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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시 23:1-6)
할렐루야!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주님의 집에 소니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며 축복합니다.
시편 23:1-2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아멘.
시편 23편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답고, 또한 널리 알려진 말씀 중 하나입니다.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불신자들까지도,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시편 23편의 말씀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시편 23편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한다면 얼마만큼 좋아하십니까?
이렇게 너 나 할 것 없이, 시편 23편을 좋아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좋아할까요?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시편 23편을 좋아하십니까? 시편 23편의 말씀 가운데, 어느 구절이 가장 마음에 드십니까? 어느 구절이 가장 좋으십니까? 어느 구절에 가장 은혜를 받으십니까? 몇 절 말씀을 가장 좋아하십니까? 시편 23편 하면, 어느 구절이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나의 목자, 부족함이 없다.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원수의 목전에서 베푸시는 상, 기름을 머리에 부으심, 내 잔이 넘치나이다. 선하심과 인자하심”
어느 구절을 보아도, 너무 너무 좋은 말씀들입니다. 어느 구절 하나 좋지 않는 구절이 없습니다. 1절부터 6절까지 모든 말씀이 다 좋습니다.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귀하고 소중한 말씀들입니다.
여러분! 시편 23편이 정말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이 그냥 우리가 꿈꾸는 이상이나, 문학적인 표현으로만 끝나지 않는데 있습니다. 즉 시편 23편이 좋은 이유는, 내용 그대로가, 곧 성도의 현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원수의 목전에서 베푸시는 상, 기름을 머리에 부으심, 내 잔이 넘치나이다. 선하심과 인자하심”는 단순한 시적인 표현이 아니라, 성도의 삶의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성도들이 이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 직접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좋아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시편 23편을 좋아하는 이유 역시, 실제로 경험해 보셨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아직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까? 이 땅에서는 경험해 볼 수 없는 멀고 먼 나라의 이야기입니까? 단지 꿈에 그리는 이상일까요? 유토피아입니까? 이 땅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고, 죽어서나 누릴 수 있는 것일까요? 천국의 모습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결코 누릴 수 없고, 죽어서, 하늘나라 가서 누릴 수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땅에서 누릴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은 바로 이 질문과 관련하여, 2절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아멘.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인도자이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인도자이시기 때문에, 나는 내일을 염려하지 하지 않습니다. 내일 어떻게 될지, 나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오늘 되어지는 일들도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나를 어디로 인도하실까요? 나의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인도자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인도하실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기를 좋아하실까요?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나의 목자이시며, 인도자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는 무슨 뜻일까요? 다음 주일 한 주간, 필리핀 세부로 목회자수련회를 갔다 오지만, 그리 멀지 않는 날, 이스라엘도 방문하고자 하는 바램입니다. 이미 이스라엘을 갔다 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데, 너무 많은 도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이스라엘 사람이 성지순례 중이던 우리나라 사람을 향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들은 절대로 우리 이스라엘 사람처럼 성경을 읽을 수 없다.”
이 말은 성경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들과 사건들을, 그곳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이해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지리와 형편과 상황을 제대로 모르면,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자, 특히 오늘 본문의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것이며, 이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거진 숲이나 풀이 무성한 들판이, 거의 없는 유대의 동부 광야지대의 낮 시간의 더위는, 우리의 7월이나 8월보다, 가히 살인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기는 열기로 인해, 숨 막힐 듯하고, 모든 것은 불에 타들어가듯, 시들어 갑니다. 이것은 양들에게는 정말 치명적입니다. 그들이 뜯던 풀은 금방 시들어버리고, 주위에는 피할 그늘이 없고, 주변에 있는 바위에 올라갔다가는, 너무나 뜨거워서, 깜짝 놀라,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양의 독특한 습성은,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을 더 어렵게 만듭니다. 양은 배가 고프면 눕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떤 장사도, 배고픈 양을 억지로 눕게 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또한 양들은 불안하고 두려우면, 눕지 않습니다. 주위에 사나운 짐승들이 있거나, 목자가 눈에 띄지 않거나, 뭔가 불안한 기미가 느껴지면, 절대로 눕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양이 스스로 그늘진 곳이나 물이 있는 곳을 찾아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양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불볕더위 속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물을 마시지도 못하고, 피하거나, 숨는 것조차 못하는 양들, 얼마나 불쌍하고 위험합니까? 어찌 보면, 양이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양, 이럴 때, 제일 바쁜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목자입니다. 목자는 주변에 몇 그루의 나무가 이룬 작은 숲, 큰 바위 밑의 작은 그늘, 해가 가려진 골짜기나 계곡을 찾아, 그곳으로 양떼를 이끌고 갑니다. 그곳에서 자기 양들을 풀을 뜯게 하고, 물을 마시게 합니다.
