하물며 친하게 지낼 이유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발록은 다리에 다다랐다. 간달프는 다리의 뻗은 중간에서, 왼손에
짚은 지팡이에 기대어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다른 손에는 글람드 링이 차고 희게 번득였다. 그의 적은 그를 마주본 채로 다시 멈췄고, 주위의 그림자는 마치 커다란 두 짝의 날개처럼 뻗어나갔다.
그것은 채찍을 들어 올렸고, 가죽끈은 울부짖고 철썩거렸다.
콧구멍에서는 불이 솟았다. 하지만 간달프는 굳건히 서 있었다."
이것이 바로 발록의 날개의 첫 등장이다. 영화의 한 장면을 상상하라.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뭔가가 펼쳐진다. 날개인가? 너무 어두워서 무엇이었는지 잘 파악이 되지 않는다. 뭔가가 뻗어나가기는 한 것 같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다시 한 번 날개를 볼 기회가 주어진다.
"'못 건너간다!' 그가 말했다. 오크들은 그대로 섰고, 죽은 듯한
고요가 감돌았다. '나는 비밀의 불을 섬기는 하인, 아놀의 불꽃을
지닌 자니라. 못 건너간다. 어둠의 불로도 네가 어찌 할 수 없으리라,우둔의 불아. 그림자로 되돌아가라! 못 건너간다.'
발록은 대답이 없었다. 그것은 다리 위로 천천히 발을 내딛었고,
갑자기 엄청난 높이로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 날개가 벽에서
벽까지 뻗었다. 그러나 여전히 어둠속에서 어렴풋이 빛나는 간달프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작아보였고, 완전히 외따로 있었다. 불어오는
폭풍 앞의 말라 비틀어진 나무처럼 회색에 꾸부정했다.
그림자로부터 붉은 칼이 타오르며 뛰쳐나왔다.
글람드링이 하얗게 번득이며 답했다."
이번에도 날개가 어렴풋이 나타났다. 하지만, 아뿔싸, 전체적인 어두운 화면과 일부 불길 때문에 여전히 막연한 실루엣 정도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뭔가 날개 같은 것이 있었고, 그것이 벽과 벽 사이에 완전히 펼쳐졌다. (영화 Spawn은 혹시 이 장면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뭔가가 전광처럼 지나갔다.
무서운 초식이다. 그러나, ..., 그게 대체 뭐였지?
불행히도, 버스는 이미 지나갔다. 발록은 카자드-둠의 어딘가에서 최후를
맞았으며, 진상을 밝힐 수 있었던 유일한 증언자인 간달프는 세상을 구하는 사소한 일에 매달린 나머지 발록의 날개가 있는가 없는가라는 지극히 중대한 학술적인 가치를 갖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또한 이런 애매한 문장을 구사해서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 번역자 톨킨은 역시 영국에서 최후를 맞았다.
고로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그냥 지나칠 까닭이 없다. 직접 장면을 목격한 사람과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들이 이미 몇천년 전에 죽어버린 이상 무슨 소리를 하며 치고 받아도 되는 것이다.
실제로, 유즈넷의 톨킨 관련 뉴스그룹인 a.f.t. (alt.fan.tolkien)과r.a.b.t.(rec.arts.book.tolkien)에서는 과연 발록의 날개가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엘렛살 텔콘탈 왕이 즉위한 직후인 제 사시대에서 시작해서 몇천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도록 기나긴 토론이 있어왔다. 팽팽하게 맞서는 논쟁에 다들 지쳐 조금 수그러지는 듯 하면 또다시 누군가가
근데, 발록의 날개가 있어유, 없어유?
라고 한 마디를 툭 던지고 지나가고, 그러고 나면 또다시 미친듯이 불길이 타오르고 타래가 이어지곤 했다. 그래서 '발록에게 날개가 있는가?'라는 정도의 제목의 글타래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그 명맥을 유지해 왔고, 이것은 종종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그 뿌리를 보존해 온 두네다인 왕실과, 두 그루의 나무의 계보에 비유되곤 했다.
절대로 죽지 않는 타래. 발록불사. 이런 악명을 떨치며 '발록의 날개'라는 타래는 유지되어왔다. 또한 '발록지익'이라는 말은,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여 사람을 혼미하게 만드는, 애매한 존재론적 위상을 갖는 대상들을 가리키는 말로 종종 쓰이곤 했다.
예를 들자면, 쌍동이 솟수의 갯수, 핀대가리 위에 올라가 있을 수 있는 천사의 총 숫자, 단일 전자의 궤도, 슈레딩거의 고양이, 받은지 며칠이 지난 월급 등등을 가리킬 때 이 표현을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발록의 날개란 너무 유명하여 종종 이 두 뉴스그룹에서는 엉뚱한 타래에서 시도 때도 없이 발록의 날개가 등장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곤 한다. 어떤 사람은 스페인어 판 LotR에 대한 얘기를 하다 말고, '빨리 방학이 되어 집에 가서 책꽂이에 모셔져 있는 스페인어 판 LotR을 읽고, 스페인어 판에서는 발록의 날개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따위의 헛소리를 중얼거리기도 한다. 또한 혹자는 발록의 날개야말로 발록이 가진 모든 속성 중에서 제일 사악한 것이라는 주장을 이 발록의 날개를 둘러싼 대립으로부터 도출하기도 한다.
