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ington Beach Pier - 모래사장을 보라 ! 특이하고 아름다운 모래사장!
금모래비단모래
시: 김수영
같은크기의미세한잔모래알
금빛반짝이며하늘을향해
작열하는태양을노래하네
산꼭대기높은벼랑에서
부셔지고부서져
낮고낮은강줄기를따라
넓고넓은바다로내려와
파도에밀리고밀려와
바닷가모래벌이되었네
비단융단을깐듯
매끄럽고부드럽고단단하게
뭇사람들의발걸음에
눌리고눌리고
다져지고다져저
파도가밀려와밀려가도
흔들리지않는자세로
한데 어울려
서로 주고받는 대화가
영겁으로 통하는
아름다운 사랑노래여라
헤아릴수 없는 부서진
무수한 잔 모래알들이
너와 나간곳 없고
금모래 비단모래로
우리들의 허전한 마음을
감싸주며 안아주네
아!
나의고향 어머니의
따뜻한품이여!
시작노트
불볕더위를 피해Huntington Beach에
피서갔다가 해변 모래사장이 얼마나
곱고 미세하고 단단하고 보드랍고
처음보는 아름다움에 감탄감탄!
김동진 선생님 소천
삼가 고인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국민 가곡" <가고파>의 작곡가 김동진(金東振)선생이 31일 오전 96세의 노환으로
별세하셨다,1913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출생한 선생은 평양음악대학 교수로 평양교향악단과
합창단을 창단하며 지휘자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는 공산 치하에 염증을 느껴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12월 임진강을 건너 월남했다
그가 서울에 도착해 헌병의 검문을 받을 때 신분증이 없어 내민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물
눈에 보이네.. 로 시작하는 <가고파>의 작곡가라고 소개하자 아무 말없이 돌려보냈다
삶과 죽음이 치열하게 갈리는 전시(戰時)에도 국민 가곡의 힘은 그만큼 컸다
조부와 부친 모두 목사였던 독실한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난 김동진 선생은 어릴적 혼자의
노력으로 오르간을 치고있는 모습을 본 부친이 11세때 바이올린을 사주었으며 첫 작품으로
숭실중 5학년 때 봄이오면을 작곡했으며 숭실전문대학 시절엔 이미 유명한 인사였다
그는 재학 시절 김동환,주요한 시집을 늘 가지고 다니며 애독한 독서가 아름다운 가곡을
작곡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그가 가고파를 작곡한 것은 1933년 약관 20세 때였다,양주동의
강의를 통해 이은상의 동명(同名)시를 알게된 그는 곧바로 곡을 붙여 이시대에 국민 가곡
으로 불려지고 있다.
남한으로 온 김 선생은 6,25 전쟁이 끝난 뒤 서라벌예대와 경희대 음대 교수로 후진양성을
했으며 영화음악부터 군가까지 폭넓은 족적을 남겼다
1952년 군가 표창상
1966년 청룡영화제 영화음악상
1973년 국민훈장 모란장
1982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2000년 대한민국 은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보림 아들 신영(사업) 신원(경희대 교수)딸 신화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경희의료원에 차려졌고, 발인은 3일 오전 7시30에 치러집니다
가고파(전편)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지고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내고저
그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가고파(후편)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거이랑 달음질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 보고 저기가 알아보나
내 몫 옛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가 안겨
처녀들 어미 되고 동자들 아비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 아까와라 아까와
일하여 시름없고 단잠 들어 죄없는 몸이
그 바다 물 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동무 노젓는 배에 얻어 올라 키를 잡고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나
맞잡고 그물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또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샌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까나 살까나
돌아가 알몸으로 깨끗이 깨끗이
첫댓글정확한지는 모르지만 가고파는 마산이 고향인 친한 친구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전쟁후에 그친구는 민족분단으로 인해 고향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그런 벗을 위해 지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사석에서 들었습니다. 친구가 이노래를 듣고는 대성통곡을 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진위여부를 떠나서 절절하네요.
첫댓글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가고파는 마산이 고향인 친한 친구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전쟁후에 그친구는 민족분단으로 인해 고향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그런 벗을 위해 지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사석에서 들었습니다. 친구가 이노래를 듣고는 대성통곡을 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진위여부를 떠나서 절절하네요.
가고파 지은신분의 절친한 친구가 일본에 살았지요. 그분의 손녀가 이곳 뉴질랜드에서 잠시 공부하고 갔었어요. 여기까지만 이야기해야겠지요.
이름보니까 여성분 같아요. 이 가곡은 싫어 하는 분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 노스탈자에 젖게 만들지요. 이 가곡의 대상자가 있었군요. 그러니 절절할수 밖에 없네요. 가공 인물이 아니니까요. 상대방 친국가 이 노래를 들으면 울지 않을수 없겠어요.
워찌 그리 상세히 잘도 아십니까? 손녀가 그곳에 다녀간 사실도 아시고.....
그집으로 시집간 아름다운 아가씨를 알고 있어요. 곧 그 아이가 고등학생이 된다네요. 순수한 영혼들의 집합체같이 느껴지는 가족이랍니다. 앞으로 자라날 저 손자 손녀를 보아도......., 역사란 힘있는자의 기록이라고 했나요.
바다가 멀지 않아 쉽게 찾게되는,물이 밀려간 단단한 모랫길을 걸으면, 언제나 떠오르는 가고파라 가고파~~~~~그어린시절 찾아갔던 마산의 바닷가를 이곳 대서양물자락을 보면서도 그립니다.찬겨울바람속을 지나서 바닷속에 있는 돌집에서 커피향을 마시면서 가고파라 가고파~~~~한국인의 정서는 인연으로 질기게 뭉쳐있는 가고파라 가고파~~~~~그인연을 심어주신분이 돌아가셨군요.