만약 목자가 피할 곳을 찾아 데려가지 않으면, 목초를 찾아주지 못하면, 시냇가로 데리고 가지 못하면, 양떼들을 금방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목자가 양떼를 그늘지고, 맛있고 영양가 있는 풀이 있으며, 시냇물이 흐르는 곳으로 데려다 놓으면, 그때서야 양들은 마음을 놓고 풀을 실컷 먹은 후, 쉬거나 잠을 잔다고 합니다. 이때 그 예민하던 양들은, 아무리 새들이 자기 등에 앉아 조잘대고, 벌들이 주위에서 윙윙 거려도, 신경을 쓰지 않고, 깊은 잠을 잔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나온 말입니다.
“푸른 풀밭”은 맛있는 풀들이 넉넉하게 있으며, 안전하고, 편안하고, 자유롭게 먹을뿐더러, 또 푹신하게 누울 수 있는 곳입니다.
“쉴만한 물가”는 졸졸졸 흘러가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시원한 물을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곳입니다. 잔잔히 흘러가고, 고요하고 맑은 물, 거기에는 산이 드리워져 있으며, 바닥에 있는 작은 돌까지도 뚜렷하게 보이고, 그 곁에는 나무와 풀들이 푸르고 무성한 곳, 바로 이런 곳이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가 이스라엘 땅에서는 흔할까요? 어디에나 널려 있는 것일까요?
연간 1,300㎜의 강수량과 사계절이 가져다주는 이 비옥한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쩌면 흔하게 여겨질지 몰라도, 이스라엘에서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는 드문 것입니다. 흔치 않습니다.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대부분 산이지만, 이스라엘은 대부분 사막입니다. 광야입니다. 물이 흔하지 않습니다. 물이 없습니다. 풀이 없습니다. 짐승들이 마음껏 먹을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표현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목자되신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양은, 이와 같이 최상의 상태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최고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상태, 차고 넘치는 상태, 풍성한 상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너무 너무 좋은 상태를 말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 있습니까?
“나는 내 삶에 만족할 수 없어”
“나는 만족해, 나는 행복해”
여러분! 이 양들은 조금 전까지 어디 있었습니까? 그리고 지금 있는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에서 조금만 밖으로 나가면, 그곳은 어떤 곳입니까? 그늘이 없어, 뜨거운 태양빛을 그대로 받는 자리, 마실 물이 없어 갈증이 나는 자리, 그리고 위험하고 어려운 자리였습니다. 목자가 그 견디기 힘든 상황을 피하게 해 주었고, 가장 풍성하고 안전하고, 편한 곳으로, 데리고 와 주었습니다. 목자가 양을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지금 성도를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내가 온 것이 아닙니다. 내가 노력하여 얻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수고의 땀방울을 많이 흘렀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닙니다. 오직 목자되신 하나님께서, 인도자되신 하나님께서 바로 이 자리로 나를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은 버리십시오. 감사하며 사십시오.
우리 주위를 둘러 보십시오. 예를 들어, 어느 날 갑자기 해고를 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해고를 취소하고, 다시 회사를 다니게 해 달라고 데모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40m 높이의 크레인에 홀로 올라가, 부당하게 해고를 했으니, 다시 회사에 다닐 수 있도록, 해고를 취소해 달라고, 290일째, 농성하는 여인도 있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디워”, “라스트 갓 파더”라는 영화를 만들고, “영구와 땡칠이”로 너무나 유명한 개그맨이자 감독인 심형래, 그가 만든 회사인 ‘영구아트무비’의 직원 43명이 작게는 1개월, 많게는 1년 정도 월급을 받지 못했다고,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1년 내내 얼마나 열심히 일했겠습니까? 영화를 만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 수고의 열매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열심히 수고는 했지만, 월급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의 삶은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힘듭니까? 나는 왜 이렇게 어렵습니까? 나는 왜 이렇게 돈이 없습니까? 나는 왜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나는 왜 이렇게 아픕니까? 나는 왜 염려와 걱정거리가 가득합니까?”
