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을 맞이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을 개최하였어요.
" 잔치풍경- 조선시대 향연과 의례 " 전시를 관람하고
우리 전통문화 속에 나타난 축하행사의 다양한 모습들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의미있고 오래도록 기억할만한 일이 생기면 기념하고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도 경사慶事를 기념하는 다양한 잔치가 열렸다.
왕실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민간의 잔치도 그 격식에 맞는 의례儀禮에 따라 진행되었다.
잔치풍경 속에는 예에 따라 의식을 진행하고 음식과 음악 무용공연을 즐기는 모습들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조선시대 기록화, 의례관련 기록을 통해 각계각층에서 열렸던 크고 작은 잔치의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별가화(別假花)
별가화는 순조기축진찬의궤(純朝己丑進饌儀軌)를 바탕으로 재현하였다.
나라의 경사스러운 잔치인 국연이 열리는 궁궐의 정전에 삼색도화준(三色桃花樽)을 장엄하였다.
조선시대 진하례(朝鮮時代陳賀禮)
진하례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때 이를 기념하여 왕세자와 백관들이
왕이나 왕실 어른에게 글을 올리고 축하하는 의식이다.
일년중 정한날에 정기적으로 거행되는 조의와 특별한 일이 있을때 이를 기념하는
하의가 구별되었으나 후기에는 이 둘을 합쳐 진하의(陳賀儀)로 행하였다.
왕세자 탄강 진하도(王世子誕降陳賀圖)
1874년 (고종11) 고종과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인 순종(순종1874-1926)이 태어난후
창덕궁 인정전에 신하들이 모여 왕에게 원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하례를 올렸다.
이 그림은 이때 거행된 하례장면을 담은 것이다.
양쪽 끝 폭에는 병풍 제작에 참여한 11명의 관원 이름과 관직 품계 등이 기록되었다.
이들은 산실청(産室廳)에 종사한 관원들이다.
따라서 이 그림은 왕자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하례의식 장면을 그린 그림을
산실청 관원들이 나누어가진 계병(契屛0으로 생각된다.
무신진찬의궤(戊申進饌儀軌)
1848년은 대왕대비인 순원왕후 김씨가 보령 육순을 맞이하고
왕대비인 신정왕후가 보령 망오를 맞이하는 해였다.
이때 헌종은 대왕대비와 왕대비에게 존호를 더하는 예를 올리고
자전에게 직접 치사와 전문 그리고 표리(表裏)를 올렸다.
이후 통명전에서 이를 축하하는 진찬례가, 저녁에는 야진친이,
이틀 뒤에는 왕이 주최하는 회작례가, 저녁에는 야연이 열렸다.
이 과정을 모두 수록한 의궤가 " 무신진찬의궤 " 이다.
무신진찬도(戊申進饌圖)
대왕대비인 순원왕후 김씨의 육순과 왕대비인 신정왕후의 망우(41세)가 되는 해인
1848년 창덕궁에서 열린 진친례를 담은 그림이다.
이 진찬례는 헌종이 대왕대비와 왕대비에게 존호를 올리는 상존호례를 기념하여 열린 것이다.
평양감사 향연도(平壤監司饗宴圖) 18세기 김홍도
평양도감사 부임을 환영하기 위하여 베풀어진 연회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감사는 원래 관찰사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종2품의 문관직으로 지방관직 중 가장 높은 자리였다.
지방행정상 큰 권력을 가진 감사의 부임은 지방 관민에게 있어서 매우 큰 행사였으며 그에 따라
민. 관 . 군이 모두 참석하는 성대한 잔치가 열렸다.
이 그림은 평양 대동강변에서 열린 평안감사 환영 연회 그림 세 폭 중 하나인 < 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 >이다.
해진 뒤 대동강에서 벌어진 환영 잔치로 많은 군인과 관원들이 횃불을 들고 어둠을 밝히고 있다.
감사가 탄 배를 중심으로 앞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악대 및 관선(官船)들이 도열해 있다.
뒤로는 관기(官妓)들이 탄 배, 음식을 준비하는 배, 아전이나 사대부들이 탄 작은 배들이 뒤따르고 있다.
회혼례(回婚禮)
회혼례는 결혼한지 60년 되는 해에 부부가 다시 혼례식을 치르는 행사다.
부부가 건강하고 자식들이 무고하여 자손이 번성할 경우에만 열 수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장수와 복록을 알려주는 중요한 의례였다.
회혼례에서 회혼을 맞은 부부는 신랑과 신부가 처음 혼인식을 치르듯
혼례복을 입고 전안례부터 합근례까지의 의식을 행하였다.