(연습문제 1. 도서출판 예문에서 번역되어 나온 '반지전쟁'을 읽고,
한국어판 발록에는 한국어판 날개가 붙어 있는지 없는지를 밝히고 그 근거를 이천 자 이내로 서술하시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일단 발록이 끝까지 모리아의 어둠을 배경으로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거의 실루엣만 보인다는 점이다. 발록의 날개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팽팽한 논쟁을 했고, 양 진영에서 각각 날카로운 논증과 '명백한' 증거들을 내 놓았지만, 어떤 것도 다른 쪽 진영을 완전히 설득시킬 수 없었다. 정말 사악한 날개가 아닐 수 없다.
일단, 발록의 날개가 있다는 쪽의 주장은 간단하다: 자, 봐라. 실제로 여기 책에 날개라고 적혀 있지 않은가. 이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우선 처음에는 '그림자가 날개같이 뻗었다'라고 했고, 그 다음에는 분명히 잘라서 '그 날개가 벽에서 벽까지 뻗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허구의 작품에서 텍스트에 의존하지 않으면 어디에 의존해야 하는가. 자, 여기 분명히 날개가 뻗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 무엇을 원하는가?
발록의 날개가 없다는 쪽의 주장은 이렇다. '날개'라는 표현은 일종의 비유다. 어두움 가운데 뭔가 펼쳐졌다. 그렇다고 그것이 진짜 날개냐? 꼭 그러라는 법은 없다. 일종의 불꽃이었을 수도 있고, 다른 무엇이었을 수도 있다. 진짜 날개가 아닌, 일종의 날개같이 생긴 등 뒤에 붙은 돌출물인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발록과 간달프는 모리아의 다리 및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발록에게 진짜로 날개가 있다면 왜 발록은 그 순간 날개를 써서 날지 않고 그냥 논개처럼 떨어지고 말았는가?
(여기에 대해서 혹자는 평하기를, 간달프가 떨어지며 남긴 마지막 말,
어서 날아, 이 바보들!
은 사실 급박한 상황에서 잘못 전해진 것이고, 실제로 간달프가 한 말은
어서 날아, 이 바보!
였으며, 그것은 프로도 일당에게 도망치라는 뜻으로 외친 말이 아니라 자신을 채찍으로 끌어당겨 함께 심연으로 떨어지고 있는 날개달린 바보, 발록에게 하는 말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역시 근거없는 소리에 불과하므로 무시하도록 하겠다.)
여기에 대한 날개파 진영의 반대도 만만치 않다. 날개가 달렸다고 해서 그런 갑작스런 상황과 불안한 자세에서 제대로 날 수 있으라는 보장이 있느냐에서부터 시작해서, 날개의 정의가 뭐냐. 사전을 보면 '날개'란 분명히 '날개처럼 튀어나온, 건물이나 물건의 일부분'이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꼭 진짜로 날아야만 날개냐, 그냥 생긴 것만 날개여도 정의 상 날개일 수 있다, 라는 의미론적인 반박을 한다. 공학도들은 또한 이 스캔달에 대해, 모리아 다리 위의 전투가 벌어지는 방의 벽과 벽 사이의 거리를 추산하고, 양 쪽 벽에 걸치도록 뻗는 날개가 어쩔 수 없이 얼마나 구조적으로 불안정한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뭐 거의 낙하산 수준이군요.')
이렇듯 발록의 날개는 정작 발록이 사라진 뒤에도 끝없이 살아남아, 많은 이들을 미혹에 빠뜨리고 다툼과 반목을 일으키며 악을 퍼뜨리고 있다. 오늘도 발록의 날개를 둘러싼 여러 진영의 사람들은 쉬지 않고 자신들의 '확실한' 증거들을 내세우지만, 다른 어떤 사람들도 그것을 확실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이 끝이 보이지 않는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발록의 날개에 대한 논쟁은 다음 천년을 또한 가뿐히 살아남아 우리가 다시 에루의 옥좌 앞에 모여앉아 다시 큰 노래를 부르는 그날까지 계속될 지도 모른다. 실로 발록의 날개야말로 발록의 속성 중에 가장 사악한 것이라는 어떤 이의 말을 다시 새기게 된다.
그럼 대체 이 글을 쓴 목적은 뭐냐?
이 글의 목적은 발록의 날개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실증적인 답을 제시하고 이 논쟁이 또다른 천년을 향해 계속되는 것을 막겠다는 원대한 것이 절대 아니다.
아지못게라! 모리아의 어둠 속에서 발록의 날개가 번득인 시간은 무궁한 조화로 펼쳐지는 아이눌의 노래, 일루바탈의 위대한 주제의 전개 속에, 태초로부터 지금까지의 기나긴 시간 안에서는 찰나에 지나지 않고, 비록 선이나 악이나 어느 쪽에 서 있던 간에 마이아와 발라는 귀이고 신이니, 귀신이 찰나에 이루는 신묘한 조화를 어린 사람이 어떻게 꿰뚫어 보겠는가! 다만 사람이 세상에 나서 학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고 세상을 평정하는 것이 도리이거늘, 귀신의 장난에 혹해 발록의 날개가 있는가 없는가를 논하는데 아까운 시간과 힘을 낭비하여 에루 하나님의 위대한 음악 속의 한 조각 불협화음이 되지 않도록 이르고저 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