눈을 들어 주변을 한번 살펴 보십시오. 우리들보다 더 힘든 사람, 엄청 많습니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 엄청 많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은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내가 노력해서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를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여러분!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가 위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을 보고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언젠가 모 카드회사에서,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고 광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떠납니까? 어디 가서 마음 놓고 푹 쉴 때가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를 마치 “열심히 일한 당신은 떠나라”고 유혹하는 광고 문구처럼, 성도가 열심히 살다가, 잠시 짬을 내어, 쉬는 장소나, 시간이나,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일이 바로 그런 시간이요, 교회와 예배가, 바로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단어의 뜻을 보면, “푸른 풀밭”에 눕는 것과, “쉴만한 물가”에서 물을 마시는 것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즉 푸른 풀밭에 눕고, 잔잔한 시냇가에서 지내는 것은, 어쩌다 한 번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양된 성도의 일상적인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주일에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경험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를 단지 영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현실은 여전히 어렵고 힘들지만, 영적으로나마, 이러한 것을 맛보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비록 생활은 어렵고, 육신은 고달프지만, 마음만은 편하다는 말과 같은 뜻이라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과 육신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에 있다는 것은, 영혼이 만족스러울 뿐 아니라, 우리의 육신 역시 충분히 먹고, 흡족히 마시고, 거기에서 안정과 평안과 위로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육신이, 세상에서 수고하고, 배고프고, 목마르게 살도록 버려두시고서, “나는 너의 목자다”, “네가 있는 곳은 푸른 풀밭이요, 쉴만한 물가이다”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아주 오래 전에 ‘톰 존슨’이라는 미국 가수가 부른 “그린 그린 그래서 오브 홈(Green Green Grass Of Home)”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래 가사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겨 봅니다.
“기차에서 내리면서 바라본 고향 집은 그대로 이구나.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를 맞아 주시지. 길 아래로 달려가는 메리가 보여. 금발 머리에 체리 같은 입술을 가진 메리가 말이야. 고향의 푸른 잔디에 안기니 정말 좋구나. 페인트 집이 말라 버려서 갈라지긴 했지만 그 옛집은 아직 그대로 있고, 내가 올라가 놀던 참나무도 있어. 오솔길 따라 금발에 체리 같은 입술을 가진 메리를 바래다 주기도 했어. 고향의 푸른 잔디를 만져보니 말로 형언하기 힘들구나. 모두가 날 맞으려 나와 줄거야. 팔을 벌리고 환하게 웃으며. 고향의 푸른 잔디에 안기니 정말 좋아”
노래가사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림이 그려집니다. 한가롭게 멋진 시골 풍경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이 노래를 가수 ‘조영남’씨가 “고향의 푸른 잔디”라는 가사로 번안하여 불렀습니다.
“꿈 속에 그려보는 머나먼 고향아 옛 모습 변치 않고 지금도 잘 있느냐 사랑하는 부모형제 어릴 때 같이 놀던 친구 푸르고 푸른 고향의 잔디야 타향살이 서러워도 꿈속에 그려보는 고향 푸르고 푸른 고향의 잔디야 앞마을 냇가에 물레방아 소리 뒷동산 종달새 지저귀는 노래 소리 아 ~꿈 속에 들려오는 어머님의 자장 노래 소리 푸르고 푸른 고향의 잔디야”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멋진 시골 풍경이 그려집니다. 한번 가 보고 싶은 시골 풍경입니다. 얼마 전에 갔다온 하동에 있는 최참판댁이 생각납니다. 멀리 섬진강이 보이고, 푸른 논이 보이고, 들이 보이고, 마을의 언덕이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노래의 결말이 뭔지 아십니까? 이게 현실이 아니고, 꿈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꿈에서 깨어난 그의 현실은 교도소 안이고, 더 심한 것은 그가 사형을 하루 앞두고 있는 사형수라는 것입니다.
“그때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난 사방의 회색 벽에 둘러 싸여 있었어. 내가 단지 꿈을 꾸었다는 걸 깨달았어. 왜냐하면 간수와 슬픈 얼굴의 늙은 신부가 서 있었거든. 날이 밝으면 내 팔짱을 끼고 걸어 가겠지.”
사형을 집행하기 전, 간수와 신부가, 그의 곁에 서 있는 것이 그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이 노래를 소개하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시편 23편은 이 노래처럼, 꿈에서나 될지, 거저 이상향으로, 소원만 하다 마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는 성도의 삶의 현재적인 형편을 노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할 때, 이 말은 여러분의 영혼뿐 아니라 육신까지도 인도하신다는 말입니다.