혼례의식이 끝난 후에는 잔치를 벌여 회갑과 같이 자식과 친지로부터 장수에 대한 축하를 받았다.
면사(面紗)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면사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머리 위에서 부터 내려쓰는 조선시대 여성용 쓰개로 사각형 보자기 형태다.
조선 후기에는 내외용 쓰개였으나 후기에는 예장용으로서 주로 혼인때 사용되었다.
보통 홑으로 만들어 금박이나 금니로 길상무늬를 장식하였다.
활옷(華衣)
활옷은 공주나 옹주의 대례복으로 사용된 예복으로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서 신부의 혼례복으로도 허용되었다.
이 활옷은 모란, 봉황, 십장생무늬를 자수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뒷면에는 두 가문의 결합을 의미하는 " 이성지합 "
그리고 이를 통해 새로운 가족구성원이 탄생하여 만복의 근원이 된다는 " 만복지원 " 이라는 글자를 수놓았다.
적의(翟衣) 세종대박물관 소장
적의는 고려시대 말부터 조선시대까지 왕비와 빈이 착용한 최고의 에복이다.
청.홍.백.흑.황의 다섯가지 색을 갖춘 꿩무늬를 수놓아 장식하여 적의라고 부른다.
꿩은 친애와 해로를 의미히고 다석색은 동.서.남.북 .중앙의 오방을 상징히여 인.의.예.지.신의 오상을 지녔다고 여겼다.
이는 적의를 입은 왕비가 오덕을 두루 갖춘 여성이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라고 한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후 왕과 왕비가 황제와 황후로 승격되면서 짙으 청색의 12등 적의를 입게 되었다.
12등 적의는 적의를 횡으로 12등분하여 꿩과 작은 꽃무늴를 배열한 것으로 꿩 154쌍을 수놓았다.
족두리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여성들이 예복에 갖추어 쓰던 관이다.
왕실에서는 원삼과 당의를 입을때 사용하였으며 민간에서는 혼례나 회혼례때 사용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 가채를 금지시킨후 활발히 사용되었다.
목기러기와 목기러기보 한국자수박물관 소장
나무기러기는 혼례때 신랑이 신부집에 기러기를 전하는 전안레에 사용된 물건이다.
원래는 산 기러기로 하였으나 점차 나무기러기로 대체 되었다.
기러기는 질서와 의리를 따르며 제 짝이 죽으면 따라죽거나 평생을 혼자사는 새로 여겨져
이를 혼례의 주요 상징물로 삼았다.
굴레와 돌띠 兒童帽子와 腰帶
굴레는 돌을 맞이한 어린아이가 쓰는 모자로 돌 이후에는 4-5살까지 여자 아이가 사용하였다.
주로 비단으로 만들고 여름에는 갑사와 같이 얇은 천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돌띠는 돌을 맞은 아이의 허리에 두르는 띠로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한바퀴를 돌려맬 수 있도록 길게 만들었다.
띠에는 수(壽), 복(福), 나비, 모란꽃 등 길상무늬를 수놓아 장수와 부귀영화를 기원했다.
황제진어대탁찬안(皇帝進御大卓饌案)과 상화(床花)
의궤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궁중 상화를 재현하였다.
상화는 궁중잔치에 놓인 진찬상을 장식하는 꽃으로 황제진어대탁안을 장식하였다.
죽책함(竹冊函)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영조가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었음을 기록한 죽책을 보관하던 함이다.
검은 칠을 하고 매화, 대나무, 난초, 봉황무늬를 금니로 그려 장식하였다.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조선 18세기 이후 간행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 소장
조선시대 국가 오례의 의식 절차를 기록한 책이 " 국가오례의 " 이다.
세종의 명으로 편찬되기 시작하였고 세조때 오례를 보완하는 서례가 편찬되어 1474년(성종 5) 에 완성되었다.
"국조오례의서례 " 는 오례의 서례를 정하고 도설을 붙인 것이다.
이 책의 편찬으로 조선시대 의례와 관련된 기본 규칙이 정해졌다.
조선시대 각종 의례를 연구하고 그 변화 관정을 살펴볼 수 있는 기초 자료가 된다.
화성능행도(華城陵行圖) 속 불꽃놀이
이 상징물은 화성능행도 속 불꽃놀이 장면을 형상화한 것이다.
색지에 축하의 글을 적어 이곳에 넣으면 조선시대 잔치에 참석한 우리들의 불꽃놀이가 완성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