일본의 관서학원(關西學院)의 “이와하시 다께오”(岩橋武夫)라는 교수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와세다 대학 이공학부를 다니던 중, 눈에 문제가 생겨, 완전한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장애인이 된 후,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이 분이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자, 한 유명 인사의 학비 지원 약속을 믿고, 영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영국으로 가던 다께오씨는, 선상에서 전보를 한 장 받았습니다. 그것은 지원해 주기로 했던 분이, 사정상 학비를 지원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만 믿고 배를 탔던 다께오씨 부부는, 그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밤을 새며 기도만 했습니다. 영국에 도착해서,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대학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학비 지원도 없는 장애인 유학생이, 낯선 영국 땅에서 공부하는 것은 고사하고, 살아가는 것, 역시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막막했겠습니까? 그런데 그곳에 도착한 그날, 이들 부부는 정말 놀라운 일을 듣게 됩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익명의 독지가가, 이들 부부를 지원하기로 했다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장학금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분이 지원해 주겠다는 장학금이, 일본의 한 유력인사가 지원해 주겠다고 했던 것과 똑 같은 액수였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다께오 교수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살아 계셔서 자기 양들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가는 곳마다 간증했으며, 우리나라에 와서도 같은 간증을 했다고 합니다.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지내고,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라는 책을 쓴 “강영우 박사”는 청소년기에 망막박리로 시력을 잃고, 국립의료원 안과의 구본술 박사가 ‘네 눈은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다’고 하면서, 일본의 ‘이와하시 다께오’ 선생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대학도 가고, 유학도 하여, 한국의 이와하시 다께오가 되겠다’고 결심을 했답니다. 그래서 강영우 박사는 맹인으로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하여, 피츠버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장남 진성이는 하바드대학 졸업시켜 의사로, 차남 진석이는 시카코 법대를 졸업하여, 변호사로 일하게 하여, 미국의 저명인사가 되어, 장애를 극복하고, 신앙으로 승리하였습니다.
“이와하시 다께오”, “강영우”
그들의 모습은 맹인입니다.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우리들에 비하면 너무나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나 행복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입니다. 우리 온전한 사람들보다 얼마나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갔습니까? 세상적으로 말해도,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영국 고아들의 아버지, “조지 뮬러”는 어떻습니까?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그는, 도대체 무엇으로 수 만 명의 고아들을 먹이고 입혔을까요? 그는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여, 자신만이 아니라, 고아들을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성도들과, 세계에 흩어진 선교사들은, 하나님께서 육신적인 일로, 물질적인 일로, 대인관계를 통하여, 구체적인 사건으로, 자신들을 인도하심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역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에 있다는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목자 되신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있을까요? 여러분의 과거의 삶의 자리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그늘이 없어 뜨거운 태양빛을 그대로 받으며, 그 열기에 헉헉 거리던 자리, 물이 없어 갈증으로 몸부림치던 자리, 그리고 위험한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목자가 이끄셔서, 뜨거운 땡볕을 피할 수 있는 곳, 먹고도 남을 양식이 있는 곳, 맑고 시원한 물이 흐르는 곳, 눈만 들면 목자가 보이는 곳, 안전하고 평안한 곳에 오게 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계신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뜨거운 땡볕이, 태양에 말라버린 풀들이, 마실 물이 없고, 사나운 짐승들의 위협을 받는 자리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이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에 있다”는 것은, 만족과 안전과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요, 그 만족은 육신적인 만족, 물질적인 만족,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조건들이 채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현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목자이시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양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있는 곳은 두 말할 여지 없이, 물이 흐르는 푸른 풀밭입니다. 이것은 사실이고, 실제로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경험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정말 여러분의 삶의 자리가 푸른 풀밭이요 잔잔한 시냇물가인지, 정말 그러한지를 확인해 보십시오. 만약 여러분은 홀로 거센 모래바람이 이는 사막에 있거나, 풍랑이 이는 바다에 있다고 한다면, 주위에 사나운 짐승들로 인하여, 불안하고, 두려운 자리에 있다면, 거기는 여러분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푸른 풀발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데,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가 계시는 것입니까?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가 아닙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와 있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 좋은 곳을 찾아 와 있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접어 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절망의 골짜기, 죽음의 골짜기, 질병의 골짜기로 내모는 분이 아니십니다.
지금 여러분이 있는 곳이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가 아니라면, 목자를 불러야 합니다. 힘껏 소리내어 부르짖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있는가를 목자에게 알려야 합니다. 울어야 합니다. 부르짖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도록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부모는 자식을 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을 몰랐던 우리를, 하나님을 떠났던 우리를 하나님 품에 다시 안길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지금 여러분의 삶의 자리가 어렵고 힘들다면, “주님, 주님께서 정말 저의 목자시라면 저를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옵소서. 지금 제가 있는 곳은, 저의 처지와 형편은 먹을 것이 없는 사막과 같고, 거기는 물줄기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곳입니다. 저를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옵소서.”라고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말씀대로 되게 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이 말씀대로 되어야 합니다. 시편 23:2절은 기록된 말씀으로 끝나지 않고, 바로 여러분의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의 삶에서 그 말씀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을 누려야 합니다. 그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이끌어 주실 것을 기도하시고,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여러분의 삶이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들 어렵고 힘든 세상이지만, 여러분만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하나님의 귀하고 소중한 자녀이기에,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나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나의 인도자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이 푸른 풀밭이요, 쉴만한 물